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96화 (96/114)

96화

경호 일자가 갑자기 당겨졌다는 걸 알게 된 날 공교롭게 출근하게 되어 긴장했던 치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이악 부대에 있을 당시 일했던 주방 찬모 자리와 다름없다는 걸 깨닫고 적잖이 안심했다.

가이드들을 경호하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일손이 달리는 게 제일 심한 곳이 주방인 듯했다. 한참 안주 주문을 산더미처럼 받고 있던 주방으로 먼저 안내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서 잡일 좀 하다가 위에 올라가서 일 익히는 걸로 하자고. 지금 일해 줄 사람이 없거든. 애들이 한꺼번에 그만두는 바람에……. 아무튼, 괜찮지?”

괜찮고 말고 할 것은 없었지만, 경호 인력으로 고용된 치영이 설거지 담당으로 배정된 것에 불만을 품을 거라 생각한 건지 김 부장의 목소리는 나긋하게 치영을 달래고 있었다. 사실 치영에게는 이쪽이 더 편하긴 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날 이악 부대에서 방문할 것 같지도 않으니, 오늘은 주방 안에서 일하며 대충 이 정체 모를 업장의 운영 방식을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졌다.

일을 따로 배울 필요도 없었다. 설거지라면 어린 손 위에 물집이 잡히도록 무수히 많은 날 동안 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년간의 설거지 경력으로 인해 치영의 몫으로 쌓여 있던 안주 접시들은 빠르게 세척되었다.

김 부장이 치영을 주방에 데려다주자마자 얼굴이 허여멀건 기운 없게 생겼는데 대체 어디에 쓰냐며 투덜거리던 주방장도 치영이 닦아 놓은 유리잔이 물방울이 말라붙은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걸 보고 어디서 일하다 왔냐 물었다.

“그냥…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라면 마땅히 월급을 받아야 할 텐데 치영의 노동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센터에 들어오고 나서야 노동이라는 게 제 몫의 삯을 받는 일이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라 대충 둘러대자, 뺨에 옅은 칼자국이 있는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이어 치영에게 감자를 깎을 수 있냐고 물었고, 손잡이 부분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철로 되어 치영의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감자칼을 쥐여 주었다. 그때부터는 다리가 낮은 의자에 쭈그려 앉아 계속 감자를 깎았다.

그다음에는 또 누군가 가져온 상자에 가득 담긴 양파도 다듬어야 했다. 치영이 수많은 양파 껍질을 밟고 겨우 허리를 폈을 때는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여기 일 끝났으니까 김 부장 다시 찾아가 봐.”

“네.”

치영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주방을 떠났다. 주방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오늘 온다는 큰손은 꼭 단체 손님을 데려온다고 했다.

치영은 손님들이 단체로 온다고 해서 수용할 공간이 있나 싶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콜라숍에는 숨겨진 공간이 더 있었던 것이다.

“주방에 일 더 없대?”

김 부장이 지하실로 돌아온 치영에게 물었다. 치영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김 부장은 저를 따라오라고 했다.

얌전히 그를 따라가자, 김 부장은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처럼 걸으며 치영에게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가서는 웬만하면 손님들이랑 눈 마주치지 말고. 가이드들이 도와달라고 해도 룸 사방 면에 있는 적색등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움직이지 마.”

치영은 대답 대신 김 부장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부장은 계속해서 주의사항에 대해 말했다.

손님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그들이 취해 휘청거려도 부축하지 말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가이드들이 손님에게 맞아 피를 흘리지 않는 이상은 끼어들지 말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김 부장은 치영을 무대 뒤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 계단과 연결된 뒷건물로 데려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좁은 복도를 지나면 나오는 별관 건물은 시골에 그저 그런 윤락업소처럼 생긴 콜라숍의 외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린애의 피부처럼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건물 안쪽으로 얇은 모슬린 천으로 된 커튼이 쳐진 칸막이들 사이사이에 U자형 소파가 놓여 있었다.

천장에 달린, 스테인드글라스를 모티브로 한 암붉은색 조명들이 카펫이 깔린 바닥을 총천연색으로 반짝이게 만들었지만, 실내를 밝히는 것에는 그다지 재주가 없어 보였다.

그 탓에 불그죽죽할 뿐 어둑한 실내를, 소파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아래서 나오는 조명이 간신히 발밑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만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이들은 심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김 부장은 인이어를 건네주며 폐쇄회로 카메라가 없으니 누가 시비를 걸어도 그냥 맞아 주라고 속삭였다.

치영이 그런 말은 없지 않았냐고 따질까 했으나, 김 부장은 귀찮았는지 금세 등을 돌려 가 버렸다.

인이어를 귀에 채우며 연결된 무전기를 혁대의 뒷부분에 고정한 치영은 조용히 그 거대한 방 안 구석에 서 있었다.

치영처럼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몇몇 이들이 벽면에 붙어 조용히 서 있었다. 같은 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할 사이가 아니라는 건 인수인계를 해준 게 그들이 아닌 김 부장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치영은 그들처럼 조용히 방 한구석에 서 있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잡생각이 들었다.

기백한이 복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 춘란의 에스퍼들이 저를 찾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직 핸드폰이 조용한 걸로 보아 별다른 일은 없는 듯했지만 또 모를 일이다.

지난번에는 없어진 치영을 찾기 위해 백한이 직접 지프를 몰고 센터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나.

치영의 센터 출입 기록이 대대장인 백한에게 공유되고 있고, 치영이 그날 나간 것은 이 중사의 이름을 빌려 외출한 것임에도 말이다.

‘감 하나는 짐승이라니까.’

치영은 갑자기 든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백한은 단순하게 행동하는 반면, 그 생각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맹수의 행동 양상에 따라 그들의 공격에 대비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당장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전혀 유추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첫사랑부터 너무 어려운 남자를 사랑한 자신의 죄였다.

그리고 치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누군가 그를 툭 쳤다.

“야.”

“…….”

치영은 김 부장의 조언을 떠올리며, 제게 말을 건 남자에게 대답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가까운 테이블에서 비척거리며 다가온 남자가 출입문 옆에 서 있던 치영을 툭툭 치며 계속해서 불렀다. 요즘 들어 날씨가 꽤 추워져서 그런지 정전기가 일듯이 남자가 치영을 칠 때마다 찌릿거렸다.

더 무시할 수 없어 벽면 쪽을 바라보자, 치영과 눈이 마주친 경호원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손님.”

“소온니임? 야,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성함은 말씀 안 하셔서…….”

“골 때리네, 이거.”

남자는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다. 곁에 서 있기만 해도 그의 호흡에 섞인 술 냄새에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걸 참아야 했다. 걸친 것들이 안목 없는 치영의 눈으로 보기에도 꽤 고가로 보였는데, 반반한 생김치고 너무 야비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제 외모를 깎아 먹는 타입이었다.

일단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치영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필요한 게 있냐 물었으나, 남자는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나 화장실 갈 거야.”

가면 되지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도 아닌데 왜 저에게 묻나 싶어 빤히 쳐다보자, 남자가 짜증을 냈다.

“안내하라고!”

“저도 오늘 처음이라 화장실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다른 분께 말씀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빨리!”

…이 새낀 그냥 길바닥에 노상방뇨 시키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은 자신이 서비스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표정이 급속도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둘 수는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복도로 나섰다. 남자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치영을 쫓아왔다.

복도로 나선 치영의 등 뒤로 남자가 섰다. 치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몸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까 김 부장이랑 올라온 길 쪽이었다.

뒷건물의 구조를 모르니 콜라숍 건물로 돌아가 화장실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가 이번에도 짜증을 냈다.

“너 바보야? 화장실 이쪽이거든?”

“…화장실 어디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치영은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내뱉었다가 너무 군인 억양이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치영의 말을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길 물어봤어? 지금 나더러 혼자 화장실을 가라고?!”

거동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왜 화장실을 둘이 가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던 치영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세워 이번에는 복도 왼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럼 화장실을 안내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 새끼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콜라숍에서 뒷건물로 들어올 때의 복도와는 다르게 널찍한 복도는 내장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다른 색의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까 그 방이 뒷건물 시설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복도를 걸을수록 그런 커다란 룸이 몇 개나 더 보였다.

치영이 어디까지 가야 하나 싶어 남자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

룸 안에는 조명이 어둑하여 잘 보이지 않던 남자의 생김이 그제야 뚜렷해졌다. 치영은 놀라 숨을 삼켰다. 그와 똑 닮은 남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까마귀.’

치영은 오늘 브리핑 자료 속 띄워진 사진의 남자와 눈앞의 남자가 동일인임을 알아챘다. 빠르게 무언가를 도출해 낸 치영은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손님, 이게 몇 개입니까?”

“뭐? 장난하나. 세 개.”

검지와 중지로 V자 모양을 만들어 보인 치영은 남자가 대답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윽—!”

단말마와 함께 남자가 푹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이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치영은 배 속이 타들어 갈 정도로 긴장했다. 쓰러진 그의 몸을 질질 끌어 복도 끝으로 간 치영은 완강기와 청소 도구들이 들어있는 폭 90cm 정도의 아주 작은 방을 발견한 뒤 재빠르게 그 안으로 남자의 몸을 구겨 넣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