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하지만 저 말인즉 정작 한별이 혼자 있을 땐 알파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역시 외모는 형질에 미친 듯이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한별은 그 생각에 상대에게 입을 열려다 태하가 선수를 치는 걸 듣곤 입을 다물었다.
“제가 오메가인데요.”
“……예?”
“그럼, 나가 주시겠어요?”
아, 지태하야……. 그건 좀 아니지. 저 사람 진짜 벙쪘잖아.
반쯤 멘탈이 날아간 사람에게 명함을 도로 돌려주며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은 태하가 볼을 긁적였다.
외모로 형질을 판단하는 건 사실 옛날 어르신들이나 하는 행동이긴 했다. 알파, 태하가 오자 한별이 오메가인가 싶어 확인하려는 이런 짓 따위 말이다.
물론 태하는 알파가 맞고, 한별 역시 오메가가 맞다. 하지만 두 사람이 친해진 계기는 애초에 형질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태하의 형질을 아는 사람들은 태하 주변의 사람들을 전부 오메가로 생각하며 인기가 많다는 둥, 그래서 누구랑 연애하냐는 둥 선을 넘는 발언을 종종 해 댔다.
“찬 음료 시키길 잘했네.”
너도 속에 열 좀 오르냐?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한별은 아이스티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좀 과하게 반응한 것 같지 않아?”
“음…….”
한별이 침울하게 나가던 남자를 떠올리며 이야기하자, 태하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대놓고 고개를 젓진 않지만 그 의견엔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왜?”
“그냥. 솔직히 이렇게 방이 나뉜 곳에 왔다는 건 프라이버시를 지켜 달라는 거고, 방해 받지 않고 싶다는 뜻이잖아.”
예의에 어긋나니까.
태하의 말에 한별은 순순히 수긍했다. 반응은 살짝 과했어도 태하의 행동에 크게 어긋남은 없었다. 물론 약간의 거짓은 섞였지만, 상대의 무례함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진 않았으니까.
이력서나 공적인 일에 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형질 속이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 기실 이상은 없었다.
태하가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입을 열었다.
“그거보다 우리 다른 얘기 해야지.”
한별이 그제야 마우스를 놓았다. 농담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일과 관련된 이야기할 땐 상대를 직접 보아야 했다.
“갑자기 너튜브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너튜브 하자는 거야. 큰 건 아니고.”
“큰 게 아니라니. 우리가 열어서 뭐 해. 거기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학과의 신입생 환영회가 타과에 비해 늦은 편이긴 했지만, 그건 현직에 있는 학생과 교수들이 있어 최대한 모일 수 있는 날짜를 맞추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기껏해야 2―3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입생이 카메라를 들고, 브이 로그랍시고 학과를 활보하는 것을 교수나 선배들이 좋게 볼 것 같진 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틱택톡 한답시고 학교에서 춤추는 애들 욕 미친 듯이 먹었잖아.”
“그건 다른 사람들 얼굴 가리지도 않고 그대로 내보냈으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우린 그러려는 게 아니라며 태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
“얼굴은 거의 안 나올 거야. 학교에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브이 로그 찍을 생각도 없고.”
“그럼 뭘 할 건데?”
“노래 올리자.”
……노래?
대학 생활 중에도 작업하다 보면 앨범도 낼 것이고, 학과에서 운영하는 너튜브 채널도 있으니 공연 영상 등이 올라갈 텐데…… 굳이?
태하의 말인즉 둘이 함께 작업하는 개인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자는 거였다. 채널 홍보가 쉬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한별의 표정에 태하가 미소 지었다.
“우리 이름값 안 써먹는 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
“그리고 난 남들한테 뺏기기 전에 먼저 너랑 작업하고 싶거든.”
뭐? 뭘 뺏겨?
한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남에게 뺏긴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내가 무슨 물건이야?”
한별의 말에 태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며 손까지 흔들었다.
“미안,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널 물건 취급하거나 그런 게 아니고,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더 뼈저리게 느껴서 그래.”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뭘…….”
“한별이 네가 되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
“……?”
한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움직였다.
태하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내가 지금 굉장히 다급하다는 뜻이야.”
“태하, 네가 왜 다급해.”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너와의 거리감이 느껴져. 나는 모르는 것들을 한별이 너는 답을 내어놓잖아.”
“그거야…… 작곡하면서 조금 더 깊이 배워서 그렇지. 수업 듣다 보면 너도 다 알게 될 텐데.”
“단순히 전공이라서가 아냐. 한별이 넌 아직 어린데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능력이 많아. 수업을 다시 듣는 선배들도 놀라는 거 한두 번 본 게 아닌걸.”
한별은 에이,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닌데, 정말로. 주변에 다른 동기들만 보더라도 이미 엄청난 작업물들을 내어놓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렇지 않대도. 조금만 지나면 한별이 너랑 작업하고 싶다는 사람들 쏟아질 테니까, 먼저 선점하고 싶어.”
한별은 태하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잘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조금만 둘러봐도 대단한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선배도, 동기도 벌써 한별이 생각지도 못한 공연을 하고 있으니까.
천재들이 가득한 학과. 그것이 한별이 속한 학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한별의 말에 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한별아, 우리가 그런 학과에 들어왔기 때문에 특수한 것뿐이야.”
“그것도 맞지.”
음악적 조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포진한 곳이긴 하다. 아직 어린 한별이 현직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자만일지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나눠서 대단하고를 말하는 건 좀 그래. 이 바닥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예쁘게 봐주진 않잖아.”
하지만 앞으로 작·편곡으로 돈을 벌어먹고자 하는 한별로서는 당연히 그들과 자신을 비교해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능력을 더 쳐 주거나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존경을 표하는 세계가 아니니까.
곡이 어떤 가수의 앨범에 수록이 되었느냐, 어떤 가수의 타이틀곡에 참여하게 되었느냐, 혹은 언제 1위를 했느냐에 따라 이름값이 달라지는 곳이었다. 인맥만큼이나 그 못지않게 실력이 미친 듯이 중요한 정글 같은 곳이란 뜻이다.
한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태하가 한별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 네 실력이 대단하니까 안주하란 뜻이 아니야. 하지만, 더 잘하게 될 건 뻔하잖아.”
“뻔해……? 뭐가?”
“너무 당연한 얘기니까. 그러니 어지간하면 한별이 네가 너무 유명해지기 전에 같이 작업해서 일찍 발 걸치고 싶은걸.”
그런 욕심이면 뭐, 그럴 수 있다.
근데, 말이 조금 안 맞지 않나?
“그런데 그 너튜브 채널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너튜브를 꼭 성공을 위해서 할 필요는 없잖아?”
이건 또 무슨 논리지. 기왕 무언가를 하려면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잡는 게 낫지 않나?
태하가 뺨을 긁적였다.
“사실, 돈을 바라고 하려는 게 아니거든.”
“그래?”
“수익이나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부담 갖지 말자고 하는 거야. 기왕이면 소소하게.”
“소소……?”
네가 있는 상황에서 소소가 가능해?
한별이 중얼거리자, 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한별이 네가 같이하면 이미 실력 적인 면에서 소소한 건 글렀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건 그거야.”
“반대 아냐? 내 쪽은 그냥…….”
“아냐, 반대야. 잠깐 사용해도 될까?”
태하가 노트북을 가리켰다. 잠시 사용해도 되냐는 손짓에 한별이 노트북을 돌려 태하에게 내밀었다.
노트북을 앞에 둔 태하가 너튜브 창을 켰다. 그가 재생한 동영상 속, 여자가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지. 나의 너는 내가 사랑할 것과 네가 떠나갈 것을―.]
익숙한 노래였다. 오래된 곡도 아니고 이번 주에 나온 음원 차트 1위 한 밴드 곡이었다.
“노래 커버 영상?”
“우리 둘이 같이하기엔 최적이잖아. 나도 너도 포트폴리오로 사용하기도 좋고.”
……그러네?
아이돌 연습생이었다고는 하지만, 태하는 학과에 보컬 전공으로 들어올 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편에 속했다.
그리고 한별은 사실 작곡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학원 수업을 들을 때도 작곡만 하지 않았다. 오래 배운 만큼 편곡도 자신 있고, 무엇보다 기성곡을 편곡해 보는 것도 실력을 쌓는 데엔 좋았다.
“그냥 음원을 쓰는 건 딱히 원하지 않거든. 그리고, 커버만 하는 게 아니라 한별이 네 개인 곡도 업로드 하는 거야. 물론, 부르는 건 내가 하고 싶어.”
음원 등록이야 음원 등록과 유통을 해 주는 회사를 찾으면 된다. 꼭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생 생활을 할 필요도 없었다.
“너, 이거 언제부터 생각했었어?”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 이야기 들으면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 인디에서 음악 하는 선배님들도 많이 오셨잖아.”
어째 선배들이 주시는 잔을 하나도 거르지 않더라니. 자신은 정신이 없어 인사하는 데만 해도 진이 빠졌는데. 태하, 너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연습생 그만두고 많이 생각해 봤어. 요즘 연예계 성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이돌처럼 느껴지잖아.”
그렇긴 하지.
한별은 태하가 하는 말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브리핑처럼 느껴졌다. 나와 꼭 같이해 줬으면 해, 하고 영업하는 느낌이라 더더욱 신기했다.
그만큼 태하가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실 취미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수익이 난다는 확신도 없고, 작업한 영상물들이 다른 곳에 넣을 만한 포트폴리오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 작업을 더 해야 하는 상황인 거지.”
한별의 말에 태하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한별이 너한테 부담이 되는 일이라는 건 알아. 그래도 한다면 너랑 같이하고 싶다는 게 내 욕심이고. 그래도…… 나랑 같이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