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태하야?”
머그잔 손잡이를 꽉 잡은 태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주변에서 먹고 갈까? 생각해 보니까 밥이 좀 부족할 것 같아.”
“밥, 새로 안친 거 아니었어?”
“아냐. 반찬만 조금 해 둔 상태였어. 밥은 아침에 해서 좀 부족하거든. 내가 나중에 해 주는 걸로 하고, 근처에서 맛있는 거 먹자. 어때?”
나야 괜찮지. 한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겉도는 느낌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하는 것 같은데, 어딘가 말속에 알맹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어떤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한별은 밥집에 들어선 후 먹기 좋게 잘린 고기를 입에 가져와, 오래도록 우물거렸다.
그간 태하와 있는 자리가 불편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오랫동안 지내 온 사이였다. 형질이 발현하기 전까진 서로의 집에 놀러 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여름 합숙에도 함께 참여하곤 했다.
“한별아. 고기 조금 더 시킬까?”
“아냐. 오늘 점심에 형들이랑 되게 많이 먹어서 괜찮아.”
“……그래?”
태하는 평소와 같이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불편한 것 같았다.
왜?
도대체 그런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거야?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기가 입 앞으로 오면 잘 벌어지는 입이, 태하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함에도 도통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번에 기획사에 노래 보내 본 거, 연락 왔어?”
“아니. 그건 아직 안 왔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몇 번이고 더 겪어야 하는 일이니, 한별은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물론, 언젠가 합격하고 말리라 하는 도전 정신은 그럴수록 강하게 뿌리박혔다.
화제는 태하가 가이드 녹음을 했던 노래로 바뀌었다.
묻고 싶은데 물을 수 없었다. 태하 역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속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지금 태하와 자신 사이에 부족한 것은 솔직함이라는 녀석이었다. 솔직함을 풀어 편하게 물어보면 되는 것들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스러웠다.
한별은 자신이 왜 태하에게 묻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하야.”
“응.”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겠다는 듯 온전히 자신을 보는 시선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욱 물을 수가 없었다.
태하는 지금껏 한별을 속이긴커녕 비밀을 만든 적이 없었다. 연습생이 되었다는 사실도 한별이 가장 먼저 들었고, 회사에서 나왔다는 것도 한별이 먼저 들었다.
태하는 이미 한별의 페로몬을 안다는 사실과 유성의 페로몬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간 한별의 페로몬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태하가 가진 매너였을 뿐이다.
그런 태하이니, 물으면 답을 해 주지 않을까? 어째서 회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것인지, 거절한 이유가 있는지, 아니면…….
“고기, 조금만 더 작게 자를까?”
“큰가?”
“아냐. 밥이랑 같이 먹어서 그래. 난 숟가락에 올려서 먹잖아.”
혹여, 오래 간직해 온 꿈을 이젠 포기하려 하는 것인지.
그래서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한별은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건넨 응원과 이야기가 사실 태하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만 같아서, 미안함이 가득 퍼질 것만 같아서.
이야기가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도은한이랑 강재휘,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온다고 했지?”
“응. 그 둘은 부모님끼리 친하시잖아.”
“언제 온다더라?”
“오래 다녀오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수요일쯤?”
“한참 전에 같이 갈 거냐고 물어봤을 때 형 일이 있어서 못 갔는데…… 태하 너한텐 같이 가자는 이야기 없었어?”
“있었어.”
“왜 안 갔어?”
태하는 고기를 조금 더 잘게 잘라, 한별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며 답했다.
“나도 가면, 한별이 네가 혼자 있잖아.”
“뭘 혼자야. 부모님도 중간중간 오시고, 형도 오는데. 게다가 도은한이랑 강재휘 툭하면 톡방 울려 대서 걔네 외국 나간 게 맞는지 의문일 정돈데.”
“그래도 혼자 있잖아.”
“멀리 간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5박 6일인데?”
“그래도.”
태하의 답은 단호했다.
한별은 내심 고마웠다. 학교에서 반이 갈렸어도 태하는 항상 한별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은한이나 재휘가 다른 친구들과 급식 약속했다며 돌아다녀도 태하만은 항상 함께였다. 그 여전함이 고맙고, 다시 한별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까지 갔으면 한별이 너, 작업한다고 밥때 놓칠 거 아냐. 다 늦어서 식사하는 버릇 있으니까. 그리고 너,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하잖아.”
제게 쏟아지는 저 걱정들이 기꺼우면서도 한별은 계속 미안했다.
고기들이 하나하나 작게 잘렸다. 한별은 가위를 쥔 태하의 손이 가끔 멈칫하는 것을 눈치챘다. 지금 태하는 모른 척할 뿐이었다.
“태하야.”
“응.”
다시 반복이었다.
태하에게 솔직하게 물어 답을 받게 되었을 때, 그 답이 사실은 자신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다는 이야기로 끝날까 봐 한별은 다시 입을 닫았다.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은 태하가 손을 가지런히 내렸다.
“한별아. 나, 캐스팅 거절했어.”
역시나 한별의 생각과 망설임을 미리 알아채 선수를 친 건 태하였다. 이미 한별이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한별의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식사 중에 이야기를 꺼내면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테니까. 저녁을 먹는 내내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흘렀던 이유였다.
차마 묻지 못한 질문에 관한 답이 태하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한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해.”
한별이 사과하자, 태하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야 할 소리야, 한별아. 좋은 기회인 거 알고, 네가 응원해 준 것도 아는데…… 내가 거절한 거니까.”
“……내가 너한테 부담을 줬어.”
태하가 쓰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까 봐 이야기 안 하려고 했어.”
“사실이잖아.”
“전혀 아니야. 네 탓은 전혀 없어.”
태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냥 내 생각이야. 다른 소속사도 있는데, 굳이 그 회사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욕심인 것도 있고.”
사실 기대한 것은 한별이었다.
형도 있고, 태하도 있으니 쉽게 작곡가로서 입성할 수 있겠지 하는 감상 같은 건 아니었다. 실력이 없다면 낙하산이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바닥이니, 굳이 낙하산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괜찮은 실무진과 대기업의 자본이다. 작은 회사에 있었던 태하를 올바르게 케어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그게 태하에게 좋은 일이라고 자만했다.
감히 타인의 생각을 재단한 것이다.
시무룩해진 한별을 보던 태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에 있던 태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별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별아.”
가까워진 거리에 고개를 든 한별이 태하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생겨서 그래. 그래서 그 소속사엔 들어갈 수가 없었어.”
“하고 싶은 거?”
“응. 그러니까 절대 네 탓이 아니야. 난 여전히 한별이 네 노래 듣고 싶고, 부르고 싶거든.”
“아…….”
“네가 내게 노래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걸 포기할 순 없지.”
태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열두 살의 어느 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던 캠프 날 시원하게 바람이 불던 밤에 서로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 * *
한별은 조가 나눠진 걸 확인하고 난 뒤부터 이놈의 영어 캠프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은한과 재휘는 태하와 같은 조라고 신나서 돌아다녔지만, 한별은 친한 친구 중 같은 조가 된 사람이 없었다.
굳이 그놈의 합숙, 가야 했냐며 미간을 좁히던 유성은 한별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계속 울리는 진동에 한별은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부모님한테 미리 말해서 시간 뺀 거잖아 그 며칠 혼자 밥 좀 먹으면 되지 중학생이나 돼서 혼자 밥 먹기 싫다고 동생한테 메시지 보내는 건 뭔데 형은 형이 돼 가지고 동생이 공부하는 게 싫냐?
문자를 누르는 손에 힘이 꾹꾹 들어갔다.
저 멀리 태하가 은한과 재휘에게 붙잡혀 끌려다녔다. 순한 친구가 저 장난꾸러기들한테 잡혀 있다니. 차라리 태하라도 자신과 같은 조였으면 편했을 텐데.
괜히 뚱해지는 기분에 신발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차던 한별은 이내 포기한 얼굴로 해야 할 일을 끝냈다.
전부 같은 학년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쉽게 친해지기는 무리였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이니만큼 친한 친구들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태하랑 같은 조면 좋았을 텐데.”
태하는 영어도 잘하니까. 함께하는 원어민 교사가 가까이 다가와도 무리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낮에 막 입소했을 때도 커다란 외국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대화하던 태하였다.
한별은 원어민 교사가 다가와 가벼운 대화를 걸 때조차 몸이 굳었다. 다른 조에 있으니 친구들을 부를 수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같은 조의 친구들 역시 다들 한별과 비슷했다. 괜히 서러운 감정에 한별은 친구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런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한별 나름대로 토라짐의 표현이었다. 말만이라도 같은 조 되고 싶었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쉬는 시간에 같이 다니고, 밥 같이 먹으면 되지 않냐고.
조별로 행동하는 걸 지향하는 상황이었음에도 한별의 토라짐은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잡아 터졌다. 자신이 이렇게 서운한데, 친구들은 제가 안중에도 없다는 것에 화도 났다.
표현하지 않으면 당연히 알지 못한다는 건 안다. 한별이 뚱하게 입을 다물면 형이 항상 하던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이 서운함을 친구들한테 풀어선 안 됐다. 속상한 것과는 별개로 엉뚱한 화풀이라는 걸 잘 아니까.
그때, 친구들에게 붙잡혀 이동하던 태하와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태하가 자신을 부르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한별은 마치 못 봤다는 양 고개를 돌려, 그대로 조원들에게 향했다.
사실 같이 있고 싶지만, 너희끼리 재밌어하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으니 토라지는 것도 당연하잖아.
조별로 움직이라 한 만큼 친구들이 자신에게 오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니까, 그때까진 나도 너희랑 이야기하지 않겠어.
초등학생 5학년의 치기가 가득 담긴 생각은 자신의 앞에 서서 손을 꼭 붙잡아 주는 태하의 모습에 바로 날아갔다.
“한별아. 이따 저녁 같이 먹어 주지 않을래?”
“…….”
“미안, 점심엔 선생님이랑 같이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같이 못 있었어. 나, 한별이 너랑 밥 같이 먹고 싶은데. 그래도 돼?”
한별은 서러움을 매만져 주는 태하의 앞에서 그날 처음으로 감정을 내보였다.
“하, 한별아?”
쪽팔리게 울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