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 *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나 MT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한별은 누구보다 빠르게 차에서 내려 숨을 들이켰다.
나, 지금 살아 있냐.
한별이 주저앉아 차마 터뜨리지 못한 말을 중얼거릴 무렵 뒤따라 내린 태하가 한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계속 숙이고 있으면 속 더 안 좋아. 힘들겠지만, 고개 들자. 응?”
“응…….”
다가와 가볍게 등을 두드리려던 윤수가 손을 내리는 것을 보았지만, 한별은 태하에게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등을 두드렸다간 진짜 일 터질지도 모른다.
“괜찮아?”
“어…….”
한별의 한쪽엔 태하가, 한쪽엔 윤수가 섰다.
양옆에 알파 끼고 다니는 심정, 참 묘하네.
삽시간에 시선이 집중됐다. 윤수는 인기 아이돌이고 태하는 학과 내 화제의 인물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윤수 형. 스케줄 없었어요?”
“아직 비시즌이라 MT는 올 수 있어. 저녁에 매니저 형 오면 출발하면 돼.”
“그래도 준비 기간 있지 않아요? 한창 바쁠 텐데.”
예정된 솔로 활동이 곧 시작이었다. 한별이 올해 초에 보았던 활동 계획을 떠올리며 이야기하자, 윤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여태 MT 와 본 적 없거든.”
여태 안 오시다가 이번엔 왜 오신 거지…….
한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올해가 마지막인 사람이었다. 이럴 때 오지 않으면 대학 MT는 평생 경험해 볼 수 없을 테니 이해는 가지만, 왜 하필 자신이 있을 때인 것인가. 작년도 있고 재작년도 있었을 텐데.
뭐, 한별로선 기꺼운 일이긴 했다. 말도 안 되는 왕따설이 불거진 상황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거니까.
한별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다른 건 자신만 잘 처신하면 되겠지.
“어차피 다들 부어라 마셔라 하고 나면 여기저기 섞여서 잘 거 아는데, 어지간하면 다들 조심해.”
모인 학생들에게 학회장이라는 4학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이미 작품 활동하는 선후배, 동기들 있잖아. 아무리 우리끼리 쉬쉬한다고 해도 학과 밖으로 이야기 터지는 건 금방이야.”
대부분의 시선이 윤수에게 향했다.
학과 내 현직 아이돌 멤버 중 MT에 온 사람은 윤수뿐이었다. 그 외엔 스캔들이 있어도 작품 활동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뿐이어서 한별은 더욱 비장해졌다.
“그럼, 다들 좀 모일까? 방에 가져온 짐들 풀고 게임 좀 하자고. 조 짠 거 다들 알지?”
한별은 윤수와 같은 조였다.
‘후배 그리고 같은 조라는 이유로 적당한 친목질을 해 보자.’
한별의 머릿속에 이전에 확인한 글들이 가득 찼다.
제목: 딱 봐도 주동자는 메퉤오 아니냐
작성자: ㅇㅇ
걔 시선 싸늘한 거 원투데이도 아니고
카메라 돌 때랑 안 돌 때 가장 차이 나는 거 팬들도 다 암
지 머리 좋다고 멤버 무시 개쩜
댓글
메ㅌ오 머리 좋은 건 인정이지 근데 왜 아이돌하냐
└ ㅋㅋㅋㅋㅋㅋㅋ아 법조계가 잃은 아이돌이라시잖냐
걘 걍 지가 아이돌이라는 걸 자주 잊는 것 같음 엊굥 조용한 거 뻔히 알면서 분위기 주도하려는 거 좀 갖잖아
└ ㅇㅈㅇㅈ 지 머리 좋은 거 내세우는 거 좀 꼴받음 공부를 잘하는 거지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 않나 엊굥 학교에서도 ×나 조용하다는데 시끄러운 쉑들 사이에서 조용한 거 볼때마다 멤이 아파ㅠ
갖잖은 게 아니고 같잖은 거겠지.
한별은 머릿속에 남은 글들을 떠올리곤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유성이 따돌림을 주도한다는 헛소리들이 판을 치니, 더더욱 없애 주겠다.
* * *
한별은 본디 사람들에게 치대는 타입이 아니었다.
‘친구들을 사랑하자, 모르냐!’
‘몰라.’
‘뼐뼐. 제발 우리도 좀 예뻐해 줘.’
‘꺼져.’
단호한 한별의 말에도 키득대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형인 유성과도 잘 지내는 편이긴 했어도 다정한 말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사실 난감했다.
“사람은 어떻게 챙겨야 잘 챙기는 거지?”
사실 계약직 스태프 활동을 하면서 나름 말도 많이 나눴고, 과자도 많이 받았지만, 사람들에게 친한 사이라는 걸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너무 심하게 친해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한별의 형질을 알게 되었을 때 분명 문제가 된다. 제 노력이 물거품을 넘어 왜곡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한별아.”
“네, 형.”
“가자.”
“예!”
한별은 자신의 손을 잡고 달리는 윤수를 따라 급히 뛰었다. 주변 사람들이 크게 환호했다. 빠르게 달려 나간 한별은 윤수와 함께 앞서 나온 사람들의 뒤로 섰다.
“자, 그럼 처음 나온 학생은 기수와 전공 이야기하고 미션 이야기하세요!”
“3학년에 20기 드럼 전공 백차현입니다. 받은 미션은 조에서 신 거 잘 먹을 것 같은 사람!”
“악! 나 못 먹어!”
“억지로라도 먹어!”
엉망진창이었다. 텔레비전 예능이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나 나올 법한 미션 달리기를 MT에서 하고 있으니.
그리 크지 않은 잔디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미션 종이를 들고 자기 조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면 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물론, 같이 땀 흘리면 빠르게 친해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럼 4조. 정윤수 선배님은 미션이 어떤 건가요!”
“조에서 가장 노래 못할 것 같은 사람.”
“…….”
아니, 제발. 그런 꽝손 예능감은 자컨에서나 보이라고! 한별이 배신당한 듯한 표정으로 윤수를 바라보자, 앞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학과가 학과니만큼 음감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작곡 전공이나 악기 전공이라 해도 어느 정도의 노래 실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 그럼 나온 학생의 자기소개를 들어 봅시다.”
“안녕하십니까. 23기 작곡 전공 최한별입니다.”
한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호성이 터졌다. 가장 소리가 큰 것은 작곡 전공 선배들이었다.
“막내 잘한다!”
“우리 막내다!”
동기도 한별보다 나이가 많았고, 선배들 역시 스물에 들어온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다음은 보컬 전공에서 크게 소리가 터졌다. 자신이 부를 노래를 작곡하거나 편곡해 줄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냥 둘 순 없는 노릇이다.
대결하듯 소리가 커지자, MC를 보던 3학년 학생이 식은땀을 흘렸다.
“완전 인기쟁이네?”
“아닙니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소리가 크기 마련이었다.
같은 4조로 배정된 조원들은 전공 상관없이 크게 소리 지르는 걸로 봐선 상품으로 걸린 양주를 바라는 모양이다. 목이 찢어질 듯한 응원이 한별에겐 ‘상품 가져 와’로 들렸다.
“자, 억지로 노래 못 부르는 건 안 됩니다. 여기, 보컬 전공 많아요.”
진짜 불러야 하는구나. 한별의 눈이 동태눈이 되었다. 대체 뭘 불러야 하나……. 뭘 부르든 답이 없긴 할 텐데.
한숨을 내쉰 한별이 MC가 들고 있던 마이크를 들었다.
“어떤 노래?”
“채널의 Nice Night 부르겠습니다.”
“억!”
“정말?”
웃음이 더 크게 터졌다.
한별이 이야기한 곡은 채널(Cha.N)이 콘서트에서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 중 하나로, 그만큼 미친 듯이 신나는 곡이었다.
야간 축제 BGM으로 굉장히 자주 흘러나오는 탓에 어른들까지 후렴구를 따라 외친다는 곡이었다. 심지어 그 후렴구는 한별의 친형인 유성이 부르는 부분이었으니 모두가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외모는 많이 다르긴 하나 형제인 탓에 분위기가 비슷했고, 목소리 역시 한별이 상대적으로 조금 높을 뿐 거의 흡사했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볼 무렵, 마이크를 잡은 한별이 윤수에게 먼저 넘겼다.
노래방 기계에서 반주가 흘러나오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윤수였다.
“와!”
“가수다, 가수!”
가수지, 그럼.
아이돌이니까. 학과에선 베이스, 그룹에선 랩을 담당하지만 윤수는 [Pick, My Dol!]에서도 보컬 파트의 출연자들과 별 차이 없는 보컬 실력으로 떡상을 이뤄 낸 멤버였다.
[내 말을 제대로 들어 봐.
이상하게 들릴 거란 걸 알아.
하지만 난 네게 가지 말라 말하고 싶어.
Oh! 제발, 이토록 간절하게 원해.]
가사만 보면 사랑 이야기였다. 연차가 적당히 쌓이고 막내 라인의 멤버들이 성인이 되기 직전에 나온 프롬 파티 콘셉트의 청량 활발한 곡이었다.
모두가 아는 곡인지 앉아 있던 학생들이 어깨를 흔들었다. 포인트 안무도 쉽고, 대충 흔들어도 춤이 되니 신나던 와중이었다.
노래가 슬슬 절정에 이르러 유성이 부르는 후렴구 부분이 되자 윤수가 마이크를 한별에게 넘겼다.
“Oh, Nice! Nice Night―.”
단 한 구절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을 듣기도 전에 학과 학생들이 모여 있던 펜션이 초토화됐다. 학생들과 교수, 조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막거나 바닥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와! 진짜 말도 안 돼!”
후렴구는 음정이 높지 않았다. 음정보단 신남이 더 먼저인 노래라 앞부분은 소리만 치면 끝나는 구절이지만, 한별의 음치력은 노래를 순식간에 개그로 만들었다.
자신의 노래 실력을 이미 알고 있는 한별이기에 애써 평소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담담한 표정 탓에 사람들이 더 초토화되었다.
노래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증명은 끝났으니, MC를 맡은 학생이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원을 취소하곤 급히 다가왔다.
“흡, 큽, 한별, 푸흐, 후배님, 너 소리 못, 흐윽, 지르니?”
“예.”
한별은 소리를 크게 잘 지르지 못하는 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건지도 모르는데 노래라고 다를까.
화를 낼 때도 삑사리는 기본이요, 음정이 뭐가 맞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맞게 낸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주변이 뒤집히는 것을 보면 역시 생각과 다른 것이다.
“음이 몇 도는 내려가 있는데?”
“그런가요?”
“인정, 인정. 이건 진짜 인정이지. 와…… 4조 점수 추가! MC 권한으로 점수 추가로 넣겠습니다!”
노래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한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