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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아이돌 생활을 위해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53화 (53/78)

53화

한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을, 어디로 내려야 하지?’

몸을 힘겹게 돌려 손을 내리자 태하가 몸을 뒤척였다.

혹시나 깰까 싶어 더 조심스러워졌다. 조금 벌어진 틈으로 한별은 팔을 넣어 내릴 수 있었지만, 여전히 태하는 제 등을 둘러 안고 있었다. 단단한 두 팔로, 꽉.

“…….”

한별이 눈을 감았다. 태하에게서 옅게 느껴지는 향이 어떤 것인지 눈치챈 탓이었다.

한별은 단 한 번도 태하의 페로몬을 알아챈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말에 전학 온 태하는 형질을 발현하기 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한별이 먼저 오메가로 발현했고, 이후 태하가 발현했다.

알아채는 것이라면 한별이 먼저 알아챘어야 맞았지만, 오히려 페로몬에 예민한 태하만이 한별의 페로몬을 알고 있었다.

11살부터 20살이 된 지금까지, 거의 10년을 알고 지냈음에도 한 번도 알지 못했던 향이 한별에게 흘러왔다. 무서울 정도로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향이었다. 스쳐 지나면 좋은 향수라고 생각할 정도로 옅게 흘렀다.

“태하야.”

어떤 의미도 없이 흘러나오는 페로몬이었다. 무언가 의미를 담고 내는 페로몬이었다면 형질을 가진 모든 이들이 바로 반응했을지도 모르지만, 잠결에 무심코 나오는 향이니 오히려 태하의 몸 상태가 걱정이었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태하를 깨워야 했다. 자신을 품에 구속하고 있는 팔 때문이 아니었다. 어두운 방 안, 한별은 조심히 태하를 부르고 붙잡아 흔들었다.

“…….”

잠귀가 밝은 것인지 태하는 금세 눈을 떴다.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운 방 안이지만 자신을 깨운 이유를 확인하려는 듯 태하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아.”

태하가 팔을 급히 풀었다.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페로몬을 확인한 듯 다급하게 몸을 물린 태하가 몸을 일으켰다.

적은 양이지만 몸에서 흘러나온 페로몬을 없애려 옷을 살짝 털어 내던 태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별은 잠들긴 글렀다는 생각에 태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이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일단 나가자.”

한별이 이야기하자 어둑한 사이로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해 뜨려나 보다.”

4월 초의 새벽은 춥기만 했다. 소매가 긴 옷에 외투까지 걸쳤지만, 몸은 서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서늘한 날씨가 오히려 딱 좋았다. 생수를 들이켜고 테이블 한쪽에 있던 간식을 주워 우물거리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살짝 나아졌다.

한별은 자신의 손을 붙잡는 태하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

손에 올려진 숙취 해소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좋은 게 뻔히 보였나 보다. 한별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숙취 해소제를 들었다.

“약이랑 같이 먹어.”

“약?”

“응. 꼭 드셔야 한다는 선배들 때문에 여러 개 사 왔었잖아.”

“아…….”

한별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애초에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먹고 마실 것이 아니기에 챙길 생각도 없었다.

한별은 봉투를 뜯어 환약 같은 알갱이와 숙취 해소제를 동시에 삼켰다. 먹는다고 바로 나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플라세보 효과인지 속이 조금 괜찮다고 느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불편했지.”

사과를 올리는 건 태하였다. 간밤의 일로 무릎 꿇어야 하는 건 자신인데 태하가 먼저 꺼냈다.

눈을 끔뻑인 한별이 어? 하고 되묻자 태하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나도 몰랐어…….”

끌어안은 팔에 대한 사과였다. 차라리 담담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태하가 민망해하니 한별 역시 같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나, 오늘 처음 알았어.”

“어?”

“네 페로몬.”

“아…….”

나직한 한별의 말에 태하가 머쓱한 듯 끄덕였다. 얼마나 철저했던 건지 몇 년을 지내도록 알지 못했던 태하의 페로몬이었다.

괜히 꺼낸 말이었을까. 태하는 더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왜, 아니 왜.

성애적인 생각으로 누군가를 홀리기 위해 흘린 페로몬도 아니고 자는 동안 나온 일반적인 향에 가까운 페로몬이었는데.

물론 향수보다 향이 좋은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면 말을 꺼낸 게 더 민망해지는 상황이었다.

“라면이라도 좀 먹을까?”

해장엔 라면이지. 다행히 학과에서 미리 사 둔 컵라면들이 있었다.

한별은 애써 내용을 바꾸려 입을 열었다. 새벽이지만 출출한 것도 있고, 공기가 서늘하니 따뜻한 국물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와 산책하듯 주변을 걷는 사이 해가 뜨고 주위가 밝아졌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준비해도 나쁘지 않았다. 한별은 문득 자신이 입은 태하의 옷을 바라보았다.

“나, 옷 혹시―.”

“내가 챙겨 뒀어. 일단 물이랑 세제랑 해서 어느 정도 지워 두긴 했는데…….”

아, 그랬구나.

이것저것 묻어서 엉망이 된 모양인가 보다. 1박 2일이고 토요일에 일정이 끝나자마자 전부 해산할 예정이었기에 굳이 옷을 챙겨 오지 않은 건 한별의 잘못이 맞았다.

“입으려고 가져왔을 텐데, 미안.”

“아냐. 어차피 다들 그냥 자던데 뭘.”

“내가 세탁해서 줄게.”

태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는 여전히 발간 얼굴이었다. 괜히 저런 반응을 보이니 외려 한별로서는 태하의 체온이 더욱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은 한별이 큼큼, 기침하다 입을 열었다.

“어제 나 그렇게 된 후에 별일 없었어?”

애써 분위기를 바꾸고자 꺼낸 말이었는데, 분위기를 바꾸다 못해 완벽하게 가라앉게 만들었다.

시선을 돌리는 태하의 모습에 한별이 고개를 움직이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태하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딱히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어?”

“괜찮을 거야.”

뭔데, 너 뭐 했는데.

한별이 태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김치 있던데.”

“…….”

태하는 설명하지 않으려는 듯 계속 말을 돌렸다.

“……김치 볶아 올까?”

“아냐.”

볶아 왔다간 라면 다 불겠다.

태하가 전날의 이야기를 얼마나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확실해졌다. 한별은 궁금했으나 일단은 묻지 않기로 했다.

물론 언젠가 묻긴 하겠지만, 지금 묻기엔…….

“와…….”

라면 맛이 너무 좋았다.

한별은 얼큰한 국물을 마시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별은 면 위로 올라오는 김치 한 조각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먹어. 하나는 모자라지?”

“그런 것 같기도 해.”

자신도 나름 잘 먹는 편인데, 태하의 먹는 양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긴 한 터라 한별이 순순히 동의했다.

한별의 고갯짓에 몸을 일으킨 태하가 컵라면 하나를 더 뜯어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한별아. 집에 어떻게 돌아갈 거야?”

태하의 물음에 한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날은 컨디션이라도 멀쩡했지만, 지금 이 상태로 차에 올랐다간 100퍼센트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다.

심지어 단체로 움직이는 버스인데, 한별을 위해 흔들림을 줄이고 천천히 달려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한별아.”

“어…….”

“역으로 가서 기차 타고 서울로 가자.”

“어?”

같이?

한별의 표정에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금 버스 못 탈 것 같아.”

태하가 힘들다는 얼굴을 하며 눈초리를 내렸다. 그제야 한별은 지난 신입생 환영회에 태하가 비운 술잔을 떠올렸다.

그땐 그나마 하나둘 집으로 갔으니 마시다 말았지만, 어제는 심지어 MT라 같은 건물에서 잘 수 있으니 분명 더 많은 양을 마셨을 것이다.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드리고 따로 빠지자.”

게다가 같은 차에 어제 그 14기 선배가 함께 타게 되면 표정 관리가 힘들 것 같았다.

한별은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곤 눈을 깜빡였다.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하긴 글렀다. 피곤하긴 한데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푹 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저쪽 펜션에도 다들 널브러져 있어?”

“아, 저쪽은 교수님들이랑 조교님들, 몇몇 선배가 머물고 있어. 이쪽 건물이 더 크기도 하고, 바로 올라가면 되니까 일찍 취한 사람들 몰아 놨거든.”

“……? 일찍 취한 사람들을 몰아?”

혹시, 너도 취했어?

한별의 표정을 읽었는지 태하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 생각보다 술 안 세.”

“거짓말하지 마.”

너, 내 잔만 13잔 비웠잖아. 한별의 단호한 반응에 태하가 푸흐흐 웃었다.

“사실 교수님들한테 붙잡히긴 싫어서 대부분이 이쪽 건물로 피신했거든.”

그렇게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저 라면을 비웠다. 그릇에 올렸던 마지막 김치가 한별의 라면 위로 올라갔다.

먼저 컵라면을 비운 태하가 미소를 지으며 한별이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리 아프진 않았어?”

“아…….”

태하가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날 이야기하려 했지만 차마 하지 못한 대화였다. 겸허히 잔소리를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에 한별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무겁진 않았고?”

“전혀.”

“거짓말하지 마. 나도 꽤 무거운데.”

“진짜야. 그다지 무겁다는 생각 안 들었어.”

“땀 뻘뻘 흘려 놓고?”

“아무것도 안 들고 스쿼트 해도 그렇게 돼.”

정말이라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한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위험하잖아.”

“……미안.”

“그놈의 자존심.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꼭 자존심 때문은 아니야.”

볼을 긁적이던 태하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보여 주고 싶었어서 그래.”

“뭐를 보여 줘?”

“내가 이렇게 강하다?”

“그게 자존심이잖아.”

“음……. 그럼 내가 한별이랑 친하다?”

“나랑 너랑 친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은근히 많아. 그래서 좀 보여 주려고 한 거고.”

사유 참 싱겁기도 하다.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보여서 뭘 하려고. 느릿하게 대꾸한 한별이 컵라면을 들고 국물까지 비운 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사진이랑 영상 찍어 보려고 했는데, 무리겠네.”

“오늘은 쉬어야지. 내일 하자.”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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