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왜, 저번에 우리 숙소 와서 픽마돌 요번 시즌 같이 볼 때도 되게 대단했잖아. 우리 시즌 외엔 본 적도 없다더니, 프로그램 돌아가는 판 다 알아채는 거 보고 와~ 했다, 진짜.”
“그래?”
“어. 솔직히 난 너보다 더 대단하다고 봐. 넌 당사잔데, 한별인 아니잖아. 단영이 형이랑 윤수 형이 아쉬워할 만도 하다.”
“……그러게.”
“이 정도로 상황 정리 칼 같은 거 보면 진짜 연예계 생활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핸드폰을 확인하던 유성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어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흘렀다.
“한별인 안 돼.”
“응?”
“……아냐. 아무튼, 이제 기사 내면 되겠다. 한별이 수능 보는 중이니까 끝나고 숙소 오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맛있는 거 사 줘.”
“한별이도 소고기 좋아하냐?”
“그럼~.”
유성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양 원래대로 돌아왔다.
* * *
수능이 끝났다.
어차피 부모님은 바빠서 집에 계시지 않고, 형은 논란들이 적당히 정리된 덕에 컴백 준비에 집중하는 시기였다.
한편 한별은 친구들과 모여, 머리를 모으고 있었다.
“망했다.”
“한, 별아…… 괜찮아?”
“난 조졌어. 진짜, 하…… 이거 어쩌지.”
한별의 눈이 퀭했다. 표정이 죽은 한별을 보던 태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험표에 적어 온 번호를 채점한 한별은 좌절에 빠졌다.
어쩐지 기억이 안 나더라. 평소면 바로 떠올렸을 영단어가 시험지를 받아 들자마자 그 뜻이 백지처럼 삭제되는 걸 처음 느껴 보았다.
평소엔 틀리지도 않는 유형의 문제조차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흐려졌다.
“진짜 망했다…….”
한별의 중얼거림에 태하가 괜찮다며 토닥였고, 수능이 끝난 후 옆 학교에서 바로 달려온 은한과 재휘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한별을 책망했다.
“쟤 방금 국어 몇 개 틀렸지?”
“두 개인가?”
“……죽일까.”
“쟤는 기준이 왜 매번 미쳐 있냐?”
공부 잘하는 놈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 없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은한과 재휘가 보였지만, 한별은 자신의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가고 싶은 학교의 수능 등급 컷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다. 가장 덜 틀린 과목이 국어이니만큼 다른 과목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물론 2, 3지망 대학이 있긴 하지만, 목표는 당연히 가장 가고 싶은 대학으로 잡아야 했다.
“정말 무리일 것 같아?”
“응…….”
자신이 왜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형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수능 만점이라는 점수를 받은 형(새끼)의 반이라도 따라가 보려고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준비한 거였는데.
한별이 속상한 표정을 짓자, 같이 속상한 얼굴을 하던 태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까만 선글라스와 마스크, 깊게 눌러 쓴 모자까지. 너무도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멀리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태하가 미간을 잠시 좁혔지만, 한별은 알아채지 못한 채 입을 열어 한탄했다.
“재수 없는 거 알아. 안다고…….”
“어?”
“기준 미친 거 아니고, 진짜 별수 없잖아. 나만 기준이 미쳤어?”
“어, 한별아? 최한별?”
“뼐뼐. 우리 때문이냐……? 우리 얘기, 서운했어?”
당황한 은한과 재휘가 한별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친구들을 타박하고 넘어갔겠지만, 이건 수능이다. 생각한 것보다 점수가 떨어진 탓에 멘탈이 쉽게 바스러졌다.
“나, 친형이 최유성이야.”
“어, 어……. 너 형, 최유성이지…….”
“최유성이다! 이게 아니고, 진짜 그 최유성이라고……. 형은 뭘 해도 유명했고, 난 뭐만 하면 최유성 동생 소리를 들었다고. 같은 학교여서 툭 하면 듣던 얘기가 뭔지 알잖아. 같은 반이었으니까 알 거 아냐.”
“……그야.”
“너 유성이 동생이니? 아, 너 형이 최유성이구나. 이거야. 근데, 난 형이 아니란 말이야. 성격이라든가 재능이 다른 거 알아. 아는데, 난 형 동생이잖아.”
“…….”
“그놈의 노력을 아무리 해도 형처럼은 못 돼. 발톱도 못 따라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잘난 인간을 형제로 두었기 때문일까? 한별은 언제나 유성과 비교돼 왔다.
한별은 나름 평균 키까지 컸다고 생각했다. 177이면 평균 이상이잖아! 하지만, 오메가임에도 180이 넘은 유성 덕에 늘 형보다 작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같이 서 있을 때도 형과 그렇게 닮지 않았다며 날카롭게 잘생긴 유성과 비교되어야 했고, 성적도 절대 넘을 수 없었다.
“내가 춤을 잘 춰, 노래를 잘해? 아니면 공부를 잘해? 심지어 최유성보다는 안 잘생겼네, 하는 얘기도 듣고.”
“하, 한별아…….”
“그나마 따라가는 거, 공부밖에 더 있었냐고. 아니 근데 사실 공부도 못 따라가.”
수능 만점을 어떻게 이겨?
머리로는 알고 있다. 유성은 유성이고, 한별은 한별이라는 걸. 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어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혹은 어머니를 닮았는지에 따라 성격도 성향도 모습도 달라진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과 다른 사람이야, 라며 애써 생각해도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마련이었다.
넋이 나가 버린 한별의 모습에 주춤거리던 두 친구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까지 멘탈이 나가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탓이었다.
하필 부모님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있는 터라 재휘와 은한은 한별과 더 오래 있지 못하고 먼저 손을 흔들었다.
“……형을 돕기는 무슨.”
한별이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포기한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태하는 결국 한별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쉽게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람을 붙잡고, 심장 소리와 비슷한 속도로 가만가만 토닥였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한별은 위로하듯 닿는 태하의 손에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꼴불견이다, 최한별.’
수능이 끝난 후 많은 학생이 허탈함을 느낀다지만, 설마하니 자신이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먼저 간 두 친구는 애초에 수능 공부나 대입 준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왕이면 잘 보는 것이 좋다며 같이 공부한 정도이지, 기실 전체 9등급이 나와도 수험생 할인만 받으면 된다며 희희낙락했다.
그리고 한별을 달래고 있는 태하는 아마 수능을 잘 봤을 것이다. 시험 점수에 연연하지 않지만, 언제나 성적이 좋았으니 수능도 잘 봤겠지.
“나, 엄청 급발진 했지.”
“음…….”
“도은한이랑 강재휘가 내일 내 멱살을 잡을까?”
“글쎄……?”
“걔네가 내 멱살 잡으면, 나도 같이 잡아야 할까?”
한별의 말에 태하가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도 같이 잡아 줄게.”
“내 멱살을?”
“아, 아니…….”
평소처럼 담담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자 널뛰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너는 너니까.”
“……뭐가?”
“유성이 형이랑 다르단 뜻이야.”
“……그건 나도 당연히 알지.”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어. 내가 말하면 물론 재수 없다는 소리 듣긴 하지만…….”
“엉?”
자조적인 말을 꺼내는 태하의 모습에 한별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하는 여전히 한별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는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 태하를 보던 한별은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한별이 네가 잘하는 것들이 있잖아?”
“내가?”
작곡은 잘한다. 하지만, 그것도 형보다 먼저 배우기 시작했으니 앞서는 것뿐일 테다. 앞으로도 현직에서 노래를 계속 듣고, 공유하는 형보다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운동도 못 한다. 괜히 몸치가 아니다. 어떻게든 체육 수업은 따라가고, 축구나 농구에 끼어들긴 하지만, 어설픈 드리블만 가능하니 슛은커녕 공을 잡았을 때 잘하는 친구에게 패스만 하고 끝났다. 그리고, 집안일? 그건 어렸을 때 형이 시켜서 한 거라…….
자신이 잘하는 것이 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별의 모습에 태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웃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없으니까 그렇지.”
저와 같은 나이였을 때의 형의 모습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한별은 여전히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수능 점수에 전전긍긍하며, 수능 성적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 원하는 대학 입학이 가능할지를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성은 열여덟에 데뷔를 했고, 매년 엄청난 금액의 정산금을 받고 있으며, 그 바쁜 와중에도 수능 만점을 이뤄 냈다. 실력은 꾸준히 상승했고, 여전히 1군 아이돌이었다.
“난 역시 잘난 곳 하나 없는데.”
“그건 아냐. 기준을 잘못 잡았어, 한별아.”
“아니, 그게 무슨…….”
“형이 아니고, 한별이 네가 한 걸 떠올려야지. 그건 형이 한 거잖아. 유성이 형이 한별이 너는 아닌데.”
그건 그렇지? 평범하게 맞는 말에 한별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네가 잘한 걸 생각해 봐. 굳이 형이랑 비교할 필요는 없잖아.”
한국은 치열한 경쟁 사회다. 공부한 결과는 성적으로 나오고, 점수로 평가된다.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도, 만든 결과물이 다른 사람이 만든 것보다 더 나아야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저보다 앞서 있는 유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이겨 내야 하는 사람으로 각인했다. 가족이니 돕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결론적으론 형을 넘어서야 자신이 무언가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별이 넌 지금껏 잘했어. 앞으로도 잘할 거고. 그리고, 유성이 형이 전부 다 잘하는 건 아닐걸.”
“어…….”
“분명 못 하는 것도 있을 거야. 그치?”
……그렇긴 하지.
몸을 챙기는 건 못한다. 한동안 그랬지만, 여전히 한별을 귀찮게 만드는 페로몬 사태도 결국 몸을 챙기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연스럽게 형의 건강을 챙기는 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이 못하는 일이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자신이 못하는 일은 형이 다 잘하니, 못하는 일이라도 자신이 챙겨서 완성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