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태하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하지만 고민할 것은 없었다. 일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더 많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한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응.”
그러자 태하가 환하게 웃었다.
무슨 고백 성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어?
한별은 어째서인지 머쓱해졌다.
* * *
“그래서, 한별아?”
“어.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렇고, 태하 너한테도 굉장히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거지.”
“그래?”
한별은 너튜브 채널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후, 작업량을 늘리고자 했다.
“어차피 전공 수업 같은 경우엔 결과물이 세상에 나오면 점수가 높긴 높잖아.”
“그렇지.”
“그럼 영상을 올리는 걸로도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게 바로 일석이조 효과였다.
이미 나온 곡을 태하에게 맞게 편곡한다든가, 태하의 가이드로 완성되었던 곡을 재작업해 음원으로 나오게끔 하겠다는 목표가 잡히니 그간 과제라고 생각해서 막막했던 것보다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물론, 학과 학기 말 공연에 올릴 곡도 작업해야 했다. 하지만 기성곡을 연습해 Weekly 준비도 참여해야 하는 타 전공과는 달리, 작곡 전공은 자신의 곡을 준비해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작업이 늘었으니 절대 여유가 아니지, 한별아.”
“……그래도 난 너처럼 매주 곡을 준비하진 않잖아.”
“그래서, 곡도 매주 뽑아내게?”
“…….”
뭐가 잘못됐지? 작곡가도 몸을 갈면 하루에도 뽑지 않나?
한별이 눈을 굴리자, 다정하게 웃던 태하가 한별을 연습실에 가뒀다.
“아, 태하야!”
“수업, 두 시간 뒤지? 지금 좀 자 두자.”
“아니, 아…….”
작업량을 늘리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챈 태하에게 노트북을 빼앗겼다.
한별의 첫 곡 가이드는 태하가 했다. 발매할 첫 곡도 자신이 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한별 역시 트렌드에 따라 판매할 이지 리스닝 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하에게 가장 잘 맞는 곡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난 것이다.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다. 너튜브 채널에 올릴 곡의 편곡도 진행해야 했다.
‘작업할 거 많아서 신났는데…….’
작업물이 자신의 노트북과 컴퓨터에만 남거나, 회사에 보내기 위해서 비밀 유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별은 신이 난 상태였다.
키보드 하나 놓인 작은 연습실에 갇힌 한별이 슬쩍 키보드 덮개를 열자, 문밖에 있던 태하가 웃으며 지켜보았다.
“…….”
키보드도 안 돼?
……그럼, 핸드폰은?
한별의 손이 바지 주머니로 향하자 태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 진짜 너무하네. 결국, 한별은 키보드를 닫고 그 위에 엎어졌다.
그런데 잠이 안 왔다. 연습실 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개중엔 선배도 있었고, 동기도 있었다.
태하는 한별이 들어간 맞은편 연습실에 들어가 너튜브에 처음 올릴 곡을 듣고 있는 듯 이어폰을 낀 채였다.
혹시나 한별이 연습할까 싶어 한쪽 이어폰은 착용하지 않은 채였다. 낌새가 느껴지면 곧장 쳐들어오겠단 듯이.
“하…….”
엄청 철저하네.
한별은 멍한 눈으로 맞은편 연습실, 키보드 앞에 앉은 태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그림이다.’
태하는 그간 건반 연습을 죽어라 하더니 이젠 키보드도 곧잘 쳤다. 악보 하나를 통으로 외워 버린 듯 태하가 키보드를 꾹꾹 누르며 입을 벌렸다.
노랫소리가 들리질 않네.
느리게 끔뻑이던 한별의 눈이 곧 닫혔다. 잠이 부족하긴 했나 보다.
조금씩 몸에 들어간 힘이 천천히 풀리는 걸 느끼던 그때, 한별의 귀에 목소리가 하나 꽂혔다.
“딱 봐도 보이잖아. 정윤수 선배, 그 사이에서 잘 못 어울리는 거.”
……정윤수? 윤수 형?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한별이 눈을 번쩍 떴다.
“맞지? 혼자만 학교 다니고, 나머지는 아니잖아. 같이 들어올 수 있었는데 들어온 사람도 없고.”
“에이, 설마.”
“나만 그렇게 본 거 아냐. 인터넷에 꽤 유명해. 다른 멤버 넷은 회사에서 작업하고 혼자만 학교 다니는 거 때문에 은근히 말 많아.”
저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창조 논란인가. 한별이 핸드폰을 들었다.
채널(Cha.N)의 왕따설.
채널(Cha.N)은 곧 지금 소속사와 계약이 종료된다. 여기서 어긋나면 레이블 설립은 다시 불투명해질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대기업 투자 받아서 들어가는 거 아니었냐고! 그룹이 가진 이미지에 따라 순식간에 철회될 수 있는 것이 대기업 투자였다.
한별이 핸드폰을 보고 있자, 태하가 귀신같이 연습실을 건너왔다.
“한별아? 좀 자 둬야…….”
“태하야, 잠깐만.”
심각한 한별의 표정에 태하가 말없이 옆자리에 앉았다. 한별은 태하에게 조금 전 제가 들은 이야기를 늘어놨다.
“……왕따설?”
“응. 사실 말도 안 되는 건데, 학교에서 말이 나올 정도니까.”
“누가 그랬는데?”
“방금 지나가면서 하는 얘기 들었어.”
사실 은근히 오래된 이야기였다.
채널(Cha.N) 멤버들은 예능에 나와서도 한두 마디 이상 건져갈 정도로 치고 빠지는 게 빨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사람이 윤수와 예찬이었다. 두 사람 다 말수가 없는 편인데, 윤수는 느긋하게 지내는 편이고 예찬은 기민하게 눈치를 보는 편이었다. 조용해도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덕분에 자체 콘텐츠 영상에서도 윤수는 분량이 적었고, 예찬은 한 번씩 막내의 하극상 콘셉트로 분량을 확보하는 편이었다.
“솔직히 윤수 형, 엄청 조용한 편인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랑 딱히 척지는 편은 아닌데.”
“응……?”
태하가 의문이라는 듯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한별은 계속해서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작은 화면으로 이것저것 찾는 것을 본 태하가 숨겼던 노트북을 내밀었다.
“여기.”
노트북을 넘겨받은 한별이 이것저것 눌러 인터넷 포털을 열었다. 메인 화면에 가장 크게 노출된 기사 헤드라인을 확인한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뉴스도 올라왔는데?”
“그러게…….”
―당근을 흔들었나? 채널(Cha.N) 윤수 ‘나는 괜찮습니다’
“하여튼, 요즘 인터넷 뉴스는 하나같이 찌라시라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한별이 열 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억까도 이 정도면 오지게 억까다.
채널(Cha.N)의 유버스 게시글에 올라온 윤수의 글들을 잔뜩 모아 놓고서는 윤수의 게시글이 너무 차분하다며 왕따설을 부추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갓 데뷔했을 때에도 이렇게 멤버 간의 불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며, 어차피 채널(Cha.N)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짧은 기간 팬들에게 간택되어 비즈니스로 모인 그룹’이라 얼마 안 가서 전부 찢어질 것이라는 말도 언급했다.
이건 안티들 사이에서도 간혹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융수도물이다 @ysismool
내 새끼 머리채좀 그만 끌고와
ㅅㅂ 내 새끼가 뭘 했다고
소위 비즈니스무새라 불리는 이들이 항상 조용한 윤수를 이유로 드는 경우가 많았기에 윤수의 개인 팬들이 하는 말은 항상 같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우리 윤수 억까의 이유로 삼지 마라
정말 큰 문제는 채널(Cha.N) 내에선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스케줄을 함께 다닌 한별이 확실히 본 상황이니 자부할 수 있었다. 서로 댓글로 장난도 주고받는 걸 겉으로 드러내는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윤수는 원래 그런 행동이 적은 편일 뿐이었다.
소위 아이돌이 되려면 최소 180도 이상 정신이 돌아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저 윤수는 멤버들 사이에서도 조금 덜 돌았을 뿐이지…….
‘솔직히 우리 중에 가장 특이한 게 네 형이긴 한데, 미친 걸로 따지면 윤수일지도 몰라.’
‘왜요?’
‘윤수 베이스 전공인 거 알아? 일렉베이스.’
‘……?!’
‘그룹에선 윤수가 랩을 하지만, 노래도 곧잘 해. 근데 보컬 전공으로 들어간 건 아니고, 지금 현직이라 특별 전형으로 들어간 것도 아냐. 입학하고 보면 알겠지만, 윤수 걔 원래 악기 다루던 애야. 시험도 베이스로 들어갔어. 교수들이 아직도 붙잡고 빌잖아. 제발 베이스 해 달라고.’
‘어…….’
‘대학은 자기가 배우고 싶은 거 깊게 배우려고 들어간 거고, 하고 싶은 건 무대 위에서 지금처럼 움직이는 거라고 하더라.’
베이스를 다룰 줄 알아서 채널(Cha.N) 데뷔 이전 소속사에서 세현과 함께 데뷔시키려 했을 때도 밴드 연주와 댄스가 둘 다 가능한 그룹으로 구성했었다나.
그룹에 무슨 천재만 갖다 모았나. 이쯤 되면 당시 멤버를 구성한 팬들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운도 좋았던 것이 이 다섯 명으로 확정될 수 있었던 건 선두를 꽉 쥐고 있던 출연자 한 명이 과거사로 마지막 방송 직전 하차한 덕이기도 했다.
어쨌든 윤수는 겉으로 티가 안 날 뿐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 아니, 360도도 아니고 최소 720도는 돌아서 아이돌이 되었다는 걸 팬들이 모를 뿐이었다. 한쪽으로만 여러 번 돌면 본인은 돌아 있어도 겉으론 멀쩡해 보인다나.
‘그래도 팬들이 다섯 명 중에 가장 멀쩡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던데요. 말도 적고.’
‘한별아. 형이 진짜 솔직히 말해 줄게.’
‘……?’
‘연습생이라든가 연예계 생활하면서 멀쩡하고 순수한 생각을 계속 유지하는 사람, 없어. 어디 하나 나사 빠져야 가능하지.’
‘…….’
‘애들 지하실에 몰아넣고 데뷔 전까지 경쟁시키면서 죽어라 실력 키우게 하는 거, 프로그램 안에 또래들 가둬 놓고 온갖 악편으로 멘탈 터뜨리고 데뷔시키는 거, 솔직히 멘탈 제대로 잡지 못하거나 기가 세지 않으면 못 버텨. 항상 착하고 순하게? 그런 사람들은 1년도 못 버티고 회사 탈출했거나 벌써 사기당해서 은퇴했을걸.’
그러니 순하다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룹의 리더인 단영이 쓰게 웃으며 한별에게 전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