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할 것도 없긴 한데, 방에 가기도 애매했다. 여전히 일어난 사람들은 없었다.
한별은 태하와 근처 산책이나 더 해 보기로 했다. MT의 마무리까지 학과 행사로 취급되니 먼저 출발하거나 가 버리는 건 애석하게도 안 될 일이었다.
“누구지?”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에 한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른 아침이라 연락할 사람이 없을 텐데?
이른 시간에 미안해. 걱정돼서 연락했어.
괜찮아? 일어나면 답장 부탁할게.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어제 상황에 대해 아는 듯 이야기하면서 저장되지 않은 번호. 옆에 있던 태하 역시 눈치챈 듯 한별의 액정을 빤히 응시했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윤수 선배님?”
“아마도.”
연락 올 사람은 너무도 뻔했다. 한별의 성격상 어제 일을 유성에게 말할 리 없고, 이미 기절했기 때문에 연락할 겨를도 없었다.
한별은 바로 또 한 번 이어지는 진동에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응.”
같이 걷던 태하가 걸음을 멈췄다. 한별 역시 핸드폰을 들어 귀에 갖다 댔다.
“네, 형.”
―방금 일어난 거야?
전화 너머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뇨.”
―혹시, 학교에서 벌써 일어나라고…….
“아, 아뇨. 그건 아니에요. 눈이 떠져서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벌써? 피곤하진 않아?
괜찮은데.
이미 라면도 다 먹어서 늦은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한별은 괜찮다고 말하며 다시 천천히 걸었다.
“괜찮아요. 태하랑 주변 산책 중이거든요.”
―……이 시간에?
“네.”
산책하는 데 시간이 있나?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지. 한별은 솔직하게 끄덕였다.
―……괜찮다니 다행이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겁다. 이런 용건이면 대충 메시지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사실은 이미 한 번 했던 이야기고 답변 아닌가?
한별은 흘러가는 통화 시간에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제가 혼내는 것도 아닌데 왜 윤수가 할 말을 찾는 건지 한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한별이 입을 열었다.
“형.”
―어?
“어제 일어난 일, 저희 형한텐 얘기 안 해 주셨으면 해요.”
―왜?
“학교 일인데 굳이 형한테까지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시비에 걸린 거잖아.
“괜찮아요.”
―이야기는 해야 대응이…….
“어차피 채널에서 콘서트 열어도 그 사람 있는 세션은 안 쓸 거 아닌가요?”
뻔했다. 유성에게까지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윤수의 선에서 막을 것이다.
어제 선배의 꼰대질에 가장 피해를 본 건 한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그간 보인 행실이 있으니, 그걸 확인한 이들은 분명 자신의 주위에 이야기를 흘리고도 남을 테다.
그 선배는 한별의 나이, 그리고 공모전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한 경력만을 보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수룩한 초짜로 생각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물론 이제 막 스물이 된, 학교에서의 일에 절절매고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는 순하고 고운 외모에 맞는 성격이었다면 그 행동에 당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별은 나름 그 나이에 비해 산전수전 다 겪은 터라 그런 꼰대 짓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냥 형 입장에서만 대응해 주세요.”
―어, 그래…….
곧, 전화가 끊겼다. 한별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알아챈 것인지 태하가 한별의 눈을 빤히 맞췄다.
“……너 설마.”
“대학도 학폭위가 열리나?”
“……그, 안 열릴걸?”
“아쉽네. 하긴, 성인들 상대로 학폭위도 좀 웃기긴 하다.”
한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옆에서 함께 걷던 태하가 어쩐지 머쓱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 * *
“왜 없지?”
“뭐 찾아?”
“어? 어…… 아냐. 뭐, 먼저 갔나 보네.”
한별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펜션을 정리한 후 학생들은 차례차례 버스에 올랐다.
미리 양해를 구한 한별과 태하는 차에 오르지 않았지만, 교수나 선배들에게 인사는 해야 했다. 인원을 체크해야 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한별과 태하 외에도 몇몇 학생이 따로 이동했다. 이미 일정상 전날 출발한 윤수 같은 케이스도 있었으니, 한별과 태하가 특이한 건 아니었다.
“저기……. 한, 한별아…….”
한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차에 오르려 준비하던 사람이 가까이 걸어왔다.
전날 옆자리에 앉았던 선배였다. 발개진 얼굴로 다가오는 선배에게 꾸벅 인사한 한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
2년 위 선배의 볼 위에 올라온 홍조와 떨리는 눈동자와 부끄러운 듯 손등을 긁는 모습이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 상황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번호 좀.”
그 바람은 무참히 깨졌다.
한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들어 번호를 많이 따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무시로 일관하거나 단박에 거절하면 되지만, 어쨌든 같은 학교 선배였다.
‘한별아. 대학 가서 연애도 해도 되고, 사랑도 해도 되고, 헤어져 봐도 되는데, CC만은 하지 마라. 캠퍼스 커플은 절대 안 돼. 특히 같은 학과는 절대 안 돼.’
여러 사람의 만류를 기억하는 만큼 절대 여지를 남겨선 안 된다.
“아, 번호요?”
어차피 학교 가면 또 만나게 될 예정이고, 한별은 앞으로 이 선배를 최소 2년간 봐야 했다.
학생들이 버스에 거의 다 올랐다.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한별은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아 제 번호 010-××××-××××입니다.”
한별이 번호를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악기 전공이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선배님. 저 지금 작업하는 것들이 많아서 이번 학기는 더 이상 추가 작업할 수가 없어요. 혹시, 다음 학기에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어, 어? 어…….”
최한별, 눈치 안드로메다행 작전이다.
* * *
이후, 버스가 떠났다. 한별은 태하와 가방을 챙겨 들고 역으로 향했다.
“괜찮아?”
“지금은…….”
기차를 타기로 한 건 좋은데, 가는 동안의 버스가 문제였다. 창문을 활짝 연 한별이 최대한 숨을 몰아쉬는 내내 태하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한별의 손목을 꾹 붙잡고 있었다.
“문제다, 진짜…….”
얼마 후, 버스에서 내린 한별은 한참 말을 하지 못하다 태하에게 포기하듯 입을 열었다.
“왜?”
“나 하나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너무 많아.”
“아니야.”
“……미안해서 그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데 차에만 오르면 사람들에게 폐가 됐다. 가평역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태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봉투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게다가 사실 한별은 MT에서의 목표가 있었다. 채널(Cha.N)에 관한 헛소문을 이번 MT에 최대한 줄이고 속 편하게 지내자는 목표가.
물론, 인터넷 내의 모든 커뮤니티에서 흘러나오는 헛소문을 한별의 힘만으로 막을 순 없지만, 적어도 학교 내에서 흘러나오는 건 최대한 막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엉뚱한 스캔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하와 진행해야 했고, 술을 마신 이후의 기억은 전혀 없다.
결국, 성과 없는 MT가 된 것이다.
“뜬금없이 번호나 따이고.”
“…….”
한별의 투덜거림에 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
“뭐? 나, 한 거 없어.”
엄청 많이 했는데. 태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별은 태하의 목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앉아서 쉬던 한별이 고개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태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웃는데?”
한별이 달싹이는 입 모양을 확인하려 했지만, 태하가 재빨리 입을 가렸다.
“괜찮을 거야. 어제 할 거 다 한 것 같아.”
“그래도…… 어제 거기서 그렇게 쓰러지는 바람에 상황도 애매해졌잖아. 보여 주기로라도 윤수 형 잔 채워 주면 좀 덜할까 했거든.”
“아, 그거…….”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시선을 돌렸던 태하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정윤수 선배님께 부탁했어. 한별이 너 위층에 눕혀 달라고.”
“어?”
“학교에까지 퍼진 내용 때문에 신경 쓴 거잖아. 그래서 일부러 말씀드렸어.”
오래는 아니었다. 태하는 한별에게 갈아입힐 옷만 들고 바로 올라갔으니, 같이 있던 시간은 기껏해야 2분가량이었다.
이후 윤수가 식당에 가지 않고 가 버린 것 역시 확실한 상황이니, 꼰대 선배의 만행이 아니더라도 윤수와 한별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다.
“아…….”
“낮에 게임 했던 것 때문에 안고 갈 수 있는 사람한테 부탁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친하니까 부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나이스 어시스트. 한별이 태하의 말에 그제야 환한 표정을 지었다.
“태하야.”
“응.”
“나 진짜 너 없으면 어쩔 뻔했냐…….”
태하가 푸흐흐,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는 듯 기뻐 보였지만, 한편으론 아쉬운 얼굴이었다.
“정말 나 믿고 지른 거야?”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나 쓰러진다고 그대로 뒀을 것 같진 않았어.”
“그래도 다음엔 술 그렇게 마시지 마. 위험해.”
태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한별에게 말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 알코올에 약해 머리가 아픈 것, 속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서 이번엔 쓰러졌다.
해마다 뉴스나 신문 기사로 대학 MT에서 벌어지는 사망 사고 따위가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태하는 순간 그 기사의 주인공이 한별이 될까 무서웠을 정도였다.
일반인이라면 굉장히 많이 마신 후 벌어졌을 일이었지만, 한별은 단 한 잔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면 한 잔이 아니지.”
“그렇긴 해.”
물론, 주종이 많이 섞였으니 벌어진 일이었다.
“나, 그래도 억지로 먹으면 한 병 정도는…….”
“안 돼.”
“……두 잔?”
“안 돼.”
태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한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4년 내내 태하와 붙어 있을 확률이 높으니, 이로써 어디서든 술 못 마실 것이 확실해졌다.
결국, 한별은 그냥 속 편하게 모든 잔을 태하에게 넘길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