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치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안 가는 터라, 행정관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여기서 지내시면 안 된다니까요.”
링거를 맞고 가이딩실로 다시금 출근하려다가 치프의 벼락같은 호통에 바로 퇴근한 참이었다.
“치영아, 너 그렇게 아등바등하게 살지 말아라. 다 좋은데 그게 너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보이겠니, 응?”
그 말에는 조금 먹먹해졌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 온 5년이었다.
타인의 시선과 말에 치중했다가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S+급 에스퍼의 각인 가이드가 될 때까지 그 앞에 알몸을 내던져 로비했을 것이다, 가이딩으로 매춘하는 것과 다름없이 굴었다더라, 반정부군 이악에 있을 때부터 걸레로도 유명했다지 않냐…….
그런 말을 하는 상대들의 생각이야 뻔했다.
쟤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돼.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데, 왜 나는 안 되냐는 말이야.
기백한이 차라리 기백연처럼 고등급의 가이드와 각인을 했으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각인을 맺은 것은 등급이 너무 낮아 오히려 찾기도 힘든 F등급의 가이드였다.
처음 2년 동안이야 백한이 그를 ‘제 가이드’로 대했고, 확실한 매칭률이 있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치영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 백한이 그를 무시하기 시작한 뒤로는 상황이 변한 것이다.
그래서 치영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치 병든 나무가 속부터 썩어 들어가면서도 오히려 겉껍질은 멀쩡히 창창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세월이 지나고 나자, 나중에는 굳이 애를 써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가이딩실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뿐인데…….
“그래요, 소위님! 푹 쉬다 오세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희정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링거만 맞고 바로 출근하겠다는 치영에게 호통을 치는 치프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만류하는 희정.
지난 몇 년간 그런 걱정은 또 처음이라, 명치 끝이 묵직하게 먹먹해진 채로 숙소에 돌아왔다.
이제는 텅 비어 버린 경비실부터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제 좌방으로 올라왔을 뿐인데…….
“퇴거 명령 내려왔어요. 기일을 드릴 수는 있는데 그래 봤자 3일 안에는 퇴거하셔야 해요.”
심드렁한 말투의 행정관은 한 사람의 주거 문제를 너무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치영은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도지는 기분에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대답했다.
“멀쩡히 살고 있는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근무지가 센터인데 센터 밖에서 어떻게 방을 잡으라는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일반군의 관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일단은 민간인들에게 그들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일반군들 중 센터의 북문, 서문, 동문 등을 감시하는 이들은 센터 안 사람들이 이능력자라는 것을 알지만,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뭘 하는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특수군 한국 지부라는 수상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그들을 경계했다.
딱 봐도 처우가 다른 것도 한몫했다.
일반군의 관사에서 살다가 싸움이라도 났다가는 걷잡을 수 없기도 하고.
관사에도 살지 못하는데, 갑자기 센터 밖에서 출퇴근을 하라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게다가 치영이 소속되어 있는 서울‧경기 센터는 경기 북부 일대에 있는 야산에 있다. 움막이라도 짓고 사는 것 외에는 당장 오늘 밤부터 지낼 집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갑자기 ‘나는 자연인이다.’를 선언하게 생긴 치영은 당황에 낯짝을 찌푸렸다.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근데 뭐 제가 어쩔 수 있나요. 위에서 시키니까 말씀드리는 거지. 저도 나랏밥 먹는 사람인데 제 처지 좀 이해해 주세요.”
행정관은 꽤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데 이런 업무를 떠안게 된 것이 유감이지, 치영을 길거리에 내팽개친 것이 유감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지금 이 새끼 얼굴에 주먹을 꽂고 영창에라도 가면, 당장 일주일간의 잠자리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치영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허공에 대고 지휘를 하는 것처럼 박자감 있게 검지를 흔들며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 치영의 물건들로 보이는 짐이 공중에 떠오른 채 두둥실 실려 오는 게 보였다. 마치 남자의 지휘에 맞춰 춤이라도 추듯이 말이다.
“…저게 뭐야.”
어이가 너무 없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치영을 향해, 공중에서 검지를 휙 휘두른 기백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포장 이사 중이잖아. 얼마나 편해. 감동 먹었니?”
가히 햇살이라도 비치는 듯한 미소였다. 왼쪽 눈 밑에 있는 눈물점이 살짝 접히며 미소에 완벽함을 더했다.
치영은 골이 싹 아파 왔다.
중력의 힘을 무한대로 증식시키거나 아예 지워 버릴 수 있는 이능력을 이삿짐 옮기는 것에 쓰고 있는 저 화상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백한은 복도에 둥둥 떠다니는 치영의 가구와 짐들을 콧노래를 부르며 비상구로 내려가게 했다.
우직끈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렸지만, 백한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웃기만 했다.
“…중령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우리 자기 홈리스 될까 봐.”
치영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행정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주장하는 퇴거 명령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나 알아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합니까, 옆에 계신 기 중령님한테…….”
“나랏일 하신다잖아. 그만 괴롭히고 보내드려. 이삿짐은 내가 싹 다 빼 놨으니까.”
행정관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백한이 그와 치영 사이에 끼어들더니 싱긋 웃었다.
…왜 저래, 진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치영에게 백한이 다시금 사근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왼쪽 눈 밑에 있는 눈물점이 도드라지도록 눈꼬리를 좁힌 요사스러운 미소였다.
“이삿날이니까 짜장면 먹으러 가자. 네가 쏜다고?”
쏘긴 뭘 쏴. 머리통이나 확 쏘고 싶다.
속으로 독을 품고 있어도 표정에는 티가 나지 않는 치영이 그런 백한을 무시했다.
그대로 휙 몸을 젖혀, 기백한의 너른 등 뒤에 숨겨져 있는 행정관을 향해 다시 질문했다.
“그러니까 그걸 왜 기 중령님한테 물으라는 겁니까. 전 아무 설명도 못 들었으니 행정관님이 직접 설명해 주시지 말입니다.”
“아, 그럴까요? 제가 설명을… 잠시만요. 3, 2, 1… 네, 죄송합니다. 여섯 시 정각이네요. 제가 퇴근 시간이라. 일단 짐도 다 옮기신 것 같으니 두 분 일은 두 분이 알아서 하시겠어요? 제가 가정이 있는 몸이라. 갈 때 기저귀도 사 가야 하고, 첫째 목욕도 시켜야 해서요.”
행정관은 말을 흘리며 입만 웃더니, 그 표정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뒷걸음쳤다.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스르륵 뒷걸음 침과 동시에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닫힘 버튼을 5연타 하는 것이 치영의 눈에 너무 잘 보였다.
“아니, 잠깐 행정관님,”
“씁, 나 배고프다니까.”
손을 뻗으며 그쪽으로 달려가려던 치영은 허리를 낚아채는 팔에 의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치영은 기가 막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거야?
치영의 그런 표정을 다 읽었다는 양,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네가 이사한다길래.”
“…지나가던 길이라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뭘 하면 숙소 지구인 난슬동에서도 가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이드 전용 숙소를 지나가는 길이었을까?
똑같이 배후에 야산이 있고, 똑같은 난슬동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나, 춘란의 팀 숙소는 난슬동에서 가장 고급 주택만 모여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뒤편 거실의 통창을 열면 너른 들판과 함께 소나무 숲으로 시작되는 야산이 자리 잡고 있고, 산 입구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그에 비해 가이드 전용 숙소는 유명무실해진 것이 오래라 야산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끔 고라니가 나오고는 했다.
끼이익, 하고 우는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어느 때는 사람 비명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가끔 숙소 뒤편 텃밭으로 내려와 치영이 심어 놓은 가지와 애호박을 훔쳐먹는 고라니들이 말이다.
네가 그런 고라니도 아닌데 이 산기슭에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치영의 시선을 싹 다 무시한 기한이 슬슬 웃으며 치영을 잡아끌었다.
“가서 밥도 먹고,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얘기도 하자고.”
욕이 튀어나왔지만 이를 갈며 참아 냈다.
기백한은 부사수가 제 앞에서 대놓고 욕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 주는 성미가 아니었다.
아닌가, 춘란대 대원들에게는 유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정정하겠다. 안치영이 대놓고 욕하는 것만은 그대로 들어 줄 만한 성깔이 아니다.
타인에게 박한 사람이 제 팀원들에게는 더없이 유하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 평 속에서 안치영의 포지션은 타인을 맡고 있지 않은가.
다만 근래 들어 과한 관심이 지속되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사막에 다녀왔다더니, 풍토병을 옮아 온 것 아닐까? 아프리카 댕기열 같은…….
암세포도 괴멸시키는 에스퍼의 면역력을 알면서도 치영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꽤 애착을 갖고 살아오던 보금자리를 한순간에 빼앗긴 사람이 하고 있을 만한 생각은 아니란 뜻이다.
옅은 분노는 금세 무기력한 느낌으로 바뀌어 버렸다.
치영 본인이 눈치를 못 채고 있어서 그렇지, 그것은 일종의 우울증이었다.
애착을 가지고 돌보던 텃밭도, 오로지 내 세상이다 싶어져 마음을 놓고 있던 안방 한 칸에 거실과 욕실이 딸린 작은 숙소도, 갑자기 내려진 퇴거 명령에 말 몇 마디 묻고는 금세 포기해 버리는 지금 이 상태가 말이다.
그러나 그 가이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 가이드가 몰랐기에 그의 에스퍼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작은 시한폭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