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사흘 후.
학과 앱으로 녹음실 사용을 지정해 두고 확인차 학과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내용을 확인하던 실습 조교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사용 목적을 가리키곤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왜 싱 코스모 녹음을 해?”
녹음실을 처음 빌릴 때부터 사용 목적으로 너튜브 채널의 이름을 적었기에 이번 역시 똑같이 적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물음표를 띄웠던 태하와 한별은 뒤늦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알아채고 힘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조교님…….”
“장난이야. 이제 내가 안 들어가도 되지? 어차피 지금 녹음실 쓰는 거 너희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체육 대회 기간이기 때문이다.
선배 중 몇몇은 학교 요청으로 중간 공연을 준비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은 체육 대회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농구와 축구가 전부 예선을 통과한 탓이었다.
한별은 일찍이 몸치를 인증해 모든 경기에서 빠졌고, 태하는 계주만 나가기로 되어 있어 별도로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간 너무 여러 번 사용했기에 녹음실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사용 후 고장 난 장비가 있는지 여부만 알려 달라는 조교의 말에 한별과 태하는 알겠다고 답한 후, 녹음실 안으로 들어섰다.
깜깜한 녹음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별은 불을 탁 켰다. 밝아진 주위에 눈을 잠시 찡그리다 몸을 돌렸는데, 태하가 뒤따라 들어오다 발걸음을 멈춘 채 그런 한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목소리 잠겼는데?”
녹음실 내부가 너무 건조한가? 한별이 물을 사 와야겠다며 몸을 돌리자, 태하가 다급하게 한별을 말렸다.
“오늘은 중간중간 화음만 넣을 거잖아. 금방 끝나.”
“그래도 너, 목 조심해야지.”
“그럼 내가 다녀올게. 컴퓨터 켜고 파일 세팅하려면 시간 걸리니까.”
태하의 급한 목소리에 한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의 대응 중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한별이 주춤거리며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자, 태하가 녹음실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컴퓨터 앞에 앉은 한별이 집에서 가져온 작업 파일을 열었다. 다음 곡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별의 자작곡이었다.
사실 한별은 꿈만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지금까지 약 8년을 기다린 일이었다.
이미 이전에 가이드를 불러 준 적이 있으니 태하가 한별의 곡을 불러 준 것은 맞지만, 그건 사람들에게 발표된 노래가 아니었다. 완성이 아닌 곡을 도와달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땐 긴장이 되거나 가슴이 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에게 발표할 자신의 곡을 태하가 부른다. 함께 완성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노래 역시 태하가 가이드를 해 줬던 그 곡이었다.
보통 가수들이 원하는 분위기의 노래를 태하에게 맞춰 조절했다. 넣었던 가상 악기들이 바뀌자, 태하의 목소리에 훨씬 어울리는 곡이 되었다.
한별은 태하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어떤 음역대에서 더 탄탄한 소리가 나고 어디까지 고음을 낼 수 있는지, 또 저음은 어디까지 나오는지 역시 머릿속에 있었다.
한별은 전에 태하가 녹음했던 가이드 파일을 재생했다.
[Yes, This is love.
처음 본 순간부터 다가가는 지금까지 믿고 있죠.
한 번도 그대가 아닌 사람을 떠올린 적 없어요.]
열이 확 오를 정도로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가이드가 완성되었던 날, 한별이 밤새 틀어 놓았을 만큼.
한별은 제가 만든 첫 곡은 무조건 태하에게 주리라 생각했다. 음원으로 나오는 곡이 태하가 부르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앨범에 실리게 되더라도 태하에게 어울리는 곡을 만들고 싶었다.
판매해야 하기에 여성용으로도 키를 조정하기도 했다. 결국, 통과한 기획사는 없지만.
자신이 만들 곡을 태하에게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태하가 알지 못해도 괜찮았다. 여전히 태하는 한별의 뮤즈고, 한별의 하나뿐인…….
“한별아. 아이스크림 괜찮아?”
“아이스크림?”
한별이 스페이스 바를 톡 눌렀다. 그러자 흘러나오던 곡이 뚝 멈췄다.
“멜론 있고, 초코 있어.”
“나 멜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초록색의 아이스크림이 내밀어졌다.
“태하 너, 단 거 잘 안 먹잖아.”
“아이스크림은 괜찮아.”
물만 사면 될 텐데, 한별을 위한 아이스크림까지 사 온 태하였다.
녹음은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한차례 가이드 녹음을 했기에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음에도 재녹음을 하고 싶다는 태하를 억지로 말린 한별이었다.
사실 화음 녹음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더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는 태하의 요청에 하게 된 거였다.
태하로선 너튜브 채널에 올릴 첫 자작곡이 한별에게 부담감이 아닌, 같이 완성한 예쁜 곡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했다.
한별은 기계에서 떨어졌다. 녹음실 벽 쪽으로 붙어 있는 기다란 의자로 몸을 옮기고서야 아이스크림을 뜯었다.
“이거, 앨범으로도 낼 거지?”
“응. 이건 형이 도와주기로 했거든.”
블루 라임 사운드와 계약하진 않았다. 아직 제대로 일을 시작하지 않은 곳과 섣불리 계약해야 할 만큼 급하지 않으니까. 너튜버 중에선 100만, 200만 구독자가 넘도록 MCN에 들어가지 않고 홀로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한별은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같이 운영하는 태하가 있으니, 함께 차근차근해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회사랑 하는 거 아니고?”
“응. 유통사만 필요해서.”
정 안 되면 기획사 차려 버리지, 뭐. 우리 태하, 사장 시켜 줘야지.
그런 한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태하는 눈만 끔뻑였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태하가 입을 열었다.
“노래하는 너튜버들 본인 노래에 유통사만 넣고, 소속사에 자기 이름 넣는 거 말하는 거지?”
“응. 그래서 엔터 회사는 안 필요하고, 노래 유통할 곳이 필요한 거야. 지켜보다가 음원 나올 때까지 회사 안 정해지면 진짜 회사 안 끼고 싱 코스모로 낼 거고.”
진짜로 회사 내서 태하, 사장 시킬 거다.
무엇보다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노래를 등록할 수 없었다. 영상에 대한 저작권, 음원 저작권이 전부 싱 코스모 채널에 귀속될 테니까.
촬영에 관한 구상으로 생각을 잇던 한별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하의 모습에 주춤, 고개를 뒤로 뺐다.
“왜……? 아이스크림 안 먹어?”
“나, 사장 시키지 마.”
……너 혹시 생각 읽니?
한별의 눈이 흔들렸다.
“난 비서 할 테니까, 사장은 네가 해야 해. 알겠지?”
사장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눈을 접어 웃는 태하의 모습에 한별은 말을 잃었다.
“홀리진 말고…….”
“썸 타는 사이니까, 미리미리 홀려 놔야지.”
“아…….”
저 얼굴, 진짜 파괴력이 좀 크다.
한별은 이를 세워 아이스크림을 아삭, 물었다. 속에 열이 올라서 얼른 내려야겠다. 어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하에게 요청했던 덫에 되레 자신의 발이 묶인 느낌이었다.
“얼른 먹고 시작하자. 우리, 녹음실 한 프로(3시간)밖에 안 빌렸어.”
“응.”
“그렇다고 급하게 먹진 말고. 빨리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태하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별은 애써 생각을 옮겼다.
‘형한테 가진 조명 다 내놓으라고 해야겠다.’
그럴싸한 뮤직비디오를 찍을 것도 아니고, 얼굴이 나올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 너튜브를 탐방해 열심히 영상 편집을 배운 한별이었다. 기왕 배운 영상 편집을 이번 곡에 알뜰하게 써먹기로 했다.
* * *
한별은 작업하는 동안, 전화를 무음으로 해 놓는 편이었다.
작업에 집중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연락하는 사람이 누구든 한두 시간 정도는 기다려 주기 때문이었다. 하여 가족에게 전화가 와, 화면이 반짝반짝하더라도 일단 놔두는 편이었다.
“…….”
녹음 부스 안에 선 태하가 의아한 얼굴로 한별을 바라보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냐, 잠깐만.”
잠시 토크백 버튼을 누른 한별이 태하의 물음에 대답한 후, 다시 손을 뗐다.
화면이 또 밝아졌다가 꺼졌다. 핸드폰의 기본 배경 화면이 떠올랐다가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정도면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한별이 토크백 버튼을 다시 눌렀다.
“태하야. 잠깐만 나와 줄래?”
벌써 한 시간 반 정도 쉼 없이 녹음했으니 잠깐 쉴 때가 되긴 됐다.
“……?”
태하가 부스 밖으로 걸어 나오다 말고 멈췄다. 한별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묻기도 어려울 만큼 굳은 얼굴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던 태하가 급히 한별에게 다가갔다.
“……어디라고요? 네. 네, 감사합니다.”
한별이 전화를 끊자마자 의자에 걸쳐 두었던 카디건을 손에 들었다.
“무슨 일이야?”
“형, 병원이래. 테러당해서.”
“……뭐?”
테러라니?
태하는 황급히 녹음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한별을 보고 우선 녹음실을 정리했다. 파일을 저장하고, 한별이 깜빡한 지갑과 가방을 손에 들었다.
“조교님. 죄송한데, 파일 그대로 저장만 해 뒀어요. 저희 녹음 파일, 나중에 챙겨 가도 될까요?”
“어? 어,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일이 좀 있어서 병원에……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발 늦게 밖으로 나온 태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학과 근처에선 택시를 잡기 어려우니, 길이 넓고 차가 많은 정문 쪽으로 갔을 것이다. 태하는 자신과 한별의 가방을 들고 빠르게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손톱 끝을 입에 문 한별이 보였고, 태하는 서둘러 달려가 한별의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