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일의 발단은 유성의 페로몬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 시발점은 오메가임을 말하지 않고 데뷔한 유성이었다.
“형도 알아야지. 나도 선의로 하는 거란걸.”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순순히 돕고 있지만, 사실 한별로서는 유성의 거짓말이 오래가지 않길 바랐다.
물론, 한번 형질을 속인 만큼 오메가임을 밝혔을 때 몰아칠 여파를 생각하면 걱정되긴 한다. 가족이 욕먹는 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언제까지 베타인 척할 순 없었다.
언젠가 들키게 될 일이라면, 적당한 시기에 진실을 이야기했으면 했다.
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모였다. 고개를 돌렸던 한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쉬는 시간, 연습실 밖으로 나갔던 채널(Cha.N) 멤버들이 한별과 유성의 대화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주요 단어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눈치챌 사람이 있을까 둘 다 언성을 낮췄다.
“어차피 이용할 생각이었으면, 눈치 같은 거 보지 말고 써먹어.”
“……최한별.”
“나나 태하나 상관없으니까. 우린 우리대로 해야 할 일을 할 거야.”
한별이 가방을 챙겼다. 채널(Cha.N)의 스케줄은 지금 진행하는 연습으로 끝날 예정이고, 한별은 아직 미성년자이니 계약서에 적힌 조항에 따라 집에 갈 시간이었다.
“집 가서 연락할게. 연습 끝나고 연락 줘.”
문을 열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네 명이 다급하게 몸을 떼어 냈다.
‘한별아, 우리 아무것도 안 들었어.’
‘우리한텐 진짜로 안 들렸어!’
‘그럼 그럼!’
‘과자 먹을래?’
한별은 애써 그들의 연기를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다.
* * *
“굳이 다툴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화나는 걸 어떡해? 화병 걸릴 것 같았다고.”
우물쭈물 답하는 한별의 모습에 태하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한별이 연습생이 된다고 해도 형이 어떻게든 빼낼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유성이 진행하려는 생각 중엔 한별에게 설명이 친절하지 않은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이번엔 반대로 유성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나만 답답해야 하나? 형도 답답해 봐야지.
한별의 뚱한 표정에 태하가 볼을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났을 만해. 설명 없이 진행되면 당연히 화나지.”
이번 연습생 소문 건도 그랬다. 한별은 일부러 대응하지 않았지만, 이를 역이용한 것은 유성이었다. 마치 예상 내라는 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황에 덮어씌웠다.
한별의 도움을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것을 미꾸라지처럼 빼내는 모습이 대단은 했지만, 한별의 속은 답답해졌다.
“진짜 열 받는 건,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형을 믿는다는 거야.”
해가 되진 않는다. 당장은 손해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과적으론 이득이었다.
이번 채널(Cha.N) 멤버들의 논란 건만 해도 그렇다. 한별은 형에게 문제가 생길까 잠까지 설치고, 표정이 최대한 멀쩡하도록 애를 썼는데, 유성은 아무렇지 않게 전부 해결했다.
예상한 것처럼 가져간 물증과 증언으로 상황이 뒤집히자, 그 반동처럼 다음 앨범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증폭이 됐다.
약간 남은 찝찝함이야 안티들의 먹잇감으로만 남을 것이고, 이미 해결된 논란거리는 이슈로서의 힘을 잃었다.
한별이 유명해진 상황은 논란이 될 만한 것도 아니었기에, 유성 역시 ‘미모의 아이돌 형제’ 같은 프레임으로 홍보가 된 것이다.
어차피 소속사에선 프로그램 1위로 데뷔한 유성을 밀고 있는 데다, 설령 채널(Cha.N)이 해체되더라도 유성만은 소속사에 남기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 화제가 된 한별의 이름값까지 어떻게든 잡으려 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이미지가 구겨지는 건 철저히 막을 것이다.
“최유성은 내 형이지만, 솔직히 결과론적인 사람이야.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과만 좋다면 중간의 고생은 생각도 안 한다고. 그게 자기 고생이든, 내 고생이든, 주변 사람 고생이든. 그 인간 아이돌 되겠다고 프로그램 나갈 때도 몇 번이나 느꼈고, 활동하면서도 느꼈어. 모를 수가 없잖아.”
한별이 지친 듯 이마를 짚었다.
“……난 가끔 형이 이번에 아프다고 하면서 날 멤버들이랑 만나게 한 것도, 뭔가 예상한 것 같다는 어이없는 생각도 들어.”
헛소리나 다름없는 생각이었다.
유성이 아픈 건 병원을 함께 다니며 확인했다. 마음대로 약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확실한 것임에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생각을 해 봐. 노래를 부르는 친형은 1군 아이돌, 솔로 활동을 해도 파워가 있을 사람들을 인맥으로 두게 되면 신인 작곡가한테 해가 될 일이 있을까?”
마치, 성인이 될 한별을 준비하듯 본격적이었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너무 복잡해서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아프더라도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은 많다. 연예계를 꿈꾸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후천적으로나마 그런 성격을 얻게 되는 것인지, 데뷔는 안 했어도 연습생 생활을 했던 태하 역시 말을 가리는 편이었다.
유성 역시 아픈 것을 숨기는 편이었다. 한별은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도 등교하던 중3 시절 유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유성은 웬일로 한별에게 일찍 이야기했다. 오메가임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끌고 들어왔다.
하지만 오메가 아이돌의 논란은 논란이고, 이미 유성은 자리를 잡은 상태기에 큰 반향 없이 지나갈 수도 있지 않나?
“아, 그건 아냐.”
“그래?”
“어쨌거나 속인 건 속인 거라서 팬들 입장에선 반향이 클 거거든.”
“아…….”
이상할 정도로 연예인에겐 완전무결함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한들 속인 것이라는 생각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냥 화나니까, 온갖 생각이 퍼지는 것 같아.”
“원래 음모론은 이상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되는 거니까.”
“…….”
“형이 어려서부터 네가 할 일을 위해서 판을 깔고 있는 것 같다는, 그 음모론.”
한별이 답답함에 털어놓은 것은 결국 유성에 대한 음모론이었다. 이런 허황된 말을 다 들어 주고 있는 태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져, 한별은 머쓱함을 느꼈다.
“……그렇지. 아무리 최유성이 천재여도 고등학생 때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맞아. 그러면 유성이 형이 너무 웹소설 주인공 같지 않아?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데, 아이돌 프로그램 1위로 데뷔라니.”
“풉―. 뭐야, 그거. 너, 웹소설도 읽어?”
한별은 이어진 태하의 말에 키득, 웃음을 지었다.
“전에 같이 데뷔 준비하던 형들이 추천해 줘서 읽은 게 몇 개 있었어.”
“그래……. 근데, 너 정말 나 도와도 괜찮겠어?”
“난 내 얼굴 팔려도 상관이 없거든.”
“그래도…….”
유성에게 말하지 않은 판에 한별을 돕기 위해 뛰어든 이는 태하였다.
수능 가채점 결과는 만점. 답안지 마킹 실수만 없다면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마음대로 넣어도 되기에 지망 대학 준비를 위한 조퇴가 당연하게 허락됐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얘도 웹소설 주인공 타입이잖아? 한별은 태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 너, 여전히 아이돌 하고 싶어?”
“음…….”
고민하는 듯 소리를 내던 태하가 웃음을 지었다.
“왜 네가 더 긴장한 얼굴이지?”
“꼬일 것 같으니까 그렇지. 까딱 잘못하면 너, 위치 이상해진다고.”
“괜찮아.”
태하는 한별과 함께 다니며 얼굴을 간혹 비춰, 아예 세트로 묶일 예정이었다.
현재 한별의 존재로 어느 정도 끌린 어그로를 태하마저 가담시켜 배로 부풀려서 이미 완성된 소속사 데뷔 조가 어긋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원래 이런 행동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데뷔 조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하지만, 채널(Cha.N)의 최근 무대 댄서로 오른 데뷔 조의 얼굴을 본 태하의 표정이 굳어진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니까, 애초에 네 데뷔가 무산된 게 그 사람들 때문이라는 거지?’
태하는 계속 입을 다물었지만, 계속된 한별의 추궁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당시, 태하는 데뷔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데뷔가 무산되었다니. 묻진 못했으나 이해할 순 없었어서 한별은 혀를 내둘렀었다.
연습생은 마음대로 회사를 옮길 수 없다. 하지만, 방출이라는 이름으로 타 회사에 트레이드되는 경우는 있었다.
높으신 분들의 거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연습생들이 먼저 StarV와 손을 잡았고, StarV는 연습생들과 영세 기획사와의 계약을 종료시켰다.
누구나 저 좋은 길을 찾아가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좋게 말하면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별이 열이 받은 건 이들이 선을 넘어도 많이 넘었다는 것이다.
13살부터 시작한 연습생 생활이기에 기실 가장 선배 격인 사람은 태하였다. 막내로 들어가 결국 최고참이 되었지만, 태하는 결코 ‘선배라는 이름의 꼰대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태하
네. 학교 끝나고 연습하러 갈 겁니다.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한별은 중학교 2학년짜리 학생이 기껏해야 생일이 두 달 빠른 동갑내기 선배에게 꼭 존대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혼이 나갔다.
반대로 나이가 적어도 들어온 순서에 맞춰야 한다는 구닥다리 논리에, 듣는 한별이 더 노이로제가 올 것만 같았다.
그러한 내리 갈굼에 나가는 연습생들도 부지기수였다. 힘들 법도 하지만 태하는 담담하게 견뎠고, 자신의 뒤로 들어온 연습생에겐 그 행동들이 가지 않도록 악습을 없앴다.
다행히 최고참이 된 태하의 뒤로 들어온 연습생들과 데뷔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 최후는 배신이었다.
‘그러니까, 너 빼고?’
‘어? 어…….’
앞에서 방패막이가 되어 준 사람은 혼자 두고 7인조 예정이었던 그룹에서 여섯이 한 번에 날랐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상의 한번 없이, 그들끼리만 이야기한 후 태하를 두고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