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각성 (3/6)

#3. 각성

일주일 뒤. 연우가 몰래 갔다 왔던 인스턴트 던전이 닫혔다.

던전 내 생존자를 모두 구출하고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실종자 수와 대조한 후, 던전 내 다른 생존자가 없다고 결론 난 뒤였다.

던전 내 자원 시료 검사는 그보다 며칠 전에 결과가 나왔다. 검사 결과, 고정시켜 정규 던전으로 만들 가치가 없는 던전이었다. 동해 길드는 곧바로 던전의 왕을 죽이고 던전을 닫았다.

국가에서는 생존자와 사망자에게 충분한 보상과 지원을 약속했다. 동해 길드에서는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 수익의 10%를 생존자와 사망자의 유가족을 돕는 데 쓰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한국에서 열린 인스턴트 던전은 세 곳이었다. 대한헌터협회에선 즉각 공시했고, 최종 낙찰 받은 건 동해 길드와 DG 길드, 강원도향토회 연합 길드였다.

정부에서는 새로운 던전 발견 시 ①발견-②공시-③낙찰-④선공-⑤후공 길드 선정까지, 일련의 과정이 1시간 내에 이루어지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I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나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특히나 던전 ①발견-②공시-③낙찰 과정은 5분 내외로 이루어졌다. 온갖 길드가 낙찰을 받으려고 뛰어드니, 그 5분 사이에 초를 다투는 결전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규모 좀 있다 하는 길드에서는 공시 모니터링팀과 낙찰팀을 따로 두고 24시간 체제로 운영했다.

이번에 인스턴트 던전을 낙찰 받은 세 길드는 거의 동시에 공략에 나섰으나, 가장 먼저 일을 마무리 지은 건 동해 길드였다. 민간인 생존율도 가장 높았다. 언론에서는 역시 동해 길드라고 추켜세웠다.

동해 길드장의 형이 인스턴트 던전 근처를 어슬렁거리더란 이야기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김정우 하사의 시신이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군에서 일련의 조사를 끝내고 시신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준 것이었다.

김정우 하사가 던전에 투입했다가 사망 처리되어 부고를 받은 날부터, 던전이 다시 열려 모연우 소위가 무사히 살아 돌아온 날까지. 다시 김정우 하사의 시신을 돌려받은 날까지. 김정우 하사의 부모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군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해서 겨우 되찾은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나마도 반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늙은 부모는 아들의 관 위에 쓰러져 오열했다. 그 모습이 생중계됐다.

10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대학로 01 던전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그 던전이 다시 열리고 모정우 대령의 형이 살아 돌아왔으니, 대중의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 관심이 모정우 대령의 형과 최후까지 살아남아 10년을 버틴 걸로 추정되는, 하지만 모정우 대령의 형과 달리 다시 살아나지 못한 김정우 하사에게 쏟아졌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김정우 하사는 고(故) 김정우 중위가 되었다. 각종 훈장이 더해지고 특진이 더해졌다. 성금이 모이고, 추모 열기가 뜨거워졌다.

국가에서 마련해 준 으리으리한 장례식장엔 입구부터 대통령과 국무총리, 육군참모 총장 등이 보내온 화한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조문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영예도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달래진 못했다.

연우는 둘째 날에 조문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을 때, 정우는 가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일이 있어 함께 가진 못한다며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길드원 넷을 붙여 줬다. 모두 A급 헌터였다.

길드원들은 각종 아이템을 착장하여 온몸이 붉은빛, 보랏빛으로 빛났다. 은은하게 빛나는 헌터들 사이에, 헌터 아이템을 하나도 차지 않은 연우의 모습이 도드라졌다.

보호인지 감시인지 모를 호위를 받으며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복작복작하여 소란스럽던 빈소가 딱 고요해졌다. 시간이 멈출 것 같았다. 장례식장이 타임홀 던전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은 없겠지만. 연우가 느끼기엔 비슷했다.

사람들은 A급 헌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연우를 대놓고 쳐다봤다. 핸드폰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사람은 셀 수도 없었다.

영정 앞에 서자 길드원들은 알아서 뒤로 물러나 주었다.

영정 사진 속 김정우 하사는 활짝 웃고 있었다. 얼굴은 연우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인데, 머리카락이 길었다. 입고 있는 옷도 캐주얼했다. 아마 입대하기 전에 찍은 것이리라.

헌터병은 입대해 훈련소 숙소를 지정받자마자 사진을 찍는다. 미리 영정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군에서도 복장을 단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멋을 내겠다며 군모를 삐딱하게 세우거나 옷깃을 세우는 훈련병은 없었다. 적어도 연우가 사진을 찍을 땐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빳빳하게 다린 군복을 입었다. 카메라 앞에 앉을 때마저 군복에 주름이 갈까 봐 조심조심 앉았다.

반듯한 자세. 경직된 얼굴.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하는 시점이었다.

김정우 하사의 시신이 인도되었을 때, 군에서는 그때 찍은 사진으로 만든 영정도 함께 딸려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우 하사의 부모님은 절대, 절대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속 제 아들의 모습을.

연우는 활짝 웃고 있는 김정우 하사의 영정 앞에서 두 번 절하고 상주 앞에 섰다.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던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연우를 보고는 기우뚱, 몸을 일으켰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소금으로 만든 인형 같았다. 하도 울고 울어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지만, 흘린 눈물이 말라 소금기로만 남아 버린 사람.

아버지는 비쩍 마른 고목이었다. 그에겐 생기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듯 상주의 의무가 그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텅 빈 눈으로 연우를 봤다. 연우는 그 흔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죄송합니다. 김정우 하사는 끝까지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싸웠습니다. 부모님을 많이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할까? 해도 될까?

연우는 뒤늦게 자신의 안일함을 깨달았다. 와야 한다고 생각만 생각했을 뿐. 김정우 하사의 부모님을 마주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죽은 동료의 장례식에 처음 와 본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안일했다. 상관의 뒤에 선 무리의 일원일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눈물과 악다구니를 받아내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건 늘 상관의 몫이었다. 연우와 다른 헌터병들은 장례식장의 장식처럼 서 있으면 되었다.

더러는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보며 옆에 선 헌터병들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투덜대기도 했다.

‘죽어서도 복 터진 새끼.’

죽은 동료에 대한 한탄 반. 부러움 반. 그런 뉘앙스였다.

헌터병들은 죽어서도 급이 나뉘었다. 장례식을 하는 부러운 놈. 유가족이 시신이라도 챙겨 주는 복 받은 놈. 시체가 되어서조차 돌아갈 곳이 없어 군부대 뒤 화장터에서 태워지는 박복한 새끼.

혹시 자신이 죽으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려 주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놓지 못하고, 양부모와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는 헌터병들도 꽤 있었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음 다음에 뭔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살아 있는 게 더 좋은 거 아니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나도 조만간 죽을 것을 알기에, 눈물과 곡소리 가득한 장례식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김정우 하사의 장례식은 헌터병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복 터진, 아주 호화로운 장례식이었다. 밖에 늘어선 화환과 꾸역꾸역 밀려드는 조문객 때문이 아니었다.

죽은 아들의 반쪽 시신이라도 끌어안아 주는 부모가 있으니까.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주는 가족이 있으니까.

연우가 대책 없이 찾아온 것과 달리, 김정우 하사의 부모님은 연우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둔 게 있는 듯했다.

“사람들 시선 때문에 고민했을 텐데…… 와 주어 고맙습니다.”

각오한 것보다 힘든 일인지, 말이 중간에 몇 번이나 끊겼다. 그래도 김정우 하사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해 냈다. 연우도 버텼다.

“우리 정우…….”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휘청, 했다. 옆에 서 있던 가족친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연우의 팔을 붙잡았다. 마른 손은 갈퀴 같았다.

아마도 김정우 하사가 입대하기 전까진 좀 더 살이 붙어 있고 부드러웠겠지만. 아니, 어쩌면 그때도 이미 이렇게 마르고 억셌을지 모른다. 아들이 헌터병이 될 날을 마음속으로 셈하며 하루하루 바짝 말라갔겠지.

“우리, 정우랑…… 계속 거기서 같이 있었다구요?”

“예.”

“그 무서운 곳에서? 계속, 우리 정우를 지켜, 줬던 거예요? 그쪽이?”

“함께 싸웠습니다. 김정우 하사는, 중위는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애는……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데. 그래서 이사 가서 겨우 제 방 생기니까, 혼자 자게 되니까. 귀신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 계속 불 안 끄고 잤는데…….”

“…….”

“그런데 우리 정우가, 십 년 동안 그 어두운 곳에서!”

팔을 움켜쥐니 손이 더욱 억세졌다. 손톱이 연우의 팔을 파고들려는 듯 날을 세웠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건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 쪽이었다.

애써 유지했던 이성은 얇디얇은 살얼음판이었다. 그 아래 도사리고 있는 용암 같은 분노와 슬픔을 견뎌내지 못했다.

“왜, 왜 내 아들만 죽은 건가요?”

“여보!”

“왜! 왜! 왜 당신만 살아 돌아온 건데!”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김정우 하사의 아버지와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제가 언제 소금 과자 같았냐는 듯 그들을 밀쳐냈다.

조문객 무리 중에 숨죽이고 있던 기자들이 튀어나와 사진을 찍어 댔다. 유가족 측에서 그들을 말리다가 몸싸움이 벌어졌다.

관망하던 길드원들이 그제야 연우를 보호하려고 다가왔다. 연우는 손을 들어 그들이 더 다가오는 걸 막았다. 다시 일어나 아내를 붙잡으려는 김정우 하사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연우는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연우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잡혔다. 흔들리고 부닥쳤다. 할퀴는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서 있기만 했다.

뺨에 생채기가 났다. 목과 손등, 팔이 긁혀 벌게졌다.

고작 그 정도였다.

“아아악! 으아아아악!”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주먹으로 연우의 가슴을 내리쳤다. 온몸을 내던져 쳤으나 연우는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제 아들을 죽이고 살아 돌아온 아들의 동료에게 끼칠 수 있는 해는 그 정도뿐이었다.

“왜, 왜 내 아들만! 왜 내 아들은! 정우야, 정우야아아!”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연우의 팔을 붙잡은 채로 고꾸라졌다.

“여보!”

“언니!”

“엄마아!”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숨넘어갈 듯 헐떡대면서도 연우의 팔을 움켜쥔 손을 풀지 않았다.

쓰러진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 그녀에게 팔이 잡힌 채로 목석같이 서 있는 연우.

좋은 구도였다.

기자와 조문객들이 핸드폰과 카메라를 꺼내 들어 그 광경을 렌즈에 담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렌즈는 차가웠다. 어느 것도 김정우 하사 어머니의 눈물을, 자식 잃은 부모의 애끓는 심정을 담아내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는데.”

김정우 하사의 아버지가 아내의 손을 때어내 두 손으로 꼬옥 감쌌다. 그러곤 연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연우도 고개를 숙였다.

“군에서 당신의 진술서를 보여 주어 읽었습니다. 우리 정우와 함께, 마지막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희미한 숨소리는 간장을 녹이는 애달픔을 씹어 삼키는 소리.

“고, 맙습니다. 우리 애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줘서.”

“…….”

“애 엄마 말처럼, 깜깜한 데 혼자 있는 거 정말 싫어하는 아이였는데. 당신이 곁에 있어 줘서, 그래도 그 아이가…….”

결국 그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십 년, 십 년을……. 그것이 거기서 십 년을…….”

차라리 들어가자마자 죽어 버려서 시체도 찾지 못했으면 덜 슬펐을까.

연우는 답을 알지 못했다. 그건 쓰러져 우는 김정우 하사의 부모님이 남은 평생 품고 가야 할 한일 테니까.

* * *

연우는 길드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바탕 울음바다로 변한 빈소를 벗어났다. 길드원들이 밀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할 동안 장례식장 건물 뒤편으로 갔다.

문득,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니, 안에서부터 계속 기미가 있었는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연우는 길드원을 뿌리치고 빈 화단가로 갔다. 화단을 손으로 집고 허리를 숙여 속을 게워냈다. 하지만 무엇도 토해 내지 못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괜찮냐고 묻는 길드원에게 손짓하여 혼자 있고 싶다고, 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길드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연우를 딱하다는 눈빛으로 보고는 돌아섰다. 무슨 오해를 멋대로 한 건지는 모를 일이나 그 덕에 혼자가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연우는 빈 화단에 걸터앉아 손으로 눈을 덮었다.

살다 보면 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속물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런데 그게 굳이, 타인의 슬픔을 보고 난 다음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자식 잃은 슬픔에 익사해 가는 부모를 보았다. 그들의 슬픔을 보고 안도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들이 말하는 정우가 ‘모정우’가 아닌 ‘김정우’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구역질이 나는 이유였다.

“젠장.”

* * *

혼자가 된 지 얼마나 됐을까. 체감상으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연우는 더 이상 체감상 시간을 믿지 않았다.

연우는 타인의 기척을 느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가볍게 튀는 발걸음. 연우는 실수로라도 동행한 길드원들로 착각하지 않았다.

일정 거리 밖에서 지키고 서 있는 길드원들을 피해 빙 둘러오는 걸 보니, 이 장소가 꽤 익숙한 듯싶었다. 그 발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연우는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또 보네요, 연지연 기자님.”

“고마워요, 연지곤지라고 안 불러서. 준수 오빠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거든요.”

지연이 연우의 앞에 섰다.

“아, 그땐 나 정신 차리게 해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부른 거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그때 한 번은 봐준다는 걸로 들리네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꽈서 듣지 말아요. 고마우니까 이거 줄게요. 됐죠?”

지연이 반창고를 내밀었다. 그리고 열흘 전쯤 연우가 그랬던 것처럼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면 나을 거라, 괜찮습니다.”

연우는 반창고를 받지 않았다.

호의를 거절당했지만 지연은 민망해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남자네요. 인터뷰이로선 매력 있지만.”

지연이 연우의 옆에 앉았다. 반창고는 둘 사이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응달진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좀 우울해지지 않아요?”

“기자님은 그러십니까?”

“사는 게 좆같을 때, 갈 때 없어서 회사 건물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으면, 볕 잘 드는 밖이랑 내가 있는 곳이랑 전혀 다른 세상 같아서 기분이 더 좆같아지더라고요.”

“…….”

연우는 남의 동생을 보며 제 동생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왜 동생들의 언어생활은 다 이따구일까. 씨발에 좆에.

“내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안 물어봐요?”

“자차 있으십니까? 없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겠지요.”

“……농담이죠? 아재 개그?”

으. 지연이 질색했다.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헌터병일 땐 말만 하면 이 자식 골 때린다고 선임들이 좋아했는데.

“뭐, 버스 타고 오긴 했어요. 여긴 뉴스거리 될 만한 사람들 죽으면 잘 오는 곳이라 익숙하기도 하고. 근데 그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구요.”

지연이 어깨에 둘러맨 천 가방에서 조그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한 달 전 기자회견 사진이었다. 무려 A4 용지 반만 한 크기로 컬러 프린트 한 것이었다.

연우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감쌌다.

사진 속에서 정우와 연우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정우는 마이크를 들고 뭔가 말하고 있었고,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연우는 이등변 삼각형 두 개를 붙여 놓은 거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누군가 검은 사인펜으로 열과 성을 다해 칠해 놓은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악당이나 쓸 법한 선글라스였다.

뭐하는 짓이냐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말하지 못한 건 지연이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었다.

“어때요? 내가 눈썰미 없는 편은 아닌데, 오히려 눈치 빠르단 소리 많이 듣거든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치니까, 설마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했던 거죠. 장소의 특수성도 무시 못 하고요. 목소리를 들으면 확실할 거 같은데, 공식석상에서 말한 거 찍힌 영상 없으시더라구요?”

“…….”

“모연우 소위님, 아니, 이젠 대위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지연이 선물이라며 종이를 접어 주었다. 연우는 일단 받았다.

“대위 소리보단 소위가 익숙합니다. 하지만 전역해서 이젠 민간인 신분입니다.”

“그럼 모연우 씨라고 부를게요.”

“좋으실 대로.”

“모연우 씨.”

지연이 고개를 돌려 연우를 바라봤다.

“준수 오빠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있고, 10년 만에 던전에서 화려하게 귀환하고선 아직까지 각성 안 하고 있는 모연우 전 대위님께 기자로서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요. 그런데 그건 다 나중으로 미뤄 두려고요. 지금 다 물어보고 답을 듣긴 어려울 거 같으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꼭 나한테 시간 내 줘요.”

“연 소위님에 대한 거라면…….”

“그건 나중에. 지금은 내가 당신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당신, 지금 위험하니까-.”

“모연우 님과 공식적인 인터뷰를 원하신다면 길드의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으악!”

안타깝게도 지연이 말을 끝내기 전, 길드원이 다가왔다. 길드원이 성큼 다가와 연우와 지연 사이를 갈라놓았다.

길드원은 지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체구의 길드원이 다가오니,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지연이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 연우가 몸을 비틀어 길드원을 제치고 지연을 붙잡았다.

“으어어!”

지연은 허우적대다가 연우에게 덥석 안겼다.

“모연우 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길드원이 인상을 구기며 훈계조로 말했다. 난 널 위해 귀찮은 날파리를 떼어내 줬는데. 네가 오히려 날파리한테 가서 붙어?

‘누가 할 말인지.’

연우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괜히 A급은 아닌지, 길드원은 컨트롤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완급을 조절해서 스킬인지 뭔지를 사용하고도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지연은 못 봤어도 연우는 보았다. 길드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이 지연을 밀어내는 것을.

헌터가 민간인에게 능력을 사용하다니? 던전 안에서나 몬스터 웨이브 같은 비상 상황에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불법 아닌가?

연우는 자신의 의문이 구헌터스러운 꼰대 짓인지 미심쩍었다. 나 때는 안 됐는데, 요즘엔 괜찮나?

“공식적인 루트로 백 날 천 날 요청해 봤자 묵살당하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다행히도 지연은 다치지 않았을뿐더러 기죽지도 않았다. 누구 동생인지 깡이 있었다.

죽어 연준수 소위 볼 낯이 있겠구나, 연우는 안도했다. 보고 계십니까, 소위님? 제가 소위님 동생 넘어질 뻔한 거 구했습니다.

연우는 지연을 내려놓고 물러서려 했다.

그런데.

“그리고 공식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아주 사적인 일이라면요?”

지연이 연우의 팔을 끌어안으며 되바라지게 받아쳤다.

되바라지다는 단어가 지연에게 매우 실례 되는 단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연우는 깜찍하게 구는 열 살짜리 아이에게 그것 말고 다른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야 되는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게, 이미 옛날에 죽어 버린 연준수 소위가 다시 살아나 등 뒤에 서 있는 거 같았다.

그가 준 담배를 피웠던 폐가 다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제가 이십 대일 때 열 살이었던 애를 노리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소위님, 미치셨습니까? 연우는 마음속으로나마 항의했다. 그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그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 짓지 말아 줄래요? 사람 무안하게스리.”

지연이 화를 냈다.

“…….”

오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정말 싫었으니까.

지연은 모르겠지만, 연우는 과거 헌터병 시절. 그러니까 던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눈물 콧물 다 빼고 질질 짜대던 신임 하사 시절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연지곤지 소릴 들었다.

연우가 더는 듣기 싫다고 슬슬 피해 다니자. 연준수 소위는 연우가 배에 구멍이 뚫려 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굳이 면회 와 연지곤지 이야기를 해댔다.

아침 9시, 면회 가능 시작 시간에 딱 맞춰 와서 저녁 6시까지 연지곤지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던 그 시절 연준수 소위는, 던전 밖 몬스터 그 자체였다.

퇴원한 연우는 그 뒤로 감히 연준수 소위를 피해 다니지 않았다. 연준수 소위가 담배 피우러 가자고 하면 얌전히 따라가 그놈의 연지곤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래서 연우 본인은 인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지연도 알게 되면 그게 뭔 소리냐고 기겁하겠지만. 연우는 지연이 이웃에 사는 꼬마처럼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사는 지랄맞은 동네 깡패, 연준수가 눈에 불을 켜고 과잉 보호하며 키우는 이웃집 꼬마.

이십 대 초중반 여자애 모습으로 서 있지만, 연우에게 지연은 여전히 열 살짜리 울보 아이였다. 연준수 소위가 입대한다니까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했다던. 너무 울어 병원에까지 실려 갔다던 연준수 소위의 애지중지 연지곤지.

정우가 서른 중반의 나이로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길드장이라 하여도, 연우에게는 여전히 이십 대 초반의 정우로 보이듯.

그러니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아, 씨. 그쪽 내 취향 아니거든요? 나도 그쪽 같은 사람 완전 싫어요. 싫다고!”

지연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두 분, 뭐 하시는 겁니까?”

길드원이 아까완 다른 이유로 얼굴을 구겼다.

몸을 꼭 붙인 채로 서로 싫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있는 모습이, 참 뭐라 해야 할까.

길드원은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짜증 나긴 했다. 뭐야, 모쏠 앞에서. 작작 좀 하지?

길드 본사로 돌아가 보고서를 쓸 때 저 모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길드원이 곤란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연우는 길드원 덕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지연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기 전에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지연이 바지춤에 뭔가를 넣었다.

연우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눈팔고 있는 길드원을 확인하고는 지연을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건 잠깐뿐이었다.

“됐어요. 날 뭐로 보고! 난 여리여리한 미소년 타입 좋아하거든요?”

지연이 손을 탁탁 털며 뒤로 물러섰다. 연우는 주머니로 손을 가려는 걸 참았다.

“방금 한 말,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 문채윤 헌터님!”

이름이 불리자, 길드원이 움찔하며 지연을 보았다.

“저 당장 동해 길드에 공식적인 루트로 인터뷰 요청 넣을 겁니다. 문채윤 헌터님이 그러라고 했다고요. 명색이 동해 길드 A급 헌터신데, 한 입으로 두말하시면, 알죠?”

“잠깐. 내가 언제 그런 식으로 말을!”

“요즘 네티즌들, 이랬다저랬다 지조 없는 헌터들 완전 싫어하는 거 아시죠? 두 달 전에 앞에서 착한 척하고 뒤로 비헌터 일반인들 무시하고 다녔던 오성 길드 오두한 헌터, 다 까발려져서 나가리 된 거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길드원의 표정이 좀 더 구겨졌다. 절정은 지연이 제 명함을 굳이 길드원의 손에 쥐여 줬을 때였다.

지연의 명함을 확인한 길드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백만 악플러를 몰고 다니는 연지연 기자는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듯했다.

“동해 길드는 시작이 민군 합작이어서 그런가. 다른 길드보다 상명하복 분위기가 강하고, 소속 헌터들도 좀 딱딱하고 팬서비스 없기로 유명하죠. 길드장님한테 과잉 충성하는 면도 없잖아 보여서, 다른 길드들한테 독재자 길드라는 소리도 듣고. 정작 길드장인 모정우 대령님은 전혀 그런 느낌 아니던데. 그냥 대외적 이미지일 뿐인 거려나요?”

여차하면 너네 길드장까지 물고 늘어지겠다. 지연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길드원이 또 스킬을 쓸까 봐 유심히 지켜보던 연우는 길드원이 갑자기 쩔쩔매는 걸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헌터병들은 개인을 대중 앞에 드러내 유명세를 얻을 일이 전혀 없었다.

살아 있는 전설 신중윤마저도 언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의 괴물 같은 업적이, 모두가 그를 알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헌터가 등장하고부터는 달라졌다. 새로운 전설 모정우 대령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언론을 휘어잡았다. 뛰어난 능력과 더 뛰어난 외모로 대중을 제 편으로 만들고는, 여론을 제 입맛대로 주물러 댔다.

모정우 대령으로 대표되는 신헌터들은 헌터로 각성하는 동시에 개인으로서 대중에게 노출되었다.

인지도를 얻어 유명해지는 것이, 헌터 등급을 올리는 것보다 중요했다. 이미지 관리를 실패하면 능력과 상관없이 사장되는 것이 이 바닥의 일상이었다.

천하의 모정우 대령의 형도 비각성 헌터병 출신이라며 은근히 무시하던 길드원이 자연의 명함을 보자마자 찍소리도 못 내게 된 이유였다.

“뭐야, 무슨 일입니까.”

“모연우 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길드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연우 씨,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요. 문채윤 헌터님 말씀대로 우리 조만간 공식적인 루트로 다시 뵈어요.”

지연이 생긋 웃어 보이고는 길드원들 사이를 헤치고 떠났다. 연지곤지 다 컸네. 연우는 내심 흐뭇해하다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어깨를 떨었다.

뒤늦게 온 길드원들은 연우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지연의 명함을 든 길드원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사이 연우는 손에 쥔 종이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안에 든 것을 만져 보았다.

핸드폰이었다.

지연이 기지를 발휘해 제 핸드폰을 두고 간 것이었다. 다음 접선 장소와 시간, 방법 따위를 논의하기에 좋은,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연우는 쓰게 웃었다.

* * *

길드 본사로 돌아온 ‘고 김정우 중위 문상팀’은 1층 로비에서 갈라섰다.

길드원들은 업무 보고를 위해 13층으로 갔고, 연우는 안내 데스크로 가 전달 사항을 듣고 최상층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연우는 안내 데스크에서 들은 대로, 바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욕실엔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씻고 나오니 입고 왔던 옷은 세탁실로 가고 없었다.

연우는 뒤늦게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종이를 빼놓지 않은 걸 떠올렸다. 하지만 세탁실에 따로 연락하진 않았다.

이런 경우, 세탁물이 돌아올 때 소지품이 따로 포장되어 딸려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저녁, 정우보다 먼저 도착한 세탁물에는 핸드폰과 종이가 동봉되어 있지 않았다. 연우는 다림질까지 마친 뒤 포장되어 온 세탁물을 대충 뒤적여 보고는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 * *

연우의 세탁물과 함께 놓여 있었어야 했던 물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우는 제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눈으로 훑었다. 김정우 중위 장례식에 등장한 모정우 대령의 형에 관한 기사가 담긴 태블릿. 길드원 넷의 업무 보고서. A4 용지에 프린트해 낙서까지 한 사진.

핸드폰.

정우는 사진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선글라스를 쓴 연우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잠깐 분홍빛 기운이 스치자 종이가 분해되어 사라졌다. 애초부터 이 세상에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계속 귀엽게 굴겠다 이거지, 모연우.”

정우는 사납게 웃으며 목을 죄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벌써 한 달이 넘어간다.

석 달을 주겠다 했지만 정말 석 달을 채울 생각이려나. 도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의 형은 여태 제정신을 못 차리고 눈치 없게 굴고 있었다. 시간을 끌수록 힘들어지는 건 그쪽일 텐데.

정우는 닫혀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그의 감각은 본능을 좇아 문을 넘고 벽을 통과했다.

길드 본사 빌딩은 타 길드의 도청과 감시 등의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코자, 헌터 아이템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던전 아이템으로 지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우의 능력치는 빌딩의 방어력을 상회했다. 다른 S급 헌터라면 감각이 막힐 수도 있겠지만, 정우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현존하는 S급 중 가장 강한 정신계 헌터였으니까.

그는 거기서 두근두근 박동하는 심장을 보았다.

집 나갔다 돌아온 개새끼가 멋대로 밖의 환경에 적응해선, 원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잊고 빌빌 대고 있었다. 침대 놔두고 바닥에 웅크려 자는 건 어디서 배워 온 궁상인지.

벌써 한 달째.

정우는 일찌감치 바닥나 버린 제 인내심을 새삼 확인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 * *

구헌터 테러 집단의 움직임이 과격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던 거 같은데……. 사람들은 짠 것처럼 특정 날을 떠올렸으나 섣불리 소리 내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들도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10년 동안 닫혀 있었던 대학로 01 던전이 열리고 일주일이 안 됐을 때, 그러니까 모정우 대령의 형 모연우의 신변이 군에서 동해 길드로 이관되었을 때 이후로 한 달 반.

구헌터 테러 집단은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게 도와주겠다는 듯 일곱 차례, 오직 동해 길드에만 폭발물을 설치했다.

세 건은 초기에 발견되어 소란 없이 해체되었고, 네 건은 폭발 직전까지 가거나 폭발하여 인근 주민 대피 소동이 벌어졌다.

일곱 건 모두 민간인 사상자 수는 미미했다. 현장을 통제하고 진압하던 동해 길드 길드원들 몇 명이 타박상을 입은 선에서 정리되었다.

추정 피해액은 많지 않았으나 구헌터 테러 집단이 동해 길드를 노리고 있다는 인식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피해를 주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구헌터들이 정우를 노린다고 생각하고 분개했으나 이내, 고 김정우 중위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것 외에는 별다른 외부 활동이 없는 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모정우 대령 형이 아직 각성을 안 했지?

미각성 상태의 귀환 헌터병 모연우와 각성을 거부한 헌터병들로 이루어진 테러 집단. 연결해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동해 길드는 적극 대응했다. 언론사를 꾸준히 관리해 왔기에 과격한 기사는 올라오지 않았다. 관련 기사가 떠도 대부분 동해 길드가 구헌터 테러 집단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는 긍정적인 내용뿐이었다.

언론사들 또 단체로 돈 먹었냐는 비아냥.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왜 루머를 양산하냐는 반박.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댓글란에서 복작복작하게 싸웠다.

동해 길드는 명예 훼손 수준의 루머에 법적으로 강력 대응하겠다고 선언했고, 정우는 방송에 출연해 길드의 입장을 대변했다. 요지는 형에게 아직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적응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냐는 질문엔 늘 똑같이 대답했다. 첫 기자회견에서 말한 3개월.

테러 집단의 의도가 무엇이든 대한민국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던전 공략과 몬스터 웨이브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 동해 길드와 정우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전화는 그렇게 여론이 복작복작해질 즈음에 걸려 왔다.

“여보세요.”

핸드폰을 손에 든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 * *

유명세라는 건 뜬구름 같다. 가지고 있어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주제에 유명세를 치른다는 말이 있을 만큼 당사자의 인생을 속박하고 제약하기도 한다.

그것이 가진 명암이 분명하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한다.

남자는 자신의 유명세를 효율적으로 써먹으면서도 속박당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군복, 혹은 슈트를 입었다. 때문에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꾹 눌러쓰고 나오면, 사람들은 그가 TV만 틀면 나오는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안 받는 건 아니었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여자도 남자도 그를 눈으로 좇았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두꺼운 흉통, 역삼각형의 상체와 긴 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잘빠진 몸매와 모자로도 가려지지 않는 날렵한 턱선을 보고 ‘설마?’하다가도 ‘설마…….’라며 돌아섰다. 공사다망하신 새로운 전설께서 고작 이런 누추한 공원 따위에 오실 리 없다는 편견에서였다.

그는 애완견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산책시키려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걸으며 공원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대로 공사 중 팻말을 지나쳐 공원 구석으로 가자 풀이 무성히 자란 공터가 나타났다. 칠이 벗겨진 낡은 벤치에 지연이 앉아 있었다.

지연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벌떡 일어나 돌아섰다.

“왜 이렇게 늦었…… 어?”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던전 밖, 한낮. 선글라스 대신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지연은 헷갈리지 않았다.

“당신이 왜 여기에?”

그는 지연이 오늘 이곳에서 만나려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지연의 앞에 멈춰서 모자 캡을 들어 올렸다. 정우였다. 캡 모자에 트레이닝복, 러닝화까지 신은 가벼운 캐주얼 차림이 잘 어울렸다.

“연지연 기자님. 나라서 실망했나 보네요.”

그림자에 덮여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지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었다.

‘왜 날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지연은 눈치가 빨랐다. 선천적인 능력은 아니고 직업병 중 하나였다.

만약 지금 기자로서 모정우 대령 앞에 선 거였다면, 감히 질문 던질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원하는 답을, 기사거리가 될 만한 답을 들을 수 없을 거 같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기자 연지연으로 그의 앞에 선 게 아니었기에. 그녀는 무턱대고, 아니, 좀 절박하게 들이댔다.

“지금 모연우 씨는 어디 있죠? 길드 본사 안에 있는 거 맞나요? 안전한 거죠?”

“내 형 안전을 걱정해 줄 정도의 사이인가 보군요.”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거든요? 일단 제 말 좀-.”

“언제부터입니까? 궁금하네요. 인스턴트 던전에서?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그걸 어떻게…….”

모연우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있는 거냐고 따져 물을 틈도 없었다.

“아니, 지금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이 없다니까! 이보세요, 지금 당신 형이 위험하다고!”

지연이 정우에게 달려들었다. 정우는 옆으로 한 발자국 걸어 지연을 피했다.

“으악!”

지연은 그를 놓치고 휘청거리다가 엎어졌다. 손바닥과 무릎이 바닥에 쓸렸다.

혼자 넘어졌다면 아픈 것보다 쪽팔린 감정이 앞섰겠지만, 지금은 아픈 게 먼저였다. 원망할 대상이 있었으니까.

“이런 형만도 못한…….”

동굴 안에서 연우를 실컷 깠던 건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지연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뒤집어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을 탁탁 털다가 손바닥이 까진 걸 보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정우는 지연을 일으켜 세워 주려고 손을 내밀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지연도 지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으나 장신의 남자를 앉은 자세로 올려다보는 건 쉽지 않았다.

“내 말 못 알아들어요? 지금 당신 형 위험하다고! 구헌터들이 노리고 있단 말이에요!”

지연이 짜증과 분노를 담아 버럭 소리 질렀다.

정우가 픽 웃었다.

‘웃어?’

형이 테러 집단에 잡혀갈지도 모른다는데?

어처구니없어 입을 허 벌렸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이 생겼다.

“함부로 헌팅 하지 말아요. 임자 있는 사람한테.”

정우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지연에게 툭 던졌다. 발치에 떨어진 건 핸드폰이었다.

“모연우 씨가 넘겨줬어요?”

“뭐, 그렇다고 하죠.”

“우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성의를 뭐로 보고 남한테 막 주고 그런데요? 우씨.”

지연이 핸드폰을 주워 액정에 기스가 났나 확인하고는 정우를 노려보았다. 아직 약정 1년 남았는데!

“맞아요. 우리 형 그런 사람이니까 다음부턴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허튼수작이라니요!”

지연이 발끈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익을 위해, 은혜를 갚기 위해 제보한 건데!

“그리고 기자님, 하나 정정합시다. 내가 형이랑 남은 아니잖아요?”

정우가 생긋 웃어 보였다. 역시나 입술로만.

지연은 이곳에 카메라를 세팅해 놓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매체에 나오는 다정하고 상냥한 모정우 대령은 무슨.

‘다 호박씨였네. 이미지 메이킹이었어.’

“그럼 뭔데요? 남보다 못한 대리 입대 입양아와 친자식 사이?”

지연이 톡 쏘듯 말했다. 연준수가 생각나 좀 과하게 반응한 감이 없지 않았다.

“형제 사이. 피 따위 안 섞여도 대한민국 제도가 증명해 주는 1촌.”

“…….”

역시나 연준수가 생각나 그딴 게 뭐냐고 쏘아붙일 수 없었다.

“다음부터 팩트 체크된 내용만 언급해 주세요. 안 그러면 내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이유가 없잖아요?”

정우는 지연을 자상하게 타일렀다. 오직 그 이유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는 듯이.

“그 소중한 형제분 지킬 생각이나 해요! 오늘이 실행날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아, 됐고, 됐고. 지연은 그의 의뭉스러운 말과 태도를 다 제쳐 놓고 자신의 용건부터 말했다. 당신의 그 1촌 형이 위험하단 말이야. 이 사람아!

“당신,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까?”

정우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지연이 그쪽과 접선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받아들이긴 했지만 취재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지, 그쪽하고 한패가 된 건 아니에요. 사람을 뭐로 보고!”

지연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우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동해 길드 지원팀 소속 구급대원으로 변장한, 어쩌면 동해 길드의 길드원이기도 하면서 테러 단체에 몸담고 있는 걸지도 모를 구헌터가 손을 내밀었다.

각성을 안 한 헌터는 비정상적인 신체 능력을 빼면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신헌터가 다른 헌터를 탐지하는 헌터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스킬을 발동해도,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대담하게도 동해 길드의 길드원인 척하거나 위장한 채로 살고 있는 거겠지.

평범한 일상 속,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에도 구헌터 테러 집단의 일원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규모가 얼마나 큰 거야?’

지연은 소름이 돋았다.

구헌터에 대해 이런저런 기사를 쓰긴 했지만, 구헌터를 만나는 건 처음, 아니 두 번째였다. 동굴 안에서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첫 번째였다.

지연은 긴장해 선뜻, 구급대원의 손을 붙잡지도 뿌리치지도 못했다.

‘아까 봤던 사람, 자긴 테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테러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는 뜻일까. 테러 집단의 비전투원이란 뜻일까.’

어쩌면 선글라스 남자를 다시 만나 준수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연은 구급대원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사회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취재할 수 있는 기회야.’

기자로서의 호기심도 그녀의 손을 부추겼다. 헌터로 인한 사회 현상, 특히 구헌터라 불리는 헌터병은 그녀의 주 관심사였으니까.

“좋아요.”

지연은 구급대원의 손을 잡았다.

“나에 대해 다 알아보고 온 거 같으니까, 나한테도 당신들에 대해 알려 줘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구겨질까 봐 소중히 잡고 있던 사진 위로, 마지막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지연은 그 사진을 소중히 움켜잡았다. 그 사진이, 구급대원의 손을 잡게 된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오빠, 나는 이 세상이 정말 싫어.

그러니까 바꿀 거야.

내 힘이 미약해 조금도 바꾸지 못하게 된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계속, 뛰어다니며 기사를 쓰고 사람들한테 알릴 거야. 이 세상이 얼마나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오빠를 잊어버렸는지.

난 포기 안 해.

내 손으로, 내 힘으로 해 보겠어.

난 오빠 동생이니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 노력에 테러로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일 따윈 포함되지 않았다. 설사 준수 오빠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해도, 그들과 손잡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있으니까.

‘오빠가 내가 사는 세상을 망치려 들 리 없어.’

그러니 지연도, 오빠가 지켜 준 이 세상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테러 단체 내부에서 빼낸 정보를, 위험을 무릅쓰고 연우에게 전하려 했던 이유였다.

“하.”

정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이 위험하다고 했더니, 그 말을 듣고 미쳤나? 지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그런 거였어.”

정우는 지연의 표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우는 지연이 아니라 지연이 손에 든 핸드폰을 보았다.

“어쩐지 순순히 넘겨준다 했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예요. 당장 모연우 씨 안전한지부터 확인하라니까!”

벌써 몇 번째인지. 돌림 노래를 불러도 이보단 관심을 받겠다 싶어 짜증 나려는데.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지연은 진동이 안 느껴지는데도 반사적으로 제 핸드폰을 봤다.

정우는 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스피커를 켰다.

[대령님! 형님분께서!]

핸드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지연만큼이나 다급했다. 얼결에 통화를 엿들은 지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러니까 제가 얼른 모연우 씨를!”

천하의 모정우 대령에게 버럭 화를 내며 고개를 든 지연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고 있는 정우를.

두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대신 아까보다 훨씬 더 싸늘하게 빛났다.

‘뭐지? 왜 저래?’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너무 말도 안 돼서 눈앞의 남자에게는 말이 될 것 같다는 무논리적인 판단이 들었다.

“설마 이럴 줄 알고, 이렇게 되길 기다렸다거나 한 건…….”

지연은 무심코 말하다가 멈췄다.

‘그럴 리 없어. 설마 그랬기야 했겠어. 아무리 피 안 섞인 형제여도 형제는 형제인데.’

제가 괜한 말을 한 거 아닐까 싶어 멈칫했건만.

“눈치가 제법 빠르네요, 연지연 기자님.”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보입니까?”

“어, 어째서요? 조금 전, 당신이 그랬잖아요. 형제라고. 그런데 형제가 테러 집단에 잡혀가길 바랐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형을 위험에 빠지도록 그냥 두다니. 지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형제는 그래요, 기자님. 당신들 남매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정우는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대령님? 대령님!]

전화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정우는 얼빠져 있는 지연을 지나쳐 걸으며 목에 손을 댔다.

답답한 느낌이 들어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려 했는데. 트레이닝복 차림이라 넥타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럼 목을 옥죄는 숨 막힘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형, 모연우는 늘 이렇게 그를 갈증 나게 만들었다.

“듣고 있습니다.”

[예? 예. 일단 언론은-.]

“통제하지 말고 보도하도록 놔두세요.”

[예?]

“그리고 내 입장도 알리세요.”

[입장이라 하심은…….]

“나는 내 형이 너무 소중해서, 꼭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고. 만일 테러 집단이 내 형의 안전을 담보로 나와의 단독 면담을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무장해제하고 그들이 보내 온 봉인 아이템을 낀 채로 그들이 정한 접선 장소까지 혼자 나가겠다고.”

정우는 그건 안 될 말이라 부르짖는 비서와의 통화를 일방적으로 끊고, 또 습관적으로 목에 손을 댔다.

삑-.

경고음이 들렸다.

정우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정우는 상태창을 열어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형.”

* * *

“여보세요.”

연우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모연우 씨입니까?]

느릿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는 핸드폰을 통해 듣는다고 새삼 색다르게 들리진 않았다.

“예, 강사님. 수업 시간 10분 전에 세미나실에 왔는데, 강사님은 없고 이거만 놓여 있네요. 이거, 강사님 핸드폰입니까?”

연우는 텅 빈 세미나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업 시작하기 20분 전에 와서 동해 길드 홍보 영상을 띄워 놓고, 연우가 10분 전에 도착하지 않으면 경멸하는 표정을 짓던 강사가 안 보였다.

연우는 강사가 늦는 일도 있구나 신기해하며, 그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오면 한없이 하찮게 쳐다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천 년 같은 10분이 흐르고 다시 천 년이 흘러도 강사는 오지 않았다. 대신 화이트보드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드드득 울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디십니까? 오늘은 수업 안 합니까?”

연우는 휴강의 희열을 숨기며 애써 아쉬운 척했다.

[좋아하지 마십시오. 오늘 휴강 아닙니…….]

휴강 따윈 꿈도 꾸지 말라는 강사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와다닥, 드르륵. 이거 놓지 못해요? 이러시면 곤란, 잠깐이면, 잠깐? 안 됩니, 잠깐이면 된다고!

여러 소리가 들렸다. 추정하기로 강사와 어떤 여성이 싸우고 있는 듯한데. 연우는 승패가 정해지기를 기다렸다.

곧 승자가 정해졌다.

[여보세요? 모연우 대위 맞죠? 당신? 우리 정우랑 같이 있었던!]

정우. 두 음절이 심장을 잡아 뜯었다.

연우는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었다. 그리고 생각이란 걸 했다.

진정해, 그 정우가 아니야, 저 사람이 말하는 정우는…….

“김정우 하사 어머님이십니까?”

[맞아요, 나예요.]

어쩐 일이시냐, 어쩌다 날 가르치는 강사와 함께 있느냐. 당연히 물어봐야 할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알아서 설명해 주었다.

당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가도 만나게 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건물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이 사람을 붙잡고 사정했다.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내 아들에 대해 듣고 싶을 뿐이다. 군에서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다.

말하는 중간중간 강사와 몸 다툼이 있었다. 강사는 자꾸 핸드폰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약골 헌터 같으니라고. 감히 자식 잃은 부모를 상대하려 하다니.

“지금 어디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선생님을 바꿔 주시겠습니까? 제가 가드 없이 이 건물을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아무래도 선생님의 조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우가 도움의 목소리를 내밀었다. 강사는 그제야 발언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강사의 조언을 들은 연우는 강사의 핸드폰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강사가 핸드폰을 놓고 갔는데 요 앞에서 가져다 달라기에 내려왔다고, 금방 주고 들어오겠다고, 연우는 안내 데스크에 말했다.

길드원은 별 의심 없이 얼른 다녀오시라고 연우를 혼자 나가게 놔두었다.

“잠깐, 지금 강의 중 아닌가?”

뒤늦게 연우의 스케줄을 확인하곤 13층에 연락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경호 인력이 급히 내려왔으나 문 앞에 서 있겠다던 연우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놓고 갔다던 강사도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강사가 알려 준 대로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다. 요금도 받지 않고 연우를 어딘가에 내려주었다.

연우는 대기하고 있던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옮겨 탔다. 오토바이는 연우를 어느 아파트 공사장에 내려주었다.

연우는 공사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구헌터 테러 집단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일곱 차례의 테러는 신호였다. 우리가 널 찾아가겠다는 신호.

연우는 그들이 제게 어떻게 접촉할지 추측해 보았다. 아무래도 가장 쉬운 루트는 연지연 기자였다.

‘계속 날 노리고 있었다면, 내가 연 소위님 동생이랑 만난 걸 모르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 루트는 너무 단순했다. 또한 설마, 연준수 소위의 동생이 그들과 한편이 될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지연의 핸드폰이 저쪽으로 넘어가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다른 루트로 접근해 오리라 기다렸다.

“김정우 하사 부모님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당신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강사님.”

하지만 설마, 이 루트일 줄이야. 한 달 반 동안 매일 봤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격인데 기분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신기하고 신선했다.

연우는 모습을 드러낸 강사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강사는 핸드폰을 돌려받은 뒤 곧바로 배터리를 분리해 옆에 선 청년에게 건넸다. 청년은 연우를 오토바이로 실어 나른 퀵서비스 직원이었다. 퀵서비스 직원은 그것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바로 자리를 떴다.

“저라서 놀라셨습니까?”

“의외였다 정도로 하지요.”

각성한 헌터라서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우가 세미나실에 강림했을 때 감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의 모습을, 연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매 수업 시간마다 모정우 대령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던 강의 내용 또한.

그 모습이 모두 거짓으로 꾸며 낸 것 같지 않았다. 연우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강의를 한 달 동안 참고 들었던 이유였다.

연우의 표정을 읽었는지 강사가 입꼬리를 들었다.

“대령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은 거짓이 아닙니다. 다만……. 내 동생이 헌터병으로 끌려간 것 또한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뿐이지요.”

내가 십 년만 일찍 헌터가 되었더라면……. 끝없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절 뒤늦게 헌터로 만들어 버린 세상을 원망하게 된 남자의 평범한 자기 소개였다.

“수고롭지 않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수업을 잘 못 따라오길래 이해력이 평균 이하인 거 같아 걱정했는데.”

“가르쳐 주는 사람이 제대로 못 가르쳐 줘서 그랬을 겁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강사는 자신만만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김 중위 어머니께서 칼을 들고 절 위협하고, 그걸 본 모연우 씨가 절 위해 어쩔 수 없이 반항을 포기하고 끌려가야 하는데. 함정인 줄 알면서도 오셨으니 쓸데없이 힘 빼지는 맙시다. 우리.”

“차라리 당신이 김 하사의 어머님을 위협하는 걸로 하지 그랬습니까.”

“한 달간 본 사이이니 절 더 구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설마.”

연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강사의 미소가 삐딱해졌다.

일곱, 여덟, 아홉.

연우는 강사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못해도 아홉이었다. 기척을 숨기는 데 능숙한 헌터병이 몇 더 있다면 그보다 많을 테고.

“제가 그냥 따라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겁니까?”

“다들 당신이라면 그럴 거라고 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위해 준비해 두자는 제 의견을 따라 주었지요.”

“그렇군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을 보았다.

강사와 몇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연우는 그 둘을 보며, 군과 대형 사설 길드들의 오랜 골칫거리인 어떤 문제의 근본적인 답을 알아냈다.

어째서 구헌터 테러 집단이 쉽게 몰살되지 않는가.

강사와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 연우의 앞에 서 있는 둘이 문제의 답, 그 자체였다.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는 건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손해 보는 걸 싫어한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고작,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실현 따위에 목을 맬 리 없지 않은가.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는 건 그게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약자가 약하기에 짓밟히고 보호받지 못한다면 강자의 안전 역시 완벽하게 보호받지 못한다. 약자들의 이탈로 불안해진 사회에서 안전함을 누릴 수 없게 될 테니까. 인간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인간이기에 누구나 약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건 인간이란 종족의 생존과 번식에 이롭지 않다.

사회가 피해자를 지키는 척이라도 하며 그들이 납득할 만한 처벌을 대신 해 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인간은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피해자가 사회를 불신하게 된다면. 피해자가 사회의 처벌을 믿는 대신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해자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게 된다면.

전혀 상관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안전까지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그건 가해자에게도 불리하다. 죄를 지었을 때 적당히 비난받고 적당히 처벌받고 안전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남아 있는 게 나을까. 피해자들의 이탈로 불안해진 사회에서 언제 복수당하게 될까 불안해하며 사는 게 더 나을까.

사회의 균열은 반드시 그들이 버린 약자와 피해자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더는 약자와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약자를 비웃고 피해자를 더 짓밟는다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뎌진다면. 공동체는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서도 그 사회가 계속 안전하길 바라는 건, 지능의 문제 아닐까.

사회가 더는 필요 없다고 내버린 헌터병들도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친구였으며 동료였다.

누군가는 그들의 죽음이 하찮지 않다고 울부짖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아무 처벌 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원망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공감받지 못한 슬픔은 독이 된다. 독이 모이고 모여 강을 이루게 되면. 그 강줄기가 흐르는 곳에서 사회의 균열이 시작된다.

고작 수십 명으로 시작된 구헌터 테러 집단이 괴멸되기는커녕 점차 수가 불어나고 강해지는 이유다.

사회 곳곳에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평범한 약자와 피해자들이 독처럼 스며들어 있다.

헌터병의 가족.

헌터병의 연인.

헌터병의 친구.

헌터병의 동료.

헌터병의 이웃.

또 그들의 가족, 그들의 연인, 그들의 친구와 동료. 그들의 이웃.

구헌터 테러 집단은 단지 각성을 거부하는 헌터병들의 집단이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빼앗기고, 그 죽음을 모욕당한 약자들과 피해자들을 통칭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그 안에 속해 있는, 연약하지만 강한 테러범이 두 손에 큰 회칼을 들고 있었다. 칼끝은 연우를 향해 있었으나 연우는 그것이 절 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들으셨지요? 그러니까 이제 그 칼 내려놓으세요.”

연우가 담담히 말했다.

“모연우 씨 말대로입니다.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내려놓으세요, 어머님.”

강사가 손을 내밀었다. 칼을 제게 넘기라는 것이었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그리고 칼끝이 자신의 목으로 향하게 돌렸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조금씩 다가가고 있던 두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모연우 씨가 우릴 이상한 단체로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강사가 투덜댔다.

애써 가볍게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행동이 계획했던 일은 아닌 듯했다.

일반인은 희생은 시키지 않는다는 거겠지. 테러 단체의 숭고한 이상을 보는 연우의 눈은 차분했다.

“시간 끌며 수사망에 혼선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했지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 당신이 죽을 생각이었죠?”

“…….”

강사가 입을 다물었다.

연우는 곁눈질로 강사의 표정을 훑다가 납득했다. 강사는 각성한 헌터였다. 일반인은 아니었다.

“당신은 아직 젊으니까 내가 할게요.”

“해도 제가 합니다. 내려놓으세요, 어머님.”

“그냥 두 분 다 안 하면 안 됩니까? 제가 당신들 따라 도망칠 때 속도 늦춰지지 않도록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연우는 정말이지 잘 협조할 자신이 있었다.

강사가 그럼 여기까지 와서 협조 안 할 생각이었냐며 면박을 줬다. 할 생각이었지만 더 잘하겠다는 말이었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우리 정우 보러 애써 찾아와 줬는데. 나 때문에 많이 곤란했지요?”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연우는 살아남은 죄에 달라붙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우리 애, 몸도 온전치 못하게 돌아왔는데. 그나마 반쪽이라도 찾아와 장례 치르는 게 어디냐고 다행으로 여기라는 말을 자꾸 들으니까. 온전한 몸으로 살아 돌아온 당신이 부러웠나 봐요. 우리 정우가 저랬으면 어땠을까 싶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아니요, 미안해요. 너무 미안한 짓을 했어요. 결국 나도 장례식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 아니냐고 말한 사람들이랑 똑같은 거였어…….”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한탄했다. 그녀의 말은 더는 연우를 향하지 않았다.

“우리 정우, 엄마 아빠 잘 만나 부잣집 가서 태어났으면, 아예 그렇게, 그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이제 더 울지도 못했다.

“우리 애, 어두운 데 혼자 있는 거 무서워해서, 이젠 혼자 있을 테니까. 내가 빨리 가 줘야 해요.”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애써 웃어 보였다.

“그 전에 뭐라도 하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편히 갑니다.”

김정우 하사 어머니가 칼 든 손을 밀어 올렸다. 그대로 제 목을 찌를 생각인 듯했다.

“어머님!”

강사가 달려들어 그 칼을 잡아채려 했다. 헌터로 각성했다지만, 그의 손에선 신묘한 스킬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김정우 하사.”

둘 사이를 가르는 차분한 목소리가 있었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손을 움찔했다. 강사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칼등을 잡았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연우를 보았다.

“우리, 정우…….”

“아드님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하셨지요.”

연우가 한 발 다가갔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김정우 하사는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연우의 목소리가 그 움직임을 붙들었다.

“어머님 말처럼 어두운 굴속이었는데,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훈련병 시절, 죽도록 훈련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리라.

“대신 살려고 했습니다.”

연우가 한 발 더 다가갔다.

십 년. 십 년이었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살았다.

몰랐지만. 그래도 너무 길긴 했다.

어두운 굴속. 더 어두운 몬스터 개미 몸통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웅크릴 때면, 김정우 하사는 종종 제 얘기를 했다.

수능 공부. 캠퍼스 생활. 친구. 가족. 전공 공부, 그리고 미래.

“김정우 하사는 제대 후에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마저 할 거라고 했습니다. 취직 잘 안 되는 전공을 택해서 어머니 많이 속상하게 해드렸다고. 돌아가면 헌터병 특례로 공기업에 입사할 수 있으니까 전역하면 남들처럼 취직해서, 돈 열심히 벌겠다고. 꼭 그럴 거라고.”

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어머니 용돈 드리고 자식 노릇 열심히 할 거라고. 어머니 노후 준비 안 되어 있어서 빨리 국민 연금도 들어드려야 한다고.”

개미들 몰려오니 입 닥치라고 발로 차면, 그제야 히히 웃으며 잠들었다.

꿈속에선 전역해 취업하고 어머니 국민 연금에 가입해드렸던 걸까. 한국사는, 김정우 하사는 자는 내내 웃었다.

“죽지 마십시오. 김정우 하사는 어머니께서 따라 죽기를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절대.”

연우가 칼을 빼앗았다. 칼날을 손으로 잡았으나 굳은살 박인 손은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였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가 제 아들을 죽이고 살아온 아들의 동료에게 끼칠 수 있는 해는 그 정도뿐이었다.

김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칼을 놓고 울부짖었다. 정우야, 정우야! 아아악!

새끼 잃은 어미의 울음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소리였다. 비탄, 비탄, 그리고 비탄. 그럼에도 비탄. 몸속을 도려내고 긁어내 모조리 토해내는 울음.

연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마저, 그녀가 부르짖는 이름이 모정우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쓰레기.

구제불능 개새끼.

연우의 머리 위에 자루가 덮였다.

뒷목이 따끔했다.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익숙했다. 아무리 겪어도 낯설었지만.

헌터병 시절, 병원에 이송돼 진정제를 맞고도 날뛰면 주사를 처방 받았다. 백까지 셀 필요도 없었다. 열만 세도 충분했다.

여덟.

털썩.

‘아, 여덟이었나?’

이상하다. 분명 열이었는데.

‘내 옆에 붙어 있어, 적어도 10km는 벗어나지 마.’

정우의 당부가 문득, 생각났다.

지금은 몇 km쯤 떨어져 있으려나.

* * *

눈을 떴다.

앞이 보였다.

머리에 쓴 자루가 벗겨져 있는 걸 알았다.

극심한 두통이 한 박자 늦게 몰려왔다. 연우는 이를 악물고 끙끙댔다. 주사의 부작용이었다.

공룡 마취제를 인간에게 투여한 것과 다름없었다. 발현해 강화된 몸은 죽지 않았지만 그만큼의 고통은 감당해 내야 했다.

연우는 몸부림치다가 뒤통수에 딱딱한 금속이 부딪치는 걸 느끼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했다.

철제 난간에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는데. 너무 과하게 감겨 있어 끊어 볼 의욕이 안 생겼다.

연우는 눈을 마저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공장 같은 공간에 군데군데, 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모두 불이 붙어 있었다. 나무에 석유를 뿌렸는지 냄새가 났다.

멀지 않은 곳엔 거대한 용광로가 있었다. 반쯤 기울어져 있었는데 안에 든 금속이 다 굳어 있었다.

약 맞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지만. 낯선 곳에 묶여 있지만. 나이브하게 ‘여긴 어디? 난 누구?’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소리치지도 않았다. 괜히 목만 아프게.

쇠사슬 누에고치가 된 연우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언젠가 누가 오겠지.

당장 급한 건 두통이었다. 머리통을 부수면 안 아프게 될까? 너무 매력적인 대안이라, 몸이 묶여 있지만 않다면 당장 바닥에 머리를 박았을 게 분명했다. 연우를 묶어 놓은 사람은 나름 생명의 은인이었다.

두통은 한참 후에야 잦아들었다. 그대로 신체에 별다른 신호가 오지 않았다면 그 태평함은 꽤 오래 지속됐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요의를 느꼈고, 연우는 슬슬 걱정이 들었다.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에도 안 오면 어떡하지? 매우 곤란할 거 같은데.’

헌터도, 인질도, 인질이 된 헌터도 화장실 다녀올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까. 연우는 인질이 된 헌터의 인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철문이 열렸다. 그그극. 낡은 쇠문이 움직이니 땅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눈부신 빛 속에서 그림자 넷이 길게 늘어졌다.

그들이 연우에게 걸어왔다.

대략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중후반 사이. 여자 둘, 남자 둘. 넷 모두 헌터병, 그러니까 구헌터였다.

연우는 걸음걸이와 대검 착용 위치, 무엇보다 상처투성이 얼굴과 몸을 보고 동료를 알아봤다.

그들 중 누가 우두머리인지 구분하는 것도 쉬웠다. 한 명이 연우 앞에 놓인 녹슨 철제 의자에 걸터앉았다. 둘은 뒤에 섰고, 한 명은 손에 호호 입김을 불며 불 피워 놓은 드럼통 가까이 섰다.

드럼통에서 손을 녹이고 있는 여자는 실눈이었다. 의자 뒤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는 각각 단발머리였고 빡빡이였다.

삐그덕대며 우는 철제 의자를 학대하고 있는 남자는 이마에서 눈을 가로질러 입술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턱 밑까지 긴 흉터가 나 있었다.

얼굴도 체격도 제각각이었지만 넷 다 눈빛은 똑같았다.

불씨 꺼진 눈.

연우는 제 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일단 살아 돌아온 걸 축하해. 모연우 소위, 아, 이제 대위인가?”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는데, 지난달에 전역했다는 건 알아두고. 일찍 축하해 줘서 고마워.”

“늦어서 미안. 우리가 당신 귀환한 지, 음, 엿새쯤인가 그쯤 돼서였지?”

흉터가 돌아보며 물었다. 빡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기억이 아직 쓸 만하네. 그때 축하인사 하러 갔었는데 방해를 받아서 말이야. 이제야 이렇게 마주 보게 됐잖아. 늦은 건 이해해 달라고.”

“이해해 줄게.”

“고마워. 근데 말이 좀 짧다?”

흉터가 괜히 트집 잡았다. 농담이든지, 만만해서 시비를 거는 거든지. 둘 중 하나였다.

만약 동해 길드 길드원이 말했다면 후자라고 생각했겠지만. 흉터는 전자였다. 연우가 보기엔 그랬다.

“왜 말 놓냐고?”

“굳이 말하자면 그 말이긴 하지.”

“그쪽이 먼저 말 놨잖아.”

순순히 따라가겠다는 사람 약으로 기절시켜 끌고 와선 쇠사슬로 칭칭 묶어 화장실 걱정하게 만든 건 제쳐 두고서라도.

“젖살 안 빠진 얼굴을 보니까 말이 그냥 놔지네.”

“지랄.”

연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 관등성명 대 봐, 새끼야. 자신 있으면 나이도 까고. 민증은 나왔냐?”

“오.”

흉터가 감탄했다.

“오는 무슨. 돌대가리 새끼.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너 나 입대할 때 코찔찔이 애새끼였을 텐데? 어디다 대고 말을 까고 지랄이야. 내가 묶여 있으니까 굴비로 보이냐? 겉늙은 게 자랑이라고 개소리 떨고 앉아 있어, 지랄이.”

연우는 어리바리한 후임을 답답해하며 욕을 하거나 폭력을 쓰는 나쁜 선임은 아니었다.

때리지도 말고 맞지도 말자.

욕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자.

우리 내무반 푸르게 푸르게.

그는 군 윗대가리들이 원하는 모범적인 선임 그 자체였다. 때문에 간혹, 생각이 많이 모자란 것들이 착하디착한 선임을 우습게 볼 때도 있었다.

헌터병대도 엄연한 군대. 적당한 비율의 쓰레기는 늘 존재했다.

쓰레기들이 기어오를 때마다 연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썼다. 모범적인 헌터병 선임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모연우는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우는 딱히 믿는 종교랄 게 없었다. 동료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자웅동체적인 시각도, 오른뺨을 처맞으면 왼뺨도 내밀어 마저 처맞으라는 SM적인 마인드도, 내가 듣지 않으면 상대가 한 욕은 상대의 것이라는 궁극의 자기합리화도, 전혀 끌리지 않았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어느 나라 법전에 쓰여 있었다는 말이 그의 신념에 딱 맞았다.

내 눈 하나에 네 눈깔 두 개.

내 이 하나에 네 강냉이 우수수.

그런 의미에서 연우는 아주 모범적인 헌터병 선임이었다. 그는 위에서 너만 믿는다며 개 같은 신임 하사를 배정해 줘도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한 달 안에 개 같던 놈을 인간 비스무리한 수준으로까지 진화시켰다.

찰스 다윈이 봤다면 공동 저자로 진화론2를 쓰자고 달려들었을 텐데. 물론 삼칠일 만에 곰을 사람으로 만드신 단군 할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쑥과 마늘을 백 일 동안 처먹이고 동굴에 가둬 두는 비효율적인 방법은 헌터병에게 사치였으니까. 좀 더 비단군적이고 비홍익인간적인 비법을 써야 했다.

개 같던 신임 하사는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채 내무반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훌쩍이며 선임의 말을 잘 듣는 착한 하사가 됐다. 선임 말을 잘 듣는 착한 하사는 좀 더 오래 살아남는다.

연우가 있는 중대는 한창때 신중윤 중대에 감히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타 중대보다는 생존율이 높았다. 약간. 아주 약간.

참으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내무반이라 감히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무반을 푸르게 푸르게 가꿔 왔던 연우는 참 오랜만에, 제게 기어오르는 후임을 만나게 되었다.

까마득한 후배고, 같은 내무반 쓰던 사이도 아니었으니 모른 척하려고 했다. 민간인이 되었으니 민간인답게 굴 생각이었는데. 소위니 대위니 관등을 먼저 운운하며 말을 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건 저쪽이었다.

“제가 당연히 대위님 후임이라 생각하나 봅니다?”

흉터가 물었다. 말투가 공손해져 있었다.

“십 년 동안 내 기수가 얼마나 살아남았을까? 몇이나 너처럼 멀쩡히 제 발로 걸어 다니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일이지. 네 대가리로는 계산이 안 되겠지만.”

연우가 겉늙은 흉터를 가소로워하며 물었다.

“그래서 네 관등성명.”

“중위입니다, 대위님.”

흉터가 즉각 대답했다. 제 이름과 나이도 말했지만, 그건 흘려들었다.

중위라니. 끽해 봐야 소위, 아니면 하사일 줄 알았는데. 연우는 잠깐 당황했으나 티 내지 않았다. 그리고 2계급 특진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 뒤에 숨어 있기에 예전 모습 다 잊고 빌빌대나 했더니, 그건 또 아닌가 봅니다.”

“칭찬 고맙다. 네 흉터도 자꾸 보다 보니 볼만해지네. 대관령 불소 던전에서 한 방 먹은 건가?”

“아니요. 물론 거기에 투입되었던 적은 있습니다. 거기서 당한 건 이렇게 남더군요.”

흉터가 제 팔을 걷어 보였다.

팔을 뒤덮은 검은 얼룩이 보였다. 타 버린 피부 위에 새살이 돋은 흔적이었다.

연우도 비슷한 자국이 무릎과 허리에 남아 있었다. 몬스터 불소에게 그을린 자국은 피부가 완전히 재생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면 아예 흉터가 사라지지 않거나.

“이건 던전 밖에서 당한 겁니다. 각성하자마자 전역해 길드에 들어가더니, 날 잡으러 온 내 후임한테.”

흉터가 제 얼굴에 난 흉터를 손으로 쓸었다.

“그거 참 간지러웠겠네.”

“가소로웠지요. 매번 내 손으로 구해 온 놈이었는데, 이제 겨우 던전에서 제 발로 기어 나오게 키워 놨더니, 가장 먼저 지원해 각성하고, 그 대단한 능력에 취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날뛰고.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날 죽이지도 못하고, 고작 이딴 생채기나 내고 그러더란 말입니다.”

“누굴 탓하겠어? 후임이 띨한 건 선임 탓인걸.”

“그래서 다음번에 또 만나면 반드시 죽일 생각입니다. 내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지 못하게.”

“그 말, 후임한테 했어?”

“얼굴에 자국이 났을 때 그놈 배에 구멍을 뚫어 놓고 말했습니다.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다음엔 나서지 말라고.”

“뭐래?”

“날 꼭 산 채로 잡아서 강제로 각성시켜 제 부하로 삼겠답니다.”

흉터는 씁쓸해 보였다.

“결국 너도 안 죽이고 왔다는 거네.”

연우가 빈정대며 말했다.

“못 죽였거나.”

“…….”

흉터의 얼굴이 굳었다.

철컥. 어느새 실눈이 총을 빼들어 연우를 겨눴다. 한 손은 여전히 불을 쬐고 있었다. 눈도 드럼통을 보고 있었다.

“거기까지 하시죠. 우리 대장이 좀 마음이 여려서 문제긴 한데. 그래서 내가 대위님 눈깔 하나쯤 해먹어도 봐주실 거 같기도 합니다.”

실눈이 샐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려. 대위님께 실례다.”

흉터가 인상을 썼다. 실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총구를 거뒀다.

하아. 흉터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두툼한 손에 마구 쓸리고 난 다음 드러난 눈은 좀 더 적나라하게 그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사는 이쯤 합시다, 이만하면 우리가 좀 친해지지 않았나 싶은데.”

“친해지려면 첫인상이 중요한데 그 얼굴로 친해지자 해 봤자.”

“짐작했겠지만 우리가 대위님을 모시고 온 건…….”

“모셔 온다는 느낌은 안 들었는데.”

“친해진 기념으로 입에도 사슬을 물려드릴까요? 철분이 부족해 보이시는데.”

“…….”

연우는 철분이 부족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좀 안타까웠다. 의미 없는 개소리야말로 헌터병의 미덕이건만. 그걸 못 견뎌 하다니. 좆같은 세상을 살며 그 정도 유머 감각도 없이 어떻게 버티려고.

“모연우 대리님. 우리는 당신을, 모정우 대령에 대항할 수 있는 상징으로 삼고 싶습니다.”

“…….”

연우는 방금 한 생각을 취소했다.

흉터 녀석, 아주 훌륭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연우의 표정을 본 흉터가 피식 웃었다. 제 말이 우스운 줄 아는 듯했다.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잘 알고 있네.”

“이쪽은 나름 절박합니다. 지난 십 년 사이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안다면……. 그동안 적당히 듣고 본 게 있다고 해도 직접 경험한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흉터의 눈에 흉흉한 기운이 서렸다.

연우는 그가, 아니, 이 자리에 있는 헌터병 다섯 중 절 제외한 넷이 정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나아가 구헌터 테러 집단이 정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그들에게 정우는 공략해야 하는 던전이자 처치해야 하는 던전의 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몸에 익은 대로 정우를 상대하려 하고 있다.

몸으로 부딪쳐 경험하고 습득하고 공략한다.

모정우 대령의 형, 비각성 헌터 모연우. 인지도도 화제성도 있는 그를 내세워서, 구헌터들을 위한 상징으로 만들자.

“이를테면 야구계의 프렌차이즈 스타라고 하죠. 한화의…….”

흉터가 말을 하다 말고 도 닦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위님 그거 압니까? 대위님이 던전에 들어간 이후 한화가 한 번도 우승을 못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못했지만.”

“난 야구에 취미가 없어서.”

“난 적어도 한화가 우승하는 건 보고 죽고 싶습니다.”

“…….”

“그런데 내가, 아니, 우리가 좀 더 오래 버티려면 당신이 필요합니다. 모연우 대위.”

참고로 나뿐 아니라 우리 넷 다 한화 팬이라고. 흉터가 말을 덧붙였다.

연우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야구 광팬 신임 하사 둘이 동시에 밑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엘지와 기아 팬이었던 거 같은데. 서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더 못났다며 싸워 댔다.

그리고 그들은 꽤 오래 살아남았다. 던전에서 돌아와 그날 야구 경기 녹화본을 보는 게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죽었다. 내일의 엘지-기아전, 기아-엘지전도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

“우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흉터가 손을 내밀었다. 연우는 건조한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똘추 새끼. 손이 묶여 있잖아.”

“풀어드리면 잡을 겁니까?”

“…….”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그런 거면 왜 순순히 따라나선 거야!”

단발머리가 발끈했다. 실눈과 빡빡이도 눈빛으로 동조했다.

손을 내민 흉터만이 실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연우는 흉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너희도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아서 너희 아지트로 바로 안 데려가고 여기에 묶어 둔 거 아냐?”

황량한 폐공장은 아무리 봐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테러 집단의 본거지로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마중 나온 구헌터는 넷뿐. 너무 적었다.

“너도 윗대가리는 아닌 거고.”

이런 수고로운 뺑이질에 윗대가리가 직접 나올 리가.

“대위님 말대로입니다. 행동대 대장들 중에서도 제일 하찮죠.”

흉터의 말에 부하 셋의 눈썹이 일제히 꿈틀했다. 부하들 표정을 보니 아주 하찮지만은 않은 듯했다.

다행이었다.

이 정도 되는 인물이 하찮다면 테러 단체에 더 대단한 놈들이 수두룩하다는 건데. 그건 좀 걱정스러운 일이니까.

이 정도 되는 놈은 적당히 좋은 취급 받고 높은 자리에 있어 주는 게 상대편에게도 이로운 법이었다.

‘상대편?’

연우가 실없이 웃었다.

“뭐가 웃깁니까?”

“내가 너무 당연하게 널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데 순순히 따라 나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웃긴 거야.”

“믿는 구석이 있어서입니까? 잘난 동생 모정우 대령?”

“……글쎄.”

연우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던전에서 나온 지 한 달 반. 여기저기서 저 비슷한 말을 숱하게 들었건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넌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앤데. 왜 사람들은 계속 내가 네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정우와 동해 길드의 보호를 받고 있긴 하다. 현재의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저 말을 들을 때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정우를 위해 입양됐다.

모정우를 위해 헌터가 되었다.

모정우를 위해 입대했다.

모정우를 위해 던전에 투입됐다.

모정우를 위해 죽었다.

오직 모정우를 위한 삶을 살았다.

정우의 부축을 받아 개미굴 던전을 나오며, 연우는 그 삶이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계속 그렇게 살았으니까. 잠깐의 죽음마저 그 삶의 일환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우의 10년을 흔적도 없이 먹어치운 던전 밖 세상은, 그 세상 속의 모정우는 더 이상 모연우가 필요하지 않았다.

정우는 헌터가 되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 강했다. 그 옆에 선 연우는 그를 지키긴커녕 그의 삶에 거치적거릴 뿐이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그 사실을 뼛속까지 실감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정우와 아침을 먹고 TV와 신문을 봤다. 정우와 점심을 먹고 간단히 운동을 하고 강의를 들었다. 정우와 저녁을 먹고 한 공간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낸 뒤, 침실 앞에서 정우와 헤어져 문을 닫았다.

정우가 자신을 위해 애써 시간을 내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불을 끄고 바닥에 눕고 나면, 오늘도 얼마나 정우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는가 되새김질했다. 하루치만큼의 무력감이 더해져 숨이 막혔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내일 눈 뜨면 또 정우의 얼굴을 보고 실감해야 하니까.

너는 더 이상 내가 필요 없구나. 아니, 너는 애초부터 내가 필요하지 않았구나.

모정우를 위해 죽을 필요 없었다.

모정우를 위해 던전에 투입될 필요 없었다.

모정우를 위해 입대할 필요도 없었다.

모정우를 위해 헌터가 될 필요도 없었다.

모정우를 위해 입양될 필요도 없었다.

……모정우에겐 모연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 모연우의 삶은 어쩌지? 모정우만을 위해 살아왔고, 살아야 하는 모연우는?

이딴 세상에 왜 살아 돌아온 걸까. 그냥 던전에서 죽어 버렸으면…….

아, 그럼 너를 못 봤겠구나. 살아 있는 너를.

던전에 나온 이후 매일 밤 죽지 않고 아침을 맞이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침밥 먹으러 가자며 찾아오는 정우를 보고 싶어서.

도대체 십 년의 세월을 어디다 버려 두고, 이따위로 구는 걸까.

여전히 모연우는 모정우에게 욕정했다.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다. 그 마음은 개미굴 속에서 갈가리 찢겼으니까.

여기 살아남아 있는 건 더러운 감정의 찌꺼기뿐이었다. 정우의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주제에, 그를 보고 싶어 하루를 연명하고 또 연명하는.

그래서 여기로 왔다. 뭐 하나라도 정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뭐 때문에 여기 놀러 온 건지 물어도 됩니까?”

흉터가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턱을 괴며 물었다.

“글쎄.”

“손잡고 쎄쎄쎄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그런 걸 수도 있지.”

“그럼 놀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말해 주고 싶군요, 모 대위님.”

“…….”

연우는 눈을 들어 흉터를 보았다.

흉터는 계속 연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던전에서 만난 몬스터를 앞에 두고, 이 몬스터는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공격 패턴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는 것처럼.

그리고 이제,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판단이 선 것 같았다.

“난 당신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던전 분석관들은 A라고 말하지만 난 분명 B인 거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 던전 공략 후 투덜대던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다.

“헌터병 전부가 구헌터가 된 건 아닙니다. 일부는 각성해 새 길을 찾고, 또 일부는 나처럼 옛길에 멈춰 섰지만.”

흉터의 눈두덩이 꿈틀했다.

“이도저도 아닌 놈들도 있었어. 꼭 당신 같은 얼굴을 하고.”

“…….”

“난 자주 봤는데. 모 대위님. 당신 그 얼굴, 그 표정과 똑같았지.”

“내가 어디 가서도 전에 봤던 사람 같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대위님, 내가 당신과 닮은 그들을 어떻게 했을 거 같습니까?”

흉터가 선심 쓰듯 물었다.

“죽였겠지.”

연우가 그딴 선심 필요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정답.”

흉터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주인이 절 잡아먹으려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몽둥이로 내리쳐 대는데. 운 좋게 목줄이 끊겨서도 도망칠 생각 않고 주인이 제 이름을 부른다고 꼬리 치고 다가가는 개새끼들을.”

흉터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같은 개새끼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지. 죽여도 내가 죽여. 내 새끼들이었으니까.”

중위라 했으니 중대장까지는 올라갔을 거다. 동기들은 이미 다 뒈져 버렸을 테고. 후임들이 죽는 것도 숱하게 봤겠지.

그 개죽음을 보며 어떻게든 한 놈이라도 덜 죽여 보겠다고 후임을 챙겨 댔을 법한 성격.

눈앞의 몬스터를 파악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죽일 건가?”

“알고 기어들어 온 거 아닙니까? 죽을 자리 찾아서.”

흉터가 물었다.

“모정우 대령의 형이 테러 집단에 잡혀 죽었다. 좋은 뉴스감이지. 그 형이 비각성 헌터 소리 들으며 살아 있는 것보단 도움이 될 테고.”

덩치에 안 맞게 똑똑하군. 연우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모습은 정말 죽을 날을 앞둔 개새끼 같아 보였다.

“걱정 마십쇼. 기꺼이 죽여 줄 테니까. 다만. 바로 죽여 드리진 못할 거 같으니 좀 기다려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왜? 내 앞에 대기자가 많아?”

“아니, 그건 아닌데. 당신을 이용해 모정우, 그놈부터 죽여 버려야 하거든.”

“……!”

연우의 눈빛이 돌변했다. 흉터가 그걸 보고 이를 드러내 웃었다.

“뭔 개소리야. 너희가 정우를 어떻게?”

아직도 정우가 헌터라는 게 이해 안 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와 별개로 정우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헌터라는 건 알았다.

새로운 전설 모정우 대령.

살아 있는 전설 신중윤보다 더 어감이 좋았다. 그러니 이들은 감히, 정우의 손가락 하나도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하는데.

“당신이 있잖습니까.”

“나?”

“우리 편이 되지 않겠다니. 모정우 대령을 함정으로 유인할 미끼라도 돼야지.”

“씨발.”

연우가 이를 악물고 흉터를 노려봤다.

“날 더 설득해 볼 생각은 없어? 사람이 왜 이렇게 끈기가 없어?”

“설득하면 넘어올 겁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설득하면 넘어올 정도의, 고작 그 정도 각오로 할 수 있는 일로 보입니까?”

“…….”

“개소리는 해도 솔직한 건 좋군요, 모 대위님.”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주인 걱정이나 해 대는 개새끼를 보며, 흉터가 메마르게 웃었다.

삶은 여전히 지옥.

헌터병에게 단 한 번도 상냥한 적 없는 세상은 이보다 더한 바닥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적응할 즈음, 더한 바닥을 드러냈다.

내게 주어지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저 멀리서 빛나는 희망을 향해 걸어가다 죽는 것. 아니면 그 희망마저 없는,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떠도는 것.

어떤 것이 더 끔찍한 일일까.

10년을 버티면 전역할 수 있다. 전역하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비록 날 이용하기 위해 입양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그 빌어먹을 희망.

그것이라도 있었던 헌터병과 세상 전체를 적으로 두고 소모전을 벌이는 구헌터는 똑같이 지옥 속을 헤매고 있다 해도 급이 달랐다.

헌터병들에게 신중윤은 전설이었고, 구헌터들에게 모정우는 적이 된 것처럼.

이제 그들에게 세상은 출구 없는 던전이었다. 영원히 헤매다 기어이 죽게 되겠지.

그들은 그 결말을 알면서도 이렇게 지친 채로, 세상과 새로운 전설을 적으로 돌려가면서까지 싸우고 있었다.

이 세상이라는 던전에서 십 년을 바친 그들과 타임홀 던전에 십 년 갇혀 있던 자신. 더 처절했던 건 어느 쪽일까.

묻는 것도, 애써 답을 구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정우는 안 와.”

연우의 목소리가 낮게 끓었다.

“글쎄. 대위님 동생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정우는-.”

“이제 와서 몰랐다느니 변명 마십쇼. 당신, 모정우 대령이 끔찍이 아끼는 형이잖아.”

“정우가 날 구하러 올 리 없다잖아!”

없어야 하는데. 내가 죽기 전까지는.

“올 겁니다. 내기해도 좋습니다. 쎄쎄쎄보단 재미있을 거 같군요. 뭘 거시겠습니까. 대위님 동생 목숨?”

“그건 절대 안 걸어.”

“그래요? 아쉽군요. 난 이길 자신이 있는데. 대위님은 없나 봅니다?”

흉터는 자신도 왕년에 헌터병이었다며 시답잖은 개소리로 연우의 귀를 더럽혔다.

“그럼 우리 이야기는 여기서 정리하고.”

흉터가 몸을 일으켰다.

연우는 그제야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래서 설마,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해 본 적 없는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살짝 쪽팔리기까지 한데.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건들지 마.”

말하자마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나? 태도를 보니 이미 정우랑 어떻게 접선할지 연락이 오간 뒤인 거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흉터는 물론 다른 구헌터들까지 뜨악한 표정으로 연우를 돌아보았다. 이런 걸 우리 단체의 심볼로 내세우려 했다니. 거절당했을 때 한 번 더 권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음.”

흉터가 잠깐 고민했다.

그 역시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는 듯했다. 굳이 입에 담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고.

하지만 연우가 그러하듯 그도 결국 말하고야 말았다.

“당신이 그런 말 할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본인 목숨 부지할 고민이나 더 해 보십쇼. 의미 없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킬킬대며 사악하게 웃지 않았다는 것, 무표정해서 느와르 분위기가 났다는 것이었다.

흉터는 말을 하자마자 연우의 입을 쇠사슬로 감았다. 새삼 철분이 부족해 보여서는 아니었고,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그만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연우가 제 혀를 깨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길든 개새끼들은, 젠장.”

흉터는 이를 갈며 연우에게 윽박질렀다.

“말했잖아. 개새끼들 죽이는 게 내 일이었다고! 내가 죽여 줄 테니까 기다려.”

* * *

올 리 없다.

정우가, 모정우가 올 리 없다.

형 들어가 있는 던전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 들어와 ‘심폐소생술’로 살려 준 건 진짜 고마운데.

입대 전날 있었던 일을 복수한다고 죽었다 살아난 형 뒷구멍에 박아 댔던 건 참, 지금 생각해 봐도 네가 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고.

더 박아 달라고 너 끌어안고 허리 흔들어 댄 나도 미친놈이었다 싶은데.

혹시 네가 날, 좀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 의심됐던 적도 있는데. 도끼병은 아니고. 그냥 오랜 짝사랑의 폐해라 하자.

제대로 정신 박힌 새끼면 아무리 피 안 섞인 사이라지만 동생을 좋아할 리도 없고. 동생 잘 때를 노려 덮칠 리도 없고. 동생이 덮친다고 좋아서 덩달아 흥분하지도 않겠지만. 난 제정신이 아니니까.

헌터병 주제에 제정신은 무슨.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다 치자.

날 강간한 동생 놈이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가 의식해서, 머리가 돌아 버릴 뻔했던 것도 그러려니 하자.

그런데 네 탓도 있어. 너 거기서 끝이었잖아. 한 달 반 동안 나한테 손 한 번 안 댔거든?

꼬박꼬박 데리러 와 주고 같이 밥 먹어 준 건 고마운데. 그건 사회 부적응자 형을 향한 눈물겨운 형제애였다 치자.

닷새 동안 군에 있을 때 거기서 그러더라. 네가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널 위해, 널 대신해 입대한 나한테 가족애를 느끼고 집착하는 거라고.

그런 거로 치자.

그러니까 오지 마.

구하러 오기만 해 봐.

죽여 버린다. 진짜 죽여 버릴 거야.

그러니까 오지 마.

형 말 듣고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정우가 왔다.

눈물겨운 형제애였다. 생중계하여 대한민국 온 국민이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해도 모자를 판국이건만. 고작 구헌터 넷에 미끼가 된 모연우. 겨우 다섯이서만 보게 되다니. 아쉬운 일이었다.

그마저도 한 명은 울분에 차 제대로 보고 즐기지도 못했다. 연우는 정우를 죽일 듯 노려보며 꿈틀댔다.

정우는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수갑은 은은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가 묻어 있었다. 정우의 몸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보랏빛 아이템은 현존하는 아이템 중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었다.

최고 등급은 분홍색이라는데, 그건 전 세계에 몇 개 없다 하니 구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헌터 아이템은 보라색이라 할 만했다. 그마저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정우가 손에 차고 있는 아이템은 특히나 귀한 것으로, S급과 A급의 모든 스킬과 능력치를 봉인하고 신체적 능력까지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군과 경찰이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헌터를 제압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제조법은 국가 기밀에 속했고 완제품은 외부 유출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러 집단은 그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접선 장소에 놓아두었다. 정우는 약속한 대로 혼자 나와 그것을 차고 이리로 왔다.

“근처에 다른 인원은 없습니다. 헌터, 일반 경찰 모두 없는 걸 확인했습니다.”

단발머리가 말했다.

“그쪽은 사람을 좀 깔아 놨던데.”

정우가 퉷, 피를 뱉으며 말했다.

“밖의 열셋, 전멸. 사망자는 없습니다. 아이템 착용 후 능력치 예상 범위 안이었습니다. 스킬 사용 흔적이 없었습니다. 봉인된 게 맞습니다.”

단발머리가 부연 설명하듯 흉터에게 말했다. 대단하군, 흉터는 혀를 찼다.

“별말씀을.”

칭찬받은 정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우가 알아서 길드원들과 경찰을 따돌리고, 제 능력까지 봉인한 채 여기 앞마당까지 와 밖의 구헌터들과 싸우는 동안. 흉터의 패거리도 나름 정우를 맞이할 준비를 해 두었다. 밖에 구헌터들을 배치했고, 안에선 식은 용광로에 불을 지폈다.

용광로가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안에 든 쇳물이 보글보글 용암처럼 끓었다. 기울어져 깨져 있던 부분에서 쇳물이 뚝, 뚝 떨어졌다.

천장에 고정된 레일이 움직이며 쇠갈고리 달린 쇠사슬이 덜커덩덜커덩 흔들렸다. 그 레일은 용광로 위를 지나갔다.

그 용광로 아래, 구헌터들이 서 있었다.

쇠사슬에 감기다 못해 입에까지 쇠사슬을 문 연우는 바닥에서 꿈틀대며 기고 있었고.

그는 정우에게 여길 왜 왔냐고, 미쳤냐고, 정답게 인사하지도 못했다.

빡빡이가 정우에게 다가가 숨긴 무기가 있는지 몸을 훑었다. 수갑을 제대로 차고 있는지, 자신들이 보낸 그 헌터 아이템이 맞는지도 확인한 후 돌아섰다.

“정말 올 줄이야.”

흉터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러게. 정말로 올 줄이야.”

정우가 쇠사슬 누에고치가 된 연우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귀엽네, 형.”

정우는 제집 개새끼가 남의 집 나무에 묶여 있는 걸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

연우는 입을 벌렸다가 쇠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정우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거 돈가스보다 맛있어?”

테러 단체 소굴에 무장 해제된 채 기어들어 왔다는 자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몸이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정우는 샤워 후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듯 피를 대충 훔쳤다.

“아끼는 형 모습이 이런 걸 양해해 줬으면 좋겠어.”

“내 형이 저걸 원했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양해하기 어렵다는 말투였다. 능력이 봉인돼 있어도 당당했다.

빡빡이는 혹시 자신이 아까 수갑을 잘못 확인한 게 아닌가 의심할 뻔했다.

정우의 키와 체격 때문에 다들 자꾸 까먹지만. 정우는 정신계 헌터였다.

대한민국 S급 중 유일무이했으며 그 능력치와 스킬 숙련도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진짜’ 능력에 대한 소문은 도시 괴담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광역시 규모로 환상을 만들 수 있더라. 서울 전체에 결계를 펼 수 있다더라. 던전 몬스터들을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들며, 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단번에 던전을 공략했다더라.

그래서 구헌터 테러 집단은 정우의 능력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늘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능력을 봉인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설마. 아니야. 그건 진짜였어.’

빡빡이는 손으로 직접 만져 봤던 수갑의 감촉을 떠올리며 애써 의심을 지웠다.

정우는 걱정 말라고, 네가 확인한 대로라고 말하듯 싱긋 웃어 보였다.

“네 형은 다른 걸 원했어.”

“다른 거라면?”

“혀를 깨물어 죽으려 하더군.”

피투성이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가셨다. 눈빛이 돌변했다. 그걸 보며 흉터가 웃었다. 피가 안 섞여도 형제가 맞긴 하군.

정우가 눈을 내려 연우를 보았다.

“형, 그거 알아?”

“눈물겨운 형제 상봉은 천천히들 하시고, 일단-.”

“각성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바로 공개한 거, 내 독단이었어.”

“…….”

“…….”

“…….”

“…….”

“…….”

철분을 보충하며 꿈틀대던 연우도, 그 각성이란 것 때문에 나락을 경험한 구헌터들도 함께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지글지글, 쇳물 끓는 소리만 요란했다. 뚝. 쇳물이 떨어졌다.

퉷, 정우는 핏물을 뱉고 말을 이었다.

“딱히 헌터병들의 처우를 걱정해서는 아니었어. 군과 정부에서는 헌터병들의 반발, 사회 혼란 따위를 우려했어. 공개된다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헌터들에 의한 국가 전복 사태. 제어할 수 없게 된 헌터병들의 쿠데타. 그런 것들. 그래서 정보를 제한하려고 했지. 미국 눈을 피할 궁리까지 했는데.”

정우가 발끝으로 잔돌을 툭 찼다. 그것이 또르르 굴러가 흉터의 발치 앞으로 굴러갔다.

“내가 그냥 다 공개했어.”

“……왜?”

흉터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우는 연우를 보며 답했다.

“난 아무 상관 없었거든.”

“뭐가.”

이번에도 흉터가 물었고.

“이딴 세상, 망해 버리든 말든.”

정우는 웃었다.

실제 해외에서는 헌터들의 반란과 폭주로 나라가 궤멸 직전까지 간 사례도 있었다. 구헌터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신헌터들이 난립하여 정부를 정복시키고 정권을 잡거나.

모정우 대령이 ‘계속 가만히 있었다면’ 한국도 비슷한 혼란을 겪었을지 모른다.

구헌터와 신헌터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해졌다. 군과 정부는 힘에 취해 날뛰는 신헌터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구헌터로 불리기 시작한 헌터병들 중 일부는 ‘불온한 움직임’을 내보였다. 잡아먹히기 전에 잡아먹어야 한다. 위기감에 예민하게 반응한 종자들이었다.

헌터병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 투입복을 수의라 생각하고, 국민의 혈세로 만든 매끼 식사를 최후의 만찬으로 생각해라?

던전에 들어가 뒈지는 거면 모를까. 그 국가와 국민에게 삶아 먹히고 싶을 리가.

군 내부가 흉흉해졌다.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무법천지가 되어 갔다.

구헌터와 신헌터 사이에 낀 평범한 사람들? 등 터진 새우가 되든지 말든지.

정우는 악의 넘치는 방관자가 되었다. 불온 세력은 정우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당신을 따르겠다. 충성하겠으니 나서 달라. 은밀히 접선해 오는 이들로 정우의 방문 문턱이 한 치나 낮아졌다.

당시의 정우는 자포자기 상태였기에, 어떤 계기가 없었다면 그 세력에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던 건, 군부 독재로 인해 한국 근현대사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잘 가르친 한국 역사 교육의 승리는 아니었다. 단지, 우연한 기회에 모연우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엘릭서를 제작해 나가며 사설 길드 체제를 도입해 대한민국을 유지시켰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연우가 살아야 하는 세상이니까. 익숙한 모양으로 적당히 안정적인 게 좋을 것 같았으니까.

“십 년 동안 열리지 않는 던전 앞에서 계속 형에게 물어봤어. 살아는 있는 거냐고. 아니면 이미 죽어 개미떼 배 속에 한 조각씩 들어 있는 거냐고.”

“…….”

“만약에 이미 죽었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게 형이 아니라면. 형이 개미떼 배 속에서 소화될 때까지 버티고 있는 그 새끼를 죽여 버리고, 굴속의 개미를 한 마리, 한 마리씩 죽여 배 속에 들어 있는 형의 살점 한 조각,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찾아내 형을 다시 살리겠다고. 생각했지.”

까득. 연우가 쇠사슬을 씹었다.

“그런데, 죽어?”

정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모연우, 넌 내 허락 없인 못 죽어.”

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눈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주먹이 정우의 뺨에 명중했다. 퍽 소리가 나며 정우의 목이 돌아갔다.

“미친놈! 미친 새끼!”

실눈이 괴성을 지르며 정우를 엎어트리고 차고 밟았다.

“상관없어? 누구 마음대로! 너야말로 누구 마음대로!”

그녀는 사정없이 정우를 팼다.

능력을 봉인하는 아이템을 찼다고는 하나, 신체적 능력이 제로가 된 건 아니었다. 반항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정우는 얌전히 맞기만 했다. 팔로 얼굴을 가리는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거라고 떼쓰듯, 정우는 폭력에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흉터와 다른 두 명은 실눈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말리기에도 벅차 보였다.

흉터의 주먹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실눈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가 정우의 목을 쥐고 꺾어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위에 연락해라. 반드시 모정우를 죽이고 가겠다고.”

“네.”

단발이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흉터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연우를 발로 찼다. 주인이 싫으면 그 집 개도 싫은 법이었다.

“주인이 먼저 가는 꼴을 보여 주지.”

흉터의 흰 눈자위에 핏줄이 돋았다.

* * *

얻어터진 정우와 쇠사슬에 감긴 연우가 나란히 묶였다. 눈물겨운 형제 상봉을 마저 하라며, 실눈이 입에 물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주고 갔다.

“미친 새끼.”

연우는 입에 가득한 쇠맛에 진저리치며 정우를 노려보았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한마디도 안 지지. 너 어쩔 셈이야. 무슨 생각으로!”

연우는 말을 쏟아내다 말고 멈췄다. 자신이 하려는 말이 그대로, 정우가 제게 하고 싶은 말인 줄 알아차려서였다.

“너, 무슨 계획이 있는 거지? 그렇지?”

연우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어보았다. 너 새로운 전설이라며. 그러니까 있다고 해라. 없어도 있다고 해.

“글쎄.”

“길드 사람들하고 연락해 놨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든가, 그런 거지?”

“설마. 그럼 저쪽에서 눈치채고 날 이쪽으로 데려오지 않았겠지.”

“너 대단한 헌터라며. 등급인지 뭔지 높다며. 그 수갑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술 수 있는 거 아냐?”

“나 이거 차면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어. 아까 처맞는 거 못 봤어? 우리나라 기술력 몰라?”

정우가 수갑 찬 손을 들어 보였다. 절그럭, 절그럭. 하필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젠장. 연우는 흉터의 치밀함에 치를 떨었다.

“봐봐, 나 피 나는 거. 겁나 아프네.”

정우가 터진 입술을 가리켰다.

늘 슈트만 입고 다니던 깔끔한 모습과 정반대였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붓고 찢어져 피 나고, 온몸은 먼지투성이였다. 누가 봐도 어디서 쥐어터지고 온 몰골이었다.

연우는 흉터와 실눈에 대한 살의가 무럭무럭 샘솟았다. 그렇다고 피해자인 정우가 안쓰러운 건 아니었다. 흉터와 실눈을 증오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정우에게 짜증 났다.

왜 이런 상황에서, 저런 몰골을 하고서도 태연한 걸까. 찢어진 입을 벌리다가 “아.” 인상 쓰는 모습은, 여유로움을 넘어 뇌에 주름이 없어 보였다.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나잇값 못하고 뭐하는 짓이냐고 한 소리 했을 텐데. 그 잘난 외모는 저 몰골이 되어서도 빛이 나 문제였다.

“너, 대체 어쩔 셈이야.”

그건 정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정우를 어떻게 탈출시키지? 이 사슬만 없어도. 어떻게든 정우를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글쎄.”

정우는 그런 연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능력을 봉인하는 아이템을 차고 있어 그런지, 정우를 묶은 쇠사슬은 몇 줄이 고작이었다.

그와 달리 연우는 목 아래부터 발목까지, 야무지게도 꽁꽁 묶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쇳독이 올라 죽었을 거 같은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당장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 건 연우 쪽이었다. 그런데도 연우는 제 몸은 생각지 않고 오직 정우 걱정뿐이었다. 눈물겨운 동생 사랑일까. 아니면 죽고 싶어 환장한 걸까.

조금 전 흉터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 정우는 싸늘히 웃을 따름이었다.

“응. 믿는 구석이 있긴 해.”

정우가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는 실눈을 보며 말했다.

실눈은 살기등등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 실같이 가느다란 눈이 바로 그 눈일 터였다. 오늘날 구헌터가 핍박당하는 게 다 정우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뭔데?”

연우가 반색했다.

“형.”

“뭐?”

“난 형만 믿고 있어.”

“뭐?”

“내가 살았으면 좋겠어?”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형이 살려 줘.”

“내가? 어떻게?”

“각성해.”

연우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럼 날 살릴 수 있을지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눈이 다가와 정우를 발로 찼다. 큭. 정우가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일어서.”

실눈이 정우를 강제로 일으켰다.

연우는 잠깐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형, 옛날에 나랑 터미네이터 영화 본 거 기억나?”

퉷. 정우가 피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실눈이 정우의 복부를 무릎으로 올려쳤다. 정우의 몸이 반으로 접혀 들썩였다.

“그만둬!”

연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우는 그걸 보고 피를 토하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형이 안 구해 주면 나도 그렇게 죽겠지? 터미네이터들이 꼭 저런 데 빠져서 죽잖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실눈이 정우의 등을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아니면 형 인생에 내가 나쁜 터미네이터 같은 거였거나. 저런 데서 죽어야 할 만큼.”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연우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터미네이터란 영화를 좋아했다. 1편도 2편도 좋아했고, 그 후속 시리즈도 모두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지만. 제일 좋아했던 건 2편이었다.

연우는 항상 거기 나오는 터미네이터에 자신을 이입했다. 그렇게 정우를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는 모습까지 완벽했다.

그러니 저 용광로에 떨어져야 하는 건 정우가 아니었다.

“아니라고.”

연우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형제 상봉은 끝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터미네이터인지 뭔지 찍게 해 주지.”

실눈이 정우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도 봤어? 재미있었지?”

정우는 굳이 안 맞아도 될 매를 벌었다. 실눈은 주먹으로 정우의 명치를 연타하고는, 피 토하는 정우를 질질 끌고 갔다.

정우는 고장 난 터미네이터같이 끌려갔다.

실눈이 정우를 동여맨 쇠사슬을 쇠갈고리에 걸었다. 척추를 꿰어 걸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유감인 눈빛이었다. 빡빡이는 용광로가 잘 보이는 위치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정우가 죽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공개할 생각인 듯했다.

실눈이 손짓하자 철커덕, 섬뜩한 기계음이 들렸다. 잠깐 멈춰 있던 천장의 레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우의 발이 붕 떴다. 그의 몸이 갈고리에 걸려 용광로를 향해 나아갔다.

연우는 더 이상 쓰잘데기 없는 소리나 해 대는 시답잖은 헌터병일 수 없었다.

“씨발, 이거 풀어. 당장 멈춰, 멈추라고!”

연우의 목소리가 공장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폐공장은 꼭 동굴 안 같았다. 이 동굴 안에서 이물질은 연우와 정우였다.

구헌터 친화적인 레일은 고작 연우의 말에 겁먹어 멈추진 않았다. 구헌터들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흉터만 눈가를 씰룩일 뿐이었다.

“뭐야, 형도 씨발 하네.”

정우가 털털 끌려 올라가면서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울리지 않아 연우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상징인지 뭔지 하면 되잖아. 할게, 할 테니까 당장 멈춰.”

“필요 없습니다.”

흉터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정우가 없는데, 대위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정우도 살리고 날 데려가란 말이야. 내가 쓸모 있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당연히,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정우가 용광로 근처까지 끌려 올라갔다.

“안 돼.”

연우는 정우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몸부림쳤다. 절그럭, 절그럭. 쇠사슬은 요란한 소리만 낼 뿐.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데도 아직 주사 약효가 남아 있었다. 약효가 떨어졌어도 끊을 수 있었을까 싶지만.

쇠사슬은 오히려 살갗을 파고들었다. 쇠사슬이 끊어지는 것보다 몸이 찢겨 피 흘려 죽는 게 더 빠를 듯했다.

철커덕.

레일이 멈췄다.

정우가 용광로 위에 섰다. 도끼를 든 실눈이 레일 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안 돼. 하지 말라고!”

“어디서 개새끼가 짖는군.”

흉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연우가 믿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그들도 믿기지 않았다. 그 모정우가 저렇게 쉽게 죽는다고?

차라리 이 모든 게 자신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일 듯했다.

단발과 빡빡이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계속 주변을 경계했다. 실눈은 도끼를 어깨에 둘러매고도 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저 쇠문을 뜯어내고 동해 길드원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오길 바라마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트린 개새끼는 주인의 죽음을 앞두고 할 수 있는 게 그거 말곤 없었다.

‘오지 말걸.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뒤늦게 주인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이래서야 정우가 말한 에밀인지 뭔지에 나오는 애새끼랑 다를 게 없었다. 유리창 깨기 전에, 유리창 깨면 추워 뒈질 줄 알았어야 했는데.

후회의 끝은 자해였다.

연우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정우의 상처와 비슷한 위치였다.

모두의 의심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은 당사자는, 정작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연우의 바람과 흉터의 의심대로 숨겨진 비장의 한 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죽고 싶었는데 마침 죽게 되어 다행인 사람 같아 보였다.

정우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펄펄 끓는 쇳물이 어서 오라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S급 헌터와 레어급 아이템 수갑을 단번에 녹여 내기 충분해 보였다. 아마 뼈도 못 추릴 것 같은데.

“남길 말이 있나? 들어주지.”

좀 더 악당 같아진 흉터가 카메라를 턱짓하며 말했다. 정우는 카메라 말고 연우를 보았다.

“형, 안녕.”

“너!”

“아, 나.”

정우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답장 계속 기다렸어.”

구헌터들의 자비는 거기까지였다.

실눈이 도끼를 내리쳤다.

귀청을 잡아 뜯는 쇳소리가 들렸다. 사슬이 끊겼다. 끊긴 사슬이 뱀꼬리처럼 휘몰아쳤고, 팽팽하던 사슬이 출렁였다.

그 끝에 걸려 있던 정우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아래는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였다.

모든 상황이 연우의 눈엔 느리게, 아주 느리게 비쳤다.

그 느린 세상 속에서 연우는 어떤 감각을 떠올렸다.

기자회견이 있던 그날. 마주했다.

뼛속까지 낱낱이 까발려지고 분해되었던 수치심. 몸속에 있던,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무언가에 강제로 갈퀴를 걸어 끄집어 올리려 했던 섬뜩함.

정우라 해도, 아니, 정우이기에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저 밑바닥의 무언가.

그걸 끄집어내느니, 그냥 헌터병으로 죽고 싶었다. 그걸 꺼낸다는 건 그 전까지 살아온 삶이, 정우를 위해 살았던 모든 게 무의미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 같았으니까.

그건 강사가 말해 준 보통의 방법과 전혀 다른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 그것이었다.

정우는 정신력이 강하다느니 방어력이 세다느니, 이해 안 되는 말을 지껄였지만. 연우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에의 욕구도 집착도 뭣도 없기에 끌려 나오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걸 끄집어낼 정도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연우는 아직도 헌터로 발현했던 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든 정우를 품에 안고 무엇을 빌었는지. 얼마나 간절히 빌었는지.

정우가 강제로 끄집어내려 했던 것도 그와 비슷했다. 아니,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연우는 그것을 원했다.

한 달 반. 던전에서 귀환하여 단 한 번도 그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정우에게 도움이 되고 죽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순간만큼은 그것을 원했다.

그건 매달 오던 정우의 편지를 닮아 있었다. 열어 보기 무섭지만, 그럼에도 그건 제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편지에 답장한 적 없지만.

정우를 위해서라면. 정우를 살릴 수 있다면. 이번엔 답할 수 있었다.

기억한다.

그 감각을.

연우는 그날, 정우가 제게 주었던 감각을 되살렸다.

그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연우는 정우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쉽게 잊지 않았으니까.

‘안 돼.’

돼.

‘위험해.’

상관없어.

연우의 눈에 짙은 분홍색이 감돌았다. 잠깐이었지만 충분했다. 연우는 그 감각을 붙잡고, 제 안의 것을 그 갈고리로 꿰어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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