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otel Mortis
그는 홀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보인 천장은 생각보다 멀었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보니, 가구 다리들이 보였다.
그랬다.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은 적어도 차갑지는 않았지만, 편안하지도 않았으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나른한 근육을 기지개로 깨우며 생각했다.
‘이런 바닥에 누워 잔 것치고는 개운한데.’
몸이 몹시 가뿐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목소리를 내어 자신을 향해 물었다. 이 공간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으므로 꿈이 아니란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생생했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깨달았다. 이곳이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소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사람들이 있다면 자연히 느껴질 미세한 소음까지도…….
그는 손목 관절을 천천히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세련된 방이었다. 더블 사이즈로 보이는 커다란 침대와 협탁, 철제 티 테이블과 의자 따위가 보였다. 은은하게 켜진 간접 조명은 혹여나 삭막하게도 보일 법한 방 안을 분위기 있게 비추었다.
‘대체 멀쩡한 침대를 두고 왜 바닥 따위에 누워 있던 거지?’
바닥에서 완전히 일어나 이 공간을 한 바퀴 돌아본 후, 그는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긴 호텔이잖아?’
커다란 침대와 안락해 보이는 침구,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가구와 내부 인테리어, 방과 이어진 좁은 복도와 붙박이장, 그 옆의 욕실까지. 누가 보아도 비즈니스호텔의 스탠다드 룸이었다.
“대체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 둔 거야?”
그러나 이 호텔 룸에 오게 된 계기도, 그 직전의 기억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괴이쩍은 기억의 공백은 지독한 숙취의 결과물이라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 정신은 너무 또렷했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는 이내 고민을 멈추고 넓지 않은 호텔 방 이곳저곳을 살폈다. 협탁 위에 놓인 디지털시계에는 ‘03:37’이라는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검은 것으로 보아, PM이 아니라 AM 03:37인 것만은 확실했다.
디지털시계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완전히 먹통이었다. 신호 대기음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건 고장이고? 가지가지 하는군.”
데스크로 연결해 자초지종을 물어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호텔은 금액을 선불로 냈던가? 후불이었던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텅 빈 주머니를 뒤지며 부디 호텔 대금이 선불로 지급됐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억이 없는 것을 보아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왔을 리는 없었으니, 자기를 이곳에 던져놓은 누군가가 호텔비를 대신 지급하였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차도 다니지 않는 새벽에 그대로 쫓겨날 판이었다.
‘차라리 모른 척 아침까지 버티다가 외출하는 척 도망치는 건 어떨까?’
차를 잡아탈 돈은 없었지만, 파출소 같은 곳에라도 가서 애원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호텔 방 안을 정신 사납게 거닐었다. 무언가 기억을 떠올려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리가 텅 비어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아예 기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완전히 비워버린 휴지통처럼 깨끗했다.
“이런 희한한 일은 난생처음인데.”
그는 작게 읊조리다가 그 말이 정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통 속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면 이 또한 기억상 ‘난생처음’인 게 맞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데도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있는 자신의 상태였다. 심지어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이상, 이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 또한 자각하기 쉽지 않았다. 경계심을 느끼는 감각 중 하나가 둔탁하게 잘려 나간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이상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사실을 끝없이 되뇌며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구름 같은 침구가 그의 몸을 감쌌다. 침대는 마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안락하고 편안했다.
‘조금이라도 피곤했더라면 그대로 나가떨어지듯 잠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는 손깍지를 낀 손으로 머리통을 받친 채 이렇게 편안한 침대를 두고 바닥에 자신을 내팽개쳐 둔 누군가를 원망했다.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굴리니 특별한 장식 없이 희고 깨끗하게 도배된 천장이 보였다. 어쩐지 이렇게 아무 경계 없이 태평하게 누워 있었던 게 아주 오래간만의 일인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눈꺼풀을 닫았다. 잠들지는 않았다. 갓 깨어났으므로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아니, 비교할 만한 그 ‘어느 때’조차도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시간을 보냈다.
이상할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가늘게 눈을 떠 침대 옆 디지털시계를 확인하니 ‘05:49’이라는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어느새 두 시간가량이 경과한 것이다.
‘슬슬 해가 뜰 때가 되지 않았나?’
몸을 모로 돌려 누워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여전히 새카맸다. 마치 창문에 검은 시트지라도 붙여놓은 듯 칠흑같이 캄캄했다. 조금 있으면 곧 여섯 시이니 동이 터올 텐데, 지금 창밖의 풍경은 검다 못해 영원히 낮이 찾아오지 않을 것같이 보였다.
‘계절이 겨울이었던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겨울에는 아침 일곱 시가 되어도 날이 캄캄할 때가 있었으니 썩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자신이 지금이 무슨 계절인지마저 깨끗하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이쩍음을 느끼고 기억을 되살려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려던 순간이었다.
-딸깍, 딸깍, 딸깍.
작은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스위치를 누를 때 나는 소리였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호텔 룸 안은 지독할 정도의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급작스러운 소음은 그에게 있어서 누군가 귀 바로 옆에서 손뼉을 치는 소리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딸깍.
뒤이어 한 번 더 딸깍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에 얼굴을 마저 찌푸렸다. 그러자 아까보다 빠른 박자로 딸깍이는 소리가 세 번 더 울렸다.
-딸깍.
그리고 역시나 한 번 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의문을 품고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급작스럽게 들려온 요란한 물소리에 그는 소스라쳐 벌떡 일어났다.
소리는 욕실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를 인식하자마자 쏴아아 퍼지던 물소리가 한순간 뚝 끊겼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스위치 소리.
-딸깍, 딸깍.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채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딸깍.
소리와 동시에 욕실과 이어진 복도가 희미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야?”
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가 있는 자리는 욕실 입구를 직접 볼 수 있는 각도는 아니었으나, 알 수 있었다. 욕실 등이 절로 켜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호텔 방 안만 둘러보았지, 욕실 안을 살피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욕실에 있나?’
등골에 차가운 소름이 올라왔다.
‘아니야. 이건…… 배전 문제일 수도 있어.’
알지도 못하고, 기억나지도 않는 전기 관련 지식을 애써 떠올리며 불길한 기분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하던 찰나였다.
-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
스위치 누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귀가 아플 정도로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기이하고도 소름 돋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미친 듯이 욕실 등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불빛이 쉼 없이 점멸했다. 이러다 욕실 등이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운 동시에, 구역질이 났다. 미지의 것이 주는 공포에서 기인하는 구역감이었다.
아래턱에 힘이 실렸다. 전신의 털이 솟아오르고,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수축했다.
-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
그는 욕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의 명멸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응시했다. 이내 눈이 건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연이어 생리적인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으나,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를 덮쳐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뱀 앞의 쥐처럼 몸을 빳빳이 굳혔다. 고작 버튼 누르는 소리일 뿐인데, 머리가 아파져 올 정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심장 박동 소리가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둥둥 울려왔다.
-딸깍딸깍, 딸깍!
-딸깍.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히스테릭한 스위치 소리가 돌연 멈추었다.
“…….”
그러나 그는 쉽게 긴장을 풀지 않았다. 욕실 등을 끄고 켜는 소리는 언제고 다시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침착을 되찾기 위해서기도 했고, 안심할 만큼 충분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자신에게 인지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는 불 꺼진 욕실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숫자를 300까지 헤아렸을 무렵 마침내 딱딱하게 굳었던 몸의 긴장이 한순간 탁, 하고 풀렸다.
“휴…….”
그는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부에 고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숨결과 함께 내뱉었다. 수를 300까지 헤아린 후로도 한참을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다.
“대체 뭐였을까.”
몹시 지친 목소리로 속삭이듯 허공에 말을 건넸다.
“환청이나 환각 같은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꿈이었다든가.”
그는 귀신 따위의 미신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직전에 일어난 사건은 충격적일 만치 현실적인 동시에 또 초현실적이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한순간의 꿈이나 환상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결국, 그가 해야 할 일은 명징했다. 이 공포를 불식시킬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
밀려오는 중압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태 평범하고 세련된 객실로만 보였던 방 안 구석구석이 모두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간접조명으로만 밝혀진 실내에는 이곳저곳 그림자가 고여 있었다. 그림자마다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부러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다섯 살 꼬마애도 아니고. 어둠을 무서워할 나이는 지났지.”
비록 당장 그 자신의 나이조차 기억해낼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다섯 살은 아니란 건 확실했다. 침대 밑, 벽장 속, 그림자 속의 괴물을 두려워할 시기는 이미 지난 것이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을 바닥에 내디뎠다. 발이 바닥에 달라붙은 듯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조차 없으니 진실을 확인할 사람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단순한 설비 오류일 거야.’
그렇게 자위하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다.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카펫은 그의 발걸음 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주었다.
‘가장 무서운 상황은 욕실에 나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이 도사리고 있는 거지.’
귀신 따위보다 사람이 더 두려운 법이다.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는 만약 욕실에서 사람이 튀어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 몸을 보호할 만한 게 필요해.’
제법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그는 철제 의자를 집어 들어 몸을 가린 채 조금씩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호텔 객실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욕실은 침대에서 성인 남자 걸음으로 큼직하게 네댓 발짝만 걸으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머뭇대다, 깊은 한숨과 함께 이동했다.
마침내 도달한 욕실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은 모두 그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듯이…….
한 걸음 더 내딛자 욕실 옆 복도의 센서 등이 저절로 켜졌다.
“깜짝이야!”
부끄럽게도, 그는 매우 놀라 고함과 함께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복도 등이 켜지면서 동시에 열려 있는 욕실 안으로 빛이 비추어졌다. 그는 힐끗, 빠르게 그 안을 훑어보았다.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저 욕실이었다. 활짝 열린 샤워 부스와 거울과 세면대, 변기, 수건 무더기가 놓인 평범한 욕실.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구나…….’
그는 그제야 크게 안심할 수 있었다. 욕실 불이 왜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이 한 일은 아니었다. 역시 설비의 문제인 듯 성싶었다.
복도 센서 등이 꺼지기 전에, 그는 욕실 벽을 더듬어 라이트 스위치를 켰다. 순식간에 욕실이 밝아졌다. 그와 함께 한 자락 남아 있던 두려움이 완전히 산화되어 사라졌다.
“뭐야. 정말로 별거 아니었네.”
그는 욕실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도 없었고, 애당초 존재할 리 없겠지만…… 귀신도 없었다.
‘불빛은 전기 배선의 문제였던 듯하고……. 물소리는 옆 객실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을까?’
이리저리 욕실 내부를 살피며 이 괴현상의 원인을 추론하던 도중, 그는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갔다가 삐끗하고 넘어질 뻔했다. 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으악!”
샤워 부스 벽을 붙잡고 중심을 지탱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뒤로 자빠졌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아찔했다. 그는 머리를 털어내며 있는 힘껏 짜증을 냈다.
“젠장! 대체 왜 이런 데 물기가 남아 있는 거야?”
욕설과 함께 샤워실 바닥을 살피다, 그는 신발창 아래에 밟힌 까맣고 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머리카락?”
두 뼘은 넘어 보이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발을 들어 살펴보니 한 가닥이 아니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샤워실 이곳저곳에 가닥가닥 흩어져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벌레처럼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자 불현듯 전신에 소름이 솟아올랐다.
“여기, 여기는 욕실…… 욕실 청소가 별로네.”
중얼거리며 샤워 부스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는 뒷걸음질 치며 깨달았다.
“어떻게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거지……?”
아까와 같은 물음이었지만, 내포된 의미는 달랐다. 단순히 샤워실 바닥이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적어도 두 시간이 훨씬 넘게 혼자 있었는데, 샤워 부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을 수가 있지?’
샤워 부스가 밀폐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욕실에 들어왔을 때, 부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공기는 건조했고, 막 샤워실을 쓴 것이 아니라면 젖어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설마…….”
그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울렸던 요란한 물소리를 기억했다.
‘만약 그 소리가 이 소리였다면?’
하지만, 대체 어떻게 멀쩡한 샤워기가 혼자 틀어졌다 꺼진다는 말인가? 그의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뒷걸음질 치다, 문득 손끝에 닿는 물기를 느꼈다. 그리고 지문 아래로 엉켜오는 길고 얇은 무엇인가…….
그 또한 머리카락이었다.
“뭐, 뭐야.”
섬뜩한 징조에 입안이 바짝 마르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는 벽에 고인 물기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이동했다. 물방울과 머리카락은 선을 이룬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
그는 한숨과도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섬뜩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물기가 향하는 끝자락엔, 욕실의 점등 스위치가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허리를 숙여 스위치를 자세히 살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벼락의 이름은 공포였다.
누군가 거세게, 연달아 스위치를 누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밝은 욕실 불빛에 비춰 확인하자 스위치 주변에 누군가의 둔탁한 손가락 자국이, 지문이 수없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미지의 순간을 목도하였다는 긴장감에 목구멍이 콱 막혔다. 떨리는 숨을 내쉬며 욕실 등 스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딸깍!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스위치가 홀로 눌려 불이 꺼지는 것을.
“헉.”
그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딸깍, 딸깍, 딸깍.
스위치가 저 홀로 움직이며 등이 다시 켜지고, 꺼지고, 켜졌다. 그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돌연 등이 켜지고 꺼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딸깍딸깍, 딸깍딸깍딸깍딸깍.
-딸깍, 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
마치 짐승이 이를 내보이듯이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고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끔찍한 것과 마주할 것만 같았다.
“뭐, 뭐야.”
재촉하듯 점점 빨라지는 스위치 소리에 그는 허둥지둥 욕실을 벗어났다. 욕실을 벗어나는 도중, 힐끔 본 거울에 무언가 검고 흰 인영이 비친 듯도 했다. 미역처럼 축축이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길게 찢어진 입술이 유난히 선명히 뇌리에 박혔다. 그는 완전히 패닉에 휩싸였다.
‘이곳은 귀신 들렸어!’
그는 욕실 밖으로 뛰쳐나와 침실과 현관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어느 곳으로 갈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이 섬뜩한 객실에서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센서 등이 켜졌고, 그는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잠금쇠가 다 풀려 있었으므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되었다. 등 뒤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객실 밖으로 뛰쳐나와 문을 쾅 닫았다. 그러자 등골을 오싹하게 하던 섬뜩한 시선이 사라졌다.
“……휴.”
객실 문에 등을 대고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이 안에 정체 모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는 하나, 그것이 이 문밖으로는 결코 나오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이상할 정도로 굳건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객실 문 앞에서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숨을 골랐다.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욱여넣고 그 괴이한 현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건이고 존재였다. 그는 평생을 살아오며 단연코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모르겠어. 기억이 나지 않아.’
그는 이제 정말로 이 상황 모두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모르는 장소에서 기억 없이 깨어났으며, 깨어난 호텔 방 또한 귀신 들렸다.
무엇보다 자신은 기억이 완전히 백지상태인데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 그는 욕실에서 거울을 보기 전까지 자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거울에 비추었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창백한 얼굴…….’
유약한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낯이었다. 마치 다가올 일을 예견하듯이 무엇인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아까 본 광경이 진짜는 맞을까?’
그쯤 되자 자신의 얼굴도, 나이도, 심지어 이름까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정신이 얼마나 정상일지, 그런 정신의 인지 능력을 믿어도 될지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치밀어 오른 의구심에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선에 ‘712’라는 문패가 눈에 박혔다. 그렇다. 그는 방금까지 712호에서 머물렀다. 묘한 데자뷔가 일었다.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꿈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712라는 숫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다시 한번 712호의 문을 열었다. 직전의 경험이 그를 두렵게 했지만, 그는 두 눈으로 이 상황을 재차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철컥!
하지만 객실의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한번 닫힌 712호가 다시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철컥, 철컥!
그는 두어 번 더 문을 흔들다 결국 712호에 다시 들어가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문 앞을 서성이며 꽤 괴팍한 결심을 했다. 기억을 찾기 전까지 자신을 한동안 712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누군가 나에 관해 물으면 ‘712호에서 나온 남자’라고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지.’
712는 자신의 기억 상실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내려 노력했다. 아니, 사실 썩 대단한 노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성은 현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며 적신호를 울려댔지만, 그뿐이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이성의 경고는 저 멀리서 울려오는 누군가의 고함처럼 느껴졌다. 마음속 깊이 와닿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는 객실 밖으로 나온 김에 로비 층으로 내려가 빠르게 호텔을 벗어나기로 했다. 꽤 괜찮은 결정처럼 느껴졌다. 곧 있으면 해가 뜰 테니 길을 찾기에도 나쁘지 않을 테고-기억이 없으므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어디로든 걸어가다 보면 파출소 하나쯤은 눈에 띌 게 분명했다.
‘기억을 잃었으니 신원 조회 요청 같은 걸 하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민원인은 처음이라며 어처구니없다며 웃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712는 일단 사람과 좀 부대끼고 싶었다. 종전의 괴이한 경험 때문인지도 몰랐다. 진짜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방금 겪었던 일도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고, 어쩌면……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복도는 어두웠다. 아무리 한밤이라 하더라도 오가는 사람이 있을 테니 어느 정도의 조도는 유지해 둘 법한데, 이 호텔은 취향이 아주 고약했다. 불빛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건의 형체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차라리 손으로 더듬어 느끼는 게 훨씬 더 정확하겠군.”
712는 투덜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문들의 호수를 확인했다. 걷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디 보자. 여기는 704…… 아니, 204호?”
그는 문패의 숫자를 확인하다 눈을 비볐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712호라면 7층의 객실이라는 의미일 텐데, 그 바로 옆에는 2층 4호 객실이 있었다. 통상적인 규칙에 완전히 어긋나는 배치였다.
그는 계속해서 호수를 읽으며 전진했다.
712호의 오른쪽에는 204호가 있었고,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1009호, 513호가 이어졌다…….
712호의 남자는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살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데야?”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문마다 디자인까지 각각 달랐다. 어떤 것은 세련된 디자인의 철제문이었고 어느 것은 백 년은 된 감옥 입구처럼 보일 정도로 낡았으며, 화려한 양각이 새겨져 있는 나무문이 있기도 했다.
712호, 204호, 1009호, 513호, 601호, 310호, 1111호…….
규칙 없는 숫자들이 나열됐다. 그는 계속 앞으로 걸으며 객실의 호수를 모두 둘러보았고, 로비로 가는 길을 찾으려 애썼다. 적어도 이 층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할 만한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종래에는 그조차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이 복도에 끝이 있기는 한 걸까?’
712호의 남자는 끝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체감상 몇 시간은 직진만 한 것 같았다. 복도는 몹시 어두웠으므로 복도 너머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어둠을 향해 오직 앞으로, 앞으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 제자리걸음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곤 오직 스쳐 지나가는 객실의 호수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909호, 508호, 71…… 2호.”
712라는 숫자를 발음하고는, 그는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직진만 했는데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지?’
이 호텔이 거대한 원형의 형태를 하고 있고, 복도가 사람의 눈으로 식별 불가능한 미세한 곡률을 그리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와는 달랐다. 그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712호의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방법이 없었다. 출구를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이미 한 번 돌아본 복도는 언뜻 보기에 이전과 다를 것 없이 보였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이야?”
남자는 712호를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꺾인 길을 발견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는 분명히 직선뿐이었던 복도가 오른쪽으로 꺾여 있었다.
극심한 혼란이 찾아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정신이 나가 버린 걸까?’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계속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계속 그래왔듯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모퉁이.
다시금 찾아온 712호의 원점.
직진, 우측, 좌측, 직진, 직진, 직진, 원점…….
매번 원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복도의 모양이 달라졌다. 마치 복도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영원히 어두운 복도를 헤매다 삶을 마감하는 게 아닐까?’
타성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자문할 때쯤이었다.
“……사람 없어요? 여기 어디 사람 없습니까?”
텅 빈 복도에서 사람 목소리가 울렸다. 712호의 남자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가 이미 지나왔고, 아무것도 없었던 그 복도.
본래의 그였다면 몹시 두려워하였겠으나, 살아 있는 복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이상하지 않았다. 공포보다 반가움이 먼저였다. 이 복도를 헤맨 지 몇 시간은 된 것 같았다. 홀로 호텔 객실에서 깨어난 이후로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712는 자기가 혼자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곳은 홀로 떠돌기에 너무나 어둡고 기이했다.
“거기 누구 계시나요?”
712는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크게 외쳤다. 그러자 메아리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어디 사람 없습니까?”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목소리가 굵고 중후했다. 중년 남성이 소리치고 있었다. 712는 그 목소리에 몹시 안심했다. 연륜 있는 목소리가 주는 안정감이란 대단했다.
“여기 사람 없어요?”
중년인은 712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는지 계속 사람을 찾아 외치고 있었다. 712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여기 사람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 계신 장소로 가겠습니다! 제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곳 길이 계속 바뀌어서 한 사람은 가만히 있어야 할 듯합니다!”
“어디 사람 없습니까?”
하지만 그의 방향에서는 712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계속 복도가 가득 울리도록 고함쳤다.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가울 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소리가 우렁우렁하게 커졌다. ‘사람’에게 점점 가까워진다는 증거였다.
“여기 어디 사람 없어요?”
712는 소리를 따라 걸었다. 소리가 크게 울려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꽤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십여 분가량을 걸었을까. 2m 전방에 거무튀튀한 실루엣이 보였다. 복도가 어두워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곳이 꺾인 길이고, 누군가가 꺾인 모퉁이 너머로 상체를 내놓고 소리를 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대강 분간할 수 있었다.
712는 그 모습을 짧게 평했다.
‘겁이 많은 분이로군.’
하지만 그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질릴 정도로 이상하고 소름 끼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또한 712호 객실을 나올 때 사색이 되어 뛰쳐나오지 않았던가. 저 중년인 또한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한 일을 겪었다면 저 정도의 겁쟁이가 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 없어요? 여기 어디 사람 없습니까?”
그는 구슬프게 들릴 만치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공포감에 휩싸여 완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했다. 712는 그에게 조금씩 접근하며 남자를 안심시켰다.
“어디 사람 없어요?”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안전한 사람입니다.”
“여기 어디 사람 없습니까?”
“진정하세요. 가까이 갈 테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남자에게 거의 가까워졌을 때쯤이었다.
끊임없이 사람을 찾던 목소리가 불현듯 뚝 멈추었다. 중후한 목소리로 우렁우렁 울리던 복도가 급작스레 적막에 휩싸였다.
“……선생님?”
기묘한 적막에 그를 부르자 712를 향해 몸을 내밀고 있던 사내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해 도망가 버리기라도 할까 봐, 712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발걸음을 재게 놀려 복도 모퉁이를 끼고 돌았다.
“으악!”
그리고 그는 누군가와 부딪혀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이고야……. 죄송…… 죄송합니다.”
712는 가장 먼저 부딪힌 코끝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분명한 자신의 실책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사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712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닌, 시커먼 벽 같은 무엇인가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기 전이었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람 없어요? 여기 어디 사람 없습니까?”
그와 동시에 기이한 감각이 휘몰아치듯 그를 감쌌다.
‘뭐지? 사람을 보고도 왜 못 본 척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야?’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나 검고 커다랄 수 있는가? 시야에 들어오는 ‘무언가’의 몸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했다.
712는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뭐…… 뭐야.”
그는 나자빠진 채로 뒤로 기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 세 명을 합친 것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졌으며, 벌거벗은 몸체를 감싼 피부는 불에 타거나 화학 물질에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이 녹아내려 끈적끈적해 보였다. 어깨가 끝나고 목이 시작되어야 할 부분에는 몸통만큼 커다란 머리가 곧바로 달려 있었다. 눈과 귀와 코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한가운데 거대한 입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입속에는…….
그 거대한 입속에는 남자의 상체가 박혀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 형체는 인간의 일부였다.
괴물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고, 곧이어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남자의 시체가 바람이 들어간 듯 팽팽하게 일어서 외치기 시작했다.
“사람 없어요? 여기 어디 사람 없습니까?”
괴물은 마치 인간을 피리 불듯이 불었다. 쩍 벌린 검은 목구멍에서 바람이 빠져나올 때마다 시체가 서글프게 사람을 찾으며 울었다.
시체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초로의 사내였다. 오른쪽 눈 아래에 점이 두 개 찍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괴물의 목구멍 속에 박혀 생전의 목소리로 울어대는 시체의 모습은 기괴하고, 또 기괴했다.
“아……. 아아, 으으아…….”
712는 몸을 떨며 조금씩 뒤로 기었다. 당장이고 일어나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으나, 공포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했다.
‘부디, 부디 저 괴물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기를.’
그는 간절히 빌었다. 저 괴물은 눈이 없으니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기를,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기를…….
하지만 이 호텔에서 일어나는 기현상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투둑, 툭!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입 안에 박힌 중년인의 시체가 기우뚱 기울었다. 그리고 그것의 입에서부터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바닥에 상반신만 남은 시체가 요란하게 나동그라졌다. 괴물은 제 입에서 분리된 그것이 보이지 않는 듯 앞으로 걸어가 그대로 밟아 우그러뜨렸다. 지독하게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몸이 부서지고 으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712는 그 광경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무력할 정도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공포감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 아, 하는 소리를 목구멍에서 간신히 내뱉으며 덜덜 떠는 일뿐이었다.
“우웩.”
구역질이 솟았다. 그는 헐떡이며 맑은 물을 토해냈다. 시체를 밟고 선 괴생물체의 모습이 역겨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지막을 예감한 육체가 공포를 이기지 못해 발악하는 것이었다.
-쉬이이이이이익!
괴물의 시커먼 목구멍 속에서 바람 소리가 울렸다. 저것은 자기 힘만으로는 울지 못했다. 자기를 대신해 울어 먹이를 유인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쿵!
기괴한 방향으로 오그라든 거대한 발바닥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괴물이 712에게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사, 살려줘…….”
그는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거대한 형체를 향해 빌었다. 712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뿐이었다. 사지의 힘줄이 모두 끊긴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날개가 꺾인 새처럼 무력하게 바르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712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괴물은 자신의 하체를 씹어 삼키고, 상체만 남겨 피리처럼 불 것이었다. 또 다른 희생자를 구할 때까지 712의 목소리로 사람을 부르고 또 부를 것이다.
괴물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그와 괴물의 거리는 한 걸음 남짓.
“시, 싫…….”
둔중한 몸체와 달리, 괴생물체가 움직이는 속도는 마치 빛처럼 빨랐다. 712는 종아리에서부터 퍼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것의 거대한 목구멍은 712를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그의 다리는 마치 톱니바퀴 사이로 빨려 들어간 듯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괴물의 입 안에서 살점이 썰리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튀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으아, 아, 아파! 으아아악!”
712는 사지를 경련했다. 고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고통을 1초라도 더 느낄 바에는 차라리 빨리 죽어버렸으면 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이토록 고통이 명료히 느껴질 수가 없었다.
“흐으, 허, 흐윽, 사, 살려…….”
하반신을 거의 뜯어 먹히고도 712는 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 있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눈가의 실핏줄마저 모두 터져 붉은 눈물이 흘렀다.
그러던 712의 복강 안으로 무언가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두툼하고 탄력 있는 길쭉한 무언가가 배 속을 헤집었다.
‘이제 죽을 수 있겠구나.’
그는 드디어 죽음이 당도했음을 깨닫고 안심했다.
괴생물의 촉수는 횡격막을 뚫고 기도를 찾아 안착했다. 내장이 진탕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괴생물이 흉통을 부풀려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것은 712의 목구멍을 통해 숨을 내쉬었다. 712는 목구멍이 열리며 제 입술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여기, 어디 사람 없나요? 누구 없습니까?”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712의 숨이 완전히 끊겼다.
***
그는 홀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보인 천장은 생각보다 멀었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보니, 가구 다리들이 보였다.
그랬다.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은 적어도 차갑지는 않았지만, 편안하지도 않았으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나른한 근육을 기지개로 깨우며 생각했다.
‘이런 바닥에 누워 잔 것치고는 개운한데.’
몸이 몹시 가뿐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목소리를 내어 자신을 향해 물었다. 이 공간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으므로 꿈이 아니란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생생했다. 넓은 공간 특유의 소리 울림이 고막을 동동 때렸다.
“아.”
그 기묘한 공간감에 그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 그는 어째서 이곳이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소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사람들이 있다면 자연히 느껴질 미세한 소음까지도…….
그는 손목 관절을 천천히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눈에 다 살피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장정 세 사람은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침대, 그리고 침대에 깔린 새하얀 고급 침구. 인공 불씨가 피어나 아른거리고 있는 모형 벽난로와 영화관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커다란 스크린의 벽걸이형 TV, 곳곳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들…….
‘대체 멀쩡한 침대를 두고 왜 바닥 따위에 누워 있던 거지?’
심지어 티브이가 걸린 가벽 너머로 이 침실보다 더 크고 화려한 침실이 보이기까지 했다. 수 개의 침대가 있는데, 바닥에나 드러누워 있었다니 그것처럼 낭비인 일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이 미지의 공간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침실에서 나와 넓은 응접실을 반 바퀴 돌았을 무렵, 이 장소의 정체를 깨달았다.
‘호텔이잖아?’
그것도 보통 호텔 객실이 아니었다.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화려함이라면 최고가의 스위트룸이래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체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 둔 거야?”
그는 먼지 하나 없이 텅 빈 주머니를 뒤지며 부디 호텔 대금이 선불로 지급됐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억이 없는 것을 보아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왔을 리는 없었으니, 자기를 이곳에 던져놓은 누군가가 호텔비를 대신 지급하였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하룻밤 사이에 억울한 빚쟁이가 되어 호텔 접시 닦이로 일하게 될 판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된 거지?”
그러나 이 호텔 룸에 오게 된 계기도, 그 직전의 기억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아예 기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완전히 비워버린 휴지통처럼 깨끗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이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알 게 뭐야. 당장 호텔비도 못 내게 될 판이 됐는걸.’
그는 이내 고민을 멈추고 넓은 호텔 방 이곳저곳을 살폈다. 객실을 탐험하며 발견한 벽걸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약 세 시 오십 분가량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면으로 탁 트인 창밖을 내다보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검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낮 세 시 오십 분이 아닌 새벽 세 시 오십 분인 것만은 확실했다.
딱히 특별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경찰에라도 자기 자신을 신원 미상자로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쯤이었다. 그는 응접실 한구석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그러나 전화는 완전히 먹통이었다. 신호 대기음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스위트 비품이 고장이라고?”
그는 어처구니없어하며 수화기를 달칵 내려놓았다. 보통 객실도 아니고, 스위트 객실의 전화기가 고장이라니. 호텔에서 이런저런 용무로 꼭 한 번은 사용하기 마련인 물건이었다.
-스스슥.
어깨를 으쓱하고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데, 뭔가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소음을 제외하면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실내였다. 그렇기에 그 미세한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하지만 소리는 너무나 한순간 스쳐 지나갔으므로 소리가 난 방향조차 알아내기 어려웠다.
“잘못 들었나?”
이마를 찌푸리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는 이미 이 스위트를 한 바퀴 돌면서 부자들의 거창한 삶을 속속들이 빼놓지 않고 대강 경험해본 참이었다. 이곳에 그 이외의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있더라면 벽장 속에나 숨어 있을 게 분명하지.’
그가 열어보지 않은 문은 붙박이장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런 수고를 하며 노력을 낭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대로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스스슥.
그러자 다시 한번 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바닥을 빠르게 기어갈 때 나는 소리였다.
‘아니면 바람 소리일지도?’
하지만 바람 소리라기엔 너무나 가까이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또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로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걸까?”
소리는 잊힐 만할 때쯤이면 계속하여 울렸다.
-슥, 스슥, 스스스스!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일정한 소리만큼이나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소리에 관한 강박 따위는 차치하더라도, 이 작은 소음은 신경을 이상할 정도로 자극했다.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인 거야?”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러나 스위트 객실은 넓어 어디에서부터 소리가 나는지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이곳인 듯하여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저곳에서 소리가 났고, 저곳으로 뛰어가 소리를 듣다 보면 또 다른 곳에서 스슥 소리가 울렸다. 어느 한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무언가 이동하며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올라왔다.
‘이곳에 나 혼자가 아니라니?’
그는 괴상한 도시 괴담 따위는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이상한 상황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살인자가 나를 이곳에 가둬 두고 사냥하려는 것 아니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무기 대용으로 쓸 만한 물건을 찾으려 객실의 미니 바로 향했다. 포크나 무딘 나이프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영 안 되면 술병이라도 꼬나드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니 바의 진열장을 뒤지던 순간이었다.
-스스, 스스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천장 진열장에 무언가 그림자가 스쳐 갔다.
‘어?’
그는 등 뒤를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은 여전했다. 커다랗고 안락한 스위트 객실의 정경…….
다시 뒤를 돌아 찬장을 뒤지던 찰나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찬장 문을 응시했고,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천장에 어떤 여자가 붙어 있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존재를 습관적으로 ‘여자’라고 칭한 이유는, 시커먼 머리카락이 바닥을 향해 치렁치렁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 아니, ‘그것’은 마치 바닥을 기는 도마뱀처럼 천장을 기고 있었다.
-스스, 스스슥.
그는 그제야 이 미세한 소음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패닉에 빠졌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몸을 삐걱대며 찬장을 뒤지는 척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그 존재는 한동안 가만히 천장에 붙어 있는 듯했다. 그는 눈알을 힐끗힐끗 굴리며 조금씩 그 존재에서부터 멀어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여자의 모양을 한 그것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내보였다. 길게 찢어진 눈 사이로 흰자 없이 시꺼먼 눈동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찬장 문을 통해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의 낯은 얼어 죽은 사람처럼 푸르뎅뎅했다. 코는 없었고, 그저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입은 쫙 찢어진 채로 활짝 웃음 짓고 있었다. 소름 끼쳤다.
뱀 앞에 선 생쥐처럼 몸이 굳었다. 그것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 목을 옆으로 꺾었다. 마치 ‘네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나 또한 알고 있어.’라며 속삭이는 듯했다. 곧이어 그것의 목은 끝없이 돌아가 이내 사람의 몸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각도까지 꺾이기 시작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어찌해야 할 바를 잊은 채 그것이 천천히 목을 회전하는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머리통을 반 바퀴 돌린 그것이 그를 향해 빠르게 기어오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으, 으악!”
그는 손에 쥔 것을 모두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는 몰랐다. 다만 본능이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스위트 객실의 출구를 찾아 우왕좌왕했다. 뒤를 언뜻 볼 때마다, 그 존재는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몸을 완전히 벽에 붙이고는 손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기었다.
‘안 돼!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해!’
그는 안간힘을 다해 뛰었다. 다급한 마음마저 더해지자 실수가 잦아졌다. 그는 휘청휘청 뛰어가며 방 곳곳에 놓인 가구나, 장식품들에 몸을 부딪혔다. 쨍그랑, 쿵!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의 그였다면 그가 망가뜨린 물건들의 가격에 걱정부터 앞섰을 테지만,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는 그깟 몇 푼 돈 따위 아무 쓸모가 없었다.
객실 안을 얼마간 헤맨 끝에, 그는 마침내 출구로 보이는 문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찾았다!”
정말로 코앞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십여 발자국 정도 뜀박질한다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스, 스스스, 스슥!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빠르게 천장을 기던 그것이 문에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것은 천장에서부터 문으로 기어 내려왔다.
“안 돼!”
온 힘을 다하여 뛰던 그는 멈추어 설 수 없었고, 그는 자연히 그것을 향해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의 목을 낚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몹시 차가운 손이었다.
“윽!”
그는 목을 조르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것은 그의 목을 움켜쥔 채 다시 천장으로 기어 올라갔다.
시야가 높아졌다. 숨이 막히고, 얼굴에 피가 몰렸다. 안압이 올라 눈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숨통을 틔우기 위해 자신의 목을 붙잡은 그것의 손을 움켜쥐고 풀어내려 안간힘 썼다.
-키, 키키, 키키키키!
그것은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즐거워했다. 어찌나 흥이 났던지, 그의 목을 붙잡은 손을 흔들며 그의 몸을 시계추처럼 이리저리 흔들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목뼈가 부러질 듯 지독하게 아파 왔고, 숨은 점점 막혀만 갔다.
“커, 크컥, 크허, 헉!”
숨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숨을 쉬려 했으나,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꺽, 꺽, 하는 소름 끼치는 신음뿐이었다.
시야가 명멸했다. 눈이 휘떡 돌아갔다. 잠깐씩 시야가 돌아올 때마다, 벌건 이를 보이며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그것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마침내 진자 운동을 견디지 못한 목뼈가 동강 나는 것이 느껴졌다. 전신의 감각이 뚝 끊긴 듯 사라졌다.
‘무서워…….’
그리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흐려지며 숨이 끊겼다.
***
그는 홀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보인 천장은 생각보다 멀었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보니, 가구 다리들이 보였다.
그랬다.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은 적어도 차갑지는 않았지만, 편안하지도 않았으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나른한 근육을 기지개로 깨우며 생각했다.
‘이런 바닥에 누워 잔 것치고는 개운한데.’
몸이 몹시 가뿐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목소리를 내어 자신을 향해 물었다. 이 공간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으므로 꿈이 아니란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생생했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깨달았다. 이곳이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소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사람들이 있다면 자연히 느껴질 미세한 소음까지도…….
그는 손목 관절을 천천히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꽃과 나무, 열매, 동물이 곳곳에 조각된 화려한 방이었다. 곳곳에 나무로 조각된 기하학적인 장식이 달려 있었다. 눈을 어느 한곳에 둘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화려함이 조잡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풍스러웠다.
호박 모양으로 부풀려진 스탠드 등이 황금빛 캐노피로 둘러싸인 침대를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침대의 존재에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멀쩡한 침대를 두고 왜 바닥 따위에 누워 있던 거지? 그리고 도대체 여긴 어디야?’
바닥에서 완전히 일어나 이 공간을 한 바퀴 돌아본 후, 그는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긴 호텔이잖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해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어쨌건 커다란 침대와 안락해 보이는 침구, 화려한 가구와 짙은 우드 톤의 내부 인테리어, 방과 이어진 복도와 그 옆의 욕실까지. 누가 보아도 고급 부티크 호텔의 객실이었다.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 둔 거야?”
그러나 이 호텔 룸에 오게 된 계기도, 그 직전의 기억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외모와 나이, 이름마저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호텔 방 안을 정신 사납게 거닐었다. 무언가 기억을 떠올려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리가 텅 비어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아예 기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완전히 비워버린 휴지통처럼 깨끗했다.
“이런 희한한 일은 난생처음인데.”
그는 작게 읊조리다가 그 말이 정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통 속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면 이 또한 기억상 ‘난생처음’인 게 맞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데도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있는 자신의 상태였다. 심지어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이상, 이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 또한 자각하기 쉽지 않았다. 경계심을 느끼는 감각 중 하나가 둔탁하게 잘려 나간 느낌이었다.
이 괴이쩍은 기억의 공백은 지독한 숙취의 결과물이라도 되는 걸까?
‘혹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맞아 단기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 정신은 너무 또렷했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는 이내 고민을 멈추고 넓지 않은 호텔 방 이곳저곳을 살폈다. 협탁 위에 놓인 디지털시계에는 ‘03:36’이라는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레이스로 만들어진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보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검은 것으로 보아, PM이 아니라 AM 03:36인 것만은 확실했다.
디지털시계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완전히 먹통이었다. 신호 대기음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건 고장이고? 가지가지 하는군.”
데스크로 연결해 자초지종을 물어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호텔은 금액을 선불로 냈던가? 후불이었던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텅 빈 주머니를 뒤지며 부디 호텔 대금이 선불로 지급됐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억이 없는 것을 보아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왔을 리는 없었으니, 자기를 이곳에 던져놓은 누군가가 호텔비를 대신 지급하였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차도 다니지 않는 새벽에 그대로 쫓겨날 판이었다.
‘차라리 모른 척 도망쳐 버리는 건 어떨까?’
시간은 야심했고 차를 잡아탈 돈은 없었지만, 파출소 같은 곳에라도 가서 애원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런 기억 없는 무연고자를 민중의 지팡이가 함부로 내치기야 하겠는가.
“일단 로비로 내려가야겠어.”
그는 객실에서 곧바로 빠져나왔다. 일견 아늑해 보였으나, 실내가 과도할 정도로 화려해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 또한 어찌나 치장해 두었던지, 도금된 황금 손잡이에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움켜잡아야 했다.
‘별 희한한 장소야.’
짧은 소감과 함께 그는 자신이 빠져나온 객실의 호수를 힐끗 스쳐 보았다.
712호.
황동으로 주조된 듯한 휘황찬란한 문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712……?’
묘한 데자뷔가 일었다.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꿈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 보았던 장면처럼 느껴졌다……. 영문 모를 찜찜함이 솟아났다.
‘이 안에 중요한 물건이라도 두고 왔었던가?’
그는 712라는 숫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다시 712호의 문을 열고자 했다.
-철컥!
“잠겼어?”
하지만 객실의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문고리를 돌려 보았지만 한번 닫힌 712호의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철컥, 철컥!
그는 두어 번 더 문을 흔들다 결국 712호에 다시 들어가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호수의 객실을 서성이며 꽤 괴팍한 결심을 했다. 기억을 찾기 전까지 자신을 한동안 712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누군가 나에 관해 물으면 ‘712호에서 나온 남자’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지.’
712는 자신의 기억 상실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냈다. 그리고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상당히 어두웠으므로 방향 감각조차 마비될 정도였으나, 괜찮았다. 그는 왼손의 법칙이니 뭐니 하는 미로 탈출법을 떠올리며 앞으로 쭉 걸어 나가기로 했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객실 번호를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의 객실 번호는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매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나온 712호 옆으로는 402호, 707호, 1313호, 211호, 901호가 이어졌다. 객실 문의 디자인까지 제각각이라 도무지 규칙성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복도도 이상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쭉 직진하다가 우회전, 그리고 우회전, 그리고 또 우회전, 우회전, 좌회전, 직진. 절대 현실에서 이루어질 리 없는 괴상한 구조가 반복되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712는 이게 꿈이 아닐까 확인해 보고자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생생했다. 꿈같이 느껴졌으나, 이건 이상한 현실이었다.
괴상한 방식으로 꼬인 복도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익숙한 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712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뭐야. 이건 아까 그 문이잖아?”
멋들어지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문이었다. 이런 문은 세상에 두 개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객실 번호를 확인하자 역시나 712호였다.
“이건…….”
이 현실을 쉽게 인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랬다.
계속 왼손으로 한쪽 벽을 짚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길은 한 갈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길을 잃은 것이다.
그는 망연한 채 712호 객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저기……. 혹시 거기 사람 맞습니까?”
712호의 남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누구야?”
뒤돌아보며 날카롭게 소리치자, 상대는 “쉬, 쉬.” 하며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경계하지 마십시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며, 아무런 해를 끼칠 의도가 없음을 재차 강조하며 712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712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검은 형체를 경계하였으나, 조금씩 가까워지며 명료히 드러나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안심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합니다.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려 놀라서요.”
“아닙니다. 이렇게 어두운데 누가 갑자기 말을 걸면 깜짝 놀랄 수도 있지요.”
중후한 인상의 초로의 사내였다. 그는 잘 재단된 양복이 어울릴 법한 인상과는 다르게 어울리지 않는 그라피티 티셔츠와 청바지를 어색하게 껴입고 있었다.
‘원래 우리가 알았던 사이였던가?’
그리고 어쩐지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눈물점 두 개가 눈에 익었다.
712는 궁금해하며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따스하고, 적당히 축축했다. 몹시 반갑고도 현실적인 촉감이었다.
사내가 712와 악수하며 입을 열었다.
“304호입니다.”
“304호요?”
712가 되묻자 자신을 304호라 밝힌 중년인이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기억을 잃었나 봅니다. 여기에 왜 왔는지도 그렇고 이름까지 기억이 안 나서……. 제가 나온 객실 번호를 이름 대신 임시로 말씀드렸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712와 처지가 같았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 대신 자기가 나온 객실 번호를 이름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는 304호의 남자에게 자신 또한 같은 상황에 부닥쳤음을 알렸다. 그러자 304호는 몹시 반가워하며 안도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괴상한 호텔 안에서 길을 헤매는 기억 상실자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난 것뿐이라 이걸 썩 반가워할 만한 호재라고는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712는 304호의 중년인이 왜 이렇게 기뻐하는지 이해했다. 과거도, 미래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댈 만한 동지가 생긴 것이다. 그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곳,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304호의 중년인이 물었다. 그는 질린 낯으로 이런저런 손짓까지 곁들여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나왔던 방도 이상하게 섬뜩했지요. 거기서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을 보내려다가 영 찜찜해서 그냥 나왔습니다. 로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복도를 걷고 있는데, 여기가 끝이 나질 않더란 말입니다. 몇 시간을 걷고 나서야 방 호수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계속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단 걸 알았을 때는 어찌나 허탈하던지.”
“저도 방금 그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습니다. 길도 계속 바뀌는 듯하더군요.”
“그렇지요. 저는 그래서 같은 곳을 돌고 있는 줄도 몰랐지 뭡니까.”
712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리 없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물었다.
“그럼 여긴 대체 어딜까요?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러자 304호의 중년인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호텔은 우리가 아는 그런 정상적인 법칙이 적용되는 장소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러다 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고 보니 ‘우리가 아는 법칙’이라는 소리가 웃기게 들리는군요. 우리 둘 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자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데 말이지요.”
중년인의 농담 아닌 농담에 712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의 너스레에 다소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누그러들었다.
“그럼 여긴 버뮤다 삼각지대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장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712는 최대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추측을 내놓았다. 304호의 중년인이 침음했다.
“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보기엔 이 호텔이 버뮤다 삼각지대보다는 훨씬 더 이상하고…… 위험해 보이지만요.”
“위험이요? 비행기에 탄 채로 수십 년 동안 실종되었다가 백골로 나타나는 것보다야 이 호텔이 훨씬 상황이 좋지 않을까요?”
712는 농담을 던졌지만, 304호 중년인의 너스레와 다르게 그의 것은 썩 먹혀들지 않았다. 304호가 몹시 슬프고도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도 수십, 수백 년 후에 어떤 꼴이 되어 발견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발견된다면 차라리 다행이지요. 죽어서도 내 시체가 영영 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내의 우울감에 712는 금방 감화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는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고,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정말이지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304호가 712에게 은근히 물었다.
“그나저나…… 그쪽은 이곳을 헤맨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저요?”
“그래요. 당신 말입니다.”
그는 껴입은 청바지가 허리에 맞지 않는 듯 712와 대화를 나누며 바지를 계속 추켜올렸다. 712는 그가 정말이지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군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에서 세 시 삼십 분쯤 깬 듯합니다. 깨자마자 로비를 찾아가려고 호텔 방 밖으로 나와 걷고 있었어요. 제게 시계가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기를 딱 한 바퀴 돈 것 같습니다.”
“아하. 젊은 청년이라 그런지 이곳이 이상하다는 걸 금방 알아챘군요.”
중년인의 말에 712는 그제야 자신이 남들에게는 청년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그는 자신의 나이와 외양마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여기를 헤매신 지요.”
“……나 말입니까?”
“예.”
그의 질문에 사내는 어쩐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몹시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가 입을 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는 한 사흘쯤 됐습니다.”
“사흘이나요?”
712는 사내의 대답에 몹시 놀라 되물었다. 후줄근해 보이는 차림이 조금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그의 낯빛은 깨끗하고 지친 기색이 전혀 없어 사흘이나 이 이상한 호텔을 헤맸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기운이 무척 좋으신가 봐요.”
“뭐, 그런 편인 것 같습니다.”
304호의 사내는 712의 경악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대충 사흘 동안 이곳을 헤매고 나서 깨달은 건데,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더군요. 복도 모양은 바뀌지만 계속 같은 곳에서 빙빙 돕니다. 차라리 객실 안을 수색하는 편이 훨씬 더 의미 있어요.”
“객실을 수색한다고요?”
“복도에 나가는 길이 없으니, 객실 어딘가에는 출구로 향하는 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꽤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아니,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희망이 필요했기에 그는 304호 사내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이곳 객실을 얼마나 수색하셨습니까? 사흘 동안 이곳에 계셨으면 꽤 많이 보셨을 듯한데…….”
712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곳은 정말 이상한 곳입니다. 하루 한 번, 특정 시간이 되면 객실 배치가 완전히 바뀌거든요.”
그 놀라운 대답에 712가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매일같이 객실의 배치가 바뀐다니? 마치 호텔 내부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특정 시간이라면……?”
“그쪽이 깨어난 시간과도 관련 있습니다. 당신은 새벽 3시 33분에 깨어났을 겁니다. 그때 모든 객실의 배치가 초기화되니까요.”
“어떻게 그런?”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경험으로 깨달았을 뿐이니까요.”
“까닭조차 알 수 없다니…….”
712는 경악을 넘어선 공포를 느꼈다. 어쩌면 그 자신 또한 이 호텔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보잘것없는 무엇인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름 돋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불길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호텔에 완전히 먹혀 그 영조차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거든요.”
사내가 음울하게 속삭였다. 712는 그의 말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지. 반드시 탈출구를 찾아내고야 말겠어.’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객실을 하나하나 뒤져 보기로 마음을 합쳤다. 712는 제 곁에 있는 화려한 문을 턱짓했다.
“그럼 712호부터 살펴볼까요? 제가 나온 곳인데, 지독하게 화려한 공간입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주눅이 들고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왔거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 둘 걸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았다. 자동 잠금장치가 있어 보이는 방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안에서 누군가가 잠근 것처럼 꽉 닫혀 안 열렸다.
“한 사람이 같은 문을 두 번 열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가는 건 몇 번이고 가능해도,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갈 기회는 한 사람당 오직 한 번뿐입니다.”
흘러내리는 바지를 추켜올리며 304호의 사내가 설명했다. 712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저는 이 문을 나가기만 했지, 제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없는데요?”
“기억이 없어도 어쨌든 들어간 건 들어간 것으로 쳐지나 보지요.”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규칙이었다. 712는 문을 몇 번 더 열어보려 애쓰다, 이내 포기하고는 사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여실 수 있으시겠네요.”
304호는 갈등하는 듯하더니, 712에게 제안했다.
“그럼 제가 이곳을 살피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402호를 살피고 계시겠습니까?”
712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홀로 행동하였다가는 다시 헤어지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 712를 304호가 설득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아직 오전 3시 33분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복도의 구조는 바뀌어도, 객실 배열이 바뀔 리는 없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사흘간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304호의 사내가 712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끝난 쪽이 복도로 나와서 기다리는 것으로 합시다. 영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면 노크할 테니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712가 물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요?”
문을 직접 열 수 있는데 굳이 남이 열어 주길 기다리는 건 꽤 비효율적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304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오늘 안에 한 번 더 객실 문을 열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곧이어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60을 셀 때까지 답이 없으면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면 되지요?”
그랬다. 문을 밖에서 ‘열’ 기회는 한정되어 있으니 최대한 아껴 두어야 했다. 그의 영리한 궁리에 712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304호처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코앞의 일에나 급급했기 때문이다.
‘역시 이곳에서 며칠 더 있었던 사람은 다르구나.’
712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304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럼 선생님 말씀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며칠이나마 차이가 있는걸요. 짧다면 짧다고 볼 수 있지만,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그사이 요령이 조금…… 생겼을 뿐이지요.”
그의 겸양의 말에 712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깨어난 지 몇 시간 안 되어 만난 일행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럼 이제 들어갑시다. 시간이 촉박해요. 서둘러야 합니다.”
304호가 712를 채근했다. 그는 712가 먼저 방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곧 712호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마치 304호가 그의 뒤를 지켜주는 듯하여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잠시 뒤에 뵈어요.”
712는 꾸벅 인사하고 402호 문을 열었다. 철커덕, 아까와는 달리 수월하게 문이 열렸다.
‘정말로 한 번 연 문은 다시 열지를 못하는가 봐.’
그는 대체 이런 규칙은 누가, 어째서 만들었을지 궁금해하며 객실 안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304호의 사내가 그 뒷모습을 향해 작게 소리쳤다.
“정말 꼼꼼히 찾아보셔야 합니다. 벽장 하나, 러그 아래, 심지어 침대보 아래나 작은 서랍 안까지요. 절대 출구가 있을 리 없어 보이는 곳까지 뒤져 보아야 합니다!”
712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 완전히 바깥과 단절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712는 402호 객실의 내부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은 그가 깨어났던 712호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이곳은 호텔 객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허름했다. 차라리 모텔 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듯했다. 좁은 방 한 칸 안에는 구질구질한 시트에 뒤덮인 싱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동전을 집어넣어 작동시키는 싸구려 티브이와 더러운 싱글 소파 두 개. 내부 가구, 가전 모두 어디 폐품장에서 아무 물건이나 가져와 배치해 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런 곳의 욕실은 말도 못 할 수준일 게 분명했다. 712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욕실 대신 침실부터 수색하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가장 맛없는 것을 맨 마지막에 먹는 타입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는 애써 잊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농담을 들먹이며 기분 전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자신은 농담에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304호의 사내와 대화했던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시큰둥한 감상이 찾아왔다.
‘적어도 내가 재미없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군.’
그는 얕은 한숨과 함께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옷걸이 몇 개와 샤워 가운 두 벌, 제습제, 그리고 먼지 덩어리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304의 말을 단단히 새기며 옷장 안쪽에 머리를 쑤셔 넣다시피 하여 내부를 살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네.”
샤워 가운의 주머니까지 탈탈 뒤져 본 그가 아쉽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쉽게 출구를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초심자의 운이란 게 있지 않겠는가. 그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새끼 도박꾼처럼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그다음은 티브이 주변이었다. 몇 년은 쓰지 않고 방치한 듯 먼지가 담뿍 쌓인 가전이 그를 반겼다. 만지기조차 찜찜할 정도로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으므로 손끝으로 툭툭 치고 들어 주변과 아래를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소파와 테이블 근처를 뒤졌고, 찾아낸 건 바닥에 떨어진 먹다 만 음식물 찌꺼기의 흔적뿐이었다.
‘재수도 없지. 이런 방에 걸릴 줄이야.’
712는 자신의 불운을 내심 탓하며 차라리 712호의 부담스러운 내부 장식이 수천 배는 낫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좁은 객실 내부였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뒤지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모텔방 안의 디지털시계를 보니 시간은 AM 05:00, 새벽 다섯 시 정각이었다. 벌써 이 호텔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지 한 시간 반가량의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그에게는 거의 하루처럼 느껴지는 한 시간 반이었다.
712는 시간이 몹시 느리게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지상태에서 깨어나 계속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테이블 근처를 살피고,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매트리스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수색했다. 심지어 베갯잇 속까지 확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닦아낼 때쯤이었다.
“아야!”
712는 오른 발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언가 그의 발목을 꼬집은 듯한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그는 빠르게 침대에서 멀어지고자 했지만, 일은 그가 침대 옆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벌어졌다.
“아악!”
무언가 갈퀴 같은 것이 침대 아래에서 튀어나와 그의 한쪽 발목을 낚아챘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발목을 낚아채인 그는 속절없이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로 자빠지지 않아 뇌진탕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넘어지며 짚은 손목이 조금 삐었는지, 시큰시큰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아픔에 몸부림칠 여유는 없었다. 그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는 무언가에게서 저항하는 일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놔, 놔!”
그는 잡힌 오른쪽 발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자유로운 나머지 발로 자신의 발목을 휘감은 무엇인가를 발로 차고 짓눌렀으나 그것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를 침대 밑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려 할 뿐이었다. 그는 열 손가락을 모두 바닥에 꽂아 넣고 버텼다.
“윽……. 이게, 이게 뭐야!”
그는 조금씩 침대 아래로 끌려 들어가며 무엇이 자기를 끌어당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침대 밑 어둠에 가려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형체를 한 앙상한 무언가였다. 침대 밖으로 튀어나와 보이는 손끝은 날카로웠으며, 손가락은 보통 사람보다 길고 마디마디가 두꺼웠다. 주름진 살갗에는 검고 푸른 반점들이 번져 있었다. 마치 곰팡이가 잔뜩 핀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아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 뒤로는 반들거리는 시커먼 눈동자와 텅 빈 입 구멍이 보였다. 그는 직감했다.
‘이대로 끌려들어 갔다가는 살아서 나오지 못하겠구나.’
그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이런 초라한 모텔방 안에서, 정체 모를 것에게 당하여, 스스로가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
방문에서 희미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712에게 있어 마치 천사의 나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60초 정도만 버티면……!’
밖에서 60을 센 다음, 문이 열리지 않으면 304호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딱 1분가량만 기다리면 됐다. 712는 부디 304호가 숫자를 빨리 헤아리는 부류의 사람이길 바랐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속으로 숫자를 카운팅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이대로 발목이 뽑혀 나가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손끝이 아팠다. 바닥에 꽂아 넣은 손톱이 힘을 견디다 못해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예순여섯, 예순일곱, 예순여덟…….’
벌써 60이 넘게 숫자를 셌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712는 문을 간절히 바라보며 304호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철컥!
“드디어!”
움직이는 문손잡이를 보며 712가 환호했다. 마침내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이미 중지 손톱은 떨어져 나갔지만, 그 고통마저 순간 잊힐 정도로 기뻤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중후한 낯의 304호의 사내였다.
“도와주세요!”
믿기지 않는 광경에 경악했는지, 사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712는 그를 향해 외치고 또 외쳤다.
“도와주세요! 저 좀 끌어내 주세요! 뭐가, 제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
“선생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
그러나 사내는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 열린 문 앞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충격을 받아 몸이 굳었다기에는 너무나 차분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시야에는 미약한 죄책감마저 어려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돕지 않을 것이다.’
712는 그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으면서도 계속 그를 향해 악을 썼다.
“도와주세요! 도, 도와주세요! 힘이…… 더는 힘을 줄 수가……!”
손톱은 빠져나갔고, 손가락에서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씩 침대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붉은 선이 드드득 그려졌다.
“젠장, 도와줘, 도와달라고! 개새끼야! 제발 살려주세요!”
이제 그의 하반신은 거의 침대 아래로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712는 304호의 사내를 향해 욕설과 애원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홀린 듯 712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304호는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동료라 믿었던 존재가 그의 죽음을 방치하고 있었다. 712는 고통보다 더한 배신감에 몸부림쳤다.
“당신을 영원히 저주할 거야! 귀신이 되어서라도 당신을 저주할 거야!”
하반신이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어깨 위만 간신히 남았다. 712는 침대 프레임을 움켜잡고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차라리 빨리 포기하는 게 당신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더 나은 길입니다.”
304호가 그를 향해 속살거렸다. 그러나 712는 삶을 쉽게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죽음.’
인간은 살면서 죽음을 단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할진대, 어째서 이런 생각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죽음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더는 죽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때였다.
“억!”
비명과 함께 휙 하는 바람 소리와 섞여 무언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712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던 304호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712는 몹시 기진한 상태였으므로 고개를 들어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 침대 프레임에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않으리라. 조금씩 몸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낯선 목소리가 우렁우렁 객실 내부를 울렸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내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낚아채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윽……. 아, 아파!”
침대 밑의 무언가는 이제 그의 양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몹시 아팠다. 발목 양쪽이 모두 부러진 것 같았다. 힐끗 내려다본 발목은 이상한 쪽으로 꺾여 있었다.
“아프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 그럼 살 수 있어!”
낯선 목소리는 그에게 고통을 참으라 강요하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712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픔을 참아냈다. 남자의 힘은 괴물만큼이나 대단해서, 완전히 빨려 들어갔던 하반신이 침대 밖으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으으, 그으으으으!
712를 침대 밑으로 잡아당기던 그것은 몹시 화가 났는지 몹시 음산하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포효했다. 고막이 진동했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져서 712는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정신을 잃어서는 안 돼, 세오!”
미지의 남자는 그를 향해 속삭였다. 712는 기진한 상태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괴물 사이, 줄다리기의 승자는 거의 가려지는 듯했다. 712의 무릎이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남자는 엉망으로 우그러진 712의 발목을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힘 싸움은 몹시 팽팽해서 가운데에 낀 712로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눈 뜬 채 눈물을 흘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아줘.”
남자가 그의 귀에 대고 계속 속삭였다. 어쩐지 믿음이 가는 목소리였다.
발목이 침대 밖으로 나왔다. 양 발목을 붙잡고 있는 앙상하고도 우악스러운 무언가의 팔목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때였다. 712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당기고 있던 남자가 침대 아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앗……!”
712는 그가 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침대 아래로 끌려들어 가리라 생각하여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그보다 더 재빨랐다. 그는 손에 쥔 길쭉하고 날카로운 무언가를 휘둘러 앙상히 삐져나온 팔목을 강하게 찔러 눌렀다.
-그에에에에엑!
침대 아래에서 엄청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712는 반쯤 졸도할 지경이 되었지만, 남자는 끄떡하지 않는 듯했다. 실로 괴물 같은 체력에, 정신력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돌 같은 것을 꺼내 마치 망치질하듯 괴물의 팔목을 꿰뚫은 길쭉한 물건을 쾅쾅 내리쳤다.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712의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려갔다.
‘살 수 있어!’
이를 느낀 712의 눈동자에 희망이 스쳤다.
남자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네댓 번 만에 괴물의 팔목은 완전히 관통당해 바닥에 고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712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이 완전히 풀렸다. 712는 엉덩이와 팔의 힘을 이용해 뒤로 기었다. 완전히 기진했다고 생각했건만, 어디서 그런 힘이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자는 712가 괴물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물건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날의 길이가 한 뼘이 조금 넘어 보이는 식칼이었다. 고작 식칼에 불과하였으나 칼날이 예사롭지 않게 번쩍거렸다. 남자가 침대 프레임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침대 밑의 괴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기이할 정도로 팔다리가 길었고, 관절이 하나씩 더 붙어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이 없었고, 콧구멍과 입 구멍만이 뚫려 있었다. 쩍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이 마치 상어의 것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전신에 푸른곰팡이 같은 얼룩이 퍼져 있었으므로 부패한 시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욱, 우읍.”
712는 그 끔찍한 모습에 욕지기가 올라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남자는 이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런 장면을 늘 보아왔던 것처럼 평온한 낯으로 칼날을 그것의 등에 찔러 넣었다.
-콰직!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마어마한 괴력이었다. 찔러 넣은 칼날 틈으로 거무죽죽한 액체가 비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괴물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윽!”
712는 그 소리에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자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괴물의 머리통을 밟아 눌렀다.
“시끄러워. 세오가 고통스러워하잖아.”
머리통이 바닥에 처박히자 소리를 조금 잦아든 듯했다. 하지만 712의 심력은 이미 깎일 대로 깎여, 그러한 폭력적인 상황 자체를 견뎌내지 못했다. 사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틴 것이었다.
그는 괴물의 머리통을 짓이기는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앞에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의식은 알싸한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으…….”
작은 신음과 함께 몸을 뒤척이자 어깨를 눌러 고정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조금 더 잠들어 있도록 해. 고통스러울 거야.”
몹시 다정한 목소리였다. 712는 그 말에 자연스럽게 다시 수마에 빠져들 뻔했다. 그러나 곧이어 떠오른 마지막 장면에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번쩍이던 칼날,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그리고…….
“……여기는?”
712는 눈을 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장소였다. 이곳은 그가 괴물과 맞닥뜨렸던 더러운 모텔 방이었다.
‘402호의 그곳.’
이곳에 존재하던 미지의 생명체를 떠올리자,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뜨끈한 손이 가슴을 천천히 토닥였다.
“두려워하지 마. 이제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712는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멀끔한 낯의 잘생긴 남자였다. 선이 굵고 눈빛이 날카로워 신경질적으로 보였으나, 그 자체가 주는 인상은 번듯하여 누가 보아도 호감을 품을 법한 얼굴이었다.
“이곳은 안전해.”
남자는 신뢰가 가는 단단한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빳빳해졌던 근육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712는 남자의 친절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낯익음을 느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얼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완전히 떠올릴 수 있었다.
‘나를 구해 준 사람!’
정신을 잃기 직전 보았던 남자였다. 괴물을 상대할 때와 인상이 몹시 달라 단박에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이…… 안전하다니요?”
그러자 남자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너를 잡아 삼키려 했던 그 크리쳐는 죽어서 사라졌다는 의미지.”
“어떻게?”
“글쎄. 식칼로 찔러서?”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712는 자신의 발목을 잡아 오던 괴물 같던 악력을 기억했다. 그리고 발목이 산산조각 나던 그 끔찍한 고통…….
그때를 떠올리자 발목의 고통이 의식되었다.
“내 발목은……?”
“부러졌어. 부기가 심하게 올라서 냉찜질 중이니까 가만히 있어. 일단 진통제를 먹여두긴 했는데…… 많이 아파?”
남자가 712의 뺨을 쓸며 그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낯간지러운 손놀림에 712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뺐다. 사실 손을 들어 그의 손길을 슬쩍 밀어내고 싶었으나, 빠진 손톱 때문인지 양손에 손수건이 칭칭 감겨 있어서 거동이 불편했다.
남자는 그가 자신의 손길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금방 눈치챘는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좀 더 자지 그래? 아직 세 시간밖에 안 잤어. 몇 시간 더 누워 기력을 회복하는 편이 나을 텐데.”
“그건 좀.”
712는 고개를 저었다. 온몸의 근육이 쑤시고, 손끝은 욱신거리는 데다, 다리는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비된 상태였지만 눈이 말똥말똥했다. 완전히 정신이 깨어나 버린 것이다.
“잠이 안…… 옵니다.”
그는 남자가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려다, 그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애써 존칭을 붙였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야, 진짜? 존댓말이라니? 원래 이렇게 정중한 캐릭터였어?”
“‘원래’라니요?”
그의 질문에 남자가 씨익 웃어 보였다. 훤칠한 얼굴 가득 웃음기가 어리자 굉장히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쩐지 그의 웃음은 조금 슬프고 쓸쓸해 보였다…….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대체 무슨 말씀을……?”
남자는 계속 영문 모를 말을 했다. 그는 마치 자신을 원래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했다.
“저는 오늘 새벽 세 시 반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전의 저를 알고 계시던 분이신가요?”
712가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는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야, 세오.”
그의 이름에서 나온 낯선 호칭에 712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괴물과 사투할 때 저를 ‘세오’라 부르기도 했었다.
“세오?”
“세오. 네 이름.”
“제 이름이 세오입니까?”
“그래. 네 이름은 세오야. 그나저나 세오 네가 내게 존대하는 건 정말 낯설게 보이니까 부디 내게 편하게 말해주지 않겠어?”
그는 거의 애원하듯 자신에게 반말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712, 그러니까…… 세오로서는 생면부지인 사람이 자신에게 반말을 쓰고 쉽게 대해 달라고 청하는 셈이니, 아무리 그들이 예전에 알고 있던 사이라고 하여도 이는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저 남자는 그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목숨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해줄 만도 했다. 당장 그는 남자에게 줄 만한 것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그의 소망에 부응해 주었다.
“그럼……. 그러도록 할게.”
“훨씬 낫네.”
남자가 활짝 웃었다. 휘어진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그러자 괴물을 찍어 누르고 발로 짓이기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이 바뀌었다. 세오는 그 간극에 조금 아연한 기분이 들었으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세오는, 그가 제 이름을 알려주었을 뿐이지 그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은 누구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나는 너의 구원이야.”
“나의…… 구원?”
그는 남자가 꺼낸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이름은 구원. 살아남아 너를 찾으러 왔어.”
그 대답에 세오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였기에 별안간 당신이 나의 구원이 되는 거지?”
말을 잘못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자신을 위해 끔찍한 괴물을 물리쳐 주고, 자신을 돌보아 주고 있는 상대에게 이런 공격적인 언사를 취하는 건 꽤나 후안무치한 행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세오는 자신의 말실수 때문에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겁이 났다.
“저…… 그, 미안합니다. 아니, 미안해.”
그는 떠듬떠듬 사과했다. 그의 사과에 자신을 구원이라 밝힌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는 네 성격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지.”
그러면서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를 아는 척하면서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지껄이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거야. 그치? 네 성격이 비교적 정중한 편이라 천만다행이군. 그렇지 않으면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이니까.”
겉보기에 구원은 세오의 말에 전혀 마음이 상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말을 잘못 꺼낸 것은 잘못 꺼낸 것이 맞았다. 세오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 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왔어.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을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그래서.”
“괜찮아. 당연히 그럴 만도 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가 꺼낸 의외의 이야기에 세오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도 그랬다니?”
“나도 기억을 잃은 채 세오 너를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자신이 과거에 기억을 잃은 구원을 만난 적이 있다니? 그래서 저 구원이라는 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걸까? 세오는 의아하여 물었다.
“우리는 대체 어떤 사이였던 거지? 형제? 동료? 친구?”
아까와 내용은 다를 바 없었으나, 이번에는 정말 궁금했기 때문에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구원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턱을 엄지로 문질렀다.
“글쎄…….”
그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고, 몹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세오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사실 철천지원수였던 건 아니겠지?’
그런 상대를 이렇게 친절하게 눕혀 간호하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 그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이었다. 그러면서 세오는 자기가 꽤 헛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구원이라는 자는 나를 정말 아는 사람이긴 했나 보군.’
그가 말하길, 세오는 조심성이 아주 많다고 했으니 말이다. 어쨌건 조심성이 많다는 표현과 걱정이 많다는 표현은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 구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구원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비밀이야.”
사람을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한 것치고는 몹시 김빠지는 대답이었다. 그는 세오의 허탈한 표정을 힐끗 보고 말을 덧붙였다.
“적어도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고는 말해 둘게.”
“그러면 왜 대답을 숨기는 거지?”
“곧바로 알려 주면 재미없으니까.”
“기억 잃은 사람을 상대를 약 올리기라도 하는 건가? 혹은 내가 당신을 원수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구원이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둘 다 절대 아니야.”
“숨기고 싶은 게 있지 않으면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거야?”
세오는 조금 흥분하여 몸을 일으키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구원이 세오의 이마를 짚어 베개에 눌렀다.
“너는 네가 기억을 잃어서 안타깝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어째서?”
“그야 네가 나를 잊었으니까.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해 봐. 조금은 원망스럽지 않겠어?”
“그건…….”
구원의 말에 세오는 말끝을 흐렸다. 거꾸로 생각해 보니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구원은 위험천만한 상황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해내지 않았던가.
“이 정도 심술은 좀 봐줘.”
구원이 빙긋 웃으며 세오의 곁에 모로 누웠다. 좁은 모텔 방의 싱글 침대에 성인 장정 두 명이 끼어 누워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세오는 팔뚝에 닿아오는 뜨끈한 체온이 부담스러웠다.
“좀……. 불편한데.”
“봐주는 김에 이것도 좀 봐줘.”
하지만 구원은 꽤 넉살이 좋았다. 그는 세오의 부러진 양 발목에 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도 보란 듯이 몸을 붙여왔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너를 보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니까……. 그러니까 하루쯤은 봐줘.”
어쩐지 목소리가 물기에 젖은 듯하여 곁눈으로 그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구원은 여전히 친절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세오는 그런 그를 향해 내내 걱정하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내 발목이 이런데, 같이 다니기 힘들지 않을까.”
한쪽 발목이라도 성하다면 목발이라도 짚고 다닐 텐데, 양쪽 발목이 완전히 부서졌다. 아마 자신이 기절한 사이 구원이 발목을 어느 정도 맞추어 놓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붙더라도 제대로 걷기는 힘들 터였다.
‘아니, 걸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뼈가 다 붙을 때까지 이 이상한 호텔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어.’
이곳은 끝나지 않는 복도에, 괴물이 사는 객실을 가진 호텔이었다. 이 정글과도 같은 곳에서 그는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으리라. 만약 저 구원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 홀로 불구인 자신을 계속 도울 수만은 없을 테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 꼴로는…….”
그 자신에게 내리는 선고라고 하기에는 몹시 냉혹한 판단이었지만,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구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너와 함께 다닐 거야. 너도 나와 함께 다닐 수 있고.”
세오가 보기에는 괜한 아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의 생존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짐 덩어리 하나를 지고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건 허황한 자신감으로밖에 안 보였다.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럼 그쪽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어.”
세오가 음울하게 답했다. 그와 구원이 본디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생과 사 앞에서는 우정이나 의리 따위는 쉽게 변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한 번 기대를 배반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가장 가까운 예를 들자면 그를 위험 속에 방치한 채 가만히 저를 응시하기만 하던 304호의 남자가 그러했다.
‘물론 우리가 나눈 건 짧은 대화뿐이었고, 그사이에 얄팍한 우정이 생기기를 바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말이야.’
그러나 이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나보다는 둘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고, 그 유대감이 서로를 단단히 묶어 주리라 생각했다.
세오는 문득 그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그는 홀로 도망가서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까? 그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가? 아니면……?’
죽어서도 저주하겠다며 원망했던 그였으나 막상 살아남아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의 처지도 조금 이해가 갔다. 압도적인 두려움 앞에서는 온몸이 얼어붙는 법이니까…….
그의 행방은 어쩌면 구원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세오는 구원을 향해 물었다.
“혹시 그 남자의 행방을 알아? 내가 그것에 끌려 들어가고 있을 때 방 앞에 서 있던 중년 남자.”
구원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잘 알고말고.”
어쩐지 그의 어조에서 빈정거림이 느껴졌다. 세오는 모른 척 계속 말을 걸었다.
“그는 어디 있어? 떠났어?”
“아니. 그자는 여기 있어.”
“여기에?”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세오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고자 했다. 그러나 역시 구원의 손길에 의해 저지당했다.
“보여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계속 움직이면 몸이 아파.”
“욕실에서 씻고 있기라도 해?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 방에 있는 건 나와 당신뿐인 것 같은데…….”
“네 질문 두 개에 한꺼번에 대답하자면, 아니야. 그놈은 욕실에 없고, 세오 네 눈은 지극히 정상이야.”
“그러면?”
세오의 질문에 구원이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세오는 세오지. 혹시나 했는데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군.”
세오는 조금 빈정이 상해 구원에게 ‘당신이 나에 대해 무얼 알기에 그런 소리를 하지?’ 하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실제로 저에 대해서는 그 자신보다도 구원이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세오의 속내를 단박에 알아차린 듯, 구원이 몸을 숙여 세오의 이마를 툭 쳤다.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니까 마음 상해하지 마. 네 주의 깊음과 꼼꼼함 덕분에 우리가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지 모를걸.”
그리고는 벽장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그 문을 벌컥 열었다. 세오는 고개만 돌려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열린 벽장 안을 보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304호?”
벽장 안에는 무언가가 몸을 웅크린 채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304호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꼴은 처참했다. 머리에 심하게 충격이 가해졌는지 관자놀이께에 핏자국이 진 채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미세하게 가슴이 들썩이는 것을 보니 숨은 끊어지지 않은 듯했다. 심지어 그는 기절한 상태로 벽장 안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꽁꽁 묶여 있었다. 입가엔 재갈이 물려 있었고, 팔은 뒤로 묶여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목과 무릎 또한 꽉 동여매어져 있는 상태였다.
세오는 벽장문을 열어 보인 구원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런 거야?”
“응. 내가 그랬지.”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몹시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오를 향해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대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서늘한 공포가 치솟았다.
“……어째서?”
진정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다친 몸뚱이가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구원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혀를 쯧, 차더니 담요 하나를 더 가지고 와서 세오 위에 덮어주었다.
“정당방위였어.”
“사람을 반 시체 꼴로 만들어 꽁꽁 묶어 두었는데?”
“너를 해치고 살아남으려 한 자야. 저자가 너를 취급한 것처럼 똑같이 대해 주고 있는 것뿐이야. 만약 저 남자가 너를 도우려 했다면 나 또한 한 번쯤 그를 도왔을 것이고, 그가 네게 친절히 굴었다면 나 또한 그를 친절히 대했겠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에 대한 원망이 아주 없다면 그 또한 거짓이겠지만, 304호가 자신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 꼴이 된 건 조금 이상했다. 세오는 애써 304호를 두둔했다.
“그는 내게 친절했어.”
“하지만 너를 죽음으로 인도했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방관했잖아. 그건 고의였어.”
“아니야. 사람이 겁에 질리면…….”
“세오.”
구원의 까만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세오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해진 그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구원이 자신 또한 저렇게 만들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구원은 그의 눈빛을 쉽게 읽어냈다.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오. 이곳은 보통 호텔이 아니야.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지. 이 호텔은 이곳의 규칙대로 움직여.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생존 방법을 빠르게 터득하지.”
그는 벽장 속의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저자 또한 그런 인간이고.”
“……당신도 생존자 아닌가?”
세오의 물음에 구원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저 인간과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고, 저자는 그런 너를 미끼 삼아 살아남으려 한 인간이야.”
“대체 나를 미끼 삼았다는 게 무슨 의미지? 당신은 계속 304호가 나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럴 만한 증거가 없잖아.”
“세오. 저자는 호텔의 규칙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 너를 이용했어. 맹세할 수 있어.”
구원이 단언하며 침대 아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누워 있는 세오와 그의 앉은 시선의 눈높이가 꼭 맞았다. 그는 세오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 이 호텔에 관해 이야기해 줄게. 그러면 너 또한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지.”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몹시 고저 없이 이어져 마치 재미없는 법전을 읽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는 이곳을 호텔 모르티스라고 부르고 있어.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사실 정확히 모르지만, 과거의 너와 나는 그렇게 불렀지…….”
그들이 호텔의 이름을 알아내는 데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객실을 뒤지다 보면 비품마다 호텔의 이름이 작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호텔의 풀 네임이었다.
다만 그 이름은 단번에 발음하기 너무 길었고 읽는 법조차 불확실했으므로 적당히 줄여 ‘호텔 모르티스’ 따위로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호텔 모르티스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인세의 규칙과는 다른, 이 호텔만의 규칙이었다.
이야기가 이쯤 다다르자, 구원이 몹시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규칙의 핵심은 새벽 3시 33분이야.”
구원의 설명은 세오도 한 번 들었던 바가 있었다. 304호의 남자 또한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오전 3시 33분이 되면 호텔의 객실 구조가 모두 바뀐다고 들었어. 그리고 하루 동안은 한 사람이 같은 객실 문을 두 번 이상 열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
구원이 눈썹 끝을 까딱였다.
“저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야?”
“그래. 거짓말이야?”
“아니. 하지만 조금은 틀리고, 전부를 이야기해 주지도 않았어.”
“틀렸다니? 그리고 전부를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고?”
“우선 틀리게 말해준 부분부터 설명하지. 객실 문을 두 번 ‘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객실 문을 두 번 ‘여는’ 거야.”
“그게 무슨 차이인데?”
“큰 차이가 있지. 객실 안에서든 밖에서든 상관없이 문손잡이를 돌려 객실 문을 열 수 있는 건 단 두 번밖에 안 되는 거야. 아마 저자는 그걸 핑계로 가능하다면 네게 문도 열어달라고 했을걸? 그렇지 않나?”
세오는 304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영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면 노크할 테니 문을 열어주십시오.’
‘오늘 안에 한 번 더 객실 문을 열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구원의 예상은 틀린 데가 없었다. 세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코웃음 쳤다.
“뻔한 수법이었어. 아마 네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다시 객실 문을 닫아 버렸을 거야.”
구원의 말이 옳다면, 그럼 세오는 이 모텔 방 안에 완전히 갇혀버렸을 것이다. 문을 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모두 소진해버렸으니까.
금세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내 발목을 분지른 괴물과 연관이 있는 일일까?’
곰곰이 생각에 빠진 세오에게 구원이 정답을 던져 주었다.
“너를 저 안에 가두어 네가 크리쳐에게 먹히기를 기다리려고.”
세오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어째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나,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저자가 네게 알려주지 않은 규칙이 하나 있거든.”
“규칙?”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말인가? 세오는 고개를 모로 틀어 구원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구원은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호텔의 객실 안에는 크리쳐가 존재해. 네가 보았던 그 괴물 같은 미지의 존재 말이지. 모든 객실 안에 존재하는 건 아니야. 간혹 운이 좋으면 아무것도 없는 안전한 객실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방은 몹시 소수야. 그러니까…… 이곳의 사람들은 터질 확률이 9할이 넘는 폭탄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지.”
그 수많은 객실에 몇 시간 전에 만났던 괴물 같은 존재들이 득실댄다니……. 끔찍한 이야기였다. 세오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렇다면 사람이 여럿인 게 혼자인 것보다 더 안전하지 않나?”
구원이 세오를 도왔던 것처럼,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크리쳐’라는 괴물을 제거한다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그건 이상적인 방법론일 뿐이야.”
구원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툭 내뱉었다가, 세오의 눈치를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몇몇 그룹은 그렇게 협력하고 있고, 너와 나도 그런 방식으로 생존했지만 말이지.”
“우리가 그런 사이였던가?”
“그래.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고, 서로를 보호했어.”
세오로서는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의 일이었다. 구원은 몹시 그리워하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가 벽장 속 기절해 있는 중년인을 턱짓했다.
“객실 안에 있을 크리쳐에게 당하지 않는 방법이 뭔지 알아?”
“크리쳐를 먼저 퇴치한다거나……?”
세오는 크리쳐 위에 칼을 꽂아 넣던 구원의 모습을 기억했다. 아마 그것은 죽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저 구원이라는 남자가 안심한 채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겠지.’
세오의 대답에 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법이 몇 개 더 있어.”
세오는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오래 살아남은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귀중한 생존 지식이었다.
구원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첫째, 크리쳐를 퇴치한다. 이건 아까 네가 말한 방법이지. 둘째, 크리쳐를 문밖으로 쫓아낸 후 문을 닫는다. 크리쳐는 열린 문 너머로는 오갈 수 있지만, 문을 직접 열지는 못하거든. 그리고 마지막 방법.”
그가 세 개째의 손가락을 꼽았다.
“……객실 안에서 인간 한 명을 크리쳐에게 희생시킨다.”
그는 ‘희생’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었다.
“희생?”
“그래. 한 사람이 희생당한 객실은 그다음 날 새벽 3시 33분이 되기 직전까지 안전해. 객실 안의 크리쳐는 목숨 하나를 취하면 미련 없이 사라지거든.”
“어째서?”
이유를 묻자, 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저 우리가 찾아낸 규칙일 뿐이야.”
“그럼…….”
그러자 구원이 자신을 ‘미끼’라 표현했던 것이 이해되었다. 만약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304호는 712호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가 이 모텔 방 안에서 죽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침대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저의 모습을 보고도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 외에는 아무 말이 없었던 304호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애당초 세오를 희생시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던 옷차림을 하고 있던 것도 그와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지.’
세오는 흘러내리는 바지를 계속 추켜올리던 304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가 희생시킨 사람의 옷가지를 꿰어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편해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304호와 구원의 이야기에서 공통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시간. 오전 3시 33분에 대한 의혹이었다.
“대체 새벽 3시 33분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계속 언급되는 거지?”
그의 질문에 구원이 고개를 돌려 세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복잡했다. 몹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그는 잠시 입술을 축이고는, 말문을 열었다.
“오전 3시 33분에 일어나는 일……. 그 시간이 되면 호텔 안의 모든 것이 리셋돼.”
“리…… 셋?”
세오는 천천히 리셋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단박에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었다.
‘리셋’이라니?
‘객실 순서나 구조가 바뀌는 것 같은 일? 이뿐만이 아니라면 리셋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지? 객실의 비품?’
의아해하는 세오에게 답변이 돌아왔다.
“호텔 내부, 인간과 크리쳐를 포함해 모든 게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야.”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건…….”
“그래. 상처와 죽음까지도 되돌리지. 죽은 사람은 기억을 잃은 채 같은 호수의 객실에서 부활하고, 산 사람의 몸은 재생되어 깨어났을 때의 몸 상태로 돌아가. 사라졌던 크리쳐 또한…….”
구원은 고개를 돌려 세오를 바라보았다.
“세오, 너도 오전 3시 33분이 지나면 다치지 않은 상태로 다시 돌아갈 거야. 네가 깨어났던 상태 그대로.”
그의 설명에 세오는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였다.
“어떻게, 그런?”
“놀랍게도 이곳 안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져.”
구원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계속 설명했다. 이곳에는 수많은 규칙이 존재했다. 그가 지금 듣고 있는 3:33의 대전제부터 시작해, 지금 단번에 모두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자잘한 규칙에 이르기까지…….
세오는 그의 설명을 듣다가 문득, 자신이 기억을 잃고 깨어난 건 이전 삶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기억을 잃고 깨어났다는 건…… 이미 한 번 이상 죽었다는 소리 아니야?”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몇 번의 죽음인지도 몰랐다. 호텔의 크리쳐들에게 수없이 난도당하면서도 그것이 반복되는 줄도 모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음을 맞이하였는지도 모른다.
“세오.”
구원이 세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바닥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시야가 암전됐다. 두렵지는 않았다. 그의 손은 뜨끈했고, 몹시 안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전에 알고 지냈다고는 하나, 지금의 기억으로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런 안온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건 너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야.”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 당신이라면 가능하겠어?”
“나 또한 그 기분을 알아…….”
“어떻게……, 아.”
그제야 세오는 구원이 지나가듯 언급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또한 기억을 잃은 채 세오와 만난 적 있다고 했지 않았는가.
‘그럼 그도 한 번 이상의 죽음을 경험했고, 지금 그가 그러하듯 나 또한 구원을 찾아가 도왔다는 의미인 걸까?’
“맞아. 네가 나를 다시 찾았고, 나를 구했어. 너는 나를 ‘구원’이라 불렀지만, 내 구원은 바로 너였어.”
그는 오직 세오의 표정만으로 그의 속내를 죄다 읽어냈다. 그의 고백에 담긴 깊은 진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세오는 자신이 얼굴에 기분이나 속마음이 티가 잘 나는 사람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당신은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나를 돕는 건가?”
“그래. 그렇다고 생각해. 은혜를 갚으라고 한 건 바로 너야, 세오. 참고로 네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줘.”
구원은 아까 세오가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그는 몇 번이나 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버리지 않는다’라며 연거푸 강조해 말했다. 세오는 그의 말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주어야 했다.
“그럼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잡아둔 건데? 복수라도 하려고?”
세오가 304호의 남자를 턱짓했다. 그러자 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조금 덩치가 크고 나이 들어서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한동안 우리의 카나리아 역할을 해줄 거야.”
“카나리아라니?”
“탄광 아래서, 광부들을 위해 가장 먼저 죽어주는 새 역할 말이야.”
“…….”
비유를 알아들은 세오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304호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겠다는 말 아닌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304호를 비난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은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다. 위선은 아니었다. 사람의 목숨을 걸고 남은 마지막 한 톨의 양심 같은 것이었다.
그의 표정을 읽어낸 구원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세오.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나를 죽게 두지 않았지?”
“너는 내게 특별한 존재니까.”
그러나 세오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그 목숨은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삶과 죽음이 중요치 않다면 무엇이 중요하다는 거야?”
그의 질문에 구원은 단 일 초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답했다.
“기억. 기억이 가장 의미 있지.”
구원이 침대 위에 상체를 기댔다. 구원과 세오는 한 뼘 정도 더 가까워졌다.
“아무리 고통스럽게 죽었다 해도, 3시 33분이 지나면 고통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백지상태로 부활해. 삶과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거야. 자신이 어떻게 생존했는지, 어떻게 살해당했는지조차 모두 잊어버린 채로. 죽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일이야. 그렇지 않다면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였는지조차 완전히 잊혀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니까.”
그의 손가락이 세오의 뺨을 스쳤다. 몹시도 친밀하였으나, 본디 그래야 한다는 듯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으므로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세오는 솜털을 스치는 손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는 당신 말이 모순적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돼. 아니, 순 엉터리야.”
뺨을 간지럽히던 손길이 멈칫 멈추었다. 세오는 눈을 감은 채 그를 향해 계속 지껄였다.
“결국, 기억이란 건 생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거잖아. 그쪽도 그래. 당신은커녕 그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기억이 없는 나는 당신이 알고 있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일지도 몰라.”
구원이 다급히 부인했다.
“아니야. 너라는 본질은 같아.”
그러나 세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야. 기억은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어. 하지만 같은 ‘나’라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서로 다른 기억을 쌓는다면 결국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할 거야. 그 둘을 이루는 기억이라는 요소가 완전히 다른 거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쩌면 그는 세오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 그에게 지닌 감정이 사실은 과거의 ‘세오’라는 자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테니까. 하지만 세오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대로 당장 그가 떠나 버린다면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는 사람의 목숨을 두고 장난치고 싶지 않았다. 304호의 배신은 뼈아팠고, 심지어 마지막엔 저주까지 퍼부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인간에 대한 의심을 심어 주었다.
허나, 그는 아직 사람을 도구로써 사용할 만큼 수많은 배신을 겪지는 않았다.
만약 이전의 자신이 저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만큼의 미움과 고난을 겪어왔을 것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그런 인간으로 변한다더라도 그건 그때의 일이지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하다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난 아직 당신의 말에 기꺼이 따를 수 있을 만큼 변하지 않았어…….”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하자 곁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섬세하고 꼼꼼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여린 사람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잘못 알고 있었겠지. 이게 당신이 말하는 나의 본성에 더 가까울 테니까 말이야.”
그의 반박을 각오하고 쏘아붙이듯 꺼낸 대답이었다. 하지만 구원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담백했다.
“그건 그렇네.”
꾹 감고 있었던 눈을 떠 구원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구원은 침대 매트리스 위에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의 눈은 세오를 보고 있었으나, 시선은 그보다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너와 613일을 함께 보냈지만, 나는 아직 너에 대해 모르는 면이 너무 많아.”
“우리가 613일이나 함께했어?”
세오는 크게 놀랐다. 613일은 1년 6개월이 훌쩍 넘는 기간이었다. 하루하루가 투쟁과도 같았을 호텔 모르티스의 오전 3시 33분을 613번이나 함께했다는 의미 아닌가.
“그래. 우리는 613일을 함께 살아남았지. 그리고 앞으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 거야. 맹세할게.”
구원의 맹세에 세오는 고개를 저었다. 613일 어치의 우정은 오늘 깨어난 그에게는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신이 알았던 ‘나’와도 아주 다를 수도 있을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자 먼 곳을 향했던 구원의 시선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 빛을 되찾았다. 그는 확신 어린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내가 세오 너를 기억해. 과거의 세오도, 지금의 세오도 내 기억 속에서는 모두 한 사람으로 이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