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6)

***

훈련소에서 받은 수면제와 물을 입에 머금고 정우에게 입을 맞췄다. 입대를 앞두고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하자, 지급해준 것이었다. 일주일 치, 일곱 알.

약효를 확인할 겸 사흘쯤 먹어봤는데 100을 세기 무섭게, 마취제라도 맞은 것처럼 고꾸라져 잠들어버렸다.

입술을 맞댈 때까지 아무 반항 않고 순순하던 정우는, 물과 함께 알약이 입 안으로 들어와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가자, 뒤늦게 반항했다.

“씨발, 이게 뭐- 읍.”

정우의 입을 다시 막고, 천천히 백을 셌다. 정우는 성기를 연우의 뒷구멍에 박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반항했다.

일곱. 피 안 섞인 형에게 따먹히는 것보다 정체 모를 약을 삼키는 게 더 무서운 걸까. 의아했다.

오십.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오십칠.

‘피 안 섞인 동생 배 위에 올라타는 놈이 뭘 먹인 건지 무서운 거겠지.’

육십이. 이로써 모정우가 모연우에게 가졌던 인간적인 정- 그러니까 신뢰나 믿음, 형제애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구나. 모연우란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학을 떼고 진저리치겠지.

팔십. 자초한 일이고 각오도 한 건데.

팔십삼. 왜 섭섭할까.

팔십구. 사이코패스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말았다.

구십사. 그랬다면 훈련소 심리검사에서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겠지.

백.

정우의 몸이 축 늘어졌다.

연우는 젖은 수건으로 정우의 몸을 닦고 새 잠옷을 입혀주었다. 이불까지 가슴께에 끌어 올려준 뒤. 잠든 정우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마련 없이 등을 돌렸다.

창밖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른 새벽. 연우는 조용히 집을 떠났다. 양부모님의 배웅도, 정우의 분노도 등지고 도망치듯 입대했다.

***

연우는 헌터보병 소속 훈련병이 되었다.

초기 던전들이 모두 지상에서 열렸기에 급조된 헌터병대가 육군에 편성됐던 것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후 육군은 정식으로 체계를 갖춰, 일반보병, 특전보병과 구분되는 헌터보병을 구성했다. 편제는 특수보병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군대 생활은 십 대 때 다녔던 훈련소 생활의 연속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손에 든 무기가 좀 더 묵직해졌다는 것뿐이었다. 검에는 날이 붙었고 총에는 진짜 탄창이 붙었다.

첫 2년은 훈련병 신분이었다. 내무반 인원 중 절반 이상은 연우와 같은 처지였다. 고아. 혹은 입양아.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제 발로 기어들어온 사람과 남의 손에 목줄이 잡혀 들어온 것은 처음부터 티가 났다. 밝은 사람들은 밝은 사람들끼리, 어느 한구석 모난 것들은 모난 것들끼리 뭉쳐 다니게 되었다. 내부의 대우 또한 차이가 났다.

연우같이 뒷배 없는, 그저 헌터병이 된 것만으로 제 값어치를 다한 것들은 늘 최전방으로 불려 나갔다. 가장 위험한 곳에 세워졌고, 자다가도 불려갔다. 그 공치사는 후방을 지원하는 다른 무리의 몫이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사정이 나은 건, 놀랍게도 연우였다.

집안의 누군가를 대신해 입대시킨 것에게 계속 관심과 지원을 보내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제대 후 어떤 보상을 약속했다면, 던전에 들어가 죽어버리길 바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던전에서 싸우다 죽으면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이 나오니까. 사례금을 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니, 죽기를 바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팔려온 헌터병들에게 입대 후에도 오는 연락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라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헌터병 징집제를 유지하는 국가지만,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지 최대한 헌터병들을 보호해주려고 했다. 군에는 헌터병이 신청하면, 외부 가족의 면담과 연락을 일체 차단해주는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었다. 역시나 신청하면, 매달 헌터병의 계좌로 입금되는 상당량의 월급을 외부에서 타인이 인출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기도 했다.

연습병 딱지를 달게 된 첫날, 가장 먼저 들었던 교육도 이런 제도에 대한 안내였다. 강사는 너희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라고 권했다. 연우는 그때 강의를 들으며 이런 제도가 잘 갖춰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헌터병이 입대해서까지 입양된 가족들에게 시달렸을까, 생각했다.

연우의 양부모는 연우가 죽기까지 바라는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대한 연우를 살뜰하게 챙길 정도로 정 많은 스타일도 아니었다. 세 번이나 헌터가 될 만한 아이를 입양할 정도로 외동아들을 사랑하나, 일에 치여 그 소중한 외동아들을 큰 집에서 혼자 자라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입대한 양아들에게 면회를 올 리가 없었다.

연우가 다른 헌터병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 건 건조한 양부모 때문이 아니라 매달 꼬박꼬박 오는 편지 때문이었다. 편지는 정우에게서 온 것이었다.

입대 후 처음 정우의 편지를 받았을 때, 연우는 열흘 동안 품에만 넣고 다니고 감히 열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동료들은 처음엔 연우가 사채 빚 독촉을 편지로 받는 게 아니냐고 수군대곤 했다.

훈련병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던전 근처 초소에서 일반 병사들과 보초를 섰다. 위험한 시기엔 연우 같은 것들이 특히 더 많이 불려나갔는데. 유독 외롭고 쓸쓸한 날 밤. 연우는 같이 보초 서던 병사들이 꾸벅꾸벅 조는 걸 보다가 무심코, 편지를 뜯어 읽어 보았다.

한 장짜리 편지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잘 지내냐고. 말도 없이 입대하는 게 어딨냐고, 투정 어린 말만 적혀 있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혹시 그날 밤 일이 꿈이었던 걸까?’

결국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망상만 했던 걸까. 그걸 혼자서 현실인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정신 검사 결과지에 정신착란 증세가 있다고 나와 있진 않았는데.

……그럴 리가. 그건 분명 현실이었다. 꿈이나 망상 따위가 아니었다. 무리한 정사로 인해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입대 직후 훈련 성적이 안 좋았고, 입대 전 훈련소 성적보다 한참 떨어진 이유가 뭐냐고 조교 면담까지 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정우는 그날 일을 그냥 없었던 일로 지워버리려고 싶은 걸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래도 절 대신해 군대를 가준 입양아에 대한 고마움과 죄책감으로 그 밤 하루쯤은 용서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어차피 자기가 박힌 것도 아니고 박은 거니까, 정상참작을 해줘서?

연우는 서글퍼졌다.

이후에 달마다 오는 편지들도 다 비슷한 내용이었다. 잘 지내냐. 밖에선 무슨 여자 아이돌이 유행이다. 군대 안에서도 티비는 보냐. 차를 샀다. 미팅을 갔는데 별 볼 일 없었다. 어머니가 조기 졸업하고 유학 가라 한다. 미국에 던전이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까먹은 거 같다. 하나뿐인 아들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나? 그래도 한국이 제일 던전 관리가 잘되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냥 국내에서 진득이 후계자 수업을 하라고 한다. 수능만 보면 공부는 인생에서 끝이라더니, 계속 공부해야 된다.

그리고 끝에 꼭 붙는 씨발.

꾹꾹 눌러쓴 그 두 글자에 연우는 늘 웃음이 났다.

답장할 용기는 없었다. 답장조차 못 하는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 줄 아니까 정우도 면회 오지 않는 거겠지. 아니면 편지는 보내도 면회 와 얼굴을 마주 볼 정도로 자신을 용서한 건 아닌 건지도 모르고.

아무튼 연우는 매달 한두 번씩 오는 정우의 편지를 받았다. 정우의 일상이 담겨 있는 한 장짜리 편지, 마지막에 꼬박꼬박 쓰여 있는 씨발. 그 두 글자를 보며 2년간의 훈련병 시절을 버텼다.

2년 뒤. 일반인은 병장을 달고 제대할 시점에 연우는 훈련병 딱지를 떼고 하사로 진급하여 중대에 배치됐다. 12명으로 구성된 중대에 새로 배치된 하사는 연우를 포함 셋. 다섯 개의 중대를 묶어 구성된 지역대엔 총 17명의 신입 하사가 배치되었다.

중대에 적응할 틈도 없이, 고참들 뒤꽁무니를 쫓아 처음 던전으로 투입됐다. 투입된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죽을 고비에 처했고, 선임의 등 뒤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는 오줌을 질질 싸며 바위 뒤에 숨어 있다 겨우 살아남았다.

연우는 선임에게 들려 나와 바로 군병원에 이송되었고, 부러진 팔다리를 치료받고 6인실을 배정받았다. 나머지 병상에도 연우와 비슷한 시기에 중대 배치된 신임 하사들이 누워 있었다. 연우는 다섯 명의 신음 중창에 자신의 신음을 더하며 사흘 밤낮 토악질했다. 쇼크가 일어날까 봐 수시로 진정제 주사가 처방됐다.

눈을 뜨면 몸이 둥실둥실 뜨는 것 같고 천장이 뱅글뱅글 돌았다.

뱅글뱅글 돌던 천장은 어느새 정우의 얼굴이 되었다. 정우의 얼굴이 쑥 내려오더니 입을 맞추기 직전, 사라졌다.

‘이거 진정제 맞아?’

연우는 피를 토하며 진정제를 더 놔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죄로 다시 던전에 들어갔다. 두 번째 투입이라고 갑자기 던전에 적응하고 실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역시나 숨어 있다가 선임에게 들려 나왔고, 군 병원에 실려갔다.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고, 몇 번 신세를 진 선임과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친해질 다음에야 벌벌 떨면서도 용케 훈련했던 대로 몬스터에게 총을 쏠 수 있게 되었다. 총을 쏘자마자 몬스터의 날카로운 꼬리에 배를 관통당했지만.

자신이 고작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 헌터라는 걸 실감하며, 절 꽁꽁 얽어매는 마물의 촉수를 허벅지에 장착해둔 단검과 권총으로 찢어발겼다. 그 뒤 던전 입구 근처에서 배를 움켜잡고 꿈틀대고 있다가, 몬스터를 소탕한 고참들 손에 들려 다시 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수술을 하고, 몸속에 흐르는 마물의 독을 빼내기 위해 피를 뽑고 혈액팩을 양팔에 주렁주렁 달았다.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고 퇴원 통보를 받았을 때. 연우는 관통당한 상처가 거의 사라진 제 배를 문지르며, 자신이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하필이면 예의상 병문안 온 상관에게 들켜 사흘 더 입원하고 심리 상담과 검사를 받았다.

며칠 후 연우는 아직은 정상이라는 의사 소견서를 받은 뒤 다시금 던전에 투입됐다. 용케 죽지 않고 기어 나왔고 다시 군병원에 이송되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니, 늘 연우를 구해주었던 선임이 그새 다른 중대를 지원하러 갔다가 작전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중대 신임 하사를 구하다 죽었단다. 구해준 신임 하사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고. 시체를 보존하긴커녕 군번줄도 수습하지 못했다고.

열흘 후 중대로 돌아온 연우의 자리에는 새로 지급된 투입복이 걸려 있었다. 가슴에 달린 포켓이 두둑한 게 이상해 열어보니 뜯지 않은 담배 한 갑이 들어 있었다. 담뱃갑에는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덕분에 연우는 오랜만에 인간답게 울 수 있었다.

- 담배 작작 피워라. 이번에도 살아 돌아온 걸 축하한다. (내 덕인 거 잊지 말고ㅋㅋㅋ)

그는 연우와 같은 입양아 처지였다.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를 대신해 입대했다고 했다.

‘너, 내 동생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지?’

‘이미 사진을 백스물다섯 번 보여주셨습니다.’

‘그래? 그럼 백스물여섯 번째로 또 볼 수 있는 영광을 주지.’

‘거절해도 됩니까?’

‘다음번에 안 구해준다?’

‘…….’

‘짜식. 쫄기는. 표정 펴라. 나중에 너 제대할 때 즈음 돼서, 내 동생 예쁘다고 노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저랑 열 살 이상 차이납니다만.’

‘그러니까, 내 동생 욕심내면 죽여버리겠다고.’

‘…….’

‘하, 얼마나 컸으려나? 내가 입대한다니까 얼마나 울고불고하던지. 울다가 기절해서 병원에도 실려 가고 그랬어. 열 밤만 자고 기다리면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선임은 두 번 접은 선이 선명히 나 있는, 낡은 사진을 쓸어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열 밤만 자고 오길 바랐던 오빠가 입대한 지 어언 오 년째. 그 오 년 동안 가족이 선임을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열 살쯤 되었을 동생은 사진은커녕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다.

그래도 선임은 여전히 가족을, 정확히는 헤어질 때 다섯 살이었던 여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월급 잘 모아놨다가 나중에 이 녀석 시집갈 때 보태줘야지. 아, 내가 말했었나? 이 녀석, 시집 안 가고 나랑 산다고 얼마나 울고불고했는지-.’

‘아흔여섯 번 말하셨습니다.’

‘그럼 아흔일곱 번 들어, 새끼야.’

아흔일곱 번 말고 구백칠십 번 정도 들어줄 것을. 귀찮아하며 틱틱 댔던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연우는 꽃이 다 시든 화단가에 앉아 선임이 주고 간 담배 한 갑을 전부 피웠다.

다음 날.

연우는 다시 던전에 투입되었다. 살아남자 또 투입되었고 또 투입되었다.

투입.

이송.

투입.

입원.

수술.

투입.

상담.

심리 치료.

정신병원 입원.

투입.

(공란)

투입.

투입.

(공란)

군병원 이송.

투입.

투입.

입대 후 삼 년 반쯤 지났을 때. 연우는 처음으로 제 발로 던전을 걸어 나왔다. 군병원에 갈 필요 없었고, 이틀 후 다시 던전에 투입되었다. 그 다음번엔 제 뒤꽁무니를 쫓아 들어왔다가 몬스터에게 한 대 얻어맞고 온몸의 뼈가 바스러진 신임 하사 둘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왔다.

사 년째가 되었을 때.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대에 배치된 열일곱 중 살아 있는 건 넷뿐이었다. 같은 중대에 배치된 셋 중 살아남은 건 연우뿐이었다.

하사 둘이 죽을 동안 중대에선 대위 하나, 중사 둘, 중위 둘도 사망했다. 이들은 죽은 뒤 2계급 특진 되었다. 용케 10년을 버티고 제대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부중대장이었던 중위. 중대장이었던 대위가 마물에게 밟힌 중위를 구하려다가 마물에게 잡아먹혀 함께 사망하고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중대는 육 개월에 한 번씩 재조직되었다. 두 개의 중대가 합쳐지기도 하고, 때론 두 개의 지역대가 하나로 합쳐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신입 하사들이 들어올 때가 되면 하나의 지역대, 하나의 중대가 다시 둘로 쪼개져 각기 열두 명의 중대, 육십 명의 지역대가 되었다.

매달 상당량의 생명 수당과 급여가 입금되었다. PX에는 언제나 술이 거저다 싶을 정도로 값싸게 들어왔고, 던전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외출을 신청할 수 있었다. 멀리 갈 수는 없었지만 인근 동네로 어슬렁 놀러 나갈 수는 있었다. 그곳엔 일부러 만들어 놓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려한 윤락가가 조성되어 있었다.

생명의 대가는 다음번 던전 투입 전까지의 기한 한정 방종이었다. 언제 죽을 줄 모를 상태의 헌터병들은 기간 한정의 방탕과 방종을 기꺼이 즐겼다. 대부분 통장에 쌓인 돈을 흥청망청 썼다. 자신이 다음번 투입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통장에 돈을 남겨두고 싶을 리가.

던전 들어가기 전까지 늘 취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 수준까지 가더라도 던전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깼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의 뛰어난 의술, 군병원의 적절한 약물 조치 덕분이었다.

반나절 외출로도 살아남았다는 흥분,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다 풀지 못한 헌터병들은 군영 내에서까지 짐승적인 방법으로 그 날뛰는 감정을 풀었다.

관내에서, 화장실에서, 훈련장 변두리에 세워진 아름드리나무 뒤편에서. 최소한으로 남들 눈을 피했다는 가상한 노력만 한 채로 섹스에 몰두했다. 자다가도 옆에서 자고 있는 동료의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가 박고 흔들고 싸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았다. 아무튼 살아 있으면 됐다. 남자와 여자가 붙어먹고, 남자와 남자도 붙어먹었고, 여자와 여자도 붙어먹었다. 피임이 쉽고 익숙해지면 쾌락도 더 커진다며 남남, 여여의 섹스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갓 훈련병 딱지를 뗀 신입 하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붙어먹는 상관들을 보며 기겁했다.

“이건 뭐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어느 신임 하사의 한마디가 오래도록 회자되기도 했다.

그 동물의 왕국에서 고고하게 동정을 유지하고, 오로지 기도와 성경 읽기로 버티던 헌터병계의 성스러운 종교인은 마의 오 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아무리 고고하게 살고 동정을 유지하고 신을 믿어도 죽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그의 시체 앞에서 그를 비웃는 헌터병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신앙 생활 또한 방식만 다를 뿐, 이 미쳐 돌아가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버티기 위한 발악 중 하나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독실한 신임 하사와 비슷하게,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그 동물의 왕국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 연우였다.

눈앞에서 동료 둘이 붙어먹으며 쓰리썸 하자고 손짓해도 픽, 웃고 말았다. 밤중에 제 모포를 들추고 기어들어오는 동료를 발로 차 떨궈낼 망정 옆에서 헉헉, 윽, 윽, 신음하며 붙어먹는 동료들을 방해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방관. 그리고 무심.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시간을 내 자위를 한다거나 외출해 따로 아랫도리를 푼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연우가 고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연우는 굳이 오해를 풀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그 동물의 왕국에서 방관하는 고자가 되었다.

그 신임 하사처럼 고고한 종교심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소문대로 고자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랑 하면 제 몸에 남아 있는 정우와의 그날 밤 흔적이 더럽혀지거나 지워질 것 같아서. 다른 사람과 접붙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순정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하찮고 더러운 욕망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몸도 알아서 마른 장작처럼 죽어버렸다.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5년을 버텼다. 연우는 소위가 되었고, 중대의 부중대장이 되었다. 헌터병치고 적당한 속도의 진급이었다. 딱히 감흥은 없었다. 그저, 던전에 투입되었을 때 여력이 된다면 신임 하사들을 좀 더 챙겨 나오자는 생각뿐이었다. 예전 선임처럼 제 목숨을 내던져서까지 구할 마음은 없었다.

마의 5년이었다. 이제 5년을 버텼고 5년을 더 버텨야 했다. 이 시기에 헌터병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자살률 역시 급증했다.

군에서는 연우에게 여러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권했다. 연우는 딱히 필요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으나 적당히, 덜 귀찮은 것들을 골라 참여했다. 안 하겠다고 다 거절해도 위험군 취급받는다는 걸 주워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와 관심병사가 되고 싶진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5년이면 강산이 못해도 반쯤은 바뀌는 걸까. 한편, 군대 밖 사회는 연우가 입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연우가 입대할 때 18.9%던 헌터병의 생존율이 5년 사이에 16.3%로 급락했다. 원래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정부와 군은 이러다가 15% 이하, 어쩌면 10% 이하까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듯했다.

대한민국 헌터병대의 병력은 5000 내외로 유지되어야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터병의 발현은 희귀할 정도는 아니나 제법 확률이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 던전 공략 난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신중윤은 제대해버렸다. 신중윤이 제대하자마자 헌터병의 생존율은 30% 이하로 뚝 떨어졌고.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 육군은 헌터보병을 4000명 내외로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그런데 여론은 그런 대한민국 육군의 고민을 알아주기는커녕, 헌터병 모집과 운용을 더 어렵게 만들려고만 하고 있었다. 던전이 안정되어 몬스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현저히 줄어들자, 일반인들이 헌터병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크게 목소리 내는 건, 자식이 헌터병인 사람들. 헌터병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었다.

모든 헌터병이 연우처럼 팔려 들어온 입양아인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이 못해도 절반은 되었다. 군대에선 되도록 연우 같은 입양아 헌터들을 위험한 작전에 우선 투입했지만 든든한 가족이 있는 헌터병들 역시 던전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생존율 역시 30% 이하였다.

그들의 가족은 헌터병의 처참한 시체 앞에서, 혹은 시체조차 없는 빈 관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억 단위의 정부 보조금도 거절하고 군부대와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내 아이를 살려내라.

헌터병들의 인권을 보호하라.

대선을 앞두고, 언론이 이들의 목소리에 포커스를 맞췄다.

- 헌터병들의 처참한 인권 유린의 현장, 이대로 좋은가?

- 대한민국 인권의 사각지대 : 인간 방패 헌터병의 진실

자극적인 타이틀과 기사가 연일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사회에서 헌터병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차 높아져 갔다.

국회에서는 헌터병들의 복무 기한을 줄이는 법안이 논의됐다. 군수업체에서는 일반병들이 던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특수 병기를 만들어 군에 납부하고자 했다. 이번 헌터병 인권 지켜주기 소동이 군수업체 쪽에서 시작된 마케팅 아니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군대는 늘 그랬듯 말을 아끼고 침묵했다. 내부적으로는 대책 마련에 몰두했다.

대중 매체에선 헌터와 일반인의 사랑 이야기가 한창 인기 있는 소재였다. 드라마, 영화가 숱하게 제작되었다. 헌터병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던전 주변 군부대의 열악함에 대한 시사 고발도 심심치 않게 보도되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분개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헌터병의 진짜 실상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매체에 비치는 헌터와 던전, 몬스터에 대한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현실은 더 끔찍하고 잔혹했다. 그리고 헌터병의 인권을 걱정하는 순진하고 착한 국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끔찍한 현실이 국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사회의 기대와 달리 일반병이 던전에 투입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최신의 무기와 장비를 갖추어도, 일반병은 몬스터를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일반인들은 몬스터가 내뿜는 독 섞인 숨소리만 들어도 죽어버릴 터였다.

10m 높이로 뛰어올라 몬스터의 급소에 칼과 총알을 꽂아 넣을 수 있는 건. 몬스터에게 밟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관통당해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도 죽지 않는 건. 헌터뿐이었다.

군이 보기에 헌터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몬스터 대용 살상 무기였다. 군은 10년의 복무 기한을 채우고 제대하는 헌터가 16% 정도라는 걸 차라리 다행으로 여겼다. 그들은 헌터병의 던전 무사 귀환 확률을 높이는데 관심 있을 뿐이지, 무사 제대율을 높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군은 몬스터와의 전투에 익숙해진 헌터, 이 무시무시한 살상 무기가 사회로 나가는 것을 던전의 몬스터가 사회로 쏟아지는 것과 비슷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간의 인식과 달리, 헌터들은 살아 제대해도 자유롭지 못했다. 살아서 제대한 16% 중 절반 이상이 심각하게 부상을 입어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나마 몸이 성한 나머지 절반은 반강제로 헌터 관련 국가 회사, 공사에 소속되어 감시받으며 살고 있었다.

아무튼 군은 수가 줄어드는 헌터병 병력 보충에 대한 고민과, 날로 심해져 가는 헌터병 인권에 대한 사회의 압박에 고민이 많았다. 연우를 비롯한 헌터병들은 저 높은 위쪽에서 자신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군영 밖 사회에서 자신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군에 있어 비극이면서 희극일 사건이었다. 대규모 헌터 병력을 한 번에 잃는 비극. 하지만 사회 유지를 위해선 헌터병들의 희생은 필수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희극.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헌터병들의 인권까지 걱정하게 된 착하고 속 편한 국민들이 그 선한 마음 밑바닥에 숨어 있는 이기심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

전 세계 곳곳에 새로운 던전이 열렸다. 크기는 기존 던전의 두 배였다.

미국에 열 곳, 일본에 열세 곳, 중국에 백삼십 곳. 그리고 한국에 두 곳.

서울과 독도.

서울 한복판. 그것도 대학가 한복판에 던전이 열리고, 몬스터들이 쏟아졌다. 연우가 슬슬 부중대장 업무- 그러니까 던전에서 신임 하사를 돌봐주는 보모 역할에 익숙해질 즈음의 일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이동 인구가 적어 민간인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신속히 초동 대응하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날 위치라는 게 문제였다.

대학가가 봉쇄됐다. 일반 병사들이 후방에 진을 쳤고, 탱크까지 동원되었다. 일선에 선 것은 당연히 헌터병들이었다.

헌터병은 일정한 기한을 두고 전국의 던전들을 순회한다. 새로운 던전이 열릴 당시, 연우가 속한 지역대는 경기도 인근의 던전을 공략 중이었다. 중대들이 순번을 정해 12시간 단위로 번갈아 투입되고 있었다.

연우가 속한 중대는 후발 투입 예정이라 대기 상태였다. 그렇기에 다른 지역에 가 있는 부대보다, 던전에 투입된 다른 중대보다 먼저 연락을 받았다.

새로운 던전이 열렸다고 해서 기존 던전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앞서 투입되었던 인원들을 그대로 두고, 후발로 준비하던 부대 위주로 서울 대학가 신 던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본 명령은 던전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사살하고 대학가를 사수하여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라는 것.

이동 중 명령, 아니, 자원 신청이 하달됐다.

대한민국은 던전 공략에 관해선 꽤 선두에 선, 선진국이었다. 늘 그러했듯, 짧은 시간 동안 던전의 성질을 분석하고 공략 조건을 유추해냈다.

던전의 왕인 여왕개미 몬스터를 사살해야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웨이브가 중단될 것이다. 여왕개미가 죽으면 명령 체계가 끊길 테니, 그러면 몬스터들은 새로운 여왕개미가 자랄 때까지 던전을 지키고자 던전 안으로 기어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전략팀의 분석이었다.

“뭐? 들어가 왕을 죽이라고? 그런 말은 나라도 하겠다.”

“이게 무슨 온라인 게임 레이드인 줄 아나. 왕 죽이는 게 쉬워?”

“아니, 맞는 말이긴 해? 던전 타이밍 맞추는 확률이 기상청 일기예보 맞는 확률이랑 비슷하잖아. 시발, 맨날 비 안 온다면서 비 오고. 이거 죽이면 끝이라더니 저거까지 죽여야 한다고 말 바꾸고.”

일선 헌터들의 생각은 좀 달랐지만.

일단 급한 대로 대학가를 사수하는 팀 하나. 이제 막 열린 던전- 오직 추측과 예상만 난무하는 그 미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여왕개미를 찾아 죽여야 하는 투입조 하나. 헌터병들은 둘로 나뉘어야 했다.

투입조는 말 그대로 죽음의 조였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는.

기존 던전들의 경우 처음에 멋모르고 뛰어 들어갔던 군인들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일반병은 물론이거니와 이후 급조된 헌터병들마저도. 대부분이라고 말한 이유는 살아 돌아온 사람이 한 명 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살아 있는 전설. 신중윤.

그가 공략법을 찾아내 던전을 안정화시켰기에 이후 헌터병 부대는 그의 방식을 흉내내 던전을 안정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신중윤이 재입대하지 않는 이상 막 생긴 던전에 뛰어드는 건 죽고 싶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대대장은 구구절절, 자원자가 누리게 될 특혜를 먼저 늘어놓았다. 가장 먼저 나온 건 2계급 특진. 이것은 죽어서 받는 영예였다. 상부에서도 들어가면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누구도 감히 나서지 않았다. 아무리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를 삶을 사는 헌터병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다가온 죽음에 초월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침묵이 길어졌다. 대대장이 자원자가 없으면 제비뽑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할까 고민할 즈음,

“지원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나섰다.

모연우 소위. 입대 5년 차.

“정말인가?”

자원자가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며 하달된 명령을 읽어 내려갔던 대대장이 놀라 되물었다.

“네.”

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저, 저도.”

“저도 자원하겠습니다.”

연우가 선을 끊자, 띄엄띄엄 자원자가 나왔다. 그것이 대대장을 감격시킨 듯했다.

“……제군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대한민국 육군 헌터병대의 귀감이 될 것이다.”

대대장은 울음을 참기 위해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치하했다.

대대장이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로 인해 자원자에 대한 수많은 특혜 끝자락에 금빛 훈장 하나 더해질지도 모른다든지 하는 건 연우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연우는 대대장의 감격에 찬 포옹을 받으며, 덜컹거리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가리를 벌린 던전. 그 던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대학가. 이곳은 입대 전, 고3인 정우와 함께 왔던 곳이었다. 수능 보고 난 후 논술과 면접을 보기 위해 찾았던 곳이었다. 정우가 지원했고 최종 합격해 입학 등록했던 대학교가 바로 이 대학가에 위치해 있었다.

정우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추측이 연우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다행히 흡입 던전이 아니어서 민간인들이 던전으로 끌려 들어가진 않았으나, 번화가에 있던 사람들이 몬스터 웨이브에 습격 받았다.

근처의 각 대학은 매뉴얼대로 캠퍼스를 봉쇄하고 방어 모드를 발동해 학생들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먼저 도착해 대학가를 봉쇄하다 몬스터 웨이브에 당해 사망한 일반병은 104명, 중상자는 348명. 현재까지 파악된 민간인 사상자는 65명.

이번 작전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사회는 다시 던전의 위험성을 실감할 터. 한동안 헌터병의 인권 문제는 사회의 안전과 유지라는 대승적인 목적을 위해 뒷전이 되리라.

연우는 중대장의 태블릿을 슬쩍 빼내 일반인 사상자의 명단을 빠르게 훑었다. 익숙한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되진 않았다.

모정우는 지금 어디 있을까. 혹시 대학로에 있었을까? 피해 입은 일반인 중에 있었을까? 크게 다쳤을까? 설마…… 죽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살아 있을 거다. 거기 있었을 리 없어.

연우가 아는 모정우는 성격 더럽고 입은 험한 주제에 게으른 놈이었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걸 싫어했다. 쉬는 날만 되면 매일 집에 널브러져서는, 연우에게도 어디 나가지 말고 제 옆에 늘어져 있으라고 강요했다. 어쩌다 쉬는 날, 학교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 집을 나갈 때면 별소리를 다 들었다.

그런 모정우가 이른 아침부터 대학가를 어슬렁거릴 리가.

‘아마 집에서 퍼 자고 있거나, 아니면 졸린 눈을 비벼 뜨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있겠지.’

정우의 부모님은 사회의 상류층이었다. 재력도 권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우를 안전한 곳에 빼돌렸으리라. 다쳤다면 가장 안전한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어쩌면 대학 캠퍼스 내 안전한 대피소에 숨어 이 모든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정우의 형, 대리 입대 헌터 모연우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모정우의 일상을 지켜야 했다.

입대 전날, 싫다고 버둥거리는 정우를 묶고 성기를 빨고, 위에 올라타 실컷 허리를 흔들어댔지 않은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

대학가는 개미를 닮은 몬스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몬스터 개미는 3층 높이만 한 크기였다. 기존 던전에서 보지 못했던 타입이었다.

중대 전체가 진압조가 되어 대학가로 급파됐다. 연우와 자원자 아홉은 후방에서 투입 준비를 했다. 대학가 던전 투입 1조, 연우는 급한 대로 조장이 되었다.

“세 시간, 세 시간만 버텨라. 곧 강원도에 가 있던 병력이 지원하러 올 거다. 그쪽 침투 자원 병력은 스물이다.”

대대장이 말했다.

죽어도 3시간 뒤에 죽으라는 것이었다.

진압조가 길을 터줬다. 연우와 투입조 조원들은 그 길을 달려, 던전 입구로 뛰어들었다. 새까만 어둠에 먹히던 순간. 연우는 언제나 그랬듯 정우를 떠올렸다.

입대 오 년째.

아직도 매달, 정우의 편지가 왔다. 여전히 쓸데없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입대 전날의 일은 한 줄로라도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맨 마지막에 적힌 두 글자는, 꾹꾹 눌러쓴 듯 편지지가 깊게 파인 두 글자. 씨발.

정우의 편지 때문에 연우는 시간을 가늠했다. 정우의 편지가 오면 또 한 달이 지났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오 년.

오 개월도 아니고 오 년.

그 모정우가 답장 없는 편지를 오 년 내내 보내고 있었다.

그때 왜 그랬냐고는 묻지 않더라도, 씨발. 왜 답장 안 하는 거냐고, 그 성질에 한 번은 물어볼 법도 하건만.

정우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정말 한 번도 안 물어봤던가?’

지난주에 왔던 편지는 아직 그의 품속에 있었다. 짬 나는 대로 다시 열어보면 될 일이지만. 지난 오 년간 받아온 편지에도 정말 그 말이 없는지 확인해 볼 기회가-

……없겠지.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이 갈가리 찢겼다 다시 뭉겨 묻는 듯한 끔찍한 고통. 던전 투입의 현기증을 느끼며, 연우는 늘 그렇듯 뒤늦게 후회했다.

‘답장을, 한 번쯤은 해줄 걸 그랬나.’

***

던전 속은 개미굴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꼬박, 몬스터 개미로 가득 차 있었다. 한복판에 떨어진 투입조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칼부터 뽑아 들었다.

연우의 주특기는 칼이 아니라 총이었다. 탄창을 채우는 종류와 레이저 건, 둘 다 능숙히 다루었으나 이번엔 다른 조원들처럼 칼을 먼저 뽑아 들었다. 버티는 게 우선인 상황에선 소모품의 한계가 분명한 주특기는 아껴야 하는 법이었다.

“흩어지지 말고 내 중심으로 모여.”

체력 또한 소모품이었다. 연우는 조원들을 불러들여 절 중심으로 뭉치도록 했다.

“호흡 유지하고, 산소 밸브 3까지 낮춰.”

“3시간 뒤면 후발조 온다고 하는데, 그래도 밸브를 조절합니까?”

“5로는 4시간밖에 못 버텨. 최대 6시간까지 후발조가 못 오는 상황을 가정한다.”

연우는 훌쩍 뛰어올라, 제 앞에 선 몬스터 개미의 머리에 칼을 박았다. 힘을 주니 주우욱- 몸이 반으로 갈렸다.

털썩.

두 쪽 난 개미의 몸. 그 아래 가볍게 착지하는 온전한 연우의 몸.

전투가 시작됐다.

***

칼날은 개미가 내뱉는 노란 액에 녹슬어버렸다. 따로 챙겨온 단검 세 개 역시 날이 모두 녹아버렸고. 레이저 건은 방전됐다. 탄창은 비었다. 산소통 역시 빈 지 오래였다.

무거운 산소통을 벗어 눈앞의 몬스터 개미에게 던진 뒤. 연우와 살아남은 조원들은 마스크를 벗고 맨 얼굴을 드러냈다. 공기 중에 독소가 퍼져 있다면 헌터로 발현된 인간 따위는 첫 숨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독하기를, 바랐다.

불행히도, 던전 내 공기는 사람이 숨 쉴 만한 범위였다. 문제는 몬스터 개미들의 시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체액의 고릿한 냄새였다. 왜 이걸 맡고도 죽지 않는 걸까 싶을 정도로 굉장했다. 코가 마비되고 나서야 겨우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사방에 바글바글하던 몬스터 개미들을 남김없이 멸살시켰다. 연우는 살아남았고, 조원들도 1/3가량이 생존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연우는 탄창이 빈 총을 집어 던져 몬스터 개미의 얇은 다리를 분지르고, 그 몸에 올라타 주먹으로 머리를 쳐 수박 부수듯 부순 뒤 훌쩍 뛰어내렸다,

“……전혀요?”

외부와의 통신 연락 및 몬스터 시체와 부산물 수거, 전투 상황 기록 및 시간 확인을 담당한 기록병이 대답했다.

쿵.

몬스터 개미의 육중한 몸이 연우의 등 뒤에서 무너져내렸다.

“여전히 열한 시 사십오 분입니다.”

하사가 나침반처럼 생긴 시계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

“…….”

“…….”

연우와 나머지 둘은 침묵했다. 누구도 섣불리 마음속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짠 것처럼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떨어져 내렸던 던전의 입구는 뱀의 아가리처럼 끔찍하고 시꺼먼 구멍이었다. 십 리 밖에서 올려다봐도 잘 보일 것처럼 크고 흉물스러웠건만.

그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던전 입구가 사라짐. 어떤 상황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시계가 정지함.

두 가지 현상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타임홀 타입인가.”

연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확인 사살이었다. 살아남은 조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시이발, 뭐? 왕을 죽이면 몬스터들이 던전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일반형?”

누가 가래를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살아 있는 전설, 신중윤 덕에 던전마다 성격이 다르고 클리어 조건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던전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고 무슨무슨 타입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헌터병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타입이 ‘타임홀 타입’이었다.

클리어 조건은 던전의 최종 보스를 해치우는 것.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는 최소한의 안정화 조건은 ‘일정 수의 이물질(헌터)이 던전 내 존재하는 것.

해당 던전이 타임홀 던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징후는 두 가지였다. 첫째, 던전 내에 이물질(헌터)이 살아 존재하는 한 던전의 아가리는 열리지 않는다. 둘째, 던전 내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소위님과 함께 싸우게 돼서…… 혹시나 살아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글렀나 봅니다.”

조원 중 한 명이 혀를 찼다. 연우는 그가 말하는 소위가 자신이라는 걸 뉘앙스상으로 눈치챘으나 답하지 않았다. 꼭 살아남을 거라는 희망적인 말도, 죽을 줄 알고 들어온 거 아니냐는 농담도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연우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당히 무기로 삼을 만한 게 없을까 찾다가, 처음에 죽었던 조원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빼냈다. 시간의 개념이 없어서일까. 죽은 지 오래됐는데도 사후경직이 일어나지 않았다. 말랑한 손이 쉽게 검을 놓았다.

투입 인원 열.

현재 생존 인원 넷.

이 넷이 다 뒈질 때까지 던전은 다시 아가리를 열지 않을 것이다.

체감상 3시간은 충분히 지난 것 같은데. 시계는 멈췄다. 그 체감상의 시간을 믿을 수 없는 공간에 서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정우야.’

다시는 못 보게 된 얼굴이 떠올랐다. 벌써 스물넷 정도는 됐을 텐데. 연우가 기억하는 정우의 얼굴은 여전히 열아홉, 그리고 스물의 얼굴이었다. 제멋대로고 싸가지 없고, 피 안 섞인 형이어도 그렇지 툭하면 모연우 모연우하고 이름이나 불러 제끼고, 형 알기를 제 좆만도 못하게 알아서는 매일 짜증 내고 화내고,

“형? 형. 형이야?”

그래도 그 순간에는 형이냐고 물어보며, 씨발 소리는 안 하던 모정우.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흩어지지 말고 내 중심으로 모여.”

연우는 검을 고쳐 쥐고, 자세를 낮췄다.

체감상의 3시간을 믿고, 어차피 죽을 줄 알고 들어왔으니까 곱게 자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틴다. 최대한 살아남고자 노력한다.

살아남은 조원 셋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연우는 섣불리 확신했다.

***

개미굴.

던전은 말 그대로 개미굴이었다.

끝없이 끝없이, 몬스터 개미들이 몰려들었다. 체감상 사흘 정도, 자지도 먹지도 못한 채 싸우던 것 같은 상황에서 기력이 쇠한 한 명이 몬스터 개미의 단단한 턱에 씹혀 동강 났다. 몬스터와 싸우면서도 깜빡깜빡 졸던 연우와 나머지 둘은 덕분에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었다.

한바탕 전투를 마친 후, 생리적인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셋은 몬스터 개미의 동강 난 몸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을 마셨다. 젤리 같기도 하고 찐득한 수액 같기도 했다. 어떤 개미의 체액은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달았고, 어떤 것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게 밍밍했다.

대충 배를 채우고 나니, 졸음이 몬스터 웨이브처럼 몰아닥쳤다. 옛날에 악독한 일본 새끼들이 독립투사들을 고문할 때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던데. 그게 왜 끔찍한 고문 중 하나였는지 알 것 같았다.

벌써부터 정신이 흐려진 조원 하나는, 몇 마리- 뒤늦게 이쪽으로 몰려온 몬스터 개미들을 마구 죽이며 친일파 새끼들을 다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눈을 뒤집어 깐 채였다. 같은 중대 소속이라는 다른 조원에게 들으니, 대학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다 입대한 놈이라고 했다.

“참고로 저는 중졸입니다. 양부모들이 딱 의무교육만 시켜줬죠.”

그러고는 물어보지도 않은 제 학력을 덧붙여 말했다. 목소리가 익숙해 얼굴을 확인하니, 처음 던전이 타임홀 타입이라는 걸 알았을 때 소위님과 함께라면 살아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둥 입을 나불대던 하사 놈이다.

그가 자신과 한국사 전공의 관등성명을 주절거렸지만, 연우는 나불이와 한국사로만 기억하기로 했다.

연우는 몬스터 개미들을 다 죽여놓고 그 시체를 난도질하며 괜히 힘을 빼는 한국사를 가볍게 제압했다. 그러고는 아직, 그나마 정신을 유지하는 나불이와 의논했다. 어떻게 잘 것인지. 배를 채웠으니 잠깐 눈을 붙여야 했다.

연우와 나불이의 의견이 갈렸다. 나불이는 이동하여 몬스터들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빈틈을 찾아보자고 했다. 연우는 잠시 주변의 지형을 눈으로 훑은 후 고개를 저었다.

“첫째. 여기는 쟤들의 홈그라운드야. 우리보다 더 잘 알 테고, 어딜 가든 쟤들에게 들킬 거야. 둘째, 우리는 있을지도 모를 틈을 찾아 돌아다닐 정도로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셋째, 지형지물을 활용할 수 없으면 적의 내부로 뛰어드는 게 기본이야. 교본에도 나와 있을 텐데?”

“적의 내부요?”

나불이가 되물었다. 연우는 반으로 깨끗하게 갈라진 몬스터 개미의 사체를 가리켰다. 체액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는 내부를.

원래 개미도 그런 건지, 몬스터 개미만 그런 건지. 몬스터 개미는 물풍선처럼, 체액으로 꽉 차 있었다. 대충 긁어내면 그 틈에 비집고 들어가 있을 만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그리고 교본에 나오는 적의 내부는, 그런 내부를 말하는 게 아니었잖습니까. 몬스터의 배 속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적진에 깊숙이 침투해 은신하라는 거였습니다.”

교본을 기억하고 있다니. 나불이가 제법이구나. 연우는 내심 감탄했다. 그렇다고 나불이를 모범생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았다.

둘은 이후도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나불이는 이렇게 말을 하는 시간도 아깝다며 서둘러 이동하자고 했다. 연우는 한국사를 둘러업은 상태에서 더더욱 이 안전한 장소-몰려온 몬스터들을 모두 처치한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장소-언제 몬스터들이 또 떼거지로 몰려올지 모를 장소-로 이동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연우와 나불이는 헤어졌다.

연우는 떠나겠다는 그를 고이 보내주었다. 대신 한국사는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나불이는 체력이 급히 저하된 상태에서 기절한 조원까지는 맡고 싶지 않았다는 듯 두말없이 떠났다.

연우는 몬스터 개미의 시체 중 목이 잘려 죽은, 그나마 몸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골라 속에 남은 체액을 긁어냈다. 빈 속에 한국사를 던져 놓고, 자신도 기어 들어갔다. 속은 사내 둘이 누워도 될 만큼 넉넉하고 어두웠다.

자리 잡고 나선 젤리 같은 몬스터 개미의 체액을 들어온 입구에 처덕처덕 발랐다. 숨통만 남긴 채로 벽 바르듯 바르고는, 그대로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

잠결에 먼 곳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듯도 했다. 으악, 살려줘. 눈을 떠야 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으나,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

바닥이 흔들렸다. 두둥실 떠서 어디론가 옮겨지는 느낌이랄까.

역시나 눈을 뜰 수 없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연우는 여전히 몬스터 개미의 몸통 속이었다. 차칵, 차칵. 손전등을 켜 입에 물고 한국사를 살펴보았다.

열 없음, 숨 쉬고 있음.

눈꺼풀을 까보니 별 이상 없어 보였다.

연우는 뺨을 때려 한국사를 깨웠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멍한 한국사를 꽁무니에 매달고, 입구에 발라 놓은 젤리 같은 체액을 뜯어내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주변에 몬스터 개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나, 잠들기 전과는 다른 장소였다. 좀 더 밝았고 따듯했고, 둥글었다. 이전에 있던 곳이 동굴 복도 같았다면 이곳은 지하 광장 같았다.

아니, 광장 말고 산란실.

연우는 처음 생각을 정정했다.

천장부터 바닥에 이르기까지, 찐득한 체액 속에 잠긴 개미 알들이 빽빽했다. 새끼들이 알을 까고 나오면 빨아 먹으라고 시체들을 수거해 쌓아 놓은 듯했다. 예상했던 상황인지라, 연우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역시.’

타임홀 타입은 처음이라 혹시나 했는데, 몬스터의 성향은 다르지 않은 듯했다.

“우웩.”

사방이 몬스터 알로 차 있는 게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지라. 한국사는 돌아서 토악질을 해댔다. 주르륵, 쏟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 개미 체액 말고는 먹은 게 없으니 나올 것도 그것뿐일 텐데, 토하기는.

쯧. 연우는 혀를 차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도 처음엔 다 그랬어.”

나름 위로도 한마디 건넸다. 한국사는 토하느라 듣지 못한 거 같지만.

토악질 후 탈진해 비틀거리는 한국사를 다시 몬스터 개미 시체 몸통 속에 집어넣었다. 강도를 확인하니 강철같이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있고, 잘 타지 않을 것 같았다.

연우는 시험 삼아 알에 든 체액 한 덩이를 떼어내 불을 붙여 보았다. 화르르. 불이 붙으며 안에 든 알이 녹아내렸다. 경기도 던전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몬스터 말벌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연우는 산란실의 알을 전부 태워, 아니, 녹여버렸다. 그리고 성체 몬스터 개미들이 몰려오기 전, 한국사를 들고튀었다.

몬스터 개미들의 시체 더미 속에서 인간 시체가 몇 눈에 띄었다. 거기엔 허리가 케이크 한 입 먹은 것처럼 씹혀 죽은 나불이가 보였다. 연우는 한국사가 그쪽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

시간 개념이 없는 상태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연우는 산란실을 불태워 녹여버리는 걸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기준을 기준으로, 연우와 한국사는 꽤 오래 살아남았다.

던전을 돌아다니다 보니, 비교적 크기가 작고 몸통의 강도가 무른 몬스터들이 뭉쳐 있는 지역을 알게 되었다. 둘은 그곳에 숨었다.

유리한 지형에 자리 잡고 몬스터 개미들이 몰려오면 죽이고, 체액으로 배를 채웠다. 한 명이 졸면 다른 한 명이 보초를 서는 식으로 조각 잠을 자다가 못 버틸 것 같으면, 이동하여 성체 개미 몬스터를 찾아가 죽이고 그 몸통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잤다. 한숨 자고 나와 산란실을 불태워 녹이고, 다시 약한 몬스터들이 있는 지역으로 튀었다.

산란실은 여럿이었다. 갈 때마다 표시를 해두는데, 이전에 표시해 둔 표식이 있는 곳을 가기도 하고, 표식이 없는 새로운 산란실을 가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사는 토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몬스터 개미를 죽일 때마다 친일파 새끼는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리긴 했다. 정신이 나가 몬스터 개미가 친일파로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말버릇이 된 것 같았다.

처음엔 연우 혼자서 몬스터 개미들을 죽이고, 한국사는 후방 지원을 맡는 정도였는데, 점점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연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게 됐다. 연우는 몬스터를 죽이면 비정기적으로 나타나는 부산물을 수거해 한국사에게 나눠주고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표식 위에 표식이 더해졌다. 이제 웬만한 산란실마다 표식이 오십 개 이상씩은 기본으로 쌓일 무렵.

한국사가 더 안쪽으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더 안쪽.

두루뭉술하게 말했으나, 한국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둘은 주로 성체가 아닌 몬스터 개미들이 몰려다니는 지역에 머물렀다. 때때로 성체 몬스터 개미들이 돌아다니는 곳까지 전진했다. 꽤 안쪽에 위치한 산란실들도 들락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더 안쪽으로 가자는 건, 던전의 왕을 죽이러 가자는 뜻이었다.

단둘이서, 왕을 죽일 수 있을까? 둘 중 하나가 살아 있는 전설 신중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우도 한국사도, 신중윤이 아니었다. 고로 한국사의 말은 자살하러 가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연우는 한국사가 제정신인지 확인해 보았다. 방금 몬스터들과 한판 했던 터라, 온몸에 체액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정신 나가 보이지는 않았다. 이 직전에 산란실에서 잠을 푹 잤기 때문에 잠이 부족한 상태도 아니었고.

그렇다는 건, 제정신으로 말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역시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그랬다.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던전 투입 후 여섯 시간은 지났겠지 싶을 따름이었다.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목적의식도 희미해졌다. 연우는 그럴 때마다 품속에 넣어 놓은 편지를 꺼내 보았다. 편지는 지난주에 도착한 것처럼 빳빳했다. 편지는 구겨질망정 닳거나 삭진 않았다. 시간 개념이 없다는 건 편지가 낡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편지가 닳지도 삭지도 않는 동안, 둘은 그저 살았다. 몬스터 개미를 만나면 죽이고, 몸을 뜯어내 체액을 마시고, 몸통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고. 알들이 꿈틀대는 산란실로 가 알들을 태우고 녹이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연우도 한국사도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미쳐 버린 건지도 몰랐다.

이래서야, 산란실이 수십 번 수백 번 불타든 말든 계속 산란실에 알을 가져다 놓고, 곳곳에서 제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데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시체를 수거해가는 몬스터 개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생긴 것만 다를 뿐. 이미 몬스터 개미처럼 이 던전의 일부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이런 내가 몬스터들과 다를 게 뭐지? 이렇게 영원히 여기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

언제까지?

왜?

끝없는 도돌이표 속에 갇혀 숨 막혀 죽기 전. 차라리 인간으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

한국사는 더 미쳐서 몬스터 개미들과 다를 바 없어지기 전에 인간으로서 죽으러 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 돼. 위험해.”

이미 더 미쳤거나, 덜 미쳤거나. 둘 중 하나인 연우는 반대했다.

“여긴 던전입니다. 어디든 위험해요.”

“우리 둘이선 왕을 못 죽여.”

“해보면 알겠죠.”

“못 죽인다니까.”

“왜 하기도 전에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못 죽일 테니까.”

“저랑 소위님 정도면-”

“안 돼.”

“됩니다.”

“안 돼.”

“될 겁니다.”

“안 돼.”

“될 거라고요! 된다고. 씨발, 그깟 왕 내가 죽여버리겠다니까?”

한국사가 연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씨발. 그 두 음절에 연우의 어깨가 살짝 움찔, 했다. 흥분한 한국사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왜? 왜! 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 더는 싫어, 이렇게 영원히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 건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

“…….”

“…….”

“…….”

“안 되는 거, 너도 잘 알지 않나.”

“……소위님이 가시지 않겠다면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한국사가 스르륵, 연우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홀로 걸어가는 그를 나불이처럼 혼자 보낼 순 없었다.

“김정우 하사.”

하필이면 이름이 정우라서.

언젠가 나불이가 알려주었던 한국사의 이름. 한 번 듣고,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이건 더 미쳤다는 증거일까. 덜 미쳤다는 증거일까.

“예. 하사 김정우. 전방 주시하며 전진하는 중입니다.”

“함께 간다.”

“…….”

“전방 확인은 내가 한다. 뒤따르며 후방을 맡도록.”

“예! 소위님. 역시, 그러실 거라 믿었습니다.”

돌아보는 한국사의 얼굴이 더없이 환했다.

“믿긴, 그런 녀석이 혼자 벌써 그만큼 가 있냐?”

“전방 주시 중이었습니다만.”

“어쭈? 말대답.”

“시정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습니다. 소위님이 좀 이해해 주십시오.

“시간이 많이 지나기는. 얼마나 지났는 줄 알고.”

연우는 픽 웃으며 정우, 아니, 한국사의 등을 퍽 쳤다.

***

성체 개미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최대한 피하며 던전 중앙으로 접근했다. 그간 파악해 두었던 산란실들에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질러 성체들이 그쪽으로 몰리게 한 뒤, 가본 적 없는 곳까지 발을 디뎠다.

여왕개미의 방으로 추측되는 중앙 지점으로 다가갈수록 몸통이 붉은 개미 몬스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이기에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전투가 이어졌고,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

어찌어찌 던전의 왕인 여왕개미의 방까지 찾아갔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할 테지만. 한국사는 물론이거니와 연우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악! 죽어버려, 친일파 새끼야!”

한국사가 하나밖에 없는 팔을 휘두르며 여왕개미에게 덤벼들었다.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살아 있는 전설 신중윤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헌터병 둘로는 던전을 클리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여. 날 죽이라고! 대한 독립 만세!”

한국사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한국사가 먼저 달려들었다고 해서, 연우가 후방 지원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하사는 어디까지나 소위의 아래이지 않은가. 소위 모연우는 여왕개미에게 나머지 한 팔마저 먹힐 뻔한 한국사를 구해 뒤로 집어 던지고, 체액으로 뒤범벅된 무기를 여왕개미의 목에 꽂았다.

팅-

무기가 튕겼다. 어떻게 감히 자신의 몸뚱이를 가지고 여왕개미를 공격할 수 있냐는 듯이.

여왕개미를 공격한 연우의 무기는 성체 개미 몬스터들의 날카로운 턱뼈를 뽑아 갈아 만든 것이었다.

던전 투입 때 가지고 들어온 날붙이는 녹슬었고, 탄환은 다 떨어졌다. 반영구적인 화력기기가 있지만 이건 성체에 통하지 않는다. 산란실에서 알이나 녹여 먹을 때 쓰지.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맨주먹으로 싸울 순 없었다. 헌터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월등해서 주먹질로 성체 몬스터 개미의 몸통을 구기고 찢을 수는 있으나 효율성이 너무 떨어졌으니까.

그래서 연우와 한국사는 던전 내에서 쓸만한 무기를 자체 조달했다. 이는 훈련병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교본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던전에 고립 시, 던전 내 물건으로 생존할 것.

둘의 선택은 간간이 몬스터 개미를 죽이면 나오는 부산물인 ‘녹지 않는 날붙이’와 몬스터 개미의 턱에서 뽑은 ‘몬스터 개미의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그것들을 얼기설기 엮어 ‘몽둥이인 듯 철퇴인 듯한 것’을 만들었다.

연우는 제 몸보다 큰 여왕개미의 눈알이 제 무기를 힐끔, 보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왕개미와 굴속의 몬스터 개미, 산란실에서 알을 까지도 못하고 녹아버린 수많은 개미 몬스터들에게. 침입자, 학살자는 자신들이 아닐까.

너희가 먼 미래에 내 동족을, 내 가족을 죽이게 될지도 모르니 우리가 미리 너희를 죽이고 있는 거란다. 갑자기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 이런 말을 씨불이며 인간들을 학살하면, 우리가 언제 그런 마음을 먹었냐고 눈물 나게 억울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잠깐 사이에.

역시 한국사보다 제가 먼저 미친 거였단 확신이 들었다.

쿠와아아아-

여왕개미가 크게 날갯짓하며 몸을 털었다. 연우는 덧없이 떨어져 나가, 벽에 부딪쳤다.

푸확-

오랜만에 피를 한 바가지 토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쾅. 못해도 갈비뼈가 한두 개는 나간 듯했다. 목에서도 우두둑 소리가 났다.

무기를 든 팔이 기묘하게 꺾여 있었다.

“…….”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아팠다.

하지만 일어나야 했다.

구르듯 몸을 일으키니, 직전까지 널브러져 있던 곳에 여왕개미의 발이 박혔다. 푹- 땅이 꺼지며 주변까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연우는 흔들리는 땅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다시 여왕개미에게 덤벼들었다.

다섯 번, 아니 여섯 번쯤. 여왕개미 몸을 그 부하들의 턱주가리로 만든 몽둥이로 간질였을 때 즈음.

여왕개미가 더는 간지러운 걸 못 견디겠는지 제 발을 몽둥이로 퍽퍽 쳐대는 한국사를 짓밟았다. 연우는 여왕개미의 머리 위에 올라 깡깡, 머리통을 내리치다 급히 뛰어내려 한국사를 끄집어냈다.

한국사는 허리 아래가 짓이겨져 있었다. 숨이 가느다랗게 붙어 있었으나 쇼크사 직전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밟히자마자 즉사였을 것을. 헌터병이기에 편히 죽지도 못했다.

경련하며 퍼득대는 품 안의 한국사. 드디어 제 굴을 소란스럽게 돌아다니던 쥐새끼들을 죽일 수 있어 행복해 보이는 눈앞의 여왕개미.

연우는 선택해야 했다. 한국사를 지혈하다 여왕 개미에게 밟혀 죽기. 아니면, 그래도 기어이 여왕개미에게 덤벼들어 한 번 더 여왕개미의 몸을 간질이다 날갯짓에 찢겨 죽기.

“……씨발.”

연우는 한국사의 몸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한국사의 무기를 왼손에 들었다. 그렇게 양손에 몽둥이를 들고 여왕개미에게 달려들었다.

다섯 번? 여섯 번? 아무튼 계속, 꾸준히 두들겼던 여왕개미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일곱 번째로 여왕개미의 머리통을 간질이고는, 여왕개미의 날갯짓에 말려들어 갔다. 강철처럼 날카로운 그 날개에 온몸이 난도질당했다. 포켓에 넣어 놓았던 편지가 눈앞에서 갈가리 찢겼다.

‘안, 돼.’

손을 뻗었으나 움켜쥐지 못했다.

휘익-

몸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 잠깐의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늘어졌다.

입대할 때부터 한 번도, 살아서 제대할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건만. 막상 죽을 때가 오니까 딱 한 명이 생각났다.

씨발을 입에 달고 다니던 모정우.

그를 대신해 입대한 것도, 죽는 것도, 전혀 아쉽지 않은데. 딱 하나, 그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한 게 후회됐다.

‘역시 답장할 걸 그랬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절대 전할 수 없었지만.

그날, 그거. 좋아해서 그런 거였어.

미안.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철퍼덕. 땅에 부딪치고는 몇 번 튕기듯 꿈틀대다가 축 늘어졌다.

흐릿한 시야에 여왕개미와 한국사가 한 번에 잡혔다. 한국사는 더 이상 경련하지 않았다. 그리 가깝지 않은데, 빛을 잃은 텅 빈 동공이 선명히 보였다. 저를 밟으려 다가오는 여왕개미가 희미하게 보이다 어둠이 내렸다.

‘이 정도 버텼으면…… 많이 버틴 거겠지? 너…… 이제는 안전한 거지?’

연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각이 하나둘, 꺼졌다. 심장이 마지막 박동을 힘겹게 뱉어냈다.

마지막으로 귀가 닫혔다.

쿠와앙-

먹먹한 굉음의 한 조각을 흘러들었다.

그리고 적막이었다.

***

“여태 기다리게 하고선. 씨발, 이런 모습으로 죽어 있어?”

***

두근.

심장이 뛰었다.

눈이 뜨였다.

숨을 쉴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눈앞에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정신이 들어?”

개미는 아니고 사람이었다. 꽤, 아니, 아주 잘생긴.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 까만 눈이, 비웃듯 씩 웃는 얄미운 입매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이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익숙하다니.

‘미쳤군.’

정신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이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딱 한 명, 모정우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정우는 이제 갓 스무 살의 풋사과였다. 눈앞의 미남은 못해도 서른 초반이나 중반은 되어 보였고.

“날 알아보겠어?”

게다가 이 미남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정우가 이렇게 상냥하게 말할 리 없지 않은가.

잘생긴 데다가 목소리까지 좋다니. 이 세상에 모정우 말고 이런 인간이 또 있다니.

“응? 말해봐. 내가 누구야?”

“……연예인?”

이런 게 왜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걸까. TV에 출연하고 있어야지, 왜 타임홀 던전에-

“……!”

자신이 ‘타임홀 타입’ 던전에 있었다는 걸 기억해낸 연우는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연예인?”

남자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컥.”

연우는 숨을 토하며 다시 쓰러졌다.

“윽.”

바닥에 뒤통수를 박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겨우 다시 눈을 뜨니, 절 내려다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더럽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연우는 더 이상 그 얼굴에 홀리지 않았다. 제가 일어나려다 도로 엎어진 게 그가 갑자기 제 배를 꾹 눌러서였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제가 뒤통수를 박을 때 그가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음에도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또한.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잘생기고 성격 더러운 놈은 또 뭐고. 연우는 눈을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던전 안이었다.

여왕개미의 굴속이었고,

“……죽었어?”

여왕개미가 죽어 있었다. 머리, 가슴, 배. 삼등분으로 끊어진 채로.

그걸 본 순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김정우 하사!”

연우는 그의 이름을 절절하게 부르짖으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이렇게,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해진 건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연우를 보며 싱글싱글 웃던 사내의 눈빛은 싸늘하게 돌변했다. 연우는 그마저도 알지 못했다.

체액 말고 붉은 피가 흥건한 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하체가 으스러진 사람, 아니, 헌터병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어.”

연우는 저도 모르게, 제 앞에 있는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는 순순히 끌려왔다.

“뭐?”

“어디 갔냐고, 김정우 하사!”

“그 시체를 말하는 거야? 하반신이 없는?”

“시, 체?”

“그래, 시체. 방금 군에서 수거해갔어.”

“그럼 나는?”

한국사가 죽었는데 왜 자신은 살아 있단 말인가. ‘짜잔- 사실 당신도 죽은 것입니다.’란 농담은 바라지 않았다. 왼쪽 가슴뼈 안쪽에서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 박동은 진짜였으니까. 일반인도 아니고 헌터가 그걸 착각할 수 있을 리가.

그러고 보니 여왕개미에게 얻어맞아 부서졌던 갈비뼈가 왼쪽이었던 것도 같은데. 심장과 폐를 찌르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우는 한 손을 내려 더듬더듬, 왼쪽 갈비뼈를 더듬어 보았다. 뼈는 부러진 적 없다는 듯 붙어 있었다.

“당신, 누구야?”

연우는 제가 멱살을 틀어쥔 사내를 새삼 바라보았다.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였다. 죽었다가 어찌 살아나 눈을 떴는데도 흐릿한 시야가 절로 쨍해질 만큼 잘생겼고, 한쪽 무릎을 굽혀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 연우의 몸을 뒤덮을 듯 체격이 좋았다. 키는 못해도 연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어깨는 수영 선수보다 넓었고, 흉통은 두터웠다. 그의 멱살을 붙잡았던 건 연우인데, 연우를 덮은 그의 그림자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굵은 목 아래 툭 불거진 목젖. 쫙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의 팔. 숨을 쉴 때마다 들썩이는 단단한 가슴. 역삼각형의 상체는 입고 있는 제복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제복.

그가 입고 있는 제복은, 연우가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어깨에 달린 장식은. 헌터병대 소속 대령 직급이나 달 수 있는 표식이었다.

‘대령씩이나 되는 인물이 여기에 왜? 그보다 여기는 타임홀인데? 안에 든 헌터병이 모두 죽지 않는 한 입구가 열리지 않았을 텐데? 그럼 나와 김정우 하사는 결국 죽은 건가? 그런데 왜 난 살아 있는 거지? 이 사람은 왜 여기에서 웃고 있는 거고? 이 남자는 도대체 뭐야. 누구야.’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모든 혼잡의 처음과 끝은 그였다.

“이제야 내가 궁금해졌나?”

“대령?”

“직급은 알아본 것 같고. 내 이름은?”

그걸 알려줘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묻다니. 연우는 ‘너도 나처럼 미쳤냐?’라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날 못 알아보다니.”

남자는 짐짓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순해 보여야 하는데, 성치 않은 몸이 흠칫, 떨릴 만큼 소름 돋았다. 여왕개미 앞에 섰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였다. 그가 누군지 알아맞히지 못한다면 단번에 목이 물어뜯길 것 같았다.

“…….”

하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연우가 답하지 못하자 남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남자는 가식적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손으로 제 왼쪽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저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건 아니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 이름 자수가 박혀 있었다.

모정우.

“……!”

연우는 숨 쉬는 걸 잊어버렸다. 멱살을 잡고 있던 다른 한 손마저 풀어 버렸다.

아직 제힘으로 몸을 가눌 정도는 아닌지라, 연우의 몸이 다시금 뒤로 넘어갔다. 두 번째로 머리를 땅에 박겠구나 싶어 닥칠 고통을 참으려 눈을 질끈 감았건만.

뒤통수는 땅에 닿지 않았다. 대신 사내가 연우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는 연우를 뱀처럼 옥죄며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허리가 조이자 헉,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숨이 사내의 어깨에 부딪쳐 흩어졌다. 간지러운지 사내가 웃음 지었다. 그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말 못 알아본 거야?”

“……정말, 정우야?”

“아아, 못 알아볼 만도 한가? 십 년 만이니까?”

“십 년?”

연우의 눈이 커졌다.

사내의 금속 어깨 장식은 거울처럼 반들반들했다. 거기에 비친 연우의 얼굴은 스물다섯, 던전에 자원 투입했을 때와 똑같았다. 함께 마지막까지 살아 있었던 한국사 역시 계속 그 얼굴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젖혀 절 껴안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엔 이십 대의 풋풋함과 설익음 따윈 보이지 않았다. 폭력적이다 싶을 만치 농염하게 무르익은 성숙한 분위기만 묻어날 뿐이었다. 못해도 연우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였다.

“말도 안 돼.”

“아니, 말이 돼. 오늘로써, 형이 이 던전에 제멋대로 뛰어들어간 지 딱 십 년이거든.”

남자가 싱긋, 웃었다.

“눈물겨운 형제 상봉을 하려고 부대원들을 싹 다 내보내놓고 둘만 남았는데, 못 알아보다니 섭섭해. 형.”

“하지만…….”

“씨발, 좆같아.”

“……!”

“-라고 말해야 알아들으려나?”

“…….”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스무 살.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서른다섯. 쉽게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그의 말마따나 ‘씨발’ 소리를 들으니 그게 믿어졌다. 이 세상에 저렇게 찰지게 씨발 소리를 하는 잘생긴 남자가 모정우 말고 또 있을 리가.

‘내가, 여기서 십 년을 버텼다고?’

그러니 미쳤지. 미쳤다고 둘이서 최종 보스를 죽이겠다고 덤볐지.

“하……”

그래도 그렇지, 십 년. 일 년도 아니고 십 년이라니.

연우는 눈앞의 서른다섯 먹었다는 모정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게, 던전 안에서 십 년을 버텼다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설마 너, 헌터로 발현한 거야?”

“응.”

“언제?”

“그날. 형이 서울 대학로 던전 01로 멋대로 기어 들어간 날. 아, 이 던전은 서울 대학로 던전 01이라고 부르고 있어. 오 년 뒤에 근처에 흡입 타입 던전이 하나 더 생겼거든. 거기는 서울 대학로 던전 02.”

“…….”

서울 대학로에 던전이 둘 있다는 것보다 하필 그날, 정우가 헌터로 발현됐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아무 상관관계도 없겠지만, 연우는 괜히 제 탓인 거 같아 울컥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고개를 땅속에 처박는 제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절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맹수도 저를 보지 못할 거라 믿는 타조처럼.

서른다섯 먹은 헌터 정우는 그런 연우를 손쉽게 손에 넣었다. 맹수가 땅속에 고개를 처박은 타조를 놓치지 않듯.

“그거 알아? 헌터는 하룻밤에 열 번도 발기한대.”

“너는,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연우는 발끈하여 스스로 팔을 치우고 눈을 부릅떠 정우를 보다가 움찔, 했다. 절 내려다보는 정우의 눈이 심상치 않은 걸 그제야 눈치챈 것이었다.

“그런데 난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 눈물겨운 형제 상봉이 싫다니, 그럼 그것부터 확인해보자. 형이 날 못 알아보는 것 같으니, 우리 사이에 제일 인상 깊었던 그날부터 떠올려 볼 수 있게 해봐야 할 거 아냐.”

“……뭐?”

라고 되묻기 무섭게 쫘악- 군복이 찢겼다. 그의, 정우의 손짓 한 번에 군복이 찢겨나갔다.

“모정우, 너!”

“오랜만에 들으니 좋네. 그런데 난, 그때 미처 못 들었던 걸 더 듣고 싶어.”

벨트 푸는 소리와 지퍼 내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악!”

말좆 같던 성기가 뒷구멍에 바로 박혔다.

“뭐하는 거, 윽!”

연우는 두 팔로 정우를 밀어내며 비명을 질렀다. 정우는 한 손으로 연우의 두 팔을 붙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반쯤 박은 성기를 마저 박아 넣었다.

한참을 풀어도 버겁게 받아들일까 말까 한 걸, 제대로 풀지도 않은 채 박혔으니. 아래가 성할 리 없었다. 흉흉한 것이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오는 와중에, 팽팽하게 벌어졌던 구멍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 냄새는 덤이었다.

“윽. 흑. 그, 그만. 찢어져!”

연우가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두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이미 찢어졌어.”

“너, 그게 무스- 억.”

정우가 기어이 제 걸 뿌리 끝까지 박자 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비벼졌다.

“우윽. 윽.”

연우는 내장이 밀려 올라가다 못해, 배 속에 들어찬 성기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압박감에 헛구역질했다.

차라리 여왕개미에게 짓밟혀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바스러지는 게 나을 듯했다. 여왕개미에게 밟혀 부러졌던 갈비뼈가 다시 부러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아래 심장이 위치한 자리까지 성기가 박혀 심장을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아, 아파. 무서워…… 흑, 하지 마……. 아, 윽.”

순수한 고통. 순수한 공포에 질려 울었다. 감히 밀어낼 생각을 못 하고, 정우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빼줘, 제발. 제발 빼줘…… 나 좀 살려줘, 정우야. 정우야, 나 아파 아파.”

“하아, 형. 연우야.”

정우가 허리를 굽혀 몸을 겹쳤다.

“악!”

배 속에 든 성기가 각도를 달리해 내벽을 찔렀다. 연우는 절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는 느끼지도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정우는 그런 연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땀과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을 핥았다. 뺨을 적시는 눈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 먹고는 비명을 질러대는 입술을 겹쳤다.

“으흡!”

두툼한 혀가 입 속에 들어찼다. 정우는 굳은 연우의 혀를 쭉쭉 빨아당겼다. 연우는 숨이 막혀 고개를 젓다 하마터면 정우의 혀를 깨물 뻔했다. 살짝 물고는, 정작 본인이 놀라 입을 벌렸다. 그 바람에 정우의 혀가 더 깊게 들어왔다.

“컥. 커흑. 억!”

목 끝까지 뱀처럼 기어들어와, 입 안을 헤집었다. 연우가 헛구역질을 해도 물러서지 않았다.

연우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정우는 한 손으로 연우의 뺨을 비볐다. 유일하게 다정한 손짓이었다. 강압적인 침입과 폭력적인 입맞춤에 넋이 나가 있던 연우는 그 손길에 반응했다.

“제, 흐…… 바알…… 여, 우야.”

뭉그러진 발음으로 사정하며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그 애처로움이 먹힌 걸까. 정우는 입술을 잠깐 뗐다. 몸을 뒤로 물려 성기를 반쯤 빼냈다. 연우는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아서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한숨 돌리려는데,

“……!”

정우가 단숨에 다시, 성기를 박아 올렸다.

연우의 허리가 크게 휘었다. 정우는 입맛을 다시며 연우의 뺨을 어르던 손으로 다시 연우의 허리를 감았다.

유일한 위안마저 빼앗긴 채, 연우의 몸이 들썩들썩 흔들렸다.

“시, 싫어, 아흑.”

연우는 발뒤꿈치로 땅을 밀어내며 도망가려 했다. 허나 허리가 잡혀 있어 정우의 품에서 한 치도 멀어지지 못했다.

정우는 연우의 허리를 감은 팔을 들어 하체를 올리고는 빠르게 허릿짓했다. 퍽퍽 소리 나게 박아댔다. 한 번 드나들 때마다, 피범벅 된 성기가 반쯤 삐져나왔다가 다시 연우의 안으로 들어갔다.

악. 악. 헉. 억. 아악. 연우는 비명을 내질렀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철썩철썩. 연우의 엉덩이가 정우의 허벅지에 부딪혔다.

“씨발, 존나 좋아…… 씨발, 이걸 내가!”

헉, 정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허리를 박아 올렸다.

“그때, 왜, 그냥 갔어. 응? 형. 말해봐.”

“윽. 흣. 아흣…….”

“너무 조이지 마, 힘 풀어. 하.”

“흑……. 읏!”

“십 년 동안, 형 죽기만을 기다렸던 심정을, 알아?”

“그, 만, 그만. 아파. 아파아- 읏. 제발.”

연우는 눈이 뱅글뱅글 도는 걸 느끼며 안을 조였다. 아니, 본인은 조인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저 몸을 두 쪽 내려는 듯 밀고 들어오는 불덩이를 막기 위해 엉덩이에 잔뜩 힘을 줬을 뿐이었다.

“읏…… 젠장.”

정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연우의 배 속에 뜨거운 게 퍼졌다.

“……?”

연우는 처음에 그게 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

하지만 곧 알아챘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정우의 말대로 십오 년 전, 그날 밤 경험했던 감각인데.

격하게 움직였던 두 사람의 몸이 일순간 정지했다. 허억, 헉. 정우는 연우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연우는 눈을 깜빡이며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으려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나한테 정우가 왜?’

그렇게 이성을 되찾고 정우를 밀어내기 전,

“아직 멀었어.”

정우가 다시 움직였다.

배 속에 들어찬 것은 시들지 않았다. 아니, 더 단단해졌다.

정우가 한 손을 들어 허공을 헤집었다.

“인벤토리, 포션.”

작게 중얼거리자 허공을 헤집던 빈 손에 손가락만 한 약병이 잡혔다.

“……!”

배 속을 찔러대는 성기가 벅차 헉헉대는 와중에도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힉, 히익. 그, 게, 뭐, 뭐…….”

“아, 형은 모르지. 형 여기 처박혀 있는 동안, 흐으, 헌터 발현,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서. 하, 씨발. 조이지 말라니까. 형, 내 걸 끊어먹을 생각이야?”

정우는 이로 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뽑아 퉷, 뱉더니, 물약을 연우의 엉덩이 사이에 부었다. 차가운 감촉에 연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이렇게 형을 생각해주고 있는데.”

정우의 손가락이 제 성기를 받아먹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해지다 못해 찢어진, 연우의 뒷구멍을 건드렸다. 히익. 연우가 놀라 허리를 들어 올렸다. 정우의 손가락까지 비집고 들어올지 모른다고 지레 겁먹어서였다.

“쉬쉬, 괜찮아. 안 그래. 안 아프게 해주려는 거야.”

“흐읏. 으, 아흑.”

“나 믿지? 하, 씨발. 믿는 게 좋을 거야. 형.”

정우는 연우를 달래며 이마에 쪽쪽, 입 맞춰주었다. 아까 뺨을 얼러준 손길도 그렇고, 마치 연약한 연인을 대하듯 다정한지라. 연우는 서러운 울음을 토하며 그의 입맞춤을 구걸했다. 정우는 기꺼이, 연우가 원하는 대로. 깊지 않고 부드러운. 입술을 쪽쪽 부딪쳤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혀를 살살 비비는. 간지러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후응, 응. 으응…….”

연우는 그 입맞춤에 취해, 찢어져 피 흐르던 제 뒷구멍의 찢어진 부위가 아물고, 포션이 닿은 엉덩이와 허벅지의 상처가 흐릿해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정우는 포션에 젖은 연우의 엉덩이를 쥐어 터뜨릴 듯 주무르다 엉덩이를 벌리고, 제 성기를 짓이기듯 쳐올렸다. 강약 박자 맞출 줄 모르고, 그저 세게 조여대는 연우의 안에 제 성기를 처박고 흔들었다.

이 감각, 이날만을 기다리며 버텨온 세월이 십오 년이었다. 기다림의 대가는, 섧게 울며 제가 허리를 박아 올리는 대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이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먹고 싶을 만큼 달았다.

‘다신 놓지 않아. 안 놓쳐.’

정우는 정욕과 집착, 그리고 사랑 비스무리한 것으로 가득 찬 눈을 번뜩이며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울다 부은 눈도, 퉁퉁 부은 입술도. 맛있어 보여서 자꾸만 허기졌다.

그 허기를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있는 대로 허릿짓했다. 이대로, 연우의 몸을 두 쪽 내버리고 그 안으로 파고들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거친 허릿짓을 받아내야 하는 건 연우의 몫이었다.

“아흑. 흑.”

연우는 그에게 짓눌린 채로, 그의 성기가 박히는 대로 몸을 꿈틀거리며, 쾌락과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픈 건지,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고통뿐이었는데. 분명 고통뿐이어야 하는데.

불에 달군 쇠꼬챙이 같은 성기가, 두꺼운 귀두가 내벽을 드득득 긁으며 빠졌다가 퍽 소리 나게 쳐올려 다시 속을 채우는 그 모든 순간. 시시각각. 발끝이 곱아들 정도로, 눈앞에 별이 보일 정도로 짜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헉, 허억. 헉. 배 속이 차올랐다 비워지는 속도에 맞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제 안에 들어차는 성기를 받아들이고, 조이고. 그가 주는 쾌락에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정우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구멍만 남고 온몸이 녹아내려버린 것 같았다. 제 팔다리가 어디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분간이 안 갔다.

“아흣.”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우에게 닿은 몸, 정우에게 닿은 자신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었다.

귓가에 정우의 입술이 닿았다. 혀로 끈적하게 귓바퀴를 핥아내리고, 귓불을 씹어댔다.

“하, 씨발.”

귓가에 닿는 나직한 신음에, 연우는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속살이 알아서, 배 속에 든 것을 잔뜩 조여댔다. 또 한 번 배 속이 더부룩해질 정도로, 정우의 것이 파정했다. 정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허리를 잘게 털었다. 그때마다 찌꺽이며,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연우가 지쳐 늘어지자 정우가 내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풀어줘도, 연우는 도망갈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정우를 밀어낼 생각은 더더욱.

정우는 제 밑에 깔려 반항하지 않는 연우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크고 두툼한 손으로 연우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하, 하지-”

“쉬이. 괜찮아. 기분 좋게 해주려는 거야.”

놀란 연우가 허리를 빼내려 하자, 정우가 연우에게 효과가 좋았던 가볍고 달달한 입맞춤을 해대며 연우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귀두 끝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살살 비벼주고는, 손바닥으로 성기를 감싸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어주었다.

정우가 두 번 갈 동안, 발기는커녕 시들시들한 채로 덜렁덜렁 흔들리기나 했던 성기가 힘을 받아 금세 단단해졌다.

“윽. 흑. 흡.”

연우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비비 꼬았다.

정우의 말대로라면 지난 10년. 거기에 밖에서 소위로 진급할 때까지 복무했던 5년. 도합 15년간 수절했던 몸이었다. 성적 자극 따위는 몸속 DNA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는 듯 잊고 살았던 몸이건만. 정우의 손길 아래, 잊고 있던 본능이 고개를 쳐들었다.

연우의 성기는 단단해지기 무섭게 곧, 정우의 손안에서 파정했다. 오랜만의 사정이었다. 그 감각이 충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서, 연우는 숨이 막혀 숨 쉬지 못했다. 정우가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 넣어주고야 겨우 다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흐으…… 흑…….”

사정 후의 탈진. 남의 손에 해버렸다는 죄책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의 손안에 해버렸다는 절망감. 그것들에 범벅된 연우는 다시 울음을 토해냈다.

“으……흑…….”

두 손을 뻗어 정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울음을 토했다. 끌어안은 탄탄한 몸이. 몸에 닿는 상대방의 온기가. 위안과 절망을 함께 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어떻게 해야 해?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정우를 다시 만나서, 자신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 게 정우라서. 다행이었다. 두려웠다. 좋았다. 슬펐다. 무서웠다.

연우가 제게 매달리자 정우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울음에 잠겨버린 연우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지만.

“괜찮아. 나잖아. 난데 왜 울어.”

정우는 뺨과 코끝, 이마에 수없이 입을 맞추며 연우를 살살 달랬다. 내려놓으려고만 하면 달라붙는, 두 팔과 두 다리로 자신을 꼭 감싸 안는 연우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성가셨다.

연우가 파정하며 내벽을 잔뜩 조이는 바람에, 여전히 연우의 안에 박혀 있던 성기가 또 발기해버렸다. 그건 뭐 당연한 일이니 딱히 충격적일 것도 없지마는. 이걸 또 흔들어 박고 싸야 하는데. 좀처럼 움직일 틈을 주지 않는, 그렇게 매달려오는 연우가 짜증 나게 사랑스럽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와 미쳤다는 말을 쓰는 건 너무 가소로운 표현이었다.

십 년 전, 연우가 이 던전에 몸을 던지는 걸 먼발치에서 보고 달려갔을 때. 닫힌 던전의 문 앞에서, 울부짖으며 연우의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그 직후 발현열을 앓고 헌터로 각성한 것부터가 미친 짓이었고 미쳐버렸던 것이었으니까.

오로지 연우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기다렸다.

기꺼이 실험체가 되어 연구소에서 몸을 갈가리 찢고, 머릿속을 들쑤셔 인벤토리니 스킬이니, 헌터의 숨겨진 또 다른 능력들을 찾아냈고. 고작 던전 최전방에서 화살받이 역할이나 하던 헌터병대를 재편하여 권력을 손에 넣었다.

던전의 왕들을 차례로 제거하여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최고 등급의 포션, 엘릭서 제작 방법을 손에 넣었고. 이후 내내, 모연우가 ‘죽어’ 이 던전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모연우가 투입된 던전과 그 인근 대학로는 그가 세운 사설 길드의 영역. 설사 대한민국 군대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는 발을 들일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 되었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버텨 되찾은 모연우가 지금 그의 몸 아래 깔려, 그의 성기에 박힌 채로 울고 있었다. 애처로이 매달리며 안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이고 싶도록 사랑스러웠다. 당장 목덜미를 물어뜯어 몸 안의 피를 전부 들이마시고 싶도록.

끓어오르는 욕정은 허기보단 파괴욕을 닮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품 안의 마른 몸뚱이를 손안에 넣고 구기고 산산조각 내고 싶다는 마음. 그럼에도 소중히, 상냥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같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으스러뜨려 버릴 정도로 사랑스럽고,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지 않을 만큼 원망스러운데.

두근두근.

살아서 열심히 뛰는 심장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당장은 쥐어 터트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형, 형. 연우 형.”

정우는 연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댄 채로, 입술만 달싹여 속삭였다. 응, 응. 연우는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다시 매달려왔다.

정우는 더 이상 연우를 떼어내 허리를 움직일 틈을 벌리는 걸 포기하고 두 팔로 연우를 꼭 안아주었다. 제 몸에 찰싹 달라붙는 마른 몸, 부딪치는 뼈와 가죽의 감촉을 그대로 느끼며 연우의 목덜미를 씹었다. 그러면서 살살, 허리를 돌렸다.

“흐윽. 윽.”

배 속에 꽉 들어찬 성기가 빠지지 않고 안을 비벼대니, 연우는 그것만으로도 자지러질 듯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배에 끼인 연우의 성기가 뒤쪽의 자극만 가지고 단단해졌다. 정우는 연우의 성기를 배에 낀 채로 슬슬, 허리를 돌리며 잘게 허리를 쳐올렸다.

“윽, 욱. 윽.”

그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소리를 내는 연우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그 안을 헤집으며. 주르륵, 입술 밖으로 흘러넘치는 타액을 쫓아 턱과 목에 입술을 대고. 끝내 정우의 목젖을 빨고 혀로 핥으며.

연우의 왼쪽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두근두근.

당장이라도 뼈를 부수고 움켜쥘 수 있는 그 붉은 살덩이. 이미 죽어 식어버렸던 것에 제 눈물과 엘릭서를 쏟아 다시 소생시켰으니. 이제 이건 신의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것이었다.

모정우만이 움직이게 할 수 있고, 다시 멈추게도 할 수 있는. 모정우만의 것.

모연우.

드디어 손에 넣은 내 것.

연우는 허리를 쳐올리며 연우의 양쪽 가슴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이제 일곱 번 남았네, 형.”

이제, 헌터는 하룻밤에 열 번 발기한다는 말을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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