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큰일이네.”
“왜요?”
“지금도 밥 잘 안 먹을 텐데, 작업실에서 더 안 나오게 생겼어.”
내 죄다.
유성이 한탄하자, 잔뜩 상기된 한별을 보던 태하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강의 들으러 다녀야 하니 괜찮아요. 한별이 성실해서 수업은 절대 안 빼먹을 테니까요.”
“밤새 작업하고 학교 가면 피곤할 거 아냐. 정신없이 작업할 것 같기도 하고.”
“음……. 그땐 제가 말려 볼게요.”
“어떻게?”
“잘……?”
“……?”
작업실에 흠뻑 빠진 한별을 보며 태하는 짙게 미소 지었다.
* * *
“잘생겼네.”
2월 말에 입학식을 하고 개강한 첫날. 한별의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키가 모델처럼 큰 건 아니지만, 눈에 띄게 단정하고 잘생긴 신입생이 조금 피곤한 얼굴로 모자를 꾹 눌러썼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어, 눈동자나 머리칼 등이 주위 사람 중에서 가장 밝았다.
심지어 피부마저 햇빛을 못 보고 산 듯 새하얬다. 또 당장 쓰러질 것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몸이 탄탄했다. 꾸준히 운동하는 듯 태가 좋았다.
강의실에 들어오던 신입생들이 이 신입생의 뒷모습을 보고 슬쩍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종종 앞으로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다 얼굴을 보고 더 놀란 표정으로 그 신입생 근처에 앉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정작 신입생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이목에 익숙한 듯, 혹은 관심이 없는 듯 귀에 꽂은 이어폰만 매만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신입생이 깨달았다는 듯 가지고 있던 태블릿 PC를 만져, 무언가를 수정했다.
“……그림이네.”
누군가 흘리듯 내뱉은 말에 주변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말하면 집중도가 높다. 나쁘게 말하면 마이웨이 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한별아.”
학생들의 감상이 깨진 것은 그 신입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톡톡 두드리는, 또 다른 신입생의 등장 때문이었다.
‘미쳤네!’
‘홀리…….’
‘와…….’
색소 옅은 신입생과는 달리 짙은 눈매와 검은색의 눈동자, 왼쪽 눈 아래 예쁘게 박힌 눈물점에 머리칼 역시 까만 신입생이 미소를 지었다.
날카롭다고 생각한 외모가 순식간에 세상의 온갖 다정을 끌어모은 듯한 표정으로 앉은 신입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직 화났어?”
“…….”
“이야기 들어 주라. 응? 한별아.”
사과, 받아 주면 안 될까? 턱선마저 날카롭게 생겨선 목소리는 또 굉장히 달콤했다.
근데, 저 애인 달래는 말투는 뭐냐.
아무리 봐도 화제가 되고도 남을 신입생들의 대화 내용에 동기들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한별은 속은 기분이었다.
“너, 진짜 너무했어.”
학식으로 주문한 돈가스를 화풀이하듯 나이프로 꾹꾹 누르던 한별이 포크로 한 조각을 꾹 찍어 입에 넣었다.
“미안해.”
누가 봐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평소의 태하는 장난기가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장난을 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능 만점자가 왜 K대에 왔냐고. 그것도, 자신과 같은 과에!
수능을 그렇게 잘 봤으면 의대라든가 연구직을 가야지. 어쩐지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었냐는 말에 여러 군데 넣었다고 슬쩍 말을 흘리더라.
한별은 제대로 알지 못한 사실에 억울할 지경이었다.
“졸업식 날 확인해도 됐던 거였는데. 서로 얘기 다 했었어.”
“졸업식 안 갔잖아, 난.”
“나도 그게 아쉬워서 그랬지.”
태하는 컵에 물을 담아, 한별의 식판 옆에 놔주곤 이번엔 자신의 생선가스를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라 한별의 접시 위에 올렸다.
미안함을 담은 선물인가 해서 뚱해져 있던 한별은 얌전히 생선가스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한별은 방학하자마자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학생부 서류는 전부 끝난 상태였기에 학교에 가든 안 가든 대학 입학엔 영향이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곡 작업을 더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선 졸업식 사진을 찍어야 하니 오라고 했지만, 그 역시 한별에겐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상을 탈 일도 없고, 받을 것은 졸업장과 선생님의 인사뿐이니까.
게다가 1월 초는 한별이 채널(Cha.N)을 도와 돌아다니던 시기였다. 무척 바쁜 와중이었기에 굳이 졸업식을 가느니 촬영이나 돕는 편이 한별에겐 좋았다.
“어차피 난 같이 사진 찍을 사람, 너랑 도은한이랑 강재휘밖에 없었잖아.”
“그러니까 왔으면 했지. 사진 남기고 싶어서.”
초등학교, 중학교 사진이 전부 있는데 굳이 고등학교까지 필요하진 않다며 한별은 고개를 저었다.
스케줄에 바쁜 유성은 당연했고, 부모님 역시 졸업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족 없는 졸업식 사진이 남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졸업식에 마음을 쓸 시간에 괜히 가족들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겠다. 한별의 생각은 단순했다.
“근데, 어쩌다 여기로 온 거야? 의대라든가 약대 같은 데 지망하려던 거 아니었어?”
“경영 계열도 넣긴 했지.”
“합격했을 거 아냐.”
태하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능 만점을 어느 학교에서 거절할까. 심지어 중고등학교 6년 내내 1반이었던 태하였다. 면접에서 깽판을 부리지 않는 한, 대부분 합격이었을 것이다.
한별은 입학식이 있던 2월 28일, 장학 증서를 받으러 강단 위로 올라서는 태하를 보고 말을 잃었다.
초중고를 같이 다녔지만 대학부턴 혼자 다녀야 하는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태하가 그 다짐을 깨부쉈다.
태하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방송 퀴즈 프로그램에서 4년 장학금을 받은 상태였다. 학교에선 수능 만점자를 놓치고 싶진 않았는지, 태하를 수석에 올려 두었다.
“나, 노래도 잘해.”
그래…… 노래도 잘하지. 한별은 누구보다 태하의 실력을 잘 알았다. 하지만, 저 머리를 썩히는 것도 조금…….
“썩히는 게 아냐.”
“내 생각 읽었어?”
“너무 티가 나서.”
어차피 전공은 달랐다. 작곡인 한별과는 달리, 태하는 보컬 전공이었다.
“……진짜 사기캐다.”
“한별이 너 말하는 거야?”
지금 장난하나. 한별이 정색했다.
키 커, 잘생겼어, 공부 잘해, 노래까지 잘해. 한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번 K대 정시 보컬 전공의 경쟁률은 150:1이었다.
* * *
“밥, 제대로 챙겨 먹고 있지?”
―한별아. 그거 내가 들을 말이 아닐 텐데.
“뭐, 왜, 뭐.”
―너 어제 작업 몇 시까지 했어.
“…….”
당당하게 말하려던 한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몇 시에 잤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최유성 방, (현)최한별 작업실엔 당연하다는 듯 두꺼운 토퍼가 배치되었다. 작업실에 살다시피 하는 한별이기에 몇 시에 잤냐는 질문 자체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최한별 어제 주말이라고 또, 또!
“아, 아냐.”
―거짓말하지 마라. 몇 시에 잤어.
평소 잔소리는 자신의 몫이었는데, 대학교 입학하고 2주 만에 바로 역전이 됐다.
기본적인 수업 방향이 달라서였다. 고등학교의 수업 시간은 같은 시간에 시작하고 끝이 나니까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대학은 공강과 휴강이 존재하니 자칫하면 생활 패턴이 불규칙해지기 쉬웠다.
“한별아. 나 전공 레슨 끝났…….”
―너, 제대로 몸 관리 안 할래!
연습실 문을 열던 태하가 수화기 너머 들리는 소리에 몸을 굳혔다.
……아, 조졌다.
한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잔소리 두 배 당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 5분의 잔소리 타임이 지나가고 통화가 끊기자 옆에 앉아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하의 눈길이 느껴졌다.
“한별아?”
너 어제 잔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태하는 자신의 이름을 포함해 단 세 글자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섞인 긴 뜻에 한별은 숨을 꼴깍 삼켰다.
“……일단, 피아노 들으러 갈까?”
그냥 미리 혼내 주라. 한별이 침착하게 태하를 따라 일어났다.
간신히 들어온 학교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무리가 따랐다. 입학할 땐 추가 합격이었지만, 성적까지 추가 합격에 맞는 성적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목표를 대학 입학만이 아니라 프로 신에 나가는 것으로 잡았으니,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그림만 그렸다는 것처럼, 자신 역시 불가피한 시간을 제외하곤 노래를 만드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든 것이다.
“한별아.”
“…….”
……넵.
앞서 걷던 태하가 평소와 같이 다정히 웃었다.
“나, 피아노 좀 알려 줄래?”
뜬금없었다. 대학 정규 과목 중 피아노 수업은 이미 있었다. 연습생 기간 중 악기를 배운 적 없다던 태하지만, 그래도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있어서인지 배움이 빨랐다.
그런데, 굳이? 이번에도 수석 노리나?
한별이 눈을 끔뻑이자, 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업 끝나고 같이 연습실 가서 연습할까?”
“개인 연습실 말하는 거야?”
“응.”
학과 연습실 중엔 피아노가 있는 방이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불편하니 차라리 집으로 갈까, 생각하던 한별이었다. 오늘 어머니도 계시고 하니, 오랜만에 인사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집에도 키보드가 있긴 하다. 곡 작업을 할 때 대부분 가상 악기를 사용하지만, 필요할 경우를 대비하여 키보드를 구매해 두었었다.
‘태하가 다음 수업이 있던가?’
집까지 갔다 오려면 조금 불편할 것 같은데. 역시, 연습실이 낫겠지.
잔소리 대신 도움을 달라는 태하의 말에 한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