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태하도 멘탈이 좋겠지.’
한별은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는 녹음에도 지치지 않고 여전히 노래에 집중하는 태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태하 덕분이었다. 형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이 꼬여 있어 당장 멘탈이 나가 버릴 것 같을 때도 태하는 곁에서 잠자코 한별의 이야기를 들어 줬다.
간혹 형에 필적하는 잔소리를 하긴 해도 성격이 침착해, 한별이 주변에 조금 휘말릴 때마다 늘 중심을 잡아 주었다.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생각이 번뜩인단 말이지.’
천재는 특이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지, 너튜브 준비를 하는 내내 신기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태하가 녹음하는 노래만 해도 그랬다. 한별의 손이 닿았지만 태하의 의견이 가장 많이 들어간 편곡이었고, 아주 재치 있는 아이디어였다.
“진짜 신기하게 편곡했네.”
“그런가요?”
한별의 말에 기기를 만지던 실습 조교가 작게 끄덕였다.
“이거, 어쿠스틱 편곡은 되게 많이 봤어. 작년 인기곡이라 커버 영상 엄청 올라왔잖아.”
“네. 많이들 아는 노래라서 이걸로 정하긴 했는데…….”
“그런데 오리엔탈 풍으로 힘줘서 편곡한 버전은 어디서도 못 봤다.”
실력 좋네.
약간의 칭찬에 한별이 조금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빡세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한별은 녹음실 안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태하를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는 곡으로 선정해서 다행이었다. 물론, 인기 보이 그룹의 해맑은 사랑 고백이 조선 도령의 아련한 마지막 고백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쭉 들어 볼까?”
“부탁해.”
목이 마른 건지 목을 매만지면서도 태하는 혹여 기계에 조금이라도 물이 묻을까 물병을 챙기지 않았다.
태하의 목 상태가 못내 신경 쓰인 한별은 토크백 버튼을 눌러 태하에게 말했다.
“잠깐 쉬었다가 하자. 물 좀 마시고.”
“응.”
헤드셋을 벗고 나오는 태하의 모습에 한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기계를 만지는 실습 조교에게 슬쩍 입을 열었다.
“조교님. 혹시 저희 뒤에 누가 녹음실 쓰나요?”
“아니, 아직. 왜?”
설마 하는 조교의 표정에 한별이 작게 미소 지었다. 조교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 쟤 나온 김에 간식 사 와라. 먹고 하자.”
“옙. 감사합니다.”
“노래는 이따 들어 보는 걸로 하고. 지태하, 너도 쟤랑 나가서 떡볶이든 뭐든 사 와. 들어오기 전에 녹음실 사용표에 시간 바꿔 놓고.”
조교가 개인 카드를 꺼내자, 태하가 자신이 사 오겠다며 한별과 녹음실을 나섰다.
“우리 세 시간 연속은 좀 힘드셨겠지?”
“아무래도?”
“조금만 수정하면 될 것 같아. 여러 번 녹음하는 것보다 오늘 내로 끝내는 게 나을 거야. 근데 조교님, 손 떠시더라.”
비흡연자인 두 사람이야 괜찮지만 조교의 손은 아까부터 떨리고 있긴 했다.
“한별아. 잠은 자?”
“당연히…….”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거 보니 제대로 안 자는구나.”
“……그래도 나름 자.”
“수면 시간 네 시간 이내는 안 쳐 줘.”
“…….”
한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변명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잔소리해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하는 꾸준했다. 한별이 눈을 굴리며 입술을 꾹꾹 깨무는 모습에 태하는 얼굴을 풀곤 다시 입을 열었다.
“섬네일은 생각해 봤어?”
“섬네일?”
얼굴 안 보이게 찍을 거라면서? 근데, 섬네일이 필요해? 한별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자, 떡볶이를 주문하며 카드를 내밀던 태하가 빙긋 웃었다.
태하는 처음부터 얼굴 공개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잘 보이지 않도록 약간 옆으로 돌린 뒷모습을 영상으로 찍을 거라고.
이미 그렇게 결정한 상황인데, 여기서 왜 의견을 묻지?
태하가 그 의문에 답하듯 입술을 열었다.
“영상은 나만 나와도, 편곡한 한별이 너도 섬네일엔 보여야지.”
“아…… 내 얼굴?”
“얼굴을 보이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너도 같이 나와야 하니까.”
“음……. 어떤 식으로?”
잠시 고민하던 태하가 포장된 떡볶이를 들었다.
“한별아.”
“응?”
“너, 한복 있어?”
“한복?”
갑자기?
“응.”
“집에 찾아보면…… 아마?”
“그럼 됐어.”
뭐야, 동양풍 편곡했다고 진짜 한복 입을 거야?
* * *
……진짜 입는구나.
한별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앞에 신중한 얼굴로 한복을 갖다 대는 태하의 모습에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
“이쪽이 나아 보이지 않아요?”
“음, 그러게…….”
“한별이 피부가 밝은 편이라 어두운 것도 꽤 잘 어울리고요.”
“한별이 피부는 쿨 톤이 맞는 것 같지? 푸른 계열이 잘 받네.”
“그렇죠?”
“왜 저래. 왜 둘이 짝짜꿍이 맞아 가지고는…….”
한별이 어이가 없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어 냈다. 눈앞에 선 두 사람, 유성과 태하가 여러 벌의 한복을 들고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나는 대충 뒷모습만 찍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그 사진 하나 남는 건데, 잘 입으면 좋지.”
옷을 가져온 유성의 말이었다.
인터넷이라든가 주변에 있는 한복 전문점에서 대충 대여할 줄 알았는데,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게 흘렀다.
“아니, 형. 요즘 스케줄 없어?”
“응.”
“하…….”
당당하지 마. 당당하지 말라고. 아이돌이 스케줄 없는 게 그렇게 당당할 일이야?
아무렇지 않게 태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컨셉대로면 너희 둘 다 상반신만 나올 거니까, 이쪽이 괜찮을 것 같아.”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유성이 가져온 것은 채널(Cha.N)의 무대 의상으로 사용했던 의상들이었다. 아이돌이라면 한 번씩 거쳐 가는 퓨전 한복 의상인데, 전부 가져온 건 아니고 상의만 가져왔다.
태하와 한별 둘 다 뒷모습, 상체만 찍을 예정이니 하의는 아예 안 챙겼다는 유성의 말에 꾸벅 인사하던 태하였다.
“이거로 입자.”
생각보다 화려한 의상에 한별의 눈이 떨렸다.
“태하는 검은색이잖아.”
“얘는 영상에 계속 나오니까 차분하게 가도 되지만, 한별이 넌 섬네일에만 나오기로 했으니까 화려하게 가야지.”
“그게 무슨 논리야? 지태하, 넌 진지하게 끄덕이지 마라.”
“푸른색이라 한별이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예쁘잖아.”
태하가 순하게 웃었다. 한별의 타박이 전혀 통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차피 녹음은 끝난 상태였다. 아무리 립싱크로 녹화하더라도 촬영은 날을 잡아 각 잡고 해야 하니 MT를 다녀온 이후로 하기로 했다.
퓨전 한복도 한복이라고 품이 넉넉해서 옷은 잘 맞았다. 실은 여유 있게 제작해 후배 그룹까지 리폼 한 후 돌려 입기를 시키려던 소속사의 계획 때문이었지만, 채널(Cha.N) 외 다른 그룹은 이 옷을 입을 만한 그룹이 없었다.
멤버 중에선 세현과 예찬이 작은 편이지만 둘 다 170센티미터 중반, 후반대 키를 가지고 있었다. 남은 멤버는 180센티미터가 가뿐히 넘었다. 그중 윤수는 사람들이 우성 알파를 찾으라 하면 사람들이 바로 가리킬 수 있을 정도였다.
사이즈가 완전히 다른 데다 그 이후로 데뷔한 그룹은 상대적으로 작아, 채널(Cha.N)만큼의 핏이 나오질 않으니 입힐 수가 없었다.
“누가 입었던 건데?”
“세현이. 예찬인 푸른 계열이 잘 안 받아서.”
한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영상에서 주인공이 될 태하보다 자신이 더 눈에 띄게 생겼다. 작업실 컴퓨터 앞에 앉은 한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근데 이렇게 막 가져와도 되는 거야?”
“창고에 내내 처박혀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
“그 뜻이 아니고요…….”
“이거 어차피 우리가 샀어. 괜찮으니까 가져온 거야. 멤버들도 입어도 된다고 했는데.”
아니. 그니까, 그게 괜찮냐고.
한별의 표정에 유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너튜브에 본명 쓸 것도 아닌데, 채널이랑 연관 있는 거 보일 필요가 있을까?”
“눈치 못 챌걸?”
“옷이 같은데?”
“이거 하나로 알아챌 리가. 그냥 따라 입었나 정도지. 코스프레 같은 걸로 생각하기도 좋고.”
한별은 윤수가 입었다던 옷을 걸친 태하를 바라보았다.
하긴, 겹치는 건 옷뿐이다. 같은 액세서리를 한 것도 아니고,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을 맞추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우린 여기에 장포까지 걸쳐 입었었어. 괜찮아.”
“……그런가?”
“응. 두 사람 다 하나만 입고 찍을 거 아냐?”
그러면 알아채는 사람 적어지겠네.
한별이 포기한 듯 끄덕이자, 유성이 뿌듯한 얼굴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는 어떤 걸로 하기로 했어?”
“핸드폰.”
한별의 즉답에 유성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아니, 핸드폰은 너무했지!”
“형. 요즘 핸드폰 4k로 찍혀.”
“4k로 찍어도 핸드폰이랑 카메라는 품질이 달라.”
“……?”
품질이 달라? 같은 4k면 똑같은 거 아냐?
한별의 표정을 읽은 태하가 다가와 한별에게 옷을 내밀었다.
“일단 한번 입어 보자.”
“어? 응.”
한별이 주섬주섬 옷을 걸쳐 보자 유성이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작업실 불을 좀 더 밝게 할 걸 그랬다.”
“집중하기엔 조금 어두운 게 나아.”
“녹음실들은 왜 다들 이렇게 어둡게 하는 건지…….”
화면에 집중해야 하니 당연하지.
한별이 옷을 입고 자리에 앉자, 태하가 이리저리 바라보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뒷모습만 한다며?”
“이건 테스트. 섬네일용은 나 찍는 날 찍을 거야. 입은 김에 보여 주려고.”
뭘 보여 줘?
한별이 고개를 움직이자, 태하가 핸드폰을 돌려 보였다.
“카메라에 비해서 핸드폰으로 찍으면 노이즈가 아주 제대로 생기거든.”
“그래?”
“응. 핸드폰 8k로 찍고 4k로 줄여도 노이즈는 그대로야. 자글자글해지니까, 기왕이면 카메라가 훨씬 나아.”
“근데, 우린 카메라가 없잖아.”
한별이 태하와 대화하는 것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하던 유성이 눈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