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배 속이 왁자지껄 소란했다. 안에 든 것을 내장까지 뱉어 내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는 느낌에 치영은 헛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명으로 변해 귓속으로 빨려들어 오는 기분이었다. 치영의 두 귀가 음압이 거세진 수챗구멍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걸 빨아들이는 느낌. 그리고 청각으로 쏟아진 방대한 음의 양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심장이 울리는 소리였다. 발밑이 쑥 꺼져 나락으로 떨어지는 추락감과 동시에 신발 밑창을 받치고 있는 바닥이 너무도 견고하게 발목을 잡고 있어 어디로도 도망갈 곳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치영은 정말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것이 치영의 이성이 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였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동안 기백한은 새벽에 귀가하는 치영보다 더욱 늦게 침대로 기어들어 오고는 했었다. 그렇다면, 백한은 지금껏 이렇게 치영이 알 수 없는 것들을 하며 거리를 쏘다녔던 걸까. 그 이유가 뭘까.
이곳은 이악 부대가 관리하는 거리다.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딱히 비밀일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악 부대 때문에 이곳에 잠입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사이, 백한은 그나마 마음에 드는 술을 찾았는지 이내 그것을 바카라 잔에 옮겨 담아 입술로 가져가고 있었다.
치영은 반쯤이나마 멀쩡해진 이성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다행히 벽 쪽은 조명이 거의 비치지 않는 데다가 겹겹이 쳐진 얇은 직물의 캐노피들에 의해 가려져 치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듯했다.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오금이 후들후들 떨리는 걸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는 기백연이었다. 두 사람 다 머리를 올려 이마를 드러냈는데, 백연의 머리 기장이 좀 더 짧은 터라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고, 기백한은.
‘…제비 같아.’
속되게 말하여 물 찬 제비 같았다. 안 그래도 기장이 긴 머리를 헤어 왁스로 고정해 넘긴 터라 드러난 이마는 옥석을 깎아 놓은 듯 유려했지만, 눈썹 산이 불거지고 콧날로 내려오는 섬세한 선들은 미묘한 야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절제된 선으로 표현된 최대의 야성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옆자리에서 기백연이 물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칼라에 검은색 뱀 무늬 자수가 새겨진 갈색빛이 섞인 보라색 실크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가 넓은지라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져 위험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검은색 슬랙스와 같은 색 로퍼에는 흙이나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아 오히려 그 날카로운 느낌을 차갑고 도회적으로 보이게 했다.
기백한은 청바지 차림이었다. 인부들이 잘 신는 작업 군화처럼 복사뼈를 덮는 베이지색 부츠에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상의는 목덜미를 반쯤 덮는 검은색 니트였는데, 직물이 얇고 속이 언뜻 비쳐 보이는 캐시미어 소재였다.
천을 몸 위에 대고 그대로 꿰매기라도 한 듯 타이트한 옷 때문에 그의 파이프 같은 쇄골이나 어느 문명의 무기처럼 보이는 어깨, 상박, 흉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치영은 최대한 그들의 테이블에서 먼 곳에 서 있으려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의 시선이, 정확히는 기백한의 의심이 따라붙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어쨌든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파장은 기백한을 알아보자마자 잠근 터라 위의 내벽이 조금 긁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결과는 성공적인지 백한과 백연은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치영은 숨죽이며 벽에 선 뒤, 다른 서버들처럼 조용히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척 그들을 곁눈질했다.
남매는 기다란 소파에 앉아 있는데도 기골이 장대하여 대여섯도 너끈히 앉을 소파를 비좁아 보이게끔 만들었다.
센터에 있을 때는 그 기백한조차도 군인이라는 느낌이 났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단정하고 정갈한 생김을 가진 백연조차 무척 거칠고 날카로워 보였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물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물담배의 파이프가 기본형인 걸로 보아, 항정신성 약물이 섞이지 않은 듯했다. 연기에 꽃잎을 짓이긴 듯한 미묘한 향이 니코틴 냄새에 섞여 공기 중에 떠돌았다. 다른 테이블과 달리 가이드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치영과 같은 복장을 한 서버가 다가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기백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줄 거면 좋은 걸로 챙겨 줘. 등급 높다고 다 좋은 거 아니니까 제대로 가져와.”
…가이드를 사려는 듯했다.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고르는 듯한 태도라 치영은 다른 곳을 바라보려 애를 써야 했다.
물론 기백연이 그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잠입 수사의 일환일 것이다. 치영은 백한보다는 백연을 믿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얘기는 이악 부대의 뒤를 독자적으로 밟고 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왜 치영은 그걸 모를까. 같은 팀원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치영 역시 이번 작전에 꽤 중요한 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문득, 치영은 이런 제 기대를 완전히 박살 내는 것은 늘 기백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기대라는 걸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가이드들이 비척비척 다가와 백연과 백한의 옆자리에 털썩 눕듯이 앉았다.
백연의 옆자리에 앉은 가이드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남자 가이드였는데 안색이 좋지 못했다. 반면, 기백한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 가이드는 그의 입에서 물담배 파이프를 빼앗아다가 제 입에 물고는 킥킥거렸다.
“뭐야, 맛없는 거 먹네?”
“얜 또 뭐야. 나 말 많은 거 싫어하는데. 저기, 얘 좀 바꿔 주라.”
기백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더러운 것에 닿기 싫은 사람처럼 큰 어깨를 옹송그리며 서버를 향해 말했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과장된 태도에 가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짜증을 누른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꽤 오래 근무한 것인지 당황한 얼굴의 서버에게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듯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곧이어, 그녀는 사근사근한 얼굴로 웃으며 백한에게 다시금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야? 여기 추천인 있어야만 올 수 있는데.”
“마켓캘리야? 추천인 쓰면 5000포인트 주시게?”
기백한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다시금 가이드의 입에서 파이프를 빼내어 제 입에 물었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볼에 우물이 패었다. 낮은 조도의 실내조명에 의해 그의 광대뼈가 만들어 낸 음영이 짙었다.
눈썹뼈가 툭 불거지고 콧대가 높아 두 눈에도 똑같은 그림자가 졌다. 때문에 치영은 그의 눈이 지금 누구를 응시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휴, 아가씨. 미안한데 방사 가이딩 좀 그만해. 정신 사나워. 맛도 없고.”
백한은 가이드의 무릎 위에 테이블에 있던 과일 접시를 얹더니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덧붙였다.
“내가 원래는 잡식이라 안 가리고 잘 처먹는데 최근에 입맛이 좀 고급이 되어 가지고. 어어? 표정이 왜 그래. 서운해? 그쪽 가이딩이 개거지 같다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사는 게 진짜 죽여준다는 얘기거든? 서운해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걔가 어떻냐면 말이야…….”
“그만.”
기백연이 백한의 입을 막았다. 날카로운 기색에 옆에 앉아 있던 남자 가이드가 지레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치영은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을 감시하듯 관찰하는 눈빛을 숨기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곧이어 그런 노력이 빛을 발했다. 벽과 벽 사이에 사람이 옆으로 들어갈 정도의 틈이 있었던 것이다. 치영은 그쪽으로 몸을 숨긴 뒤 대화를 엿들었다.
이윽고, 백연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백연이 슬랙스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내 열자, 안쪽에서 증명사진 같은 게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자 가이드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남자가 움찔 놀랐다.
…무슨 사진일까. 누구를 찾는 걸까. 만약 저 증명사진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면 저 가이드가 그런 반응을 할 리가 없다. 이곳에 올 때마다 페르소나 이능을 사용했으니 치영의 원래 얼굴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백한과 백연이 찾고 있는 것이 저였다면, 조현호의 회사에서부터 치영의 뒤를 몰래 밟는 쪽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단계를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백연과 백한은 누가 봐도 잠입을 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근거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치영은 아닐 거란 결론을 내주었다. 빠르게 돌아간 이성적 판단을 토대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려 노력했다.
“우, 우린 이런 거 몰라요!”
가이드 중 여자 쪽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멀리 떨어져 있던 서버들이 소란에 그들의 테이블을 주시했다.
백연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치영은 그녀가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모르면 쓰나. 이런 데는 많은 가르침 받으려고 오는 곳이라 해서 기대했는데.”
애초에 그런 식으로 느물거리게 말하는 것조차 처음 보았다. 늘 쓰던 딱딱한 말투도 아니고, 누군가를 유혹이라도 하듯 웃고 있는 미인의 얼굴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가이드의 뺨이 붉어지는 것까지 보였다.
백연이 내뱉은 말의 중의적인 뜻을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그들을 응시하던 서버들이 고개를 돌렸다. 백한이 웃겨 죽겠다는 듯 킬킬거렸다.
“와, 연기 천재 어쩌지? 한예종이 빼앗긴 인재가, 씨발, 여기에도 계셨네.”
“넌 좀 닥쳐. 그것보다, 자세히 봐 봐. 난 바쁘고 참을성이 없다.”
백연은 다시금 본래의 말투로 돌아와 남자 가이드에게 사진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녀는 다른 손에 포크를 쥐고 있었는데, 사진을 보여 줌과 동시에 엄지로 포크의 목을 눌러 가볍게 휘어 놓았다.
남자가 힉, 숨을 삼키는 소리가 치영에게도 들렸다.
“모, 몰라요!”
남자는 부정의 의미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고개를 저으며 백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