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 *
“해방이다.”
계약의 마지막 날, 한별은 두 손을 꽉 쥐고 해방을 만끽했다. 유성의 상태는 한 달 전 회복되어 이제 더는 오지 않아도 됐지만, 일단 계약서에 서명은 했으니 일하는 기간은 채웠다.
한 달 전, 유성의 회복 판정이 확인되자마자 한별은 소속사에 찾아가 캐스팅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작곡의 꿈을 버릴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며, 일부러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했다.
“되게 서운하다, 한별아……. 형이랑 있는 게 그렇게 싫었어?”
“형, 말은 제대로 해야지. 내가 여태 엉뚱한 일에 시간을 뺏긴 거잖아.”
소속사에서 한별을 캐스팅하고자 눈에 불을 켤 동안 채널(Cha.N)을 향한 루머와 논란이 뚝 끊겼다. 그리고 한별이 거절한 이후, 당연히 꺼진 논란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SNS 사이로 태동한 논란거리들은 있었다. 전부 해괴한 내용들이었는데 결국엔 힘을 받지 못했고, 수면에 올라오지 않았다.
보통은 찌라시로 돌고 말 내용들이 힘을 받아 시끄러워지려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채널(Cha.N)의 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붙잡아 신고를 넣는 데다, 소속사 이메일에 신고 자료가 한가득 쌓이니 대응하지 않았다간 팬들의 공식 항의 서한을 받을 판이었다.
게다가 논란이라는 것들이 다 세현과 예찬에게 생겼던 창조 논란이나 다름없는 것들인지라, 자칫 알려졌다가 역풍이 돌면 이번 앨범처럼 홍보로 이용이나 당할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 근데, 형. 태하한테 연락한다고 하더니 왜 연락 안 했어?”
“어?”
“연습생으로 데려갈 것 같더니 연락 안 한 것 같아서.”
“무슨 말이야?”
유성이 눈을 끔뻑였다. 한별은 돌아온 반응에 되레 멍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왜 모르는 척해?
형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너야말로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그때 이미 얘기 다 했는데.”
“……어?”
“그날 너한테 얘기하고 바로 통화했어. 혹시, 태하한테 이야기 못 들었어?”
네. 못 들었는데요.
한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 *
한별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깊이 생각에 잠겼다.
‘태하, 제안 거절했어. 이미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 들은 이야기 없어.’
‘그래? 이번 일 때문에 연예계 쪽에 들어오기 싫어졌나 해서, 우리도 그냥 더 묻진 않았거든.’
저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버스 안은 그에 맞추어 차 내부에 불을 켰고, 잘 보이던 창밖은 금세 어두워져 한별의 얼굴과 건물의 불빛들만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태하가 가득 찼기 때문일까. 한별은 덜컹거리는 차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중간에 한 번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것조차 깜빡 잊었다.
한별은 뒤늦게 멀미에 울렁거리는 속을 다 잡으며 벨을 눌렀다.
그간 태하는 아직 연예계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한별이 새로 만든 곡을 가장 먼저 들어 주었고, 컴백하거나 데뷔한 그룹들의 곡을 같이 들으며 분석하기도 했다.
졸업 전, 마지막 방학임에도 한별은 친구들과 자주 만났다.
하루가 멀다고 한별의 집에 방문한 친구들은 한별이 만든 곡을 들으며 키득거리기도 하고, 작업하는 한별의 옆으로 와서 일부러 간식을 펼치며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태하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1월의 중순. 채널(Cha.N)은 초에 컴백했으니 가장 바쁠 때였다. 당연히 컴백 전에 태하와 이야기를 끝냈을 확률이 높았다.
한별은 태하가 당연히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두 달간 채널(Cha.N)과 다니면서, 그리고 유성이 하는 행동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이 만들 레이블의 내실이 착실하게 다져지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까.
유성은 마치 채널(Cha.N) 데뷔 초부터 지금을 준비한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런 회사라면 적어도 뒤에 만들어질 그룹들이 바닥을 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한별은 조금 서운했다. 사실 자신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사항이기도 했다. 소속사에 들어가는 것,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는 것. 모든 일은 태하의 선택이니까.
가장 가까이서 응원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해서 태하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의무는 없었다. 반대로, 태하 역시 한별에게 말해 줘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렇지만, 알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이건 버스 때문이다. 평소에도 차를 타면 상태가 안 좋아졌으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다.
지금 바빠?
결국, 한별은 울렁거림을 참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해가 짧은 겨울이기에 어둠이 주위에 가득해지자, 따스함은 온데간데없고 한기만 가득 감돌았다.
다시 차를 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갈 수도 없었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거리가 꽤 돼서, 한별은 속을 달랠 겸 태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태하
저녁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어.
오늘 마지막 날이잖아. 잘 끝났어? 혹시 돌아가는 중이야?
나는 전부 이야기했는데.
한별은 그간 자신의 상황이나 회사와 한 계약의 마무리 일체 태하에게 공유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서운한가 보다. 그만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지금 태하가 어색하고, 또 서운하게 느껴졌다.
“……비밀이 있을 수도 있지.”
한별은 울렁이는 속을 애써 달랬다.
그래도 가장 빛나는 곳이 어울리는 사람인 것은 변함이 없다. 만약 태하가 다시 무대에 오르는 꿈을 꾸게 되었을 때, 그때만큼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말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응. 지금 퇴근하는 중이야.
지태하
한별아. 혹시 차 안이야?
아냐 밖인데
지태하
어디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별은 주변을 살폈다. 다니던 학교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한별은 익숙한 건물의 이름을 대고,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태하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올 생각이 있으니, 위치를 물은 거겠지.
한별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여긴 태하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달려오는 태하가 보였다. 한별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뛰어나온 듯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뛰어와?”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언젠가 태하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걱정을 입에 올리자, 전속력으로 달려온 태하가 한별의 앞에서 멈추곤 숨을 골랐다.
추운 날씨인데도 태하의 머리칼 끝은 젖어 있었다. 막 씻은 참이었나 보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았다.
“감기 걸리겠는데.”
어디 들어가야 하나.
걱정 가득한 한별의 표정을 읽은 태하가 입을 열었다.
“버스 탔을 것 같아서. 형이 데려다주시는 거였으면 멀미 때문에 집에 도착하고 연락했을 것 같았거든.”
퇴근하는 중, 메시지의 답. 그것으로 한별의 모습을 떠올렸단 뜻이었다. 그만큼 태하는 한별을 잘 알았다.
한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태하가 씩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게 그렇게 기쁜 걸까? 머리도 다 말리지 않고 달려 나올 만큼.
그런데, 그건 왜…….
한별은 조금 애매해진 표정으로 태하를 응시했다.
“왜? 제대로 안 닦인 데 있어?”
태하가 민망한 듯 제 뺨을 매만졌다.
“머리 제대로 안 말리면 감기 걸린다고 했지, 태하야.”
“하하…….”
“어디 잠깐 들어가자.”
어차피 집에 갈 순 없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은 태하의 가족분들께 실례가 되는 행동이니까. 그렇다고 집으로 향하기엔 속이 좋지 않고, 달려온 태하에게도 안 될 말이었다.
고개를 돌리던 한별은 커다란 카페를 가리키며 태하의 외투를 잡아끌었다.
입김이 터지던 곳에서 안으로 들어서자 훈기가 몸을 감쌌다. 생각보다 밖이 추웠나 보다. 추운 것도 모를 만큼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떤 거 마실래?”
“아, 나는 아메리카노……. 내가 살게, 한별아.”
“아냐. 여기까지 뛰어와 놓고 뭘 사.”
나, 형한테 용돈 뜯어냈거든?
한별은 웃음을 짓곤 달콤한 유자차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태하 머리도 말릴 겸, 자신의 속도 달래야 하니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태하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제가 물은 모든 것이 태하에겐 부담이 되었던 걸까 싶어 한별은 애써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다 끝나니까, 기분이 이상해?”
“아무래도 그렇지. 매주 자컨 찍는 건 아닌데, 스탭들이 준비나 자료 조사 같은 건 꽤 했거든. 그런데 그거 안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신기하긴 하더라.”
“채널 숙소도 이제 안 가는 거야?”
“응. 형도 상태 괜찮아졌고, 이젠 진짜 바쁠 때니까. 형이 어워드 준비 되게 힘들다고는 했는데, 난 오히려 좋았어. 진짜 할 거 없었거든. 물이나 좀 챙겨 주면 되던데.”
“그랬어?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끝나서.”
카페엔 사람이 많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최대한 사람이 적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 덕이었다.
간혹 멀리서 태하와 한별 쪽으로 향하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이건 태하와 함께 다니면 항상 있던 일이니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
“집에 다시 가야 하는 거 아냐? 저녁 먹을 준비 중이었다며.”
“오늘 부모님 안 계셔서 어차피 혼자였어. 괜찮아. 같이 저녁 먹을래? 조금 더 준비하면 되는데.”
“갑자기?”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좋잖아.”
방학엔 하루 세끼 전부 혼자 먹는 경우가 많았다. 곡 작업에 빠지다 보면 때를 지나 먹기도 했다.
지금 태하는 한별의 밥을 챙기려 들었다. 평소와 같은 행동이었다. 이런 태하에게 서운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커피도 사 줬는데 밥은 내가 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형한테 엄청 혼나겠는데.”
“왜?”
“알파 친구 집 놀러 간다고.”
평소라면 웃고 말았을 것이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장난스레 꺼내던 농담이었으니까.
한별의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친구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에 등짝 스매싱을 조심해야겠다며 키득대기도 했다.
한별은 엊그제만 해도 친구들이 간식을 사 들고 놀러 와서 했던 농담을 꺼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태하에게선 반응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