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불쑥 시야가 높아지자 백한이 치영을 올려다보았다. 놀란 신음을 입안에서 눌러 죽이며, 치영이 백한의 어깨를 퍽 쳤다.
“이런 미친, 내려 당장!”
“명령하는 거 짜릿한데.”
변죽만 치는 하마 새끼가 짜증 났다. 진득한 구석 없이 가벼운 농담만 치는 입매에는 시원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입만 살았지, 아주.
치영은 도대체 기백한이 저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싶어졌다.
이렇게 스킨십을 하다가도 어딘가 심사가 뒤틀리면 바로 토악질을 해 대면서.
사람을 오물 취급하며 그 앞에 대고 변기통을 붙잡고 웩웩거리면서.
도대체 이런 희롱들에 무슨 마음이 있다고 연애를 하자는 건지.
작전처장의 손을 탔나 싶어 이제 와 아깝기라도 한 건가. 그것 외에는 짚이는 게 없었다.
저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계륵. 그보다 치영을 더 잘 설명하는 단어가 있을까. 제 인생을 압축 기장한 단어를 떠올리며 치영은 이죽거렸다.
“왜요. 자벌레 주제에 다른 새끼 손 탈 거라 생각하니 배알이라도 꼴리십니까?”
“뭐?”
“손 처장 손 탔을까 봐 연애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신뢰가 없네.”
“그럼 해 봐, 미친 새끼야. 또 토하는 김에 아예 피까지 토하고 콱 뒈져 버려.”
치영이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앞니가 부딪혔다. 얼얼할 정도로 아팠지만, 치영은 두 눈을 감지 않은 채 그대로 입술을 얽어 들어갔다.
백한은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끓어올랐던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웃겨? 넌 내가 다 우습지, 이 하마 새끼야.
치영은 백한의 웃음에 자극받아 아예 그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백한은 순순히 입을 벌려 주었다. 어디 해 보라는 듯한 움직임에 치영은 열이 받았다.
그러나 거기서 더한 움직임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뭇거리자, 킥킥거리던 백한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맞닿은 틈새가 점점 더 태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붙어버 렸다.
입맞춤이 깊어지자 치영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좀 더 조여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등을 끌어안아 제 품으로 당기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없는데도 더욱더.
숨이 가빠 새어 나온 윽, 소리가 맞닿은 입술을 통해 잔뜩 뭉개졌다. 백한은 어느새 눈까지 감고 있었다.
…미친 새끼, 지금 느끼는 거야?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닐 수 없다.
기가 막혀 반응을 멈춘 채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백한이 그대로 치영의 혀를 감아올려 제 입 안쪽으로 깊게 빨아들였다.
“읏…….”
“…….”
단단히 미친놈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왠지 모르게 희롱당하는 기분이라 백한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으나, 꿈쩍도 않는다.
간신히 틈을 벌려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숨소리에 섞여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흣, 잠, 깐—.”
“왜.”
겨우 입을 떼어내자 입술 사이에 반짝이는 은실이 늘어졌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기묘했다. 꼭…….
“왜, 왜 그렇게 보는…….”
“뭐가.”
백한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도 한 번 친 적 없는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은 납덩이처럼.
배꼽 아래가 묵직해지는 기분에 치영은 몸부림을 쳤다.
백한은 저보다 작은, 게다가 가이드인 치영의 몸부림 정도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 있었다. 까부니까 내려 준다는 표정으로 치영을 땅 위에 내려 주고는, 떨어질 틈도 없이 다시금 몸을 붙여 왔다.
또 벽과 백한 사이에 갇힌 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는 벽을 왜 이렇게 좋아하지? 변태의 생각 따위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백한은 그 눈빛 그대로 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골을 살살 간지럽히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보냐고 묻고 싶은데 힘껏 안긴 탓에 그걸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눈빛 때문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먼저 시선을 피하면 될 일인데도 어쩐지 계속 보고 있게 된다.
백한 말고는 접촉 가이딩을 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런 쪽 경험도 없었다.
공용 가이딩실만 해도 콘돔과 젤, 물티슈가 상비되어 있는 방이 따로 있는 센터에서 치영은 유일하다시피 경험이 없는 가이드였다.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 눈빛이 수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뭣 모르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뭡니까.”
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새삼스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백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잖아. 서로 인사시켜 줘?”
“미쳤습니까?”
돌아 버린 새끼. 짜증이 난 치영이 백한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도리어 허리에 감긴 팔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치영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먼저 엉겨 붙었잖아. 이러라고 그런 거 아니었어? 내숭이 참신하네.”
“…그런 거겠습니까? 개소리 하지 말고 꺼지시지 말입니다.”
“깜찍하네, 우리 치영이.”
근데, 형 놀릴 거면 처음부터 각오하고 덤볐어야지.
백한이 치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순식간에 치영의 두 손목이 백한의 한 손에 잡혔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 의해 그대로 만세 자세를 취해야 했다.
팔이 올려진 채로 벽에 밀어붙여진 치영을 보며 백한이 씩 웃었다. 치영은 그런 백한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역겨워하면서도 가이딩은 가져가고 싶습니까?”
“아, 내가 너 역겹댔지, 네 가이딩까지 역겹대?”
“…개새끼.”
“그걸로 되겠어? 더 해 봐. 입술도 부비게 해 줬는데 형이 네 화풀이 정도는 더 들어 줘야지.”
백한이 다시금 치영의 입술을 물었다. 앞니 사이에 물린 아랫입술을 살짝 당기기까지 한다. 백한의 앞니에 깨물린 아랫입술이 얼얼했다.
치영은 그를 노려보던 두 눈을 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싫으면 그냥 두면 되지. 저와의 각인이 치영의 의지도 아니었는데 마치 당해 보라는 듯이…….
“오히려 반대야. 네 가이딩이 얼마나 달아 빠졌는데.”
“…….”
“싹 다 핥아먹고 싶은데 참아 주는 거야.”
“중령님은 참을성 따위는 없는 새끼십니다. 참는 게 아니라 더 건들면 귀찮아질까 봐 그러는 거 아닙니까, 이 비열한 새끼야.”
“알고 있었어?”
백한이 웃으며 치영의 목울대를 짓눌렀다. 확인 사살 당한 마음이 피를 흘릴 새도 없이 급소에 와 닿은 압박감에 숨을 멈춰야 했다.
“알면 울대 들썩거리면서 말하지 마. 네가 아무리 좆같아도 내 가이드가 나랑 같은 거 달린 새끼라는 걸 끊임없이 되새기는 나만큼 좆같을까.”
“…….”
치영의 두 눈에서 빛이 꺼졌다. 노려보던 눈매도 허물어졌다.
허무했다. 이딴 새끼 뭐가 좋다고 지난 몇 년간을……. 치영은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가진 것 없는 살림에 하나 있는 가족이라는 게 집안 동전까지 싹 다 긁어모아 사이비 종교에 바치는 걸 보는 기분이 이럴까?
치영은 자신을 아껴 주지 않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딴 새끼 뭐가 좋다고 동전 한 닢까지 박박 긁어 가져다 바치려는 걸까.
눈빛이 흐려지자, 백한이 치영의 뺨을 톡톡 쳤다.
“백연이랑 가이딩 연습 해 놔. 잘할 수 있지?”
“…….”
“우리 치영이 속상해? 속상하면 각인 좀 풀어 줄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면?”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 새겨진 각인의 해제는 불가능에 가깝다.
바꿔 말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해제를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대상자의 죽음이다.
간단하다고는 하나 죽음이란 것이 쉬운 방법은 아니니, 덜 까다로운 두 번째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가이드가 본인이 갖고 있는 가이딩의 파장을 바꾸는 것이다. 말이 쉽지, 사실상 타고난 머리 색을 제 의지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흑발로 태어나 놓고 의지만으로 금발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않나. 가이드가 제 파장을 바꾸는 일도 그러하다.
그 때문에 수술이 개발되었다. 가이드의 골수를 모두 비운 뒤, 유전자가 조작된 조혈모세포를 새롭게 이식하는 수술이다.
그렇게 혈액과 림프액에 기반을 둔 가이딩 물질액을 교체하면 파장 또한 바뀌게 된다.
문제는 조혈모세포가 면역계 세포라는 데 있다.
유전자 조작된 조혈모세포는 자기 인식에 실패하여 온몸의 장기를 공격하는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꽤 높은 확률로 일어나는 부작용이었다.
세 번째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인을 맺을 때 약물을 주사한 뒤 성관계를 맺는 것처럼, 가이드가 지정된 약물을 투여받고 각인을 맺었던 에스퍼와 성관계를 하여 해제하는 법이 있다.
이 방법이 가장 쉽고 안전하지만, 가이드의 등급이 S+급 이상일 때만 가능하다는 맹점이 있다.
각인을 맺은 에스퍼의 체내에서 제 각인의 흔적을 떼어내는, 일종의 전투 가이딩 기술이기 때문이다.
에스퍼의 몸에 돌고 있는 가이딩을 억지로 빼앗는 것과 같은 원리다.
백한이 마음을 운운하는 것은 F급이 S+가 될 수는 없으니, 수술하여 뒈져 버리라는 말이었다.
치영은 이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자살하라는 말을 쉽게 하십니다.”
“글쎄. 우리 치영이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
“나도 너 꽤 좋아해.”
“지랄하네.”
“진짜라니까. 형도 너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치영아.”
백한이 눈매를 사그러 트리며 웃었다. 왼쪽 눈 밑 점이 요사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치영은 암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전투 가이딩을 익히는 거야.”
고개가 내려오더니 치영의 입꼬리 끄트머리에 입술이 닿았다. 입맞춤 같지도 않은 입맞춤, 다정을 가장한 몰인정, 내킬 때만 적선하듯 던져지는 애정,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할 수 있지, 자기야?”
아름다운 것들은 꼭 독이 있노라고. 그 말 그대로의 미소를 지으며 백한이 다정스레 속삭였다.
나 그런 거 못 해, 씹새끼야.
치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뱉지 않았다. 사랑하는 에스퍼가 원한다는데, 기어코 나와의 각인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고 싶다는데.
사실은 너에게 온 세상을 주고 싶었는데.
못난 안치영은 그에게 줄 것이 없어서 악에 받친 이별이라도 선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