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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아이돌 생활을 위해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3화 (3/78)

3화

“태하야.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연습 시간에 너무 늦으면 피곤해서 힘들잖아.”

“어? 어, 그렇지.”

“그리고 이건 영양제인데 요즘 형이 따로 사서 먹는 거래. 몸 움직이는 사람한텐 연골 되게 중요하니까, 꼭 챙겨 먹어.”

“어…….”

세상은 불공평했다. 세상이 공평했다면 지태하가 세상에 나왔을 리가 없었다.

키 크지, 공부 잘하지, 머리 좋지, 얼굴 잘생겼지, 노래도 잘하지. 키가 크면 처음엔 허우적거린다던데, 얘는 춤도 곧잘 춘단다.

한별은 가방에서 영양제를 꺼내 태하의 품에 안겼다.

“데뷔 날짜가 잡혔다니까, 수능 전후로 나오려나? 아니면, 내년?”

한별의 응원하는 말에 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물론, 태하는 유성이 있는 소속사의 직속 연습생이 아니었다. 태하가 있는 곳은 대형 소속사도 아니고, 아직 아이돌 데뷔 팀이 없는 작은 뮤지션 기획사였다.

대형 기획사보다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 성공 확률이 적다지만, 한별이 보기엔 소속사 규모가 어떻든 태하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스케줄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스케줄을 가는 중에 쪽잠을 자야 하고, 메이크업 중에도 쪽잠을 자야 하고, 대기 시간 역시 쪽잠을 자야 한다.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냐고!

“본격적으로 데뷔 준비 진행되면, 식단 관리부터 되게 잘해야 할…….”

이야기를 늘어놓던 한별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태하의 모습에 한기를 느꼈다.

설마. 이건 설마가 사람 잡는 건데.

한별은 직전에 방문했던 분식집에서 이 메뉴 저 메뉴 가리지 않고 먹던 태하를 떠올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하야. 너 설마, 혹시…….”

“미안. 어쩌다 보니 또 그렇게 됐어.”

“……아, 아니, 아냐.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한별이 네가 응원 많이 해 줬잖아.”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태하의 데뷔가 또 엎어진 모양이다.

한별이 아는 것만도 벌써 4번째였다. 한별은 자신의 힘겨움을 눈치채고, 응원해 준 친구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 말을 잃었다.

다시 시작된 기약 없는 연습생 생활. 그럼에도 태하는 연습실로 향해야 한다.

다음 버스가 오기 5분 전. 한별은 자신도 지친 상황임에도 태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태하가 먼저 침묵을 뚫고 말을 꺼냈다.

“나,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한별이 네가 내 목소리도 좋고, 꼭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게다가 시기조차 수능 직전이다.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도 이렇게나 흔들리고 힘든데!

담담하게 웃고 있지만, 당연히 힘들 텐데. 그럼에도 태하는 되레 한별을 달랬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데뷔라는 흐릿한 빛을 향해 기약 없이 달리는 태하를 보며 한별은 숨이 막혔다. 유성을 보며 마음을 졸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기에.

이제 한별은 알고 있었다.

데뷔 후에도 아이돌이 걸어야 할 곳은 예쁘게 포장이 된 가시밭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해 나가는 태하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응원과 격려뿐이었다.

“그래. 다녀와. 내일 보자, 태하야.”

저 멀리 버스가 보였다. 한별이 웃으며 태하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넌 할 수 있어.

당사자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변에 선 자신은 믿어 주고, 밀어주는 것 외엔 할 수 없다. 한별은 형과 함께 데뷔한 동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어왔기에 태하를 위해서도 그렇게 했다.

주춤, 발을 옮긴 태하가 버스에 올랐다. 그러곤 한별이 가장 잘 보이는 창의 좌석에 앉았다. 한별이 손을 흔들자, 태하가 미소를 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가리켰다.

버스가 멀어졌다. 동시에 지잉, 지잉 울리는 핸드폰을 본 한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태하

너무 큰 고민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고민이라면 잠에 방해되지 않게 잠시 잊자.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고민이라면 언제든 얘기해 줘.

잘 가. 내일 보자.

“……누가 누굴 위로해.”

한별은 여전히 착하기만 한 친구의 연락에 핸드폰을 꼭 잡았다.

* * *

지금 한별은 닫힌 현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문만 열면, 이 시간에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원흉이 서 있을 것이다.

“진짜 누구 오는 거 아니지?”

―진짜 없어. 진짜 아직 아무도 없어. 멤버들도 오려면 조금 걸릴 거고. 내 동생, 오느라 너무 고생이 많았어. 형이 진짜 맛있는 거 사 줄게. 응? 조금만 오면 돼. 거의 다 왔다. 아이 우리 한별이, 잘 오고 있다.

“뭘 잘 오고 있어야, 뭐가! 문이나 열어!”

안 그래도 한별은 마스크에 검은 모자까지 푹 눌러쓴 탓에 경비원에게 붙잡혀 한차례 시달려야 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데! 잔뜩 열 받은 한별을 달래듯 유성의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한별의 목소리에 문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하…….”

한별의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채널(Cha.N)은 사생, 스토커 등의 이유로 이사가 잦았다. 데뷔 전부터 사생 문제가 심각했던 탓에 부모님이 숙소에 방문하는 경우조차 드물었고, 멤버의 형제들이 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지금 이 숙소도 보안이 철저하여 들어오기가 굉장히 귀찮아, 한별은 굳이 숙소에 찾아오지 않았다.

“두 번짼가?”

“세 번째!”

“아…….”

멤버들이 스케줄로 나가, 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유성은 식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두 번째가 맞다.

한별의 방문은 채널(Cha.N)이 이 보안 철저하고 비싼 숙소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반찬 심부름으로 왔던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당시에도 멤버들은 없었고, 형인 유성과 매니저만이 숙소에서 한별을 맞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만들기로 했으니 말을 맞춰야 했다. 형의 멤버들이 맡은, 숙소에 살짝 묻은 페로몬은 한별이 잠시 들렀다 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아무리 친동생이라 해도 멤버의 가족이 숙소를 자주 드나드는 건 그다지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도 숙소에 멤버들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별은 유성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페로몬 샤워 같은 건 질색이나 이래서 살짝 남았겠구나, 싶을 정도는 필요했다.

“형, 병원은?”

“다녀왔어.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진짜로 괜찮아. 몸이 조금 지쳐서 일어난 일이야. 약만 꾸준히 챙겨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했어. 근데, 대신 페로몬 억제제 약효를 약한 걸 먹어야 한대서 문제지.”

억제제의 효과가 옅으니, 유성의 페로몬이 슬쩍 묻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한별은 대체 이걸 어떻게 감춰야 하는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형이 먹을 때야 그렇다 치지만, 내 히트 사이클 땐 어떡해야 하냐고…….”

애초에 페로몬 억제제는 자연스레 나와야 하는 것을 억지로 막는 것이기에 부작용이 많이 보고됐다.

열성 오메가인 유성은 그래도 부작용이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수가 굉장히 적은 오메가 인구 중에서도 그보다 더 적은 우성 오메가인 한별의 경우 억제제의 부작용 탓에 약을 먹을 때마다 매번 앓아누워야 할 정도였다.

멤버들에겐 억제제의 부작용 탓에 일어난 일이라 말했을 텐데, 페로몬이 묻었을 때와 억제제를 먹었을 때의 몸 상태가 차이 나면 설명이 어렵지 않나.

한별이 그리 생각하며 추궁하자, 유성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억제제 때문에 그렇다고는 안 했어.”

“……그럼 날 진짜 페로몬도 조절 못 하는 새끼로 만들었단 거야?”

“아, 아냐!”

유성이 기겁하며 고개를 젓자, 사나워졌던 한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럼, 어떻게 설명했는데?”

“수능 준비 때문에 그렇다고 했어.”

“어?”

“사실 나도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거잖아.”

한별이 눈을 끔뻑이다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많은 스케줄 때문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져 벌어진 일이기도 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스트레스 누적으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 그 탓에 벌어진 일을 한별에게 슬쩍 접목하여 한별이 지금 수능 때문에 힘겨워 한다는 이유를 붙였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공부 가르쳐 준다는 핑계 대기도 쉽고. 멤버들한테 설명 잘해 뒀으니까, 숙소 출입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수능 준비라면 한별이 유성을 보러 숙소에 오는 것이 말이 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게 어째서 이유가 되는데?’ 하고 묻겠지만…….

「채널(Cha.N) 유성, 수능 만점 비결? 과외 받을 시간은 없었죠.」

「유성, 수능 만점으로 엄친아 반열 등극!」

「채널(Cha.N) 유성. 수능 만점과 밀리언 셀러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상대가 아이돌 2년 차에 수능 만점 받으셨다는 그 최유성 씨면 말이 되지요.

한별은 새삼 유성이 얼마나 사기 캐릭터인지 깨달았다. 세상에 어느 아이돌이 활동 중간에 수능을 쳐서 만점을 받아 오냐고.

“그리고, 내가 수능 봤을 때 문제집 아직 안 버렸거든. 풀이법도 있고.”

유성은 자신의 방 한쪽에 꽂혀 있던 문제집들을 한별에게 내밀었다. 수능 기출문제집 안에 쓰여 있는 풀이법들을 보고 감탄하던 한별이 미간을 좁혔다.

“……형.”

“응?”

“이거 뭐야. 이거, 올해 나온 수능 문제집이잖아. 왜 풀었어?”

“기출은 매년 조금씩 바뀌잖아. 한별이 네가 물어보면 가르쳐 주려고…….”

“쉬는 날엔 좀 쉬라고!”

몸 안 좋다는 사람이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한별이 기겁하며 유성을 향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유성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지만, 한별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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