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 *
이 사기극의 시작은 한별의 형질이 생각보다 빠르게 알려질 것 같다는 데서 시작됐다.
“저…….”
한별은 그 늦은 밤, 태하를 믿고 술을 마시자마자 기절했다. 태하는 윤수에게 한별을 부탁하며 꼰대 선배와 벌어질지도 모를 다툼을 원천 차단했다.
한별의 옷을 갈아입힌 건 태하지만,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본래 술을 마시고 늘어진 사람을 돕는 건 대부분이 그렇듯 관리직이었고, 한별과 윤수 그리고 태하를 따라 펜션 2층으로 올라와 한별의 환복을 도운 과대와 부과대가 있었다.
“혼자는 아무래도 힘들잖아.”
“아, 네. 감사합니다, 형.”
윤수는 태하를 포함한 세 사람이 한별의 옷을 갈아입히고, 이불에 얌전히 눕히는 것을 보고서야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태하가 꼰대 선배의 잔을 채우던 무렵, 기절한 한별을 보살핀 것은 과대였다.
그는 동기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얼떨결에 과대를 맡게 됐다. 원치 않은 자리라 하더라도 과대를 맡은 이상, 학생이 119에 실려 가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MT 도중 알코올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은 막겠다는 일념하에 그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며 1층과 2층을 계속 오갔다.
한별이 펜션 2층에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태하는 입술에 원치도 않는 기름칠을 하며 앞에 앉은 꼰대 선배의 멘탈을 탈탈 흔들었다.
어렵지 않았다. 벌어진 모든 상황은 그 선배가 한별에게 했듯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인한 사고’일 뿐이니까.
과대가 태하를 부른 건 그 직후였다.
밤 아홉 시. 하나둘 취하긴 했어도 쓰러진 사람은 여전히 한별 하나였다.
아니, 하필 한별이 쓰러진 걸 보았기에 학과 내 모두가 자신의 주량을 잘 조절했다는 것은 학과 임원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학생들끼리 마시라며 자리를 비웠던 조교와 교수들이 펜션 다른 동에 따로 자리를 차린 터라 그곳엔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싸늘한 낯을 하던 태하가 과대의 귀엣말에 다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일단, 창문은 열어 뒀어. 너 얘랑 옛날부터 친구라고 들어서.”
몸이 좋지 않거나, 취하거나, 쓰러지면 원치 않게 페로몬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일이니만큼 한별 역시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 수가 적다 하더라도 학과에 없다는 보장은 없었다. 강제적인 관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해도, 꼭 취기를 핑계로 일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기에 더더욱.
“감사해요, 형.”
“아냐. 난 이만 내려갈게. 친구 잘 챙겨.”
페로몬이 무조건 상대 형질에게 성감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이 짧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삼곤 하기에 갈무리하는 편이 좋았다.
역시, 한별을 먼저 신경 썼어야 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한별보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한별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지금 알려지는 것은 상황상 좋지 않았다.
과대는 성정상 한별의 형질을 소문내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남의 형질을 동의 없이 이야기하고 다니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
과대 역시 자신의 형질을 남에게 말하지 않은 만큼 확실했다. 하여, 태하는 자신이 더 신경 써서 막으면 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태하는 누군가가 한별의 페로몬 향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곧, 방 안 가득 태하의 페로몬이 찼다.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 페로몬에 먹히듯 감춰졌다.
물론, 한별을 향해 페로몬을 쏟은 건 아니었다. 한별에게 강제적으로 다가갈 마음은 죽어도 없었다.
“어……?”
학과 학생은 대부분 베타였다. 태하의 알파 페로몬이 가득한 방으로 들어왔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태연히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학생 중 딱 둘만 알파 페로몬을 확인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하나는 역시나 과대, 또 하나는 2학년의 선배였다.
술에 취해 나온 알파 페로몬이라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던 두 사람은 피하듯 밖으로 향했다. 둘 다 알파구나. 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하는 한별의 옆에 누워 한별을 가렸다. 한별의 페로몬은 굉장히 옅었지만, 태하는 그 적은 향조차 다른 사람에게 퍼지지 않길 바랐다.
시간이 조금 지나 깊게 잠든 한별에게서 페로몬이 더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태하의 페로몬 역시 줄어들었고, 곧 사라졌다. 폭발적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기에 약간 열린 창 사이로 전부 나가 흐려진 것이다.
태하는 사실 밤을 지새웠다. 한별의 페로몬이 다시 퍼질까 걱정되어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미안…….”
태하는 잠결에 흘러나온 한별의 사과를 가만히 들었다.
모르는 척, 아주 작은 욕심을 냈다. 앞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과 이불을 덮어 주는 움직임 사이로 태하는 한별을 아주 잠시 붙잡았다.
욕심 같아선 품 안 가득 안아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별을 감추고 싶지만, 차마 마음껏 그럴 수 없기에 잠깐 팔의 무게만 실었다.
잠시지만 행복했다.
한별의 체온을 아주 잠시나마 담았다는 사실이 기쁨을 안겨 줬다. 자신이 한별의 향을 감추기 위해 페로몬을 내보냈던 것을 일순 잊을 만큼.
만약 잊지 않고 계속 있었다면 다음 날, 한별은 태하를 깨우지 않으려고 품에 안긴 채였을 것이다. 하지만 옷에 옅게 남은 제 페로몬을 취기에 페로몬이 흘러나온 것이라 착각했기에 한별은 태하를 흔들어 깨웠다.
그 이후 라면으로 속을 달래는 동안, 태하는 슬쩍 간밤의 이야기를 흘렸다.
차라리 페로몬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한별이 그 선배에 관한 생각일랑 잊을 것이라는 계산 아래에서 태하가 벌인 일이었다.
“……뭐?”
“말 그대로야. 과대 형이 한별이 네가 오메가인 걸 알게 됐어.”
“하…….”
그리고 태하의 계산은 정확했다. 굳이 형질을 숨기는 편은 아니나, 한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등학생 땐 담임 선생님만 형질을 알고 있다면 선생님의 역량으로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시험 점수를 개인적으로 잘 챙기기만 한다면 결석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도 했다.
학생 중엔 선천적으로 몸이 안 좋은 경우도 꽤 있었기에 같은 반 학생들은 구태여 한별의 건강 상태를 묻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은 출석 점수가 총점수에 영향을 주기에 출석 인정을 위해서라도 형질과 관련된 이야기를 미리 해야 했다. 주변에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메가라는 이야기가 퍼지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단 뜻이다.
적어도 히트 사이클 때까진 알려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리 빠르게 아는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는 한별로선 계산하지 못했다.
“아…….”
한편, 태하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말하면 한별이 그 방법을 과연 채택해 줄지를 걱정했다.
“과대 형이 딱히 말하고 다닐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그래서 네 페로몬으로 가려 줬던 거야?”
“응……. 한별이 너, 지금은 오메가인 거 알릴 생각 없잖아.”
그러나 입에선 변명만 빠져나왔다.
오랜 기간 한별에겐 무어라 할 수 없을 만큼 약한 태하였다. 한별에게 짐이 될 생각은 없고, 도움만 되고 싶어 제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언급해서 ‘그 관계’가 굳어져 버리면 태하는 더욱 한별에게 더 다가설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그저 친구이기에 돕는다고 생각할까 봐……. 난 이미 오래전부터 너에게 다른 감정을 품어 왔는데.
그때, 한별이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태하야.”
“응?”
“만약 일이 터지면, 내가 너한테 도와달라고 할 것 같거든.”
“응.”
“그럼 그때 나랑 썸 좀 타자.”
“……어?”
태하의 눈이 커졌다. 멍했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변했다.
태하가 머뭇머뭇 제의하려던 건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계약 연애’였고, 한별이 비슷한 결이지만 다른 관계를 답으로 내놓았다.
“어때?”
오랜 친구에서 썸 타는 사이 정도면 계약으로 묶이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가능성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알았어.”
“나중에 부탁 좀 할게.”
한별이 미소 지었다.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별이 자신에게서 친하고 편한 친구의 모습이 아닌, 달라진 지태하라는 사람과 달라지게 될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면 지금은 그 이름이 무엇이 되든 괜찮았다.
그간처럼 도움을 주는 평범한 친구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다가서도 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한별의 생활에 자신의 색을 옅게 섞는 것을 넘어서 짙게 물들이는 건 이제 태하, 자신의 몫이었다.
* * *
나중에 단영이나 윤수와 엮일까 싶어 태하에게 부탁했던 것인데, 벌써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한별은 평소보다 더 다정한 태하의 모습에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태하가 주로 찍히는 것도 아니었다. 촬영 팀 역시 태하가 외모로는 아무도 까지 못한다는 그 채널(Cha.N) 멤버들 사이에서조차 꿀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더라도 방송 콘셉트가 콘셉트인 만큼 태하를 메인으로 촬영할 순 없었다.
채널(Cha.N) 유성 동생의 친한 친구 정도로 마이크는 주었지만, 어쨌든 한별의 노래를 불러 주는 정도의 영향력만 필요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잘생긴 일반인은 화제성으로 써먹기 좋은 반면, 채널(Cha.N)의 분량은 시청률로 써먹기 좋았다.
“아.”
“진짜……. 나, 애 아니라고.”
유성이 직접 만든 도시락을 먹던 한별은 자신의 입 앞으로 반찬을 들이미는 유성의 젓가락에 미간을 좁혔다.
[Q. 자주 있는 일인가요?]
―네. 형이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형 머릿속에 저는 아직도 한 다섯 살쯤인 것 같거든요.
[ㅋㅋㅋㅋㅋ(울며 웃는 이모티콘)]
[Q. 정말인가요?]
―저, 진심이에요.
―형이 아이돌만 아니었어도 ‘Hot 한 고민 연구소’에 출연 신청했을걸요.
나중에 추가로 들어간 인터뷰에도 한별은 최선을 다했다. 같은 방송사에서 밀어주는 일반인 고민 상담 프로그램 제목까지 언급하며 정말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