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107화 (107/114)

107화

“읍—.”

저도 모르게 볼썽사나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맞부딪힌 입술의 말랑한 감촉이 치영의 것 위를 지그시 눌러 왔다. 기백한이 살짝 입술을 떼어낸 다음 속삭였다.

그가 속삭일 때마다 아직 맞붙어 있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입 좀, 벌려 봐. 안으로 들어가게, 응?”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그렇게 급할까? 치영은 문득 의아해졌다.

어디 대단한 작전이라도 나가야 해서 저에게 이렇게 엉겨 붙나 싶었다. 가이딩이 필요한 건가 지레짐작한 것이다.

백한은 치영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치영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걸 숨기며 얌전히 입을 벌려 주었다. 굳이 반항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때와 달리 오늘의 치영에게는 백한을 이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기백한을 이용하는 안치영이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 웃겨 치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혀를 집어넣다 말고, 백한이 여전히 게게 풀린 눈으로 치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웃어.”

“하던 거나 마저 하십쇼.”

“씹—. 오늘 왜 이래.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말을 사람 돋우는 것으로 착각하기라도 한 건지, 기백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떼어냈던 입술을 다시금 마주쳐 왔다. 치영은 두 눈을 살짝 감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백한은 치영을 원했다. 정확히는 치영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이딩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치영이라는 사람 자체는 거부했었다.

치영은 기백한의 그런 거부를 거절하고 싶었다.

나는 너를 욕심 낸 적도 없는데 너는 나를 이 세계에서 가장 파렴치한 도둑으로 몰아. 꼭 너를 훔치려고 갖은 애를 쓰는 양심 없는 인간으로.

치영에게는 그것이 가장 서글펐다. 그래서 치영도 기백한을 거부했다.

단 한 번도 그의 스킨십이 달가웠던 적이 없었다. 치영의 사랑에는 기대가 부재했다. 치영은 꿈에서조차 기백한이 자신을 봐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저라는 인간을 까탈스러운 기백한이 사랑해 줄 거라 기대하는 건, 자각이 없는 이나 하는 짓일 테니.

그리고 원래도 없던 기대가 이제는 말라 버려 갈라진 논처럼 밑바닥을 드러낸 오늘에서야 치영은 기백한의 스킨십을 반길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스킨십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자 했다. 마치 기백한이 치영을 도구로써 이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백한은 치영의 그런 반응이 기분 좋은 듯했다. 얼마간 더 포기한 덕에 겨우 편해진 치영을 이제야 좋아해 주는 것이다. 그 역설이 웃겼다.

이제는 기백한이 저와의 입맞춤에서 헛구역질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기백한은 몸에는 좋으나 먹기 싫은 걸 억지로 삼키는 사람처럼 치영을 대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초반에 일이고, 점점 가이딩을 받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한 건지 요즘에는 저와의 접촉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가이딩을 받아 가면서 즐기기까지 하는 기백한을 보며, 치영은 놀랍도록 허무해졌다. 욕심 많은 에스퍼를 페어로 둔 탓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러니 자신 역시 그저 이 잠깐의 닿음으로 인해 충족될 무언가를 이용해도 될 것이다. 처음으로 기백한과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져보게 되었다.

너도 나를 몇 년간 뜯어먹고 살았잖아. 나도 조금만 그럴게.

그렇게 마음먹자, 제게 엉기는 에스퍼의 파장이 기껍기만 했다. 백한의 입술이 진하게 붙어 올수록 파장은 신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치영과 닿은 것이 못내 기꺼운 것처럼.

치영은 그 모든 감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백한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손에 느껴지는 등 근육이 단단했다. 움찔, 하고 떨리는 움직임이 느껴지기도 했다.

순간,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좀 더 진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기백한은 꼭 조급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치영을 꼭 도망이라도 갈 것 같은 사람처럼 대했다.

치영은 숨이 가빠 고개를 모로 젖혀 입술의 틈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백한은 그걸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수 분 후로, 치영은 백한의 파장이 노곤 노곤 풀어진 개처럼 엉겨 오는 걸 받아 주며 가빠진 호흡을 정리했다.

“하아—.”

“…너, 이 씹—. 누가 이렇게 야하게 굴래?”

뭘 어쨌다고 또 시비인지 몰라 올려다보자, 기백한이 꼭 심경이 복잡한 사람처럼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일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영은 젖은 입술이 못내 간지러워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으며 말했다.

“저 이제 가 봐야 합니다. 그쪽에서 늦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기백한이 빨갛게 타오르는 숯처럼 일렁이는 눈으로 치영의 말을 잘랐다.

“그 새끼가 너 각인한 가이드인 거 알고 있나?”

“…네?”

센터에서는 기백한과 제가 각인한 사실이 유명한 내용이지만, 페어가 있다는 건 알아도 각인까지는 모르지 않을까? 치영은 불쑥 닥쳐온 백한의 질문에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재벌들 같은 경우에는 사람 두는 것이 까다로워 저에 대한 사전 조사를 미리 했지 싶은데, 그것도 그냥 추측일 뿐이라…….”

“오늘 가자마자 너 나랑 각인했다고 그 새끼한테 말해.”

“…뜬금없이 그런 말을 어떻게 합니까. 더욱이 상대가 묻지도 않은 내용을.”

조현호는 관심도 없을 텐데 거기에 대고, 난 각인한 에스퍼가 있다고 말하는 건 사회성이 떨어지는 짓 아닌가 싶었다. 그런 짓을 시키는 걸 보니 아예 돌아 버린 건가 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기백한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냥 하라면 해.”

“네, 뭐 물어보면 하겠습니다.”

“안 물어봐도 하라고.”

치영은 백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 했다. 백한이 제 등을 껴안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엉덩이에 와 닿는 것이 묵직했다. 파장이 완벽하게 엉겨 있는 터라 더 이상의 접촉은 불필요했다.

“이제 가 봐야 합니다.”

“매정해서 눈물이 다 나.”

“처우시든가요.”

치영은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말하며 이내 문고리를 돌려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백한이 제 뒤에서 혀를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없었다. 밖으로 나온 치영은 곧장 계단을 내려가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출근하려는 걸 본 에스퍼들이 잘 다녀오라고 소리쳤다.

오늘은 박형인이 태워다 주기로 했다. 치영이 준비가 다 된 걸 본 박형인이 앞치마를 풀고 차 키를 챙겨 나오려던 때였다.

“내가 간다.”

기백한이 불쑥 층계참을 내려오며 말했다.

“대대장님은 오늘 오전에—.”

박형인이 놀라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기백한이 치영의 어깨를 밀어 현관을 나서게 만들었다.

뭔가 싶어 가만히 서 있던 치영은 두말 않고 현관을 나섰다. 전이었다면 기백한과 둘이 있는 것 자체가 껄끄러워 싫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도 미미하여 출근만 할 수 있다면 아무나 상관없었다.

의외로 운전을 험하게 하는 편은 아닌지라 기백한의 옆에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치영은 제 어깨에 팔을 얹은 채 현관을 빠져나오는 기백한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그런 치영에게 백한이 말했다.

“…너 좀 이상하다? 평소라면 수줍어서 개지랄 떠느라 바쁘잖아, 너.”

“수줍, 은 게 아니라 중령님이 좆같아서 싫어한 거죠.”

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말이 의외라는 듯, 기백한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뭐야, 그럼 지금은 뭐가 좀 달라?”

치영은 생각 없이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손을 뻗어 기백한의 지프 조수석 문을 열려고 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을 때였다.

탁,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닫혀 버렸다. 백한이 손바닥으로 조수석 문을 꾹 눌러 닫은 것이다.

또 시답잖은 장난을 하나 싶어 미간을 찌푸린 채 쳐다보는데, 기백한이 드물게 표정 없는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살기를 띤 눈빛을 하거나, 기백한의 표정은 늘 다채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감정을 엿볼 수가 없었다. 치영은 오히려 그것이 살기를 띤 얼굴보다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상관이 없어?”

기백한이 읊조리듯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서는 이렇다 할 어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치영은 어쩐지 기백한이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당황한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어 사고가 멈춘 사람처럼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눈빛 속 어딘가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느낌. 일을 나가기도 전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은 터라, 치영은 딴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또 시비십니까.”

그러나 백한은 그 물음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뭔가를 참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교근이 바짝 설 정도로 이를 아득 깨문 상태로 말했다.

“타기나 해.”

저가 먼저 못 타게 잡아 놓고 무슨……?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기백한은 어느새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탄 뒤였다.

치영은 하, 하고 낮게 탄식하며 저도 올라탔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치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오늘 조현호와의 만남에서 어느 타이밍에 빠져나와 콜라숍으로 출근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복장이 이러니 바로 가는 것도 이상했다. 이 중사에게 연락하여 옷을 받는 수밖에는 없을 듯했다. 이 중사가 못내 껄끄러웠던 치영은 쯧, 혀를 찼다.

그 상념을 깨트리듯, 기백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벨트 안 매지.”

그냥 벨트 매라 하면 될 걸 말을 꼭 저렇게 한다. 그러나 치영은 기분 상할 것 없이 얌전히 벨트를 맸다.

차는 금세 출발했다. 치영은 계속해서 밖을 바라보았다. 전이었으면 한없이 불편했을 분위기인데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작게 하품하며, 기백한이 오늘은 철 지난 아이돌 노래를 틀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는 생각만 잠깐 했다.

그게 다였다.

지프는 얌전히 센터를 빠져나왔고, 치영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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