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의 아이돌 생활을 위해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41화 (41/78)

41화

한별이 근처 벽에 기대곤 좌절된 듯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챙겨야 하는데.”

“나 괜찮아.”

그렇게 많은 잔을 비웠는데 괜찮을 리가.

평소에도 친구들에겐 다정한 얼굴이었지만, 태하의 시선은 평소보다 살짝 내려와 있었다. 태하도 자신도 많이 취했다는 핑계로 술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머리는 괜찮아?”

“어…….”

한별과 태하는 근처 벤치에 앉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 머리 아픈 거, 어떻게 알았어?”

한별의 말에 태하가 고개를 돌렸다. 태하의 까만 눈동자가 한별을 빤히 바라보다 웃음 사이로 접혀 사라졌다.

“여기.”

태하의 긴 손이 한별의 왼쪽 눈 근처를 살짝 매만지고 떨어졌다.

“머리가 아프면 왼쪽 눈을 조금 더 작게 찡그리면서 뜨니까 알지.”

너와 오래 알고 지내긴 했구나. 한별은 자신의 상태를 쉽게 알아채는 태하의 모습에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엔 술자리 가지 말자.”

한별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태하의 모습을 보다 말했다.

중고등학교 내내 연습생 생활까지 하며 바빴던 태하였다. 하지만 시험 기간이 되더라도 피곤한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원래 체력이 좋기도 하고. 컨디션 관리에 철저한 태하였기에 이렇게까지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 흐릿한 시선으로 한별을 보던 태하가 느리게 끄덕였다.

“한별이 너도 마시지 말자. 몸 많이 안 좋아 보여.”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를. 몸도 가누기 힘든 듯 고개를 한별에게 떨어뜨리면서 태하는 한별을 먼저 걱정했다.

여기서 한별의 집까진 비교적 멀지 않았다. 하지만 태하의 집은 멀었다. 오늘 부모님이 오신다고 하셨던가? 아니, 들어오셨던가? 만약 들어오셨다면 태하를 어디에 재워야 하지?

한별이 중얼거리자, 태하가 눈을 끔뻑였다.

“나랑 집에 같이 가게?”

“술 취한 사람을 혼자 보낼 순 없잖아.”

태하가 푸흐흐 웃었다.

딱히 거절하는 기색은 아니어서 한별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자신은 작업실에서 자면 되고, 태하가 제 방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한별은 조금 가라앉은 속을 쓰다듬으며 태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일단 가자.”

술 깨길 기다리다간 밤새우게 생겼다. 신입생 환영회가 금요일에 열려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한별은 빠르게 가려 했지만, 태하가 일부러인 듯 천천히 걸었다.

결국, 한별이 먼저 포기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태하를 붙잡고 가는 동안 한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냐?”

“어떤 거?”

“외박.”

“아…… 오늘 어차피 환영회 있는 거 말씀드려서 괜찮아.”

“그래?”

태하의 집은 외박이 자유로운가 보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고…….”

태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작 한별은 핸드폰을 들어 톡톡 메시지를 남겼다.

“누구한테 연락해?”

“형.”

“왜?”

“집에 손님 오는 건 얘기해야지.”

커다란 집에 한별 혼자 지내고는 있지만, 공식적으론 가족과 사용하는 집이니 동거인들의 허락이 필요했다.

한별의 모습을 보던 태하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욕…… 먹을 것 같은데.”

“왜?”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거든.”

그러니까, 왜?

한별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늦은 시간이지만 약 90퍼센트의 확률로 유성이 잠에 들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최유성 씨]

액정에 바로 전화가 꽂히자, 한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미쳤어?! 어? 술 마셨다더니, 돌은 거야?

아무리 숙소가 방음이 잘된다지만, 오밤중에 소리를 지르는 형보단 덜 미친 것 같은데.

“아니, 내가 왜 새벽 한 시에 형한테 욕을 먹어야 하지?”

―당연한 거 아니야?

“아, 왜!”

―야, 이 시간에! 어? 태하는 외간―.

“태하, 전에 집에 와서 자고 간 적도 있잖아. 형도 알면서, 뭘.”

―그래도 걔는 알파잖아!

유성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전화를 받으며 걷는 한별을 따라 느리게 걷던 태하가 걸음을 멈췄다.

“그래, 당연한 거라니까.”

태하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한별은 단호했다.

“태하가 나 때문에 술 많이 마셨어. 나 대신 마셨다고. 그런데 혼자 보내? 이대로 그냥 두라고?”

―최한별.

“내가 같은 침대 쓰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내 방 빌려줄 거야. 나는 작업실에 들어가서 잘 거고.”

태하는 한별이 아끼는 친구고, 알파와 오메가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서로를 챙기는 다정한 사이기만 한데, 유성이 버럭 화를 내자 오히려 반발심이 들었다.

“내가 나 대신 고생한 친구한테 방도 못 빌려줘?”

―전에 자고 간 건 부모님도, 나도 다 있을 때야. 그리고 너희 형질 나뉘기도 전이었고.

“그놈의 형질……!”

한별은 이를 으득 물었다.

오메가이니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고 살았다.

알파 우월주의 사상이 많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오메가는 알파의 힘을 이길 수 없으니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절대 우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처럼 선이 그어졌다. 조금만 친해도 사람 사이의 기류를 핑크빛으로 여겼다.

한별은 자신이 오메가이길 바란 적 없었다. 특히나 우성 오메가이기를 바란 적은 더더욱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에 강제로 페로몬을 닫고 살았고, 억제제를 때에 맞춰 먹어 왔다.

태하가 자신들을 돕고 있다는 것도, 그 때문에 입학 전 구설수에 휘말렸어야 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유성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이 그러는 건 아니지.”

자신 때문에 고생한 태하조차 알파라는 이유로, 자신은 오메가라는 이유로 조심해야 한다면, 도대체 뭘 할 수가 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돕는 것도 못 해? 내가 지금 태하한테 돈을 빌려준다고 했어? 아니면, 보증을 서 준다고 하기를 했어? 지금 내가 태하랑 있는 게 형한테 뭐 문제가 생긴다고―!”

핸드폰을 꽉 쥔 한별의 손에 태하의 손이 올라왔다.

“……태하야.”

한별의 손이 풀리고, 태하의 손으로 핸드폰이 넘어갔다.

커다란 유성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알면서도 태하는 당연히 자신이 받아야 할 화를 받는 것인 양 차분하게 답했다.

“죄송해요, 형. 저, 자고 가진 않습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제가 취기가 조금 돌아서 한별이가 걱정해서 그래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아무리 몇 번 보았다 하더라도 남에겐 소리칠 수 없는 모양인지 유성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네, 괜찮습니다. 한별이 집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어요. ……아뇨, 형.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당연하죠. 그럼요. 걱정하실 일 없을 거예요.”

전화하는 동안 태하의 눈빛이 많이 가라앉았다.

태하는 나쁜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꿈의 방향이 정해진 태하의 입장에선 선배나 다름없는 유성에게 밉보여선 안 됐다.

“제가 처신을 잘못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형. 지금 집 근처예요.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나쁜 소리를 감내하게 된 태하에게 너무도 미안해져서 한별은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술에 취하긴 했나 보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생각했다.

까맣게 변한 액정이 한별의 손에 올라왔다. 태하는 혹여 떨어질까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올려 주곤 웃으며 한별을 토닥였다.

“갈까?”

왜 화를 내지 않는 걸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알면서도 태하는 차분하게 한별을 달랬다.

한별은 환영회 자리에서도 분명히 알파인 윤수가 자신으로 인해 시끄러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별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윤수가 자신에게 관여하는 것에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걱정하시는 건 당연하게 생각해.”

취기가 많이 가신 모습이었다. 태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자고 갈 생각은 없었어.”

“……뭐?”

“앱으로 택시 부르면 되고, 갈 방법은 많으니까. 편의점 들러서 숙취 해소제만 좀 살 생각이었거든. 한별이 너도 술 마셨잖아.”

“…….”

“미안. 내가 확실하게 말할 걸 그랬어. 괜히 유성이 형한테 혼났다. 그치.”

자신을 달래는 태하의 웃음이 한별의 가슴에 묵직하게 남았다.

“한별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평소에도 표정의 변화가 극적이지 않은 한별이었다. 지금은 주변이 어두우니 더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태하는 당연하게도 한별의 표정을 읽고 조심스럽게 한별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조심성이 없는 거야?”

“술김에…… 라는 것도 있다고 봐. 평소라면 한별이 너도 날 쉽게 집에 들이진 않을 테니까. 엊그제도 어머니 계시니까 함께 가지 않았어?”

맞았다. 친구들도 집에 쉽게 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도 있었다. 유성이 데뷔하기 전부터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한별의 습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어머니, 연구하느라 바쁜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아버지, 어딜 가나 화제의 중심이 되는 엘리트인 형, 그리고 평범한 자신.

언제나 한별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들이었다. 사람들 틈에 지내면서도 온갖 계산을 해야 했다. 가족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오메가이기에 주변에 끼치게 될 상황까지 언제나 고려하며 살아왔다.

그 부담에 걸려 있던 리미트가 고작 알코올 몇 잔에 잠시 폭발했다.

“술, 먹지 말아야겠어.”

형은 분명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족으로서 걱정하는 것이니, 자신이 과하게 화를 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술이라는 게 이렇게 감정을 뒤죽박죽 섞어 버리는 거라면, 다신 마시고 싶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