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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85화 (85/87)

85화

가연, 아니 이제는 리슈아라 불러야 하는 그는 팔을 들어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아마 그는 몰랐겠지만 리슈아의 온몸은 붕대로 감겨있었다. 하지만 각성한 순간, 기억이 돌아옴과 동시에 상처가 모두 낫고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몸에 감겨있던 붕대나, 반창고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는 찢어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리슈아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전생의 기억이 온전히 들어차자, 리슈아는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무섭고, 마음 아프고, 미안하고, 뒤이어 그리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를 내려왔다.

“세르미네, 세르미네는 어디 있어?”

리슈아는 세르미네를 찾았다. 그는 바로 앞의 침대에서 잠들어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병실에 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르미네의 침대로 다가간 리슈아는 미안함을 안고 그의 몸에 쓰러져 내렸다. 그리고는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좋아해….”

“…누구지?”

얕은 잠에 들었던 것인지 작은 소리임에도 세르미네는 눈을 천천히 떴다. 가슴 쪽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세르미네는 고개만 움직여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연아! 너 상처가 다 나은 거야?”

세르미네도 하루가 흐르자 이제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리슈아는 제일 중상을 입었음에도 온몸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세르미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고자 리슈아를 잠시 달래 멈추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세르미네, 나 이제 다 생각났어. 모든 것이 다.”

“모든 것이라면 너, 설마…!”

“응. 난 이제 더 이상 주가연이 아니야. 리슈아야.”

세르미네가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이날을 위해 몇백 년 동안 리슈아를 찾아 헤매고, 몇 달을 마음졸이며 각성을 기다렸는지…. 세르미네는 조심스럽게 리슈아의 머리카락을 붕대 감긴 손으로 쓸어보았다.

“세르미네, 내 기억을 깨워준 건 너야. 너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어.”

“나와 만났을 때라니?”

리슈아는 세르미네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그의 허벅지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처음 연무장에서 대련하는 너를 보았을 때 들었던 마음, 연민, 슬픔, 안타까움…. 그 모든 게 모여 사랑이 되고 만 거야. 난 네 행복만을 쭉 바라왔어.”

세르미네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진 못했지만, 차츰 기억을 떠올렸다. 리슈아를 연무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경외감, 당혹감, 그리고….

“나도 그날 이후로 쭉 생각했어. 처음에는 어쭙잖은 동정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 또한 너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고 결심했어. 네가 나를 만든 거야.”

“세르미네. 이젠 쭉 함께야. 그동안…, 내 기억을 찾아주려 해서 고마워.”

세르미네는 감정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이곳은 병원이었다. 게다가 새벽부터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대신 세르미네는 리슈아를 좁은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리슈아는 영차, 하며 세르미네의 옆에 모로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함께 누워 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

동이 트고, 병실에는 작은 소동이 일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루아가 서로를 안고 함께 자고 있는 세르미네와 리슈아를 보더니 깜짝 놀라 둘을 깨웠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리슈아, 당신 설마….”

루아는 보기 드물게 동요해 어쩔 줄 몰라했다. 우선 서로 딱 달라붙어 잠이 든 두 사람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두 번째로 완전히 상처가 나은 리슈아를 보고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아, 루아. 일어났구나. 루아도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일어난 리슈아가 루아를 보더니 생글거리며 웃었다. 루아는 리슈아가 이렇게 웃는 것을 매우 오랜만에 보았다.

“리슈아. 기억이 전부 돌아온 겁니까? 각성한 거예요?”

“응! 이제 모두 기억나! 루아에 관한 기억도 전부 돌아왔어!”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리슈아를 보자 루아의 눈가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감정을 극도로 드러내지 않는 그녀로서는 글썽이는 눈물이 최고의 기쁨을 나타내는 감정 표현이었다. 그녀 또한 리슈아와 알고 지낸 시간이 많으니, 세르미네만큼 특별한 감회가 아닐지라도 리슈아의 각성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 당신 뭐야. 왜 상처가 없어?”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깬 리레시아가 눈을 비비며 리슈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런 리레시아를 향해 가연일 때와는 달리 리슈아는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며 기쁘게 말했다.

“리레시아! 나 기억 전부 돌아왔어!”

“뭐, 뭐? 진짜냐?”

리슈아의 기억이 없는 가연은 리레시아의 무례한 언행에 대한 반발로 그에게 거칠게 대했었다. 물론 거기에는 세르미네를 놓고 생긴 라이벌 의식도 한몫했다.

하지만 본래 리슈아는 리레시아에게도 천진난만했다. 게다가 세르미네를 놓고서는 ‘자신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음’을 자신했기 때문에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리레시아도 본래의 리슈아에게는 가연에게만큼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다행이긴 하다만, 아깝군. 쳇.”

리레시아가 혀를 찼다. 아마 세르미네를 놓고 더욱 심한 신경전을 벌여야 함에 대한 피로일 터였다. 그러나 리슈아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뭐가 아까워? 그보다, 다들 상처가 거의 다 나았네!”

리슈아의 말에 세르미네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깊은 상처에 남은 약간의 흉터 빼고는 다친 흔적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꽤 심한 부상이라 자연치유력으로도 며칠은 걸릴 상처였는데?”

“전원 부상률 20% 미만, 퇴원 및 일상생활 가능. 24시간 뒤 부상률 5% 미만 예상.”

어느 틈엔가 일어난 폴라로이아가 자신의 태블릿PC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루아는 더욱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제 지팡이가… 금이 갔던 수호석과 보석들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전투로 인해 망가졌던 루아의 지팡이와 폴라로이아의 태블릿PC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리슈아의 각성과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했다.

“이전에는 지구를 되돌려놓더니… 리슈아 넌 대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는 리슈아를 바라보며 세르미네가 중얼거렸다.

“세르미네. 마이데가 일어나면 그와 함께 퇴원 수속해 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봐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르미네에게 말하는 루아는 약간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

머지않아 마이데까지 일어나자, 세르미네는 루아의 말대로 그와 함께 퇴원 수속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전부 믿을 수 없어 했지만, 실제로 상처가 다 나았으니 병원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준비는 끝났어? 아 참, 그리고 루아가 말한 것 말인데….”

마이데가 활기차게 문을 열고 들어오다 리슈아를 바라보며 다소 표정을 굳혔다.

“응? 뭔데?”

“이제 주가연이라는 사람은 없어. 입원할 때도 다섯 명만 입원한 것으로 되어있더라.”

리슈아는 약간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마이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그, 그렇구나. 아틀란티스의 시스템이 그렇게 결정한 모양이네….”

“괜찮아?”

세르미네가 나갈 채비를 하다 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리슈아는 수 초 정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세르미네를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 어차피 나는 주가연이 아니라 리슈아였고, 부모님에게는 가람이 형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리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지만, 아마 몹시 혼란스러울 것이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부터 리슈아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

세 사람이 살던 집, 아파트와 쇼핑몰을 겸하던 건물은 반파되어 당장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리슈아가 아틀란티스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집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의 거점이 없는 건 좀 아쉬운걸.”

마이데가 입맛을 다시며 멀리 떨어진, 옛집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안전띠와 삼각대가 여기저기 놓여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그럼 집 하나 더 구하면 되잖아. 이번에는 더 좋은 집으로 말이지.”

리레시아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제는 아틀란티스를 거점으로 마신과의 싸움에 대비해야 합니다.”

더는 인간들을 휘말리게 할 수 없다는 그녀의 의지였다. 아틀란티스의 재정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리슈아, 아틀란티스에 가는 게 얼마 만이지?”

세르미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리슈아는 손을 꼽으며 날을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너무 먼 옛날인걸. 세려면 밤까지 걸리겠어.”

장난처럼 한 이야기를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리슈아였다. 세르미네는 괜찮다며 그의 손을 잡았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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