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뭔가 할 일을 찾아 움직이려 하면 선배들이 먼저 움직여 일을 끝마쳤고, 필요한 물건을 찾을라치면 빨리 눈치챈 사람들이 물건을 건네줬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도대체 나한테 왜? 내가 뭐라고……? 한별은 흔들리는 눈을 애써 바로 했다.
“그만 싸우고 먹자고.”
“아, 얘랑 같이 안 먹는다고!”
“쟤 빼고 먹자~!”
“고기 다 익었네.”
“잘 먹겠습니다.”
방방 뛰는 4조 조장을 제외한 4, 5조의 조원들은 준비한 음식을 서로 나눴다.
저녁을 먹기 시작하자 당황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이 앞다투어 한별의 접시에 고기를 먼저 내밀거나 부대찌개를 담은 그릇을 가장 먼저 주는 게 아닌가.
한별의 자리가 가장 끄트머리인 것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고기를 집어 줄 이유도, 부대찌개 그릇을 먼저 받을 이유도 없었다.
‘막내 취급인가……?’
하지만 정작 태하는 선배들이 열심히 부려 먹고 있었다.
“태하야, 고추장 가지고 온 것 좀 꺼내다 줄래?”
“예, 알겠습니다.”
한별이 태하랑 같이 일어나려 하면 고기가 앞으로 왔다. 너 시킨 거 아니니까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가 확실히 보이니 더욱 애매했다.
대체 왜……?
한별의 눈이 떨리는 것을 본 선배와 동기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귀엽다.”
한별이 눈이 커졌다. 꾹 눌러 쓰고 있던 모자가 옆에 앉은 선배의 손에 잡혔다.
“아, 그…….”
“밥 먹을 땐 모자 벗어야지.”
그게 예의이긴 하지. 한별이 주춤거리며 모자를 벗자, 조원들이 귀여운 동생을 보듯 웃음을 짓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대체 뭘까?
한별의 표정을 보던 태하가 한별의 그릇 위에 구운 김치를 올려 주었다.
“고마워.”
태하는 무언가 아는 표정인데, 말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혼란해하는 걸 분명 아는 듯한데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얄미웠다.
한별은 태하를 흘끔 바라보다 포기하고 고기를 우물거렸다.
“……!”
와, 녹는다.
한별의 커진 눈에 태하가 슬쩍 소곤거렸다.
“그거, 소야.”
뭐? 돼지라며!
한별은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고기가 소라는 말에 입을 벌렸다.
“4조 조장 선배님이 방금 돼지 싫다고 하셨잖아. 장난치느라 돼지라고 한 거야.”
한별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굽는 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로 굽는 것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숯불에서 굽고 있기에 앞에 온 것은 학생들 앞에 놓인 건 까만 고기였기 때문이다.
“선배님들이 일부러 소고기 너한테 좀 몰아 주신 것 같네.”
“왜?”
“음…….”
귀여우니까?
태하가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한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짠데.”
“하…….”
한별이 고기를 우물거렸다.
대학 MT에 술이 빠질 리는 없었다. 4조는 오후 활동에서 우승한 상품으로 받은 양주를 서로의 잔에 따르며 5조를 향해 자랑을 했고, 5조는 한 잔만 달라며 슬쩍 고기를 더 구워 앞에 내밀었다.
‘난 어쩌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한별의 눈이 흔들렸다. 한별에게 술은 독이었다.
장난스레 태하에게 술 마실까? 하고 말한 적은 있지만, 사실 마시지 않았다.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신 이후론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MT가 아무리 마시고 토하고의 준말이래도 거절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저녁 시간을 여는 시작 주 한 잔 정도는 괜찮다 생각했지만, 이건 좀…….
역시 시작부터 양주는 좀 아니다. 한별이 마른 숨을 삼켰다.
“4조! 절대 5조한테 술 주지 않기!”
“아 왜!”
다른 조는 이미 술판이 벌어졌지만, 4조와 5조만 조금 늦어졌다.
장난치던 조장들 탓도 있었고, 대부분 고기나 굽던 다른 조에 비해 4조는 부대찌개와 같이 먹을 다른 반찬들까지 전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조는 4조의 양주를 탐내며 돕느라 늦었다.
“우린 ×팸이 있다, 이 말이야!”
“우린 소고기 주잖아!”
“양주 한 방울 정도는 줄 수 있다.”
“개 치사하네, 진짜.”
한별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건 까먹으신 것 같았다.
다른 선배들 역시 이미 신이 나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중이니 한별을 챙겨 줄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예뻐라 하시던 사람들은 어디에 가셨는지.
“우리 막내! 막내 술 받아야지~.”
저, 술 못 마시는데요.
신입생 환영회에 오지 않았던 선배인 것을 확인한 한별이 잔에 찬 양주를 바라보았다. 이걸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때, 태하가 슬쩍 테이블 아래로 한별을 툭 치며 잔을 들이밀었다.
“……?”
빈 잔이 한별의 저 혼자 태하의 빈 잔을 발견한 한별이 얼떨결에 앞에 선 선배가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이게 뭐 하는 거야? 한별이 바라보자 태하가 미소 지었다.
“후배님! 잔 받고 나중에 같이 위클리도 하고~ 학기 말 공연도 하고~ 연말 정기 공연도 하자고! 알았지? 나 3학년에 보컬 전공 이도한이야!”
“예, 예!”
“잘 부탁해! 우리 소중한 작곡 전공 후배님!”
짠!
한별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선배가 술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들자 그 틈을 노린 태하가 자신의 빈 잔을 한별의 잔과 바꿨다.
“뭐야, 막내 벌써 마셨어?”
프하하 웃던 선배가 다시 한별의 잔을 채우고 등을 팡팡 친 후 사라졌다.
“뭐야…….”
선배들이 대놓고 예뻐하고 챙기던 이유가 있었다. 막내라 편애하는 것은 아니었고, 좋은 재원을 자신의 팀에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태하였고, 알려 주지 않은 태하를 슬쩍 흘기는 한별이었다.
“술 대신 마셔 줄게.”
술 마시려고 내 옆에 앉았냐? 한별의 눈초리는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대신 마셔 주겠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태하는 눈치를 보다 한별의 술이 차는 족족 슬쩍 잔을 바꿨다.
몇몇 선배들은 태하의 행동을 이미 알아챈 듯했지만, 딱히 눈치를 주진 않았다. 분위기를 해치는 행동도 아니었고, 서로 신나는 상황에서 마시지 못한다며 거절해 분위기를 뚝 끊어 버리는 행동 자체가 사라졌으니 오히려 좋을 일이었다.
게다가 학생들 대부분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한별이 술 두 잔에 급격히 상태가 메롱 해진 걸 알고 있었다.
다만 MT에 참여한 모든 선배가 신입생 환영회에 참가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너그럽지도 않았다. 특히 경쟁률이 높은 학과인 만큼 여러 번 재수하거나 졸업을 제때 하지 못한, 소위 꼰대들도 여럿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약해서…….”
“뭐냐. 요즘 새끼들은 선배가 ×으로 보이나 봐. 약하다는 개소리를 하네. 선배가 주는데 제대로 마시지도 않고, 잔을 돌려? 1학년밖에 안 된 어린놈이 벌써 꼼수만 늘어 가지고.”
“제가 잘―.”
“씨×, 못 마시긴 뭘 못 마셔. 쇠도 씹어 처먹어도 삼킬 나이에. 어린 새끼가 건강 생각하는 척하고 있어.”
그만큼 겨우 몇 살 차이 난다고 신입생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자신을 과시하려 드는 선배도 많았다.
한별에게 병을 내미는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로만 따지면 학과 내 학생 중 가장 많은 나이였다.
한별은 이 선배를 잘 알았다.
대학 입학 전부터 이미 필드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온갖 방송의 백그라운드 연주 및 세션에 참여하는 데다 활동 때문에 수업과 과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여태 졸업하지 못한 14기 선배였다.
물론, 원래부터 잘 알았던 건 아니었다. 오늘 알았다. 술자리가 시작되자마자 내가 누군지 아냐며 우렁차게 떠벌려서.
한별로선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냥 아까처럼 멀찌감치 떨어진 데서 자랑질이나 계속했으면 좋으련만, 왜 제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가지고는.
‘학교를 이 정도로 오래 다닌 게 자랑은 아닌데.’
휴학이나 개인 사정으로 인한 문제 없이 학교에 다녔다면 19기인 윤수가 올해 초 졸업했어야 하니 14기라면 소위 말하는 고인물, 화석을 넘어 이미 석유가 된 지경인 학번이었다. 23기인 한별, 태하와는 거의 10년이 차이 나는 학번이었다.
“에이~ 선배님. 막내가 술에 약해요.”
“어른이 얘기하는 데 끼어들지 마라.”
5조의 조장이 슬쩍 도움을 주려 가까이 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작곡이라며? 필드 나가면 동료들이랑 술도 한잔 털고 말도, 섞고 해야 할 텐데, 빼긴 뭘 빼?”
“…….”
“저기 저, 아이돌 후배처럼 술 마시면 이미지 ×되는 것도 아니고.”
×되는데요.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고 건강의 문제였다. 한별은 단 두 잔 만에 겪었던 깨질 듯한 두통을 기억하고 있기에 더욱 식은땀이 흘렀다.
거센 항의도 무리였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에게 들이받는 건 가능하지만, 술을 진탕 마신 것이 분명한 사람을 들이받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시비의 시발점이 분명하고, 목격자가 많지만, 쌍방이 되는 즉시 혼자만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글프게도 유명인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제 행동에는 족쇄가 걸린 것이나 다름없다.
[바람 잘 날 없는 가족사 : 채널(Cha.N) 유성]
절대 안 된다. 연예인들 골머리 썩는 그 특집 기사에 형의 이름이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받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자, 마셔.”
“네.”
한별은 결국 잔을 받았다. 쓰러지더라도 받아 줄 사람은 사방에 많았다.
“잔이 작다?”
“…….”
“선―.”
“죄송합니다. 바꾸겠습니다.”
“어디서 앉아서 받아. 일어나.”
태하가 항의하려 했지만, 한별은 말을 가로챈 후 작은 술잔을 맥주잔으로 바꿔 들었다. 시끄러워지는 것보다 한 번에 끝내는 편이 나았다.
일어난 한별의 잔에 여러 주종이 섞였다. 그놈의 오후 게임으로 받은 술이 모조리 섞인 잔을 받았지만, 한별은 손을 빼지 않았다.
태하의 분위기가 험해지는 걸 눈치챈 한별은 태하의 손목을 꽉 쥐었다.
‘사고 치지 마. 난 괜찮으니까.’
사고 칠 생각 없다. 작은 불씨도 큰불처럼 포장되는 게 연예계고, 아무리 학생으로 만났어도 대부분 연예계 관련으로 나갈 이들이었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눈앞의 선배는 제법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별 역시 이름이나 자랑질을 듣고서 온갖 곡에 세션으로 참여한 사람임을 알았으니까.
“처음부터 안 뺐으면 얼마나 좋아. 그치?”
뒤를 맡긴다. 한별은 슬쩍 태하를 바라보았다. 사고 안 쳤으면 싶지만, 이미 제대로 사고 치고 말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래, 기왕이면 일 터진 뒤에 뒤엎어 주라. 이유 없이 뒤엎는 건 좀 그래. 그래야 수습도 되겠지.
한별은 잔을 부딪친 뒤 그대로 잔을 비웠다.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