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 *
학교에선 학기 말 공연에 매달려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마저도 팀별 악보가 하나둘 최종 완성됨에 따라 한별도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무대에 오르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학기 말 공연이 1주 앞으로 다가왔다! 다들 파이팅 하자.”
“네~!”
“한별아, 마지막까지 수정하느라 수고했다.”
“아니에요.”
한별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합주실 밖으로 향했다. 마이크를 들고 한별의 뒷모습을 보던 태하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작업량이 줄었음에도 한별의 상태가 계속 좋지 않자, 태하는 한별의 행동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공연을 위한 작업 곡은 이제 공연하는 연주자 몫이다.
주마다 올리는 싱 코스모의 영상 작업은 한별이 미리 작업해 둔 곡들이 있어 괜찮았다. 유성이 입원했을 때 작업을 못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한별이 비축하듯 음원들을 편곡해 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봐도 잠을 못 자는 이유가 꼭 작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 더위를 먹었나?’
요즘 봄과 가을은 짧은데 여름과 겨울이 기니, 영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한별의 집에 마련된 작업실을 떠올리던 태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어컨이 없었던가?’
이제 6월 초도 덥다.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태하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티를 만들 과일 원액을 샀다.
시간이 있었다면 직접 만들었을 텐데. 태하는 아쉬운 얼굴로 커다란 텀블러에 아이스티를 만들어 담고 얼음까지 충분히 넣었다.
더 달콤하게 만들 걸 그랬다. 태하는 다 만들어진 아이스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별에게 줄 것이기에 조심히 들고 걸었다.
전공 수업 탓에 시간표가 갈렸지만, 한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이미 연습실 사용표는 확인한 상태였다. 그리고 화장실에 간 게 아닌 이상, 한별은 늘 연습실에 있는 편이었다.
집에 돌아갔을 리도 없었다. 금요일에 있는 교양 수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수업은 학년별 시간표가 거의 같았다. 연습 이후로 전공 선택 과목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위해 분명 학교에 남아야 했다.
앱에 적힌 사용표 내용에 따라 한별을 찾아온 태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는…… 아니, 기분 나쁜 감각.
한별이 연습실을 빌린 시간표대로라면 태하가 전공 수업에 들어갔을 쯤부터 연습실에 와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있었다 나갔다면 옅게나마 남은 한별의 흔적이 느껴졌어야 했다.
보통은 알파나 오메가 본인이 페로몬을 내지 않고 감추면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오래전부터 태하는 한별의 옅은 향을 맡아 왔다. 한별이 머문 자리엔 늘 옅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맡아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던 것이 아니다. 흐리게 남은 누군가의 흔적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약간의 거부감.
태하는 알파의 페로몬에 이를 으득 물었다.
* * *
“저기, 선배님.”
한별이 결국 포기하듯 입을 열었다. 확실히 불편했다.
“응!”
“이 정도면 될까요?”
“아, 그, 조금만 더. 조금 잘 들렸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최소 2년 반은 더 봐야 하는 사람이라, 차마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태하의 전공 수업이 슬슬 끝났을 시간이었다. 다음 영상 녹음을 할 생각이기 때문에 태하에게 연락을 줘야 하는데…… 깜빡하고 가방 안에 핸드폰을 놓고 왔다.
연습실 한쪽에 고이 놓여 있을 제 가방을 떠올린 한별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하가 알려 준 바에 따르면 알파 선배 중 하나였다. 학과에 형질이 있는 사람은 적지만, 학교 수업에 나오는 오메가는 한별과 3학년 선배 한 명뿐이라 들었다.
베타였으면 조금이라도 덜 부담스러웠을 텐데.
처음엔 문제가 생길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저기…… 한별아.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네?’
‘개인적으로 프로그램 연습하는 중이거든. 노래를 녹음해서 조정해 보고 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공부한다는데 도와주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더구나 도움을 요청한 선배는 보컬을 전공하는, 그것도 실력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공연에 도움이 될까 싶어 한별에게 찾아왔다고 했다. 교수님을 찾긴 껄끄럽고, 학과에 작곡 전공 학생 중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어서 찾아왔다고 하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부전공으로라도 하면 좋지.’
살짝 미간을 좁히긴 했어도, 한별은 차근차근 상대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컴퓨터 실습실은 수업이 없다면 학생들이 많이 오지 않는 곳 중 하나였다. 미디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와 전자 피아노 여러 대가 연결된 이곳에 지금 학생은 한별과 선배, 둘뿐이었다.
“여기서 더요?”
“응…….”
한별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지금 선배가 흘러나오는 소리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선배님.”
“응? 왜 한별아?”
왜 한별아, 가 아니죠. 한별은 바로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며 화면을 가리켰다.
“음정 조절도 끝났어요.”
이제 가도 되냐는 뜻이었다. 벌써 한 시간 가까이 붙잡힌 탓에 애써 잡아 둔 연습실을 빼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개인 연습실에서 전공 악기 및 보컬 연습을 진행하지만, 한별은 다른 전공들처럼 피아노나 기타 같은 악기를 연습했다.
편곡하는 데 있어 악기에 관한 이해도가 필요함은 물론, 기본적인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연습 시간을 빼앗겼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수정 요청에 한별 역시 조금씩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럼. 한별아―.”
“저, 선배님.”
“응……!”
도대체 무슨 기대를 품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확연히 밝아진 선배의 표정에 표정을 굳힌 한별이 말을 이었다.
“이제 돌아가도 될까요?”
“어, 어?”
“연습실 빌린 시간이 다 끝나서요. 핸드폰도 연습실 안에 있어서 가방도 빼고 비워 줘야 해요.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도 될까요?”
한별을 보며 환해졌던 표정이 금세 변했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별은 몸을 일으켰다. 더는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다음 수업은 태하와 같이 듣는 수업이었고, 끝난 후 바로 녹음실을 빌려 두었기 때문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수업 전까지 피아노 연습하려고 했는데, 시간 다 끝났네.’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선배를 보던 한별은 파일을 저장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시간 내서 많이 알려 줬다.
“파일 저장 끝나면 메일이든 가지고 계신 usb든 옮기시면 돼요. 바운스…… 아니, 그러니까 파일 변환해서 저장하는 거 아니면 듣는 건 불가능하고요. 바로 듣는 걸 원하시면 변환해서 저장하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폴더는 바탕 화면에 있으니까, 아예 싹 다 가져가세요.”
“…….”
“학교 컴퓨터는 주기적으로 포맷 해서 파일 날아가요.”
이로써 할 말은 다 마쳤다.
손을 덜덜 떠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지만 한별은 최대한 모른 척하기로 했다. 뒷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감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잘못 느끼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한 시간 내내 궁금한 걸 물어보면서 작업 창이 아닌 자신을 보고, 가려고만 하면 어떻게든 말을 잇는 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나.
무엇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내보이지 않는다. 한별은 옅지만 새어 나오던 선배의 알파 페로몬을 눈치챘다.
물론, 일반적인 생활 중 아주 옅게 흘러나온 페로몬쯤은 모른 척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어떠한 의도를 품은 게 아니라 컨디션에 따라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기도 하니까.
하여, 한별 역시 처음엔 선배의 상태가 불안정한가 싶어 모른 척했다. 하지만 점차 농도 짙어지는 페로몬은 일반적으로 옅게 흘러나오는 페로몬과 달랐다.
갈수록 짙어지는 알파 페로몬 탓에 컴퓨터 실습실 안에 향이 진동했다.
“가 보겠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 오메가잖아.”
“…….”
그걸 알면서도 매너 없게 실습실에 페로몬을 흘렸나? 한별이 얼굴을 찌푸리자, 상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럼……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래.
“예?”
“알파잖아, 나.”
그러니까,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상대의 페로몬에 휩싸이면 성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고 몸 상태 나름이었다.
한별은 사실 지금 히트 사이클 시작 직전이었다. 학교에 나와야 하기에 미리 억제제를 먹은 터라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대학 입학 후 첫 기말고사를 보기 일주일 전, 시험 준비해야 하는 지금이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반대로 시험에 빠지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결론적으로 그놈의 억제제가 한별의 컨디션을 나쁘게 만들었고, 반대로 상대의 알파 페로몬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끔 만들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저 페로몬에 반응하진 않았을 것 같긴 한데…….’
인구의 대다수가 베타다. 그리고 베타들은 페로몬에 관해 오해하는 경우가 좀 많았다. 알파의 페로몬, 혹은 오메가의 페로몬에 노출되면 상대 형질은 무조건 반응해 사고가 일어난다는 오해 말이다.
오래도록 이어진 오해와 착각, 그리고 세워진 편견 때문에 오메가는 밖을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던 만큼 시간이 얼마나 들더라도 인식을 바꾸는 건 굉장히 중요했다.
물론, 사랑하는 상대라면 그런 반응이 자연스레 나타난다. 페로몬 이전에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페로몬이라면 더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 없지 않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러트 사이클,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 아니고서야 상대 형질에게 미친 듯이 성감을 불러일으키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한별은 우성이었다. 같은 우성 알파가 아니라면 한별에게 큰 영향을 주기 어려웠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한별이 목소리를 낮췄다. 알파 페로몬이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기대에 찬 얼굴이 보였다. 정작 한별은 상대가 바라는 대로 열이 오르기보단 불쾌했다.
“당연히 매달려야 하는 거 아냐?”
“……?”
“난, 알파잖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