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동굴 안 (1/6)

#1. 동굴 안

“거기 누구 없어요?”

어둑한 동굴 안.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동굴은 습하지 않았으나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며 저 너머로 끝없이 퍼졌다.

지연은 혹시 저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 기울였으나 되돌아오는 제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아무도 없냐구요오!”

없냐구요- 없냐구요-. 지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흐윽, 엄마, 아빠…….”

울컥 울음이 복받쳤다.

막막하고 무서웠다.

걷는 걸 멈추고 이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거 왜 미아가 되었을 때 수칙은 그렇지 않은가. 움직이지 말고 엄마 아빠 잃어버렸던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

하지만 던전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던전에서의 생존 수칙이 지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걸어야 한다. 힘이 있는 한 걸어야 한다.

아예 던전 초입에서 멈춰 있었으면 모를까. 던전 입구에서부터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던전 안쪽으로 도망쳤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몬스터들이 인간 냄새를 맡고 몰려올 수 있으니까.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 해. 연지연! 정신 차려!”

지연은 제 뺨을 꼬집으며 눈을 부릅떴다. 눈가에 고인 눈물은 더러워진 소매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백만 악플러를 몰고 다니는 연지연이 여기서 죽을 순 없지!”

지연은 핸드폰을 고쳐 쥐고, 핸드폰의 손전등 불빛이 앞을 향하게 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다 잘될 거야.”

지연은 뒤를 돌아보고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곤 크게 심호흡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으…….”

그럼 뭐하나. 다시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래서 던전 안전 수칙에서 그렇게나 강조했나 보다. 힘들어도 멈추지 말고 계속 걸으라고. 한 번 멈추면 다시 걷기 싫어지니까 절대 멈추지 말라고.

여태 몬스터를 다시 마주치지 않은 건 다행인데. 어디로 향하는 건지도 모를 길을, 어쩌면 몬스터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길을 다시 걸으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 걸어왔는데도 새삼 막막하고 무서웠다.

‘내가 헌터가 아니라 일반인이라 그럴까? 헌터가 되면 하나도 안 무서울까?’

TV를 틀기만 하면 어느 길드가, 헌터 아무개가 인스턴트 던전을 이틀 만에 닫았느니, 채취할 자원이 많은 던전이라 정규 던전화시켰느니 하는 뉴스가 쏟아진다. TV든 인터넷이든, 헌터와 던전에 대해 너무 가볍게 떠들어 댄다.

헌터들이 던전에 들어가고 나오는 게 사람들이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양.

TV에 출연하는 헌터 연예인들도 문제다. 그들은 언제나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와 싸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짜릿하고 끝내주는 경험이라는 듯이 자랑한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유튜버에서 헌터로 바뀐 건 뉴스감도 아니게 된 지 오래.

이제 부모들은 아직 발현하지 않은 자식을 헌터로 만들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길드에 헌터 연습생으로 소속되고 싶어 한다.

유명 길드 헌터 연습생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데다가,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길드의 헌터 연습생이어도 일단 예비 헌터 취급은 해 주니까.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길드 중 특히 인재 육성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진 DG 길드에서는 15세 이하 헌터 연습생을 천 명 이상 데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헌터 연습생이 되기 위해서는 길드에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한다. 양심적인 길드는 분기별로 한 번 받으나 대부분의 길드는 매달 받는다.

헌터 연습생 수업료가 웬만한 길드의 주요 수입원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바치고도 주간 평가나 월간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지 못하면, 내쫓기기도 한다.

그런데도 돈 좀 있다 하는 부모들은 제 자식을 헌터로 만들고 싶은 욕심에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유명 길드를 찾아다닌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바뀌어 버렸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돈 좀 있다 하는 집에서는 온갖 편법을 써서 헌터로 발현할 만한 아이를 입양해 제 자식 대신 군대에 보내려고 했다.

헌터로 발현한 사람들은 나이, 성별 상관없이 우선 입대 대상이었고, 십 년간 복무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 제대하기 전에 죽어 버렸다. 그 시기엔, 헌터로 발현했다는 말은 십 년 내로 반드시 죽는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게 불과 몇 년 전까지의 일이었건만.

순식간에 변해 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지연만의 일은 아니었다. 아직 수년 전의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불어 온 새로운 바람, 헌터 열풍에 올라타지 않은 사람들 눈에 이 세상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연은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인, 기자였다.

그녀는 수습기자 시절부터 헌터에 열광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기사를 꾸준히 작성했다. 대부분 사수에게 아웃 당했으나 어찌어찌 데스크까지 올라가도 거기서 컷 당했다.

이상한 기사나 쓰는 무능력한 수습 사원이 되어, 정규직 채용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일 때. 학교 선배의 연락을 받아 인터넷 신문사로 직장을 옮겼다.

신문사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곳이었으나 지연은 만족했다. 쓴 기사를 마음껏 업로드 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 지연은 자신 같은 진정성 있는 언론인을 알아보지 못한 전 직장 데스크가 후회할 만큼, 높은 조회수를 자랑하고 광고를 척척 따오는 기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인터넷 기사에 댓글 좀 달아 봤다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기자가 되었다.

기사를 올리자마자 헌터가 못 돼서 열폭한 헌혐 기자가 또 지랄한다는 댓글이 우르르 달리는, 백만 악플러를 몰고 다니는 기자가 되었으니까.

멘탈만 튼튼하면 이 짓도 할 만했다. 조회수와 화제성은 보장됐으니까.

지연은 회사에서 가장 높은 뷰수를 매주 갱신하는 기자였다. 인센티브는 한 번도 못 받았지만 잘하면 내년쯤 주임 소리는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연이 수습기자로 일했던 곳은 대한민국에 몇 안 남은 대형 일간지였다. 때문에 회사 사람들이나 가끔 만나 맥주 한잔 하는 친구들은 직장 옮긴 걸 후회하지 않냐고 물어보지만, 지연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이 없었다.

대형 일간지 정규 기자? 엘리트 언론인? 개나 주라지. 헌터 협회와 유명 헌터 길드들의 똥구멍이나 핥아 주며 팩트 체크도 안 되는 기사나 써 제끼고, 길드에서 헌터 연습생 모집 광고나 받아오는 일간지 따위.

월급은 반 토막 났고, 힘들게 쓴 기사를 업로드하면 살해 협박 악플이나 받는 처지지만. 지연은 자신의 상황을 단 한 번도 비관하지 않았다.

취재 나왔다가 인스턴트 던전에 빨려 들어와 어두운 동굴을 걷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후회하지 않았다. 대형 일간지 기자였다면 회사에서 준 구조 물품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 그게 좀 아쉽긴 했지만.

‘사람들은 던전을 무슨 게임 속 세상 같은 걸로 알고 있는데. 헌터 협회랑 대형 길드들이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던전 생존자들을 입막음하고 인터뷰 금지시키고, 던전 내부도 공개하지 않는 거겠지. 던전 안이 끔찍하고 무서웠다는 폭로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도시 괴담 취급이나 하고. 이거 봐봐, 그럴 리 없잖아. 헌터도 결국 인간이야. 이런 끔찍한 곳에서 몬스터랑 싸우는 게 쉬울 리 없잖아.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고.’

지연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은 손전등 역할이나 하고 있지만, 지연은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잔뜩 찍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제발 그중에 몇 장이라도 건질 수 있기를. 몬스터의 끔찍한 모습이 한 장이라도 찍혔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이 핸드폰과 함께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던전의 실상에 대해 적나라하게 기사를 써 업로드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헌터협회 투자로 만들어지는 영화와 드라마에 나오는 낭만적이고 유쾌한 던전 생활? 개나 줘 버리라지.

지연은 백만 악플러가 아니라 천만 악플러가 덤벼들어도 절대 기사를 내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회사에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기사를 삭제하려고 한다면? 그 게으른 사장이라면 모정우 대령이 아니라 모정우 대령 형이 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지, 회사 망하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만약 그런다면 회사 데이터 서버를 빼내어 들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바로 명동 성당으로 달려가야지.

“으아아, 거기 누구 없어요오오?”

일단 여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제발.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생존자 찾으러 온 헌터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몬스터 말고 사람이면 되니까. 누구라도 좀 나와 봐요. 그때 다 죽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지연은 울상을 지으며 동굴 저편을 바라보았다.

“……모르겠다. 그냥 조금만 쉬어가자. 나 다리가 너무 아파.”

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옆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아, 아파. 도대체 얼마나 걸은 거지?”

지연은 다리에 배긴 알통을 주무르는 척하며 찔끔 난 눈물을 훔쳤다.

핸드폰을 보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있겠지만, 확인할 엄두가 안 났다. 얼마 안 지났을까 봐. 혹은 너무 많이 지났을까 봐.

등 뒤로 스윽-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이 애써 웃음 지으며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거기 있습니까?”

동굴 저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있습니까. 있습니까. 묵직한 저음이 웅웅 울렸다.

“여, 여기요! 여기요!”

지연은 다시 앞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제 손짓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쳐,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들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손전등 빛을 향하게 했다.

저벅, 저벅.

길게 뻗은 등대의 불빛을 밟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제법 멀리서 들렸지만, 지연의 가슴은 벌써부터 콩닥콩닥 뛰었다.

‘잠깐만. 사람 맞겠지?’

꿀꺽. 지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헌터? 서, 설마 몬스터는 아니겠지? 던전엔 사람 같은 몬스터도 있다고 했는데?’

몬스터면 어떡하지? 일단 숨어야 하려나? 아, 숨어야겠다.

뒤늦게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는데.

“거기로 가지 마십시오.”

바로 앞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떻게? 조금 전까지 저 멀리에서 들렸는데?’

남자의 숨이 약간 거칠어져 있는 걸 듣고 나서야 답을 찾아냈다.

‘아, 내가 도망갈까 봐 뛰어왔나 봐.’

먹이를 놓칠까 봐 달려온 몬스터가 아니라, 생존자를 놓쳤을까 봐 다급해진 헌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 중 하나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거라고 누가 그랬던 거 같은데. 지연은 한 줄기 희망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 손전등 불빛 앞에 선 남자는 일단 인간형이었다. 키가 커서 바위 위에 앉은 지연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고.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목소리는 일단 합격! ……이 아니라, 아무튼 듣기 좋았다. 웅웅 울리는 동굴 효과 때문이 아니더라도, 성우나 가수를 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저음이었다.

남자는 품이 넉넉한 스웨터에 면바지 차림이었는데, 군화를 신고 있었다. 웬만한 한국 남자는 소화하기 힘든 차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웬만한 한국 남자가 아니었다.

수영 선수처럼 벌어진 어깨에 스웨터 위로 드러나는 탄탄한 몸매. 울룩불룩한 근육질이 아니라 잘빠진 몸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보는 게 슬플 정도였다.

‘이야, 나 이런 성인 남자 좋아하네.’

그동안 여리여리한 미소년 취향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외모의 아이돌만 좋아했었는데.

지연은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또 하나의 취향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도 남자의 몸은 그만큼 감동적이었다. 광채가 났다. 핸드폰 손전등 불빛을 정면에서 받고 있으니 빛날 수밖에 없겠지만.

“앗, 죄송해요!”

지연은 얼른 핸드폰 손전등 불빛을 아래로 내리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턱 선이나 오뚝한 코가, 이 남자는 몸뿐 아니라 얼굴도 제법 잘생겼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눈을 가리는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잘생김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두운 동굴에서 선글라스라니. 덕분에 정면에서 손전등 불빛을 쏴댄 게 덜 미안했지만, 아무튼 이상한 모습이었다.

‘혹시 헌터 아이템인가?’

지연은 선글라스 주변에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선글라스는 보라색으로 빛나기는커녕 흰빛도 내뿜지 않았다.

던전에서 채취한 자원을 가공하여 만든 물건, 혹은 던전에서 몬스터를 죽여 습득한 물건을 헌터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원래 명칭은 던전 아이템이지만, 던전이나 헌터와 관련된 건 무조건 헌터란 단어부터 가져다 붙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냥 헌터 아이템이라고 불렀다.

헌터 아이템은 던전 밖의 물건과 비슷하게 생겼고 쓰임새도 거의 같지만, 게임 아이템처럼 특수 능력치가 붙어 있었다. 조던 농구화를 신어도 덩크 슛을 못했던 사람이 가뿐히 덩크 슛을 할 수 있을 정도?

아이템에 붙는 능력치는 천차만별. 고급 아이템일수록 능력치가 좋았다. 노멀 등급 헌터 아이템은 덩크 슛을 할 수 있게 하는 정도지만, 에픽 헌터 아이템은 하늘을 날 수도 있게 해 준다고 한다. 실제로 본 사람은 없다. 에픽 헌터 아이템은 S급 헌터만큼 귀하니까.

노멀 등급 헌터 아이템은 헌터가 아니더라도 착용할 수 있고 능력치 보정을 받을 수 있지만, 높은 등급의 헌터 아이템은 일반인뿐 아니라 급이 낮은 헌터들도 착용할 수 없었다. 설사 착용한다 해도 패널티 적용을 받아 헌터 아이템의 능력치를 일부만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세상에 등장한 헌터 아이템은 그 성능과 등급에 따라 나뉘는데 흰색부터 분홍색까지, 등급에 따라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그래서 그 색만 보면 아이템의 등급을 알 수 있었다.

지연이 신고 있는 운동화도 헌터 아이템이었다. 부모님께서 지연이 유명 일간지의 수습기자가 되었을 때 사 주신 것이었다.

노멀 등급이라 은은한 흰빛을 내뿜는데, 이것도 수백만 원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헌터 아이템은 매물이 적어 일반 사람들이 사기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지연이 그 대단한 일간지의 기자 자리를 포기하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삼류 인터넷 매체에 들어간 걸 알고 무척 화를 냈다. 하지만 운동화를 도로 팔아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운동화들을 몽땅 치워 버리고, 헌터 아이템 운동화만 신고 다니게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운동화를 신고 남보다 빨리 뛰어 도망치라고.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고. 헌터가 아닌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랬다.

부모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건지, 지연은 인스턴트 던전에 빨려 들어왔을 때 이 운동화 덕분에 살아남았다. 등 뒤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죽자 사자 뛰어 달아날 수 있었으니까.

평범한 운동화를 신었다면 던전 입구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지연은 다시 떠오르는 기억에 진저리 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척. 그래야지만 버틸 수 있었다. 혼자 도망친 죄책감,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를.

그런데 남자의 선글라스는 지연의 운동화만큼도 빛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평범한 선글라스라는 건데.

지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자의 옷과 신발을 다시 살펴보았다. 역시나 보통의 옷과 신발이었다.

‘날 구하러 온 헌터는 아닌가 봐.’

실망스러웠지만 뭐, 그래도 괜찮았다.

“자, 잠깐만요!”

남자가 다가오려고 하자 지연은 그를 제지했다.

“확인해 봐야겠어요. 더, 던전엔 인간형 몬스터도 있다고 하잖아요?”

남자는 제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이 안 보이지만, 남자가 절 기특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남자는 지연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었다. 많아 봤자 스물다섯? 여섯? 선글라스를 써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서른이 넘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절 어린 조카 보듯 볼 리가 없었다.

“자,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세요.”

지연이 남자를 노려보듯 보며 말했다.

로또 당첨되었을 때 당첨금 수령하는 방법과 함께 인터넷에 떠도는 방법이었다. 던전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인지, 몬스터인지 확인하는 방법.

“김치 하루에 몇 번 드세요?”

“……?”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글라스를 써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냥 기본 반찬 아닙니까?”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말투. 과연 김치 냉장고를 개발한 민족의 일원다웠다.

“정답!”

지연이 짝, 손뼉 쳤다.

“몬스터 아니고 한국 사람 맞으시네요.”

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끝인가요?”

남자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뭐가 더 필요한가요?”

“음, 아뇨.”

남자가 뒤늦게 수긍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던전의 몬스터가 김치를 매끼마다 먹을 것 같지는 않았나 보다.

“이름이 뭡니까.”

이번엔 남자가 물었다.

남자는 과연 어떤 질문으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확인하려고 할까. 내심 기대했던 지연은 살짝 김이 빠졌다.

“저요? 연지연이에요. 기자죠.”

김이 빠진 것과는 별개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지연이 주머니를 뒤져 꾸깃해진 명함을 내밀었다.

‘아, 취재 중도 아닌데, 명함은 왜 꺼냈지?’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남자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자는 명함을 건네받아 손전등 불빛에 비춰 보았다.

“연지곤지 찍는다 할 때 그 연지?”

남자가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아, 예. 그 연지요.”

지연은 좀 놀랐다.

“제가 이상한 걸 물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그냥, 음, 제 이름 들으면 다들 이름 앞뒤가 똑같은 거냐고 물어보거든요. 아니면 연지현이냐 그러거나…… 아, 명함 때문에 그러진 않으셨겠구나. 어, 연지곤지냐고 묻는 말은, 어…… 너무 오랜만에 들어봐서요.”

“그렇습니까? 하긴, 요즘엔 연지곤지란 단어를 잘 안 쓰겠군요.”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그렇죠.”

그 바람에 지연도 미심쩍은 느낌을 흘려 버렸다.

“그런데 저건?”

남자가 바위 뒤쪽을 턱짓했다.

“아!”

지연은 그제야 돌아서 손짓했다.

“얘, 이제 나와도 돼. 여기 아저씨도 우리랑 같은 생존자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

남자는 지연이 저를 아저씨라고 불러도 눈 한 번 깜짝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위 뒤에서 무언가 스윽 걸어 나와 지연의 옆에 섰을 땐 눈썹을 찌푸렸다.

바위 뒤에서 나온 건 이제 일고여덟 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겁에 질렸는지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은 반쯤 감겨 땅만 내려다봤고, 두 손은 제 몸통만 한 강아지 인형을 꼭 안고 있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쪼르르, 지연의 다리 뒤로 숨었다.

“여기에 얘 숨어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들렸습니다.”

남자가 제 귀를 톡톡 두드렸다.

“숨소리요? 난 못 들었는데……. 에이, 숨소리도 울리는 줄 알았으면 뒤에 숨어서 오라고 하지 말걸. 얘, 많이 무서웠지?”

“…….”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 괜찮아. 누나도 있고, 저기 아저씨도 있잖아. 조금만 더 걸어가면 우릴 구하러 온 헌터님들도 만날 수 있을 거야.”

지연이 애써 밝게 말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속 함께 다닌 겁니까?”

“네. 걷다가 중간에 만났는데, 혹시나 싶어서 제가 앞서 걷고 얘는 뒤에서 좀 떨어져 걸어오라고 했어요. 혹시라도 몬스터가 나타나서 절 공격하면, 얘라도 그 틈에 도망가라고요.”

“…….”

남자가 말없이 지연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세요? 재난 상황에서 어린이를 우선시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던전에 갇혔을 때 지켜야 하는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어요.”

“정확히는 여자와 어린이, 노약자로 쓰여 있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는 저랑 얘가 뒤따라 갈 테니까 그쪽이 앞장서실래요?”

지연이 농담 삼아 말했다. 정말 남자를 앞세우고, 아이와 둘만 도망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그건 좀 곤란하겠습니다.”

남자는 진지하게 답했다.

“어…… 네.”

‘좀 깬다.’

지연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그 키와 몸이 아까웠다. 역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지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함께 걷자며 손짓했다.

‘진짜 깬다.’

지연은 남자를 슥 보고는 오히려 앞장서 걸었다.

스무 걸음이나 걸었을까. 지연은 아이를 생각해 걸음을 늦췄다. 남자는 그 긴 다리로 휙휙 걸어 금세 지연을 따라잡았다.

“쟤한테도 그거 물어봤습니까?”

“뭘요?”

남자의 말투가 좀 딱딱한 거 같다고 생각하며, 지연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거 말입니다. 매 끼니 김치 반찬.”

“님, 장난해요?”

“음?”

“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울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구요. 처음에 던전 입구에서 난리 났을 때 부모님을 잃어버리고 충격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런 애를 의심해서 너 김치 먹을 줄 아냐고 물어보라고요? 게다가 요즘엔 김치 잘 못 먹는 애들도 많단 말이에요!”

지연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애를 의심해요? 의심해요? 해요? 짜증 난 목소리가 여기저기 메아리쳤다.

“아.”

지연은 자신이 과민반응했다고 생각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연은 지독하게 피곤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는 동굴. 겨우 만난 사람이라고는 겉만 멀쩡하고 속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방금 만난 남자가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불쌍한 아이를 의심했다.

동굴은 끝없고, 옆에서 걷는 남자는 짜증 나고, 왜 하필 인스턴트 던전이 내가 취재하러 간 곳에 열린 거고, 왜 하필 나는 던전에 빨려 들어와 버린 걸까.

왜 하필, 내가.

내가!

짜증이 확 폭발하려 하는데.

툭.

발에 뭔가 걸렸다.

지연의 몸이 휘청했다.

“조심.”

남자가 팔을 잡아 주었다.

“…….”

아이도 다리를 꽉 잡아 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고마워.”

지연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핸드폰 손전등 불빛을 발아래로 비추었다.

“여태껏 이런 적 없…….”

지연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발에 걸린 건 돌부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다리였다. 나머지 몸은 어디에 놔둔 건지 다리 한 짝만 길게 널브러져 있었다.

“…….”

어둠 속에서 다리 하나 없는 시체가 통통 뛰어와 ‘내 다리 내놔!’하고 외치는 게 무서울까. 아니면 나머지 다리마저 먹어치우겠다며 몬스터가 달려오는 게 더 무서울까.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까.’

나 생각보다 담력이 센 걸지도. 나야말로 헌터 해야 되는 거 아냐? 하하하.

“괜찮습니까.”

남자가 지연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흠칫, 지연은 몸을 떨며 그 손을 쳐냈다. 단순한 거부라기엔 너무 격했다.

“아.”

지연은 퍼뜩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표정을 알기 어려웠다.

“죄, 죄송해요. 죄송…….”

걱정해 줘서 그런 걸 텐데. 기분 나빴을 텐데. 미안하다고 해야 하겠지? 생각이 엉켰다.

입이 얼어붙어 생각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더 급해져서, 자꾸 말이 헛돌았다.

“너무 떨고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연지곤지 씨?”

남자의 말을 듣고야 지연은 제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단지 떨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방금 뭐라고?”

지연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제가 한 말에 크게 감흥이 없어 보였다.

“지금 너무 떨고 있습니다?”

“아뇨, 그거 말고.”

“괜찮습니까?”

“아니, 그거 말고요.”

“연지곤지 씨?”

“네, 네. 그거요.”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문제될 거 있습니까?”

“아니, 문제될 건 없……지는 않죠.”

하마터면 남자의 태도에 말려들어갈 뻔했다. 지연은 눈을 부릅뜨고 반박했다.

“없지는 않다니 없다는 뜻이네요.”

그래도 남자는 태평했다.

“제 말뜻이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들리는 대로 듣지 말고 행간을 읽으세요, 좀!”

지연은 계속 딴청 부리는 남자가 짜증 나 언성을 높였다.

대한민국 국민의 문맹률은 0%에 수렴하지만 문해력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더니. 눈앞의 남자가 그 통계의 산증인인 것 같았다.

“기자니까 다른 뜻이 있어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비꼬는 건가요?”

“비꼬는 걸로 들립니까?”

“그게 아…… 하아, 아니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좀 예민한가 봐요.”

무심코 다시 발아래를 볼 뻔했다.

‘으으.’

지연은 얼른 눈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는다는 걸.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어느새 떨림이 멈춰 있었다. 식은땀도 나지 않았다. 남자의 무덤덤한 태도가 지연을 진정시키는데 단단히 한몫한 듯했다.

‘설마 날 생각해서 일부러?’

지연은 새삼스럽게 남자를 바라봤다. 살짝 남자를 다시 볼 뻔했는데.

“뭐합니까. 뒤처지지 말고 빨리 내 옆에 서십시오.”

남자의 재촉에 김이 샜다.

‘날 배려해서 그랬을 리 없지.’

‘던전 안’이라는 위급 상황에서도 여자와 아이를 보호하긴커녕 제가 먼저 희생당할까 봐 발맞춰 걷자는 놈인데, 뭘.

너무 실망해서, 무엇 때문에 남자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도 까먹어 버렸다.

“가시죠.”

남자가 재촉하며 손짓했다. 어서 제 옆으로 와 걸으라는 것이었다.

‘거봐. 우씨.’

지연은 욱하는 마음에 바닥에 놓인 남의 다리를 펄쩍 뛰어넘었다. 지연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아이도 폴짝 뛰어넘었다.

“…….”

아이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어둠 속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연은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고개를 돌려 주었다.

“그런 거 보지 마.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서워하지도 말고. 알았지?”

“…….”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냈다.

“왜요? 뭔가 보여요?”

지연은 후다닥,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어둡네요.”

남자가 손전등 불빛이 닿지 않은 동굴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

지금 장냔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치고 올랐다. 성질대로 내지르고 싶었지만. 다리를 꼬옥 붙드는 아이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실어증 증세까지 있는 아이 앞에서, 어른들이 싸우면……. 그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참자, 참아. 화내면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야.’

지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눈으로 온갖 욕을 하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강렬한 눈빛 공격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깨나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지연은 남자 덕분에 기운이 나서 더욱 씩씩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조금도 고맙진 않았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와 지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도도도 뛰어와 다시 지연의 다리에 꼭 매달렸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남자의 눈이 힐끔, 둘을 보았다.

곧 지연은 조금 전에 고작 다리 하나에 놀랐던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의 시체가 널려 있었으니까.

시체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팡! 터진 풍선 인형처럼 몸의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머리와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흥건한 핏물 속에서 팔다리만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지연은 즐비한 시체들을 보다 못해 무덤덤해지……기는커녕, 핸드폰을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동굴은 어두웠다. 걸으려면 불빛을 비춰 앞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불빛이 닿는 곳마다 시체가 드러났다.

지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우웩, 토했다.

동굴에 들어온 이후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으니 나올 것도 없었다. 신물만 올라올 뿐이었다. 오히려 두 눈에서 더 많은 분비물이 나왔다.

지연은 눈물을 줄줄 흐르는 눈을 팔로 슥슥 문지르며 토악질을 마저 했다.

“이런.”

남자가 지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큰 손은 거칠었으나 의외로 자상하…….

“웬만하면 참으십시오. 탈진해서 못 걸으면 안 되니까.”

……기는 개뿔.

“그럼, 등 두드리지 말, 라, 우웩.”

지연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째려보았다. 몬스터는 뭐하나, 이놈 안 잡아가고.

“눈을 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요.”

“그거 쓰고 제 눈이 보이긴 하세요?”

지연의 말이 뾰족했다. 남자는 하하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당연히 잘 보이죠 따위의 허세 가득한 말을 하기만 해 봐라. 정말로 잘 보이게 해 줄 테니까. 주먹으로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서. 그럼 일부러 선글라스를 쓸 필요도 없어지겠지.

지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래 봬도 태권도 검은 띠였다. 초등학생 때 딴 거지만.

“당연히 잘 안 보이지요.”

“그럴 줄 알…… 네?”

“어두운 곳에서 선글라스를 쓰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가 초등학생을 가르치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 그걸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연지곤지도 잘 모른다고 해서, 그런 것도 잘 모르나 싶었는데.”

남자는 진지했다.

‘멕이는 거야, 뭐야.’

어쩌다 만나도 저런 또라이를 만나서.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먹어요? 사람 맞아요?”

“아닌 걸로 보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기자님이 말씀하시니까, 뭔가 있나 해서요.”

초면에 당신 등 뒤에 원혼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고 말해 주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터였다.

“제 등 뒤에 뭐가 있습니까? 아까부터 계속 제 뒤만 보시네.”

선글라스 써서 잘 안 보인다면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저 무속인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사실은 보여, 보인다고! 당신의 개 같음이!

“다행이네요. 신내림 받으면 사는 게 고달프다는데.”

“아이고, 제 인생 걱정까지 해 주시니 참 고오맙습니다.”

“별말씀을. 기자님은 웬만하면 별 탈 없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니까.”

“…….”

속으로 실컷 남자를 욕하던 지연이 멈칫했다.

‘뭐야, 왜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와.’

저 놈의 키와 체격이 문제였다. 이런 곳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또라이라도 괜찮은 남자로 보이게 만드니까.

지연은 잠깐 설렐 뻔했던 자신을 탓하며, 눈에 힘을 팍 주었다.

‘아까 하는 말 못 들었어? 선글라스를 써서 앞이 잘 안 보인다잖아. 나보고 그거 모르냐잖아. 젠장. 또 다른 거 이상한 점은 없나. 찾기만 해 봐. 이번엔 또 뭐라는지 두고 보자.’

민망하고 어색해서, 괜히 오기를 부리며 남자를 손전등 불빛으로 비춰 보았다.

바지 아랫부분은 젖어 있었다. 핏자국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는 지연과 함께 시체 가득한 길을 걸어왔으니까.

최대한 시체와 피웅덩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한 지연의 신발과 바짓단도 피에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의 바지 끝이 피에 젖어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데.

……왜 피가 무릎 위, 허벅지에까지 튀어 있는 걸까. 심지어 스웨터에도 피가 튀어 있었다.

‘왜 몸 여기저기에 피가 튀어 있는 거지?’

동굴 입구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을 때 도망치다가? 아니면 피웅덩이를 잘못 밟아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도망친 건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연의 몸엔 저렇게까지 피가 튀지 않았다. 피웅덩이를 밟았다고 해도, 허벅지 위까지 튈 것 같지는 않은데.

‘꼭 사람을 죽이다 몸에 튄 것 같…….’

잖아, 하하하.

실없이 웃으려고 했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은 남자가 지연을 만나기 전까지 걸어온 길이었다.

그때. 처음 만났을 때, 남자의 모습이 어땠지?

남자는 손전등은커녕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다.

동굴은 핸드폰의 손전등 앱 불빛 없이는 몇 발자국 걷기도 어려웠다. 남자는 그런 곳에서 손전등 없이, 선글라스까지 쓰고 지연에게로 걸어왔다.

돌부리에 발이 한 번 걸리지도 않고, 숨이 거칠어질 정도로 급하게 뛰어오기까지 했다.

헌터도 아닌 평범한 생존자가, 가능한 일일까? 몬스터가 아니고서야 평범한 사람이 그럴 수 있을 리가.

“…….”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연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불안한 마음을 읽은 걸까? 아이가 다리에 매달렸다. 다리를 끌어안은 힘이 너무 강해서…….

“으.”

절로 신음이 나왔다. 살살 잡으라고, 그러면 우리 둘 다 도망 못 간다고 눈치를 줘야 하는데. 남자의 눈을 피해 아이에게 말해야 하는데.

“왜 그러십니까?”

남자가 빙글, 돌아섰다.

“아, 아니요. 그, 그게, 그러니까요…….”

지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사이드 키를 눌렀다. 손전등 불빛이 깜빡, 꺼졌다가 켜졌다.

“해,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 가나 보네, 하, 하하, 하필 이런 때…….”

국어 교과서를 읽어도 이보단 나으리라 싶을 정도로 어색했다.

“호, 혹시 손전등 있으세요?”

“아니요.”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아, 아, 그, 그러시구나. 그럴 수 있죠. 근데…….”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뇨. 문제는, 문제랄 건 없는데…….”

지연은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소, 손전등도 없이 어떻게…… 어, 어떻게 걸어왔어요?”

선글라스까지 쓰고?

남자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아이에게 붙잡힌 다리는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애써 참았던 울음이, 두려움이, 아니 공포가 밀려들었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로 돌아 도망가지도, 남자에게 달려들어 태권도 검은 띠의 매운맛을 보여 줄 수도 없었다.

쯧.

남자가 혀를 찼다.

“이제야 눈치채다니.”

“……!”

지연은 숨 쉬는 걸 잊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제 스웨터를 들어 올렸다. 맨살이 드러났다.

지연은 겁에 질려 얼어 버린 와중에도 군살 없이 탄탄한 남자의 식스팩 복근을 보고 감탄해 버리고 말았다. 탄탄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 몸뚱이를 본 건 지연만이 아니었다.

“이리 오든지.”

남자가 제 배를 가리켰다.

내내 지연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아이가 지연의 다리를 놓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악!”

아이의 껍데기는 지연의 옆에 그대로 서 있다가 풀썩 쓰러졌다. 남자에게 달려든 건 아이 속의 알맹이였다.

한마디도 못하던 입이 쩍 벌어지며 꿈틀거리는 축축한 촉수가 뭉텅이가 쏟아졌다.

아이의 자그만 머리통은 그 격렬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했다. 입이 찢어지는가 싶더니 머리가 터졌다.

피와 잔해가 지연에게까지 튀었다. 지연이 놀랄 새도 없이 그 징그러운 촉수 뭉텅이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옳지, 그래야지.”

남자가 손을 뻗었다.

“위, 위험해, 피해요!”

지연의 외침이 동굴에 쩌렁하게 울렸다. 동시에 남자가 그것을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첨벙, 피웅덩이에 빠진 것이 징그럽게 요동치며 남자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촉수가 남자의 몸으로, 손으로 파고들려 했다.

콰직.

남자는 촉수 뭉텅이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아예 짓이겨 뭉개 버렸다.

꾸르르르르르.

피웅덩이에서 공기 방울이 피어올랐다.

요란하게 남자의 다리를 감고 버둥거리던 촉수 덩어리가 축 쳐져 피웅덩이에 잠겼다.

남자는 그것을 발등으로 살짝 건져 올려 공 차듯 차 버렸다. 촉수 덩어리가 근처 바위에 철썩 붙어 곤죽이 되었다.

“으악.”

지연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바닥에 엎어진 아이의 시신을 보았다.

“으아악.”

배에 큰 구멍이 뚫려 있어 몸이 너덜너덜했다. 구멍이 조금만 컸어도 팔다리가 덜렁덜렁 흔들렸을 것이다.

아이가 끌어안고 있던 인형은 근처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배와 닿았던 부분의 털이 말라붙은 피로 뭉쳐 있었다.

배의 구멍을 가리기 위해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아이가 살아 있어서 제 인형을 놓치지 않았던 걸까.

“몬스터가 몸을 파고 들었을 때 즉사했을 겁니다.”

남자는 지연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지연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몬스터가 미숙한 개체였습니다. 보통은 입을 통해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배에 구멍을 내다니.”

남자가 다가와 언제 떨어뜨렸는지 모를 핸드폰을 집어 들어 남은 배터리 양을 확인하곤-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지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지연은 파드득 몸을 떨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보통은 그런 걸 궁금해하더군요. 얼굴에 다 쓰여 있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입니다.”

“아.”

지연은 무심코 뺨에 손을 댔다. 뭔가 진득하게 손에 묻었다. 그게 무얼까 생각하자마자 다시 굳어 버렸다.

“이런.”

남자가 혀를 차며 스웨터를 벗었다.

이 와중에도 남자의 상체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슬프게도 남자는 반팔 셔츠를 속에 받쳐 입고 있었다. 천이 얇아서 몸 선이 다 드러나고 소매는 팔 근육 때문에 팽팽해져 있어서 또 나름의 볼거리긴 했지만.

남자는 스웨터의 깨끗한 부분으로 지연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남자의 손길은 담백했다. 꼭 어린 딸을 돌보는 아빠 같았다. 아니면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을 돌보는 오빠거나.

애 취급당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성인 남자에게서 이렇게나 성적으로 담백하게 대우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남자가 더러워진 스웨터를 바닥에 버릴 때였다. 바위에 납작 눌려 쥐포가 되어 있던 촉수 덩어리의 끝부분에서 머리인지 꼬리인지 모를 촉수가 뛰어올라 남자를 노렸다.

“뒤, 뒤에!”

지연이 버럭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메아리치기 전. 남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는 야구 선수가 야구공을 받듯 그 촉수를 붙잡았다. 촉수가 손등을 파고들 새도 없이, 악력만으로 촉수를 으깨 버렸다. 콰직.

투둑, 툭.

남자의 손안에서 다진 고기가 된 촉수가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제가 방금 버린 스웨터를 다시 주워 들었다. 그걸로 촉수를 으깬 손을 대충 닦았다. 지연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던 것에 비하면 매우 성의 없고 거칠었다.

“어, 어떻게…….”

어쩌면 조금 전 했어야 했을 질문이었다.

“들렸습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제 귀를 톡톡 두드렸다.

“들리다니요?”

“민달팽이 같은 게 애 몸 안에서 질척이는 소리.”

“…….”

지연은 듣지 못했다.

아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동굴은 아주 작은 소리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곳이었다. 아이 몸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면 분명 크게 들렸을 텐데.

“민간인들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 가장 착각하기 쉬운 점이 그겁니다. 밖과 비슷해 보인다고 던전 안이 똑같은 곳인 줄 아는 거.”

“아, 닌가요?”

“던전은 몬스터 친화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은 이를테면, 몬스터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침입자 내지 이물질이고.”

“그게 무슨…….”

“던전과 몬스터가 한편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설마요.”

지연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다고 동굴이 갑자기 제 정체를 드러내 요동치며 지연을 집어 삼키려 들지는 않았다.

“아마 이 던전도 몬스터가 내는 소리는 울리지 않을 겁니다.”

남자도 지연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진 않지만, 주변에 또 다른 몬스터가 있나 경계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나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걸을 수 있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예? 예, 예에. 어…… 아뇨, 아니요, 예.”

지연은 두서없이 대답했다. 남자는 지연을 가만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왜, 왜 그러세요?”

지연은 감히 그 손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던전에 갇혔을 때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걷는 것 자체는 옳은 행동입니다. 큰 소리를 내며 구조를 요청한 것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에는 아주 잘한 겁니다. 덕분에 제가 기자님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

“당신 잘못한 거 없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연지곤지 씨.”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지곤지.

흐엉. 비로소 울음이 났다. 연지곤지. 그 단어가 가진 마법이 지연을 그렇게 만들었다.

우는 소리가 동굴에 우웅 울렸다. 하지만 남자는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달래는 재주는 없는데.”

뒷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울지 마라, 괜찮다. 달래주기는커녕 함부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난감해하는 중얼거림이, 어설픈 위로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길보다 훨씬 마음 놓였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끝없이 운다더니.”

남자가 농담 반, 한탄 반 정도의 느낌으로 중얼거렸다.

“아니거든요?”

지연은 욱해서 반박했다.

“아, 예에, 예.”

“그런데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크흥.”

지연은 소매로 눈을 문지르며 계속 울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달랐다.

아직 던전 안이다. 우는 소리가 울리면 또 몬스터가 올지도 모른다. 그걸 아는데,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지연은 입을 틀어막고 우는 소리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남자는 간간히 주변을 돌아볼 뿐. 그만 울라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지연의 손에 제 셔츠 자락을 쥐여 주었다.

“잘 잡고 따라오세요. 발밑 조심하고.”

남자가 지연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들고, 지연의 발 앞으로 불빛을 비춰 주었다.

남자가 앞장섰다. 지연은 엉엉 울며 남자를 따라 걸었다. 남자는 더 이상 지연에게 제 옆에 서서 걸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남자는 무척 컸다. 어깨도 넓고 흉통도 두꺼웠다. 어릴 적 봤던 그 사람처럼.

그래서 지연은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티셔츠를 늘어지게 붙잡고 졸졸 따라 걷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도 이랬을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더 울음이 났다.

“아까 나한테, 늦게 알아차렸다고, 크흥,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 그거. 그쪽한테 말한 거 아닙니다.”

“그럼요?”

“그쪽 다리 붙잡고 있던 몬스터한테 한 말입니다.”

“왜요?”

훌쩍. 지연은 울면서도 꼬박꼬박 잘 물어봤다. 남자는 역시 기자답다고 감탄하다가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남자는 아파하지 않았다. 아픈 건 걷어찬 지연 쪽이었다.

“윽…… 돌덩이 같애.”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해요, 흑, 내가 그쪽 때리다가 당한 건데.”

“그럼 안 미안한 걸로 하죠.”

“님, 지금 나랑 장난해요?”

“뭐, 아무튼.”

남자가 슬쩍 말을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장난한 게 맞는 듯했다.

“입이 아니라 배 쪽으로 파고 들어간 걸 보고 덜떨어진 놈이구나 싶었는데. 절 발견하고도 기자님과 저 중에 누구로 껍데기를 갈아탈까 고민하는 거 같더군요. 일부러 허술하게 빈틈을 보였는데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그쪽한테 붙어 있고.”

“…….”

아이가 매달려 있던 다리가 새삼 아팠다.

“겨우 내 쪽으로 갈아타는 게 이득인 줄 알아차린 거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남자가 후, 숨을 내쉬며 말 안 듣는 동생을 보듯 지연을 돌아봤다.

“그쪽이 계속 그거랑 붙어 있는 걸 지켜봐야 했던 제 마음이 어땠을지 아시려나.”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도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던 건가요? 또라…… 아니, 빈틈 있어 보이려고?”

“아니요. 잘 들으려고요.”

남자가 제 귀를 톡톡 가리켰다. 벌써 세 번째였다.

지연은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 개소리야. 생명의 은인 입에서 나왔어도 개소리는 개소리였다.

“인간은 주변을 감지할 때 시각과 청각에 많이 의지합니다. 아, 후각도 중요하긴 하지만. 둘 중 한쪽 감각을 가리면, 다른 쪽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물론 아무나 눈이나 귀를 가린다고 바로 예민해지는 건 아니니까 함부로 따라 하지는 마십시오.”

슬그머니 눈을 감고 걸어 보려 했던 지연은 다시 눈을 떴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뒤통수에 눈 달렸어요?”

“아닙니다.”

“그런 훈련은 어디에서 받았는데요?”

“군에서요.”

“아.”

‘군인인가?’

체격을 보니, 직업 군인 같기도 했다.

“귀가 예민해지려고 일부러 선글라스를 꼈다는 건가요?”

선글라스를 껴서 눈을 가린 것치고, 남자는 한 번 비틀대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동굴 길을 잘도 걸었다. 울고 있지만 두 눈 멀쩡히 뜨고, 핸드폰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걷는 지연보다 훨씬 나았다.

“말했다시피 몬스터가 내는 소리는 울리지 않으니까. 직접 귀로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이런 던전에 와 본 적 있으세요?”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숨 쉬듯 질문이 튀어나오는 게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다.

“네. 여기랑 비슷한 던전이 여수 쪽에 하나 있었습니다.”

남자도 직업병 비스무리한 게 있는 듯했다. 누가 뭘 물어보면 무조건 대답하는 병.

“그 던전이 아직 남아 있는지, 닫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는 가재형 몬스터가 주로 출몰했습니다. 역시나 새끼 크기일 때 인간의 코나 입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크기를 키우는데.”

남자가 잠깐 말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지연은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꾸물꾸물 징그러운 몬스터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가재 몬스터는 딸깍딸깍하고 긁는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판단했습니다.”

여수 던전은 하필, 한창 축제 중이던 여수 앞바다에서 열려 인명 피해가 컸다.

무슨 몬스터가 출몰하는지 몰랐을 땐, 던전 안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생존자라 생각해 구출 작업을 우선시하다가 헌터병들이 줄줄이 사망했다.

군은 어쩔 수 없이 해당 던전에 생존자는 없다고 공식 발표했고, 헌터병들에게는 던전 내에서 인간이 보이는 족족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헌터병들은 던전 안에서 걸어 다니는 몬스터들이 어쩌면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했다. 아니, 거의 대부분 몬스터라는 걸 알면서도 구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군 윗대가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감수성이겠지만, 헌터병들에겐 그런 게 있었다. 우리가 적어도 인간은 죽이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이 지랄을 하고 있다. 그런 마지노선.

헌터병 절반이 대리 입대 입양아 처지였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인간이라면 환멸을 내는 인간불신 성격파탄자들이었으나 그래도, 그랬다.

나중에 가서야 갑각류 몬스터의 껍질이 경직된 인간 몸에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는 걸 알아냈다. 이후 헌터병들은 훈련을 통해 청각을 극대화하여 진짜 생존자와 인간 거죽을 뒤집어쓴 몬스터를 구분해 낼 수 있게 됐지만.

그 전까지, 아니 구분해 낼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여수 가재 던전은 대한민국 내 던전 중 헌터병 귀환율이 가장 낮은 던전으로 악명 높았다.

“어…… 혹시 헌터, 세요?”

지연은 그제야 맨손으로 몬스터를 때려잡고, 어두운 동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도 멀쩡한 남자의 정체를 의심했다.

지연이 특별히 둔해 늦게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요즘 헌터들과는 확실히 달랐으니까.

“네.”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어느새 울음을 멈춘 지연은 남자의 옷을 다시 살펴보았다. 빛을 내뿜는 아이템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몬스터를 죽일 때 휘황찬란한 스킬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헌터라면서? 왜? 어째서?’

지연이 의아해하자 남자가 지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요즘엔 저 같은 헌터를 구헌터라고 하더군요.”

“아.”

지연은 바로 납득했으나.

“……!”

남자의 셔츠를 놓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 왔군요, 입구.”

남자도 멈춰 서서 앞을 가리켰다. 환한 빛이 보였다.

[거기, 생존자입니까?]

“예. 지금 갑니다!”

남자가 손에 든 손전등을 휘두르며 소리친 뒤 자연을 돌아보았다.

“어, 그러니까, 음. 저는…….”

“저기 가서 당신을 인질 삼아 뭔가를 요구하거나 테러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안심하십시오. 구헌터가 모두 테러범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연지연 기자님. 관련 기획 기사도 여러 건 쓰신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죠. 어…… 죄송합니다. 제가.”

지연은 곧바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남자의 말이 옳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을 구해 준 구헌터를 잠재적 테러범 취급하다니.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입니다. 기자님께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남자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지연은 그것을 받고 다시 남자를 따라 걸었다.

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웅성웅성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연은 눈물 나게 반가웠다.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위에서 탈것이 내려왔다. 생존자가 맞는지 확인해야 하니 한 사람씩 올라오라고 했다. 남자는 당연하게 지연을 먼저 태웠다.

“저,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위에 올라가서 정신 없을까 봐 미리 말씀드려요.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러니까 성함하고 연락처 좀.”

지연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늘 가지고 다니는 펜과 메모지가 난리 통에 흘렸는지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을 내밀어 연락처를 찍어 달라 하면 될 일이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던전 안에서 핸드폰은 손전등일 뿐이었으니까.

“연준수 소위님 덕분에 목숨 부지한 게 몇 번인데. 그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에, 아무리 그래도…… 예?”

바지 주머니를 털던 지연이 그 모습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오기 전에 기자님 SNS를 봤는데, 아직 학자금 대출 갚는 중이라면서요. 연 소위님이 기자님 시집갈 때 아파트 사 준다고 월급 꼬박꼬박 모았는데. 그걸로는 해결 안 되는 겁니까?”

“……당신, 뭐야.”

“반밖에 못 모아서 아파트는 못 살 테고. 그냥 학자금 갚는 데에나 쓰십시오. 연 소위님도 잘했다고 하면 했지, 왜 그랬냐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 당신 누구야? 우리 오빠를 알아?”

지연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올립니다. 남자분, 떨어지세요. 위험합니다.]

저 위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덜커덩.

지연을 태운 탈것이 움직였다.

“자, 잠깐! 당신! 당신, 누구야. 우리 오빠, 우리 오빠를 알아요? 아냐고!”

지연이 다급하게 남자를 잡아당겼다. 이대로 붙잡아 저 위까지 함께 갈 생각이었건만.

“위험합니다.”

남자는 손쉽게 지연의 손을 풀어냈다.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지연의 손에 들려 주었다. 접힌 종이였다.

“연 소위님 유품이 유가족에게 인계가 안 되었다고 해서 소각되기 전 빼돌렸던 겁니다. 제 유품 속에 들어있더라고요.”

“잠깐. 잠깐만!”

지연이 다급히 몸을 내밀고 손을 뻗었다. 지금 잡지 못하면 저 위에서 다시 남자를 만날 수 없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남자는 잡히지 않았다.

“그건 연 소위님한테 담배 한 갑 얻어 피운 거 갚는 겁니다.”

남자는 잘 가라며 태평하게 손을 흔들고는, 동굴 저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 잠깐! 잠깐만!”

지연이 아무리 외쳐도,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철커덕.

지연만 태운 탈것이 입구에 닿아 고정됐다.

“괜찮습니까? 말할 수 있습니까?”

올라오는 내내 소리 질렀던 걸 다 들었으면서.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등으로 은은히 빛나는 아이템으로 무장한 헌터들은 열 보 밖에 서서 지연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김장철에 엄마 아빠를 도와 김장했던 후기 썰이라도 풀어야 하는 걸까. 지연은 자신이 몬스터가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지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다가 손에 잡힌 걸 펴 보았다.

바스락.

많이 낡은 사진 한 장이었다. 두 번 접힌 선이 선명하다 못해 찢어질 듯 너덜너덜했다. 그래도 사진 속 인물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자기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유치원복을 입고 있으니, 유치원 다닐 때 찍은 거 같은데. 이게 왜 처음 보는 사람 손에 있었던 걸까. 의문이었다.

지연은 무심코 사진 뒷면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더는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내 동생

연지연.

다시 울음이 쏟아졌다.

“오빠…….”

지연은 아이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헌터들이 서로 눈짓했다.

“중지. 생존자가 확실하다.”

“구급대! 마흔세 번째 생존자 발견. 어서 옮겨! 신원 파악하고!”

조용해졌던 던전 입구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오빠, 오빠아.”

절 둘러싼 헌터들, 플래시를 터뜨려대는 기자들. 그 복작복작한 인파 속에서, 지연은 오빠를 잃고 미아가 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 * *

그 사람은 갑자기 떠났다.

어릴 적 지연은 집을 나서는 그 사람의 다리에 매달려 울고불고 난리 쳤다.

그래서 강아지 인형을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아이를 던전에서 만났을 때도 의심하지 못했다. 도도도 달려와 제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 모습이 꼭 저를 보는 것 같아서.

“얘, 얘가 왜 이러지?”

“연지연! 너 이리 안 와?”

엄마 아빠는 어렸던 지연을 그 사람에게서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지연은 악착같이 버텼다.

“잠시만요. 그러면 더 안 떨어지려고 하고 계속 울 거예요.”

아이의 팔에 벌건 손자국이 남자, 나무처럼 서 있던 그 사람이 엄마 아빠를 막았다.

“어? 어, 어. 그래.”

“그럼 네가 좀…… 달래주겠니?”

지연을 혼내고 화내고 애원하던 엄마 아빠가 쭈뼛거리며 물러나자, 그 사람은 한쪽 다리를 접고 앉아 제 반의 반 토막이나 될까 싶은 지연과 눈을 마주쳤다.

“연지.”

“우에엥.”

지연의 얼굴은 눈물콧물로 엉망이었다. 그 사람은 옷소매를 길게 잡아 늘여 지연의 조막만 한 얼굴을 살살 닦아 주었다.

“가, 지 마아. 흐어엉. 가지 마아아.”

“가야 돼.”

“왜 가아, 연지 두고 가지 마아아. 오빠아, 싫어, 연지 버리고 가지 마.”

“오빠 너 버리고 가는 거 아니야. 나는 너…….”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

‘오빠 너 버리고 가는 거 아니야. 나는 너 지키려고 가는 거야.’

고작 스무 살이었다. 다섯 살 아이한테는 아빠보다 커 보이고 어른 같았지만. 그도 그땐 고작 스무 살이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기 싫었을까. ……울고 싶었을까.

고작 스무 살인 그를 그 무서운 곳으로, 가기 싫은 곳으로 내몬 건 그의 키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조막만 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가 울 수도 없게 만들었다.

저가 뭐라고 펑펑 울며, 그가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던 걸까. 당신은 그런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얼마나 싫었을까. 얼마나 미웠을까.

“오빠, 열 밤만 자면 돌아올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상냥할 수 있었던 걸까.

“열 밤 싫어. 가지 마! 그냥 연지 옆에 있어어!”

“……꼭 갔다 와야 해.”

“으아아아앙, 싫어, 싫어어어어!”

“대신 진짜 열 밤만 자고 올게. 오빠, 연지한테 꼭 돌아올게. 약속해.”

그가 제 바지를 꼬옥 움켜쥔 지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히잉. 정말, 열 밤 지나면 올 거야?”

“그럼.”

지연은 그의 새끼손가락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잠시 기다리다가 아주 쉽게 제 손을 빼냈다.

“흐에엥, 왜에에…….”

다시 빼액- 소리치며 또 울려 했건만. 그가 지연을 끌어안았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제나 지연이 먼저 매달려야 곤란한 듯 웃으며 안아 주었던 그가 먼저 손 내밀어 준 것은.

“오, 빠?”

지연이 놀라 울음을 멈추자.

“연지야, 오빠 잊으면 안 돼.”

그가 작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지연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는 모자를 꾹 눌러써 눈가를 가리고는 엄마 아빠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돌아서 뚜벅뚜벅 집을 나섰다. 더는 지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빠, 오빠아! 가지 마아아아아!”

지연이 우는데. 세상 떠나가라 우는데. 그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지연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날, 지연은 종일 울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병원에서도 계속 오빠만 찾으니, 보다 못한 아빠가 훈련소에 연락해 막 입소한 양아들의 외출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그게 지연의 가족이 그가 살아 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연락이었다.

지연이 쑥쑥 자라 그때의 그와 같은 스무 살이 되고, 그가 죽었다던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되었다. 그래도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명해졌다.

고작 스무 살, 연준수.

왜 당신은 고작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때문에 그렇게 죽었어야 했던 걸까. 당신을 데려갔으면서, 시체도 찾아오지 못했으면서, 왜 세상은 고작 십 년 만에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당신은 헌터가 되고 싶지도, 그렇게 죽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당신은 그렇게 죽여 버린 주제에. 왜 이 세상은…….

“괜찮으세요?”

“아…….”

지연은 고개를 들었다.

구급대원이 물과 담요를 내밀었다. 그는 이미 지연을 구급차에 앉히고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던전 입구에서부터 기자들 앞에 서서 플래시 세례를 받는 내내 그녀는 계속 울었다.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헌터들은 큰 소리로 구급대를 불렀다. 지연은 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인파를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

시끌시끌한 던전 입구에서 조금 벗어난 것만으로 한적한 느낌이 들었다. 마흔네 번째 생존자가 발견되어 지연을 향한 언론의 관심이 수그러든 덕분이기도 했다.

지연은 생수병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이대로 울다 온몸이 녹아 버리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손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지연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연지연

내 동생.

스무 살 성인이 된 다음 날. 이것과 똑같은 글씨체로 쓰인 우편물을 받고 나서, 지연은 고 연준수 소위의 지정 상속인이 되었고 그가 남긴 통장을 받았다. 다달이 모은 월급, 사망 확인 후 일시금으로 입금된 위로금.

강남 아파트를 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큰돈이었다. 부자 부모를 두고서도 가난한 척하는 대학생이 자취방 월세 걱정하지 않고, 아르바이트 하지 않고,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고 학교를 다니는 것쯤이야 가뿐할 정도로.

하지만 통장을 받은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연은 통장에서 단 1원도 빼 쓰지 않았다. 조금 전 동굴에서 만난 남자는 얼마든 빼 쓰라고 했지만, 지연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제 통장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람 생각에 눈물 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또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는 누굴까. 누군데, 우리 오빠를……. 나를…….’

힘없이 눈을 감는데.

“지금 마음, 변치 않을 자신 있습니까?”

구급대원이 물었다. 조금 전, 물과 담요를 건네줄 때보다 훨씬 낮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지연이 다시 눈을 떴다.

“당신은 또 뭐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고 연준수 소위.”

“……!”

“죽은 오빠에 대한 마음. 오빠를 죽게 만든 이 세상에 대한 분노. 그대로 혼자만 속상하고 말 겁니까? 아니면.”

구급대원은 지연이 걱정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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