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 그런가요?”
한별이 작게 답하자, 전화 너머 상대가 반색했다.
―그럼요. 우리도 제대로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거든요.
아직 대응 시작하지도 않아 놓고 말은 번지르르했다.
한별의 이야기가 퍼진 지도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한별의 연습생 계약이 가능할 것 같으니, 그제야 기사가 내려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별의 눈은 가라앉았지만, 전화로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아직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곧 수능이잖아요.”
―갑작스럽게 퍼지니 당황스러울 만하죠. 수능 끝난 후에 다시 이야기 나눠 봐요.
“네.”
수능까진 시간을 벌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그때까지 채널(Cha.N)의 논란은 더 터지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봉합하지 못하면 수능 이후 컴백은커녕 활동 자체가 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채널(Cha.N)의 컴백은 내년 1월로 정해졌다.
커리어 하이가 계속 갱신되는 채널(Cha.N)의 상황상, 이번 앨범까지 대박이 나면 당연하지만 소속사에서 더는 채널(Cha.N)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단을 쓰는 것이다. 회사를 나가면 안 되도록, 혹은 타 소속사에서 건들지 못하도록, 혹은 멤버들이 지쳐서 자연스럽게 있던 자리 그대로 뿌리를 내리도록.
“마지막 발악을 너무 더럽게 하는 거 아닌가?”
몇몇 사람은 간혹 자신이 가지지 못하면 남도 가지지 못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길은 있는 법. 한별은 기묘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형을 위해 움직였다.
계약할지도 모르는 한별을 위해 소속사는 더 이상 유성을 건들지 않을 것이다. 멤버 사이가 원체 좋은 채널(Cha.N)이니, 이 이상 건드렸다간 멤버 전원이 본사와 연결된 레이블은커녕 아예 재데뷔를 강행할 수도 있었다.
[아이리즈(I_Rize) 전원 재계약 불발. 이젠 리투이(Litu:)로 불러 주세요!]
[안녕하세요! 디레이서에서 새로 데뷔한 중고 신인 골디닷(GoalD.)입니다!]
한별은 인터넷 이곳저곳 바라보다 흐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게 정상적으로 계약 끝낸 곳이 한 군데도 없냐.”
채널(Cha.N)보다 계약 기간이 짧았던 타 프로그램 출신들만 보더라도 뻔했다.
대부분 프로그램 화제성을 믿고 자신들의 소속사로 오디션 프로그램 생존자들을 데려와, 상표권 등록까지 끝냈다.
하지만 얼기설기 진행한 스케줄에 아티스트 케어가 바닥을 치니, 노이로제나 다름없는 상황에 다들 소속사와 손절 해 버린 것이다.
그룹에 멤버가 없으면 상표권 가져 봐야 이용해 먹기 어렵다.
반대로 그룹명에 애착을 가진 이들 역시 상표권을 가져오고 싶지만, 금액적인 문제가 걸리니 눈물을 머금은 채 포기하고 그냥 재데뷔 타이틀을 얻어 활동을 진행해 버렸다.
여러 선례가 남았으니 상황이 이렇게도 최악으로 치달은 것이다.
어차피 너희는 가져가지 못할 거고, 우리가 이용해 먹지 못하면 부숴 버리겠어! 같은 논리로 진행되는 이번 사태에 한별은 이마를 짚었다.
“뼐뼐. 통화 끝났냐.”
“오냐.”
“있다가도 내내 문제 풀 거냐? 영어?”
“어. 근데, 영어 말고 수학.”
“오케. 그럼 점심에 같이 답 맞추자. 나, 반으로 돌아간다.”
“어.”
그리고 아침부터 제게 전화해 대던 형의 소속사에겐 더욱 믿음이 안 갔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학교에 있는 학생한테 그렇게 전화해 대면 어떡하냔 말이다. 그것도, 수험생한테!
‘쉬는 시간이었으니 망정이지.’
한별은 수능 대비 문제집을 풀며 시간을 쟀다. 형의 일이 신경이 쓰이는 건 맞지만, 제가 할 일은 해야 한다.
한별의 눈이 빛났다.
“8번에 3번.”
“아, 씹―.”
“욕 좀 줄여. 너만 망한 거 아냐. 도은한도 망했어.”
“지태하야 10번도 3번 맞아?”
“아니, 2번.”
“조졌네?”
“지태하 개 사기다. 이것도 다 맞혔어?”
“뼐뼐이도 많이 맞은 것 같은데? 아프다더니, 집에서 내내 공부만 했냐?”
긴장해서 푼 덕분인가 보다. 한별은 번호 위로 그어진 작대기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 수능에 비해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아니면 분별력 없이 쉬워질지 예상이 되지 않지만, 지금과 비슷하게 나오면 원하는 대학에 성적으로 떨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와, 말도 안 돼. 수능 사흘 남았어!”
“그 말 할 기력 있으면 틀린 문제나 더 풀어.”
“최한별 개 예민행…….”
예민하지 않은 친구가 더 어이가 없는 한별이었다. 지금 수능 나만 보냐?
수험 준비 중인 평범한 고3으로서 날카로워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한별이 지금 예민한 이유는 수능 때문만이 아니었지만.
한별의 상태를 확인하던 태하가 손을 뻗었다. 이마에 살짝 손등이 닿았다 떨어졌다.
“약은?”
“먹고 왔어.”
“뭐야? 최한별이 어디 아파?”
“아픈 거 아냐.”
“약 부작용? 아직도?”
한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휘와 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베타인 친구들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한별의 억제제 부작용을 걱정했다.
아직 두통이 남아 있는 탓에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하나 꺼내 들자, 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붙잡았다.
“진통제도 너무 많이 먹으면 간에 무리 가. 괜찮으면 조금만 참자.”
“큰일이다. 최한별, 너 원래도 끝나고 일주일은 몸 더 안 좋지 않냐?”
“괜찮아.”
“괜찮긴. 좀 있음 수능인데.”
문제 답지를 맞추던 두 친구는 한별의 안색을 지켜보다 음료수를 사 오겠다며 매점으로 향했고, 태하는 옆에 남아 한별의 상태를 확인했다.
몸은 괜찮았다. 한별에겐 오히려 꼬이는 상황들 때문에 쏟아진 스트레스가 더 문제였다.
“혹시, 계약 때문에 그래?”
태하의 물음에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는 수능 이후로 미뤘다. 하지만, 회사 측 전화가 오늘만 올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후 들어온 음료수 쿠폰을 보아하니, 마치 자신들을 잊지 말라는 듯이 계속 의사를 표시할 것 같았다.
“수능까지 사흘이야. 연예계가 아무리 빠르게 바뀐다고 해도 소문 가라앉는 데엔 시간이 걸려. 거기다, 논란이잖아.”
유성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수능 직전이니 수험생은 공부하라는 뜻인 건 묻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실제로도 연예계에 속해 있지 않은 한별이 도울 방법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돌 팬 활동이라도 꾸준히 이어 갈 걸 그랬지.
아이돌을 꿈꾸는 태하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치기 어린 마음에 가입해 활동했던 여러 커뮤니티의 아이디는 유성의 데뷔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묻혀 있었다.
“팬들이 뒤집히는 게 가장 무서운 거잖아.”
“그렇지…….”
“예찬이 형이랑 세현이 형 홈들 몇몇이 밤에 Close를 걸었어. 예찬이 형 상황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지켜보겠다는 의견이 강했거든.”
이젠 끼리끼리 모여 데뷔했다는 의견이 생겼다. 그리고 한별의 화제성을 이용하려는 소속사 입장에선 두 사람의 이미지 하락이 한별의 형인 유성에게까지는 닿게 해선 안 됐다.
상황이 훤한 만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한별은 이제 뒷덜미를 잡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두 형들 상황이 터지기 직전에 내 건이 터졌다는 거야.”
“대신, 그만큼 한별이 네가 귀찮은 상황이잖…….”
이야기하던 태하가 진동하는 한별의 핸드폰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한별은 핸드폰을 뒤집어 두고 어깨를 으쓱였다.
최근, 02나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들은 대부분이 한별에게 저희 쪽 소속사로 들어와 달라는 캐스팅 연락이었다.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는 한별이 다니는 학원 선생님을 통해 연락이 닿기까지 하니, 기획사들의 정보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 지경이었다.
“수능 끝나면 번호 바꾸려고.”
“지금 바꿔도 되지 않을까?”
“그럼 화제성이 줄어들잖아.”
태하의 걱정에도 한별은 태연했다.
“지금은 수능에나 집중하자고. 나, 16번 문제 풀이 방법이 조금 헷갈리거든?”
화제를 돌리는 한별을 보는 태하의 눈에 걱정이 가득 들어찼다. 괜찮다는 말이 버릇인 걸 아는 만큼, 태하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한별아, 채점 끝났어?”
“응. 잠깐만 쉴까?”
그러자, 하고 웃던 태하가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한별은 핸드폰을 든 채 와― 하고 입을 벌렸다.
[악플러를 향한 선처는 일체 없다.]
기사에 적힌 강한 워딩에 한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 미리 좀 하지.
논란에 힘입어 장작을 부어 버리려는 사람들은 가득한 반면 불을 끄고자 물을 끼얹는 사람은 없으니 정말 불이라도 난 듯 온갖 커뮤니티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갑자기 커진 불은 기실 진짜 불이 아니라 불처럼 보이는 가짜일 뿐이었기에 사그라드는 건 쉬웠다.
“난 진짜 몰랐네.”
한별이 머리를 긁적였다.
채널(Cha.N)의 멤버인 예찬이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중학교에서 그의 얼굴을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닮아 보이는 사람만 가득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예찬이 다닌 중학교가 소문이 돌았던 예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 중학교 출신이라는 사람들이 나와 인터넷에 글을 적고, 그 글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인터넷에 떠돈 예찬의 이미지는 예찬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확실하게 나오자, 순식간에 반전됐다.
한별은 어이없을 만큼 쉽게 해결된 이야기에 눈을 찡그렸다.
“예찬 형이 우리 학교 선배였다니……. 태하, 너는 알았어?”
“전혀…….”
뜻밖에도 예찬은 한별이 졸업한 중학교 선배였다. 전혀 시기가 맞지 않아서 본 적은 없었다.
“입학 일찍 가능한 건 알았어?”
“얘기는 들어 본 적 있어. 그 형이 조기 입학한 건 몰랐지만.”
사실 나이로 따지면 예찬이 중학교 3학년일 때 한별과 태하가 1학년으로 입학했어야 했다.
한별 역시 그렇게 생각해서 예찬의 출신 중학교로 소문났던 예중 행사 사진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유성은 어떻게 알았던 것인지, 며칠 전 뜬금없이 집에서 중학교 졸업 앨범을 챙겨 갔다.
[채널(Cha.N) 예찬, 졸업 사진 인증 나와……]
[연예 칼럼 : 악한 소문이 소문을 낳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