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 말마따나 후자는 소문이 퍼지더라도 금방 잡힐 수밖에 없다. 그간 한별은 태하 외엔 누구에게도 여지를 준 적이 없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입학 직후부터 대부분 태하와 함께 움직였고, MT 이후론 더 가까워 보이기까지 하니, 한별에게 슬쩍 다가와 보려 생각했던 이들이 전부 눈물을 머금고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상대가 태하라는 점이었다.
학과의 대표 비주얼이라는 윤수와 함께 서도 꿀리기는커녕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릴 정도의 외모니까.
태하가 정문을 통과하는 사진이라든가 카페에서 주문을 기다리는 사진, 학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때 찍힌 사진 등이 대학교 대나무 숲에 자주 올라오기까지 했다.
“……한별이 너는 아닌 척한다?”
“너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거든? 거기다 난 형이 최유성이니까 당연하지. 방송 뜨고 사진 엄청 많아졌잖아.”
한별은 묘하게 찌그러지는 태하의 표정에 제 말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실용 음악과가 있는 예술관 건물을 기웃거리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실음과 잘생긴 학생 보겠다고 찾아오는 학생 수가 윤수가 입학했을 때보다 더 많다는 이야기를 조교에게 직접 듣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일반인의 초상권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아무리 학교 내 대나무 숲이라고 해도 남을 몰래 찍었다는 것 때문에 댓글 창이 한참 시끄럽기도 했다.
그러니 실은 그 선배와 사귀고 있었다, 한별도 페로몬을 냈다, 같은 소문은 금방 없앨 수 있었다. 물론, 태하가 또 화제가 되긴 하겠지만…….
“시끄러울 텐데, 괜찮겠어?”
“한별이한테 도움이 되니까 괜찮아.”
이 순한 녀석을 어쩌면 좋냐. 한별은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른 쪽은 어떡해?”
“음……. 쌍방? 그거야…….”
한별이 흐린 눈을 했다.
학교에서도 큰 문제가 없으면 조용히 넘어가길 원하는 눈치고, 사건을 신고 받은 경찰도 상대가 초범인 데다 감정이 격해 그랬다는 이유로 적당히 무마하길 원했다.
열은 받겠지만 증거가 있어도 처벌하긴 애매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 한별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빠르게 합의해 주지 않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빠른 합의는 항상 피해자의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다. 당한 건 피해자인데 상황을 무마시킨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피해자가 된다.
“근데 이 일, 유성이 형한테 이야기했어?”
“당연히.”
벌어진 일이 일이라 보니 이야기는 해야 옳았다. 이쯤 되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닌 것도 같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
이번 일로써 겸사겸사 알게 될 것이다.
유성이 한별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 * *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한별의 친형인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직접 연락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별을 포함한 주변은 자신을 가해자라고 비난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 아닌가. 무엇보다 벌어진 일이 없기도 하고.
“왜 이런 곳에 부른 겁니까?”
꽤 으슥한 곳이었다. 하지만 연예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사건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 그다지 무섭진 않았다.
자신을 찾아온 한별의 형, 유성은 심지어 얼굴도 가리지 않고 있었다.
‘베타라고 들었는데, 얼굴은 무슨 알파같이 생겼어? 재수 없게. 역시 한별이 쪽이 오메가라 그런가? 더 순하고 사랑스럽게 생겼네.’
그는 이 순간에도 되먹지 않은 생각을 이어 갔다.
떠올리고 보니 새삼 아쉬웠다.
그때, 페로몬을 더 씌워서 한별을 가졌더라면 차라리 억울하지라도 않을 텐데. 그랬다면 한별도 저를 가해자로 몰지 못할 텐데.
싫다곤 해도 결국 자신은 알파고, 한별은 오메가니까. 서로의 형질에 끌리게 됐을 테니까.
그가 입맛을 다셨다.
“왜요? 한별이가 저에 대해 뭔가 이야기한 게 있나요?”
조금 더 천천히 작업할 걸 그랬나.
알파는 오메가에게, 오메가는 알파에게 끌리는 건 자연의 섭리다. 매번 한별의 옆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그 알파 새끼만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때였다. 가만히 눈만 마주하던 유성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초면에 왜 반말이세요.”
그가 연예인 갑질 논란 따위의 단어를 떠올리며 인상을 굳혔지만, 유성은 상관없는 듯 말을 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학교에서 나가 주지 않겠어?”
“……예?”
미치셨나? 아무리 어려서부터 아이돌이 되었다지만, 세상 물정 몰라도 정도가 있지.
“대학 그만두는 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이래서 대학도 못 간 인간이랑은 상종도 하는 거 아닌데.”
하지만, 유성은 반응이 없었다. 자신이 할 말만 입에 올릴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말로 할 때…….”
무대나 텔레비전 출연 때와는 달리, 렌즈도 끼지 않은 까만 눈동자엔 빛이 없었다. 그 모습에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한별이 눈앞에서 꺼지라고.”
“……씹,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동생 말만 듣고 남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는가 본데, 당신이 지금 헛소리하는 거 내가 녹음해서 인터넷에 올리면―.”
“네가 한 일, 다 까발리고 싶은가 봐?”
유성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소곤거렸다.
유성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바람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던 상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아서 조용히 꺼질래? 아니면…… 진흙탕에서 더럽게 개싸움 하다가 뒈지게 해 줄까. 물론, 진흙탕은 너 혼자 구르게 될 거야.”
그러니, 상대를 봐 가며 건드렸어야지.
유성이 빛이 죽어 버린 까만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자퇴요?”
한별은 혼란스러웠다. 만약 상대가 정말 힘든 싸움을 걸어오더라도 철저히 대응할 생각이었다.
특히나 한별과의 쌍방으로 주장할 것에 대비해 합의는커녕 조금 더 강하게 대응할 것들을 주말 내내 생각해 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주말이 지나고 시험으로 정신없는 와중이었다. 시험이 슬슬 끝나 가는 와중, 조교는 한별에게 그 선배가 자퇴서를 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또 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해결한 것처럼.
‘내가 힘들다 싶을 때마다 매번 자연스럽게 해결되니, 이젠 못 알아채는 게 슬슬 더 이상한데.’
하지만 한별은 자신이 예측하는 그 누군가에게 당장 추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채널(Cha.N)은 현재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CHO_Oi_Meteo__r…
슷부이 게객기들
애들 좀 재워라.
ㅅㅂ 애들한테 돈 뽑아내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건 좀 아니지
소속사에서 내는 마지막 앨범인데 1주 음방하고 외국 스케쥴 ㅈㄴ 돌리는 게 말이 되냐?
애들이 돈벌어 오는 기계냐고
채널(Cha.N)이 컴백한 지 딱 한 주 지났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요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것을 제외하면 다른 방송 출연은 없었다.
음악 방송이 시작과 동시에 종료되고, 한별은 외국으로 향하는 형과 멤버들의 사진을 보았다.
음악 방송 활동 종료와 함께 일본어 앨범이 발매됐고, 관련 스케줄을 진행한 뒤 중국으로 넘어가는 스케줄이었다.
한국 근처 3국만 돌아다니나 했는데 그다음 주 스케줄은 더 가관이었다. 마지막이랍시고 소속사에서 리패키지 앨범을 낸 것이다. 아주 뽕을 뽑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였다.
그 와중에 미리 찍었던 온갖 자체 콘텐츠와 예능에 모습에 많이 나온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었다.
정말, 말을 잃게 하는 수준이었다.
@ysismool…
ㅂㄹ ㄹㅇ에서 내는 첫 앨범은 제발 애들 너무 안 돌렸으면 좋겠다
아직 어린 애들이 투자받아 만든 회사라고 방송사에서 막히고 사방에서 ㅈㄹㅈㄹ 생ㅈㄹ 들을 거 생각하면 미리 빡침
슷부에서 얼마나 애들 힘들게 하겟냐고
출국한 채널(Cha.N)을 보며 팬들이 올리는 반응에 하나하나 공감하던 한별은 마지막 글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췄다.
“이건…… 전혀 아닐 건데.”
방송사로서는 여전히 잘나가는 채널(Cha.N)의 이름값을 여기저기 써먹으려 했다. 리패키지임에도 판매 지수가 엄청나게 오르고 있으니까.
심지어 옮겨지는 레이블로 간 직원 역시 기존에 일하던 사람 중 알짜배기만 데려갔다. 일 잘하던 팀장 대리가 옮겨 간다는 말을 얼핏 듣고 헛웃음 지었던 한별이었다.
오히려 블루 라임이 대단해지면 대단해지지, StarV가 블루 라임을 압박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모회사―Vnet―StarV로 내려오는 것과 다르게 모회사 직투자라 StarV가 블루 라임을 막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너무도 스무스 했다.
그룹의 이름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계약 종료 후, 울며 겨자 먹기로 ‘재데뷔’라는 타이틀을 다는 아이돌들이 많았다.
소속사의 상황이 더 나아졌고, 레이블로 옮기며 작성된 정산 계약 역시도 훨씬 나아졌고, 원래도 강했던 앨범 제작에 대한 자율성은 더욱 커졌다.
이젠 회사 대표가 아는 곳이라는 이유로 들어온 협찬을 억지로 끼워 넣지 않아도 된다. 의상이나 액세서리 역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끝나는 것은 역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