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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86화 (86/87)

86화

리슈아는 세르미네의 손을 잡았다. 이제껏 수도 없이 잡아 온 손이지만, 기억을 찾고 처음으로 잡는 그 크고 투박한 손의 온기는 각별했다. 리슈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르미네가 시전하는 순간이동에 합세했다.

하얀빛이 잠깐 시야를 물들였다. 눈이 시리도록 아픈 빛은 아니었지만, 리슈아는 눈을 꽉 감았다.

‘과연 눈을 뜨면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빛이 사라지자 리슈아는 눈을 떴다.

그런 그를 보며 세르미네 또한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다. 이렇게 함께 손을 잡고 아틀란티스에 돌아오는 순간을 그는 몇 번이고 꿈꾸고 바라왔다.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굉장히 소중했다. 떨림과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리슈아는 고향에 한 발짝 내디뎠다.

“우와, 역시 정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역시나 정원을 아끼고 사랑하던 리슈아의 첫 시선은 정원에 머물렀다. 아틀란티스 왕성 내의 거대한 정원, 그 한가운데의 분수가 놓인 대로에 그들은 서 있었다.

두 천사가 항아리를 들고 있는 조각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흘러나와 분수를 가득 메웠다. 약간 탁한 우윳빛 벤치로 보라색 꽃이 총총, 원을 그리며 피어 있었다.

리슈아는 폴짝거리며 분수를 바라보더니 이내 세르미네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이제 막 움튼 새 잎사귀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 세르미네와 다른 사람들이 잘 보살펴주었구나!”

“그럼, 내가 또 한 몫 크게 했지…, 으악!”

마이데가 어느 틈엔가 뒤로 와서는 거드름을 부리려다 흙 속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지렁이에 질겁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레시아는 배를 잡고 웃었고, 마이데는 그를 보며 웃지 말라며 성을 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 드네요.”

루아가 분수대의 벤치에 앉아 감상을 남겼다. 리슈아는 루아 또한 챙겨줘야겠다는 마음에 그녀 옆에 다가가 앉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푸르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조금 낯설긴 해도, 곧 익숙해지겠지. 모두에겐 고마운 마음뿐이야.”

“저희도 당신이 돌아와서 무척 기쁩니다. 그거면 됐어요.”

루아 역시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아무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지만, 생각하는 바가 전혀 없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멸망 이전부터 같이 지내온 리슈아였다. 루아로서는 최고의 표현이었다.

“세르미네! 나 내 방에 가보고 싶어!”

잠시 가만히 하늘을 보던 리슈아가 벌떡 일어나 세르미네를 찾았다. 아직도 지렁이에 놀란 마이데를 놀리던 세르미네는 리슈아가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손을 잡았다.

“리슈아가 가보고 싶다면 가봐야지.”

세르미네는 냉혈한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주 살갑고 다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슈아가 돌아오고 난 지금, 세르미네에게는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보였다.

물론 마음속에는 리슈아에 대해 걱정하는 바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입 밖으로 내기 전까지 세르미네 스스로 말하는 것은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까지 같이 왔으니 이제 난 볼일 보러 간다~”

리레시아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 먼저 성 안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세르미네와 리슈아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저희도 이만 탑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루아와 폴라로이아도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성의 동쪽에 있는, 리슈아의 기억보다 다소 화려해진 탑을 향해 정원의 좁은 길을 걸어갔다.

남은 것은 마이데와 세르미네, 그리고 리슈아뿐이었다. 세르미네는 같이 차라도 마시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을 텐데, 다들 매정하다며 혀를 찼다.

“그래도 우리만의 시간을 만들어 준 거잖아. 배려해줬으니 고마워해야지.”

하지만 리슈아는 어느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생각뿐이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리슈아를 대견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다, 네 말이.”

“자자,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물론 꽃이 만발한 정원도 좋지만, 리슈아의 거처로 돌아갈 시간 아니야?”

마이데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리슈아의 한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고는 성 쪽으로 함께 걸어가려 했다.

“잠깐, 왜 네가 리슈아의 손을 잡는 거지?”

세르미네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마이데는 마치 1 더하기 1은 3이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표정을 지었다.

“왜? 리슈아의 손이 네 것이야?”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이제 막 각성한 리슈아를 사이에 두고 웃고 있었지만, 내뱉는 말 하나하나는 몹시 날카로웠다.

마이데는 몹시 초조했다. 더 이상 기억이 없다는 이유로 가연에게 자신과의 다정했던 옛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다. 때문에 그의 행동은 세르미네가 봐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리슈아와 마이데가 가까이 붙어있는 것을 봐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세르미네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싸우지 마. 손은 두 개니까 하나씩 잡고 가면 되지, 안 그래?”

리슈아가 뺨을 긁적이며 두 사람의 손을 하나씩 붙잡았다. 작고 하얀 손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온기가 두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래. 그 말이 맞지.”

“리슈아, 역시 네가 현명하구나.”

왼손에는 마이데의 손을, 오른손에는 세르미네의 손을 잡은 리슈아는 넓게 트인 정원의 가운뎃길을 지나 성문으로 들어섰다.

붉은 나무로 만든 성의 커다란 문은 기사라면 그 힘을 사용해 손쉽게 열 수 있었다. 양옆으로 정교하게 새긴 금테의 사자 무늬를 리슈아는 신기하게 바라보다 세르미네의 손짓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성 안이야. 굉장하지?”

마이데의 말이 아니더라도 리슈아는 이미 감탄 삼매경이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든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에는 온갖 조각상이 박물관처럼 즐비했고, 벽에는 태피스트리와 벽화, 그리고 초상화가 빽빽이 걸려있었다.

“우와, 굉장해! 마치 베르사유 궁전과도 같은 곳에 온 것 같아!”

리슈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내뱉었다. 그러자 어쩐지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으쓱해져서는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틀란티스의 성인데, 그런 인간들의 궁전에 비할 바가 못 되지.”

“리슈아는 아틀란티스의 후계자니까 이 성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려도 돼.”

말을 하다 눈이 마주친 마이데와 세르미네는 리슈아 모르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리슈아만이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고 오른쪽에 난 회랑을 걷기 시작했다.

“내 방이면 분명 이쪽이었지?”

회랑의 한쪽 면에는 초상화가, 또 다른 한쪽 면은 정원이 보이도록 아치형으로 뚫려 있었다. 대리석 기둥 사이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초상화를 비추었고, 리슈아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 모든 것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성 전체가 붉은 융단이 깔려있는 것과 달리, 리슈아의 개인실이 있는 곳에는 꽃을 수놓은 카펫이 길게 깔려있었다. 리슈아의 취향이면서도, 왕의 후계자라는 신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리슈아의 키보다 두 배 큰 하얀 문이 나타났다.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그 문의 양쪽을 하나씩 잡고 마치 새집을 자랑하는 주인처럼 ‘짜잔~’하고 열었다.

“와! 옛날과 똑같아!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신난다!”

중앙에 놓인, 연보라색 이불이 푹신하게 깔린 침대에 몸을 던지며 리슈아가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이 아끼던 인형들도, 세 명은 거뜬히 잘 수 있는 침대도, 방을 장식하는 값비싼 골동품이나 귀여운 물건들, 그리고 책꽂이와 벽난로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단 하나 세르미네가 손을 쓴 것이 있다면 청소 정령을 시키지 않고 스스로 이 방을 청소한 것뿐이었다. 언제든 리슈아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는 그리움의 표시를 대신해 매일같이 리슈아의 방을 청소했다.

리슈아는 침대에 놓인 두 개의 곰 인형을 살펴보았다. 그 인형들의 목에는 각각 브로치가 걸린 목걸이가 달려있었다. 하나는 C, 하나는 R. 세르미네와 리슈아의 이니셜을 새긴 브로치였다.

어찌나 깔끔하게 닦여있고, 녹 하나 슬지 않았는지 마치 방금 만들어져 나온 신제품 같았다. 리슈아는 그 브로치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이데는 그 광경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저 곰 인형들은 그가 기사가 되기 전부터 있던 것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있으니 자신의 이니셜을 새긴 곰 인형도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복잡해진 마음에 리슈아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마이데는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내뱉었다.

“리슈아. 역시 가연으로 살 때보다 리슈아로 돌아오니 좋지? 그쪽 세계 사람들보다 우리가 훨씬 좋고 말이야.”

그러나 그 말은 치명타였다. 일순 침묵이 흘렀고, 리슈아는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세르미네가 불같이 화를 냈다. 사실 세르미네도 그리 묻고 싶었지만, 리슈아를 위해 꾹 참고 있던 말이었다. 그가 먼저 아틀란티스에 대해 평하기 전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르미네의 화보다도, 리슈아의 울적한 표정에 마이데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황급히 말을 돌리며 사과했다.

“아, 아니. 그게…. 미안하다….”

마이데는 사과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세르미네는 마이데 스스로가 벌인 일은 스스로 책임지라며 눈을 찌푸린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이데 역시 무어라 상황을 무마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리슈아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사실은 말이야….”

수십 초의 정적 끝에 리슈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에 억눌린 목소리로 그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분명 리슈아고, 아틀란티스에서의 삶이 소중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연으로 살던 삶을 잊을 수는 없더라. 가족들과의 연도 끊겼지만, 마음까지 가위로 자르듯 끊어낼 수는 없었고. 그래도 나는 거기 주가연으로 있었고, 추억도 있으니까.”

리슈아는 눈물을 참듯 천장에 달린 벽화를 뚫어지게 올려다보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잊었어도, 내가 기억할 거야.”

‘저 녀석도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니구나.’

세르미네는 내심 감탄했다. 이전의 리슈아라면 인간들의 사사로운 정에 휘말려 울고불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인간들과 어느 정도는 얽혀도 괜찮겠어.’

세르미네가 그리 결심하는 와중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이데와 리슈아의 휴대폰에서도 소리가 났다.

“누구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마이데가 밝은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휴대폰을 열었다. 그곳에는 루아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재회 인사는 다 나누셨습니까? 이제 마신과 관련하여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탑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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