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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12)화 (12/67)

12화.

대한민국의 각성자 관련 법은 엄격했다. 특히 각성자 등록법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각성한 후 한 달 내로 본인이 센터에 방문해 각성자 등록을 하지 않으면 최소 억 단위 벌금을 물릴 정도였다. 그래서 등록할 때 등급과 힘을 숨기는 힘숨헌은 있을지언정, 아예 등록조차 안 한 힘숨헌은 존재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였다.

생각에 빠져 있던 정빈이 턱을 문질렀다.

“이사영 님, 그 각성자가 B급 이상인 건 맞습니까?”

“응.”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내 공격을 막았어.”

“이사영 님의 공격을요?”

사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빈은 빠르게 납득했다.

“그렇다면야 확실히 B 이상이겠군요.”

“중독자 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가시도 쳐내던데.”

“그 정도면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아니겠군요. 능력을 다루는 게 꽤 익숙한가 봅니다.”

사영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기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짧게 덧붙였다.

“국자로.”

“예? 국자요?”

처X처럼 앞치마를 입은 게 패션은 아닐 테고. 이사영은 ‘형’이 어딘가의 아르바이트생이나 가게 아들일 거라고 예상했다. 자기보다 나이는 많다고 했지만 그래도 2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이었다. 벌금을 낼 돈도 없을 텐데, 각종 불이익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등록조차 안 하는 건 무슨 깡이란 말인가.

이사영은 그 일련의 사실들이 이해가 안 됐다. 이해가 안 돼서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형’에게 붙여놓은 놈들이 손에 명함만 들고 들것에 실려 복귀했을 때도 이렇게 짜증이 나진 않았다. 금방 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고, 정예 길드원 네 명을 단숨에 해치운 걸로 다시금 그의 실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건드리면 뒤진다

사영은 구겨진 명함에 적힌 삐뚤빼뚤한 글씨를 하루에도 열 번씩 들여다보았다. 이쯤 되니 사영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이 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비서실과 연결되는 마이크 전원을 켰다.

“아주작은기적밍기적 헌터, 길드장실로 오라고 전달 바람. 최대한 빨리. 아니, 그냥 방송으로 불러.”

―헌터 네임 아주작은기적밍기적, 본명 서민기 헌터, 지금 바로 길드장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헌터 네임 아주작은기적밍기적, 본명 서민기 헌터…

퇴근을 40분 앞둔 시간, 사영은 서민기를 길드장실로 호출했다.

잠시 후 길드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아주작은기적밍기적, 본명 서민기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초췌한 낯짝이었다. 그가 음침하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저 괴롭히려고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의 말에 이사영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괴롭힌다니. 지금 바빠?”

“…바빠도 부르실 거잖습니까.”

“잘 아네.”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사실 서민기도 본인이 지은 죄가 있는 탓에, 길드원들이 ‘240 심기 왜 저럼?’이라고 물을 때마다 아주 작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각관국 데이터베이스 터는 일 제외하면 다 가능합니다.”

이사영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웃었다.

“저번에 찾으라고 했던 애. 이름이 뭐랬지?”

“샛별초등학교 2학년 2반 박하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걔.”

사영이 테이블 한켠에 놓인 명함을 힐끗 보고 양손으로 깍지를 껴잡았다.

“내가 그 애 가족 관계도 조사해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오, 맙소사. 서민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각성자 관리국 데이터베이스를 터는 데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심지어 터는 데에도 실패하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안 한 셈이었다.

서민기가 덜덜 떨기 시작하자 사영이 싸늘하게 말했다.

“당장 조사해와.”

“…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서민기가 냉큼 뛰쳐나가고 난 뒤. 사영은 다시 명함을 손에 쥐었다. 잠시 후, 구겨진 종이를 만지작대는 손 너머로 놓여 있던 핸드폰 화면이 팟 하고 켜지며 전화 수신 화면이 떴다.

[ 서원 길드 남우진 ]

발신자를 확인한 사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무슨 일이지?”

―정빈이 중독자 시체를 수거했다고 연락했다. 신고가 들어왔다더군.

“…….”

―우선 이쪽으로 인계받긴 했는데, 꽤 흥미로워서 말이야…. 직접 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전화했다.

사영은 힐끗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25분. 그는 구겨진 명함을 인벤토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 * *

같은 날 오후 2시 40분, 재료 준비 시간 팻말을 건 해장국집은 하루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록색 테이블에 앉아 20분째 학습지 첫 장을 넘기질 못하던 하은이 데굴 눈을 굴려 의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가리켰다.

“삼촌, 안쪽 머리 밝아졌어.”

“응? 그래?”

“응. 염색해야 할 것 같아.”

의재는 힐끔 시선을 돌려 하은이의 학습지를 보았다. 1번 문제의 답을 적는 칸에는 정답 대신 지렁이 두 마리가 나뭇잎에 나란히 앉은 그림이 뜬금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재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1번 문제 답이 지렁이야?”

“응. 그리고 삼촌, 삼촌은 거울 안 봐서 모르니까 내가 일부러 말해주는 거야. 머리 염색해.”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거울 좀 보고 올 테니까 1번 다시 풀고 있어봐.”

“치, 알겠어.”

하은이 입을 비죽이며 다시 학습지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의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달린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카락을 들어 안쪽을 비춰보았다. 형광등 때문에 잘못 본 것 아닌가 싶었는데, 까맣게 덮어놨던 잿빛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다시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떨떠름히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겼다.

‘염색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색이 빠지냐.’

균열에서 탈출한 순간부터 그의 머리카락은 잿빛으로 세어 있었다. 남들 눈에 띌 일을 조금이라도 더 피하고자 주기적으로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있었지만, 회복력 때문인지 혹은 알 수 없는 다른 이유에서인지 염색을 해봤자 금방 잿빛으로 돌아갔다.

‘염색약값도 장난 아닌데.’

그의 머리칼은 염색이 잘 먹지도 않아 한 번 할 때 염색약 두세 통씩은 사용해야 했고, 염색 주기도 짧았다. 머리 색을 바꿔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는 연예인보다 자신이 염색을 더 자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오늘은 재료도 많이 다듬어놨으니 비교적 한가한 오후를 보낼 예정이었다. 말 나온 김에 뿌리 염색이나 할까. 그는 앞치마 끈을 풀었다.

“하은아, 삼촌 머리 염색 좀 할게. 팻말 걸어놨으니까 사람 와도 문 열어주지 말고.”

“문에 매달려도?”

가끔 재료 준비 중 팻말을 걸어놔도 제발 해장국 한 그릇만 달라고 문에 달라붙는 헌터들이 있었다. 대부분 막 던전 공략을 마치고 눈이 돌아버린 헌터들이었다. 의재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매달려도 절대 열어주면 안 돼. 만약 너무 심한 진상인 것 같으면 바로 삼촌 불러. 학습지는 최대한 노력해서 풀어보기. 약속.”

“응. 약속.”

하은은 듣는 둥 마는 둥 대답하며 의재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연필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글자를 쓰는 게 아니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문제 해결보단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은데…. 의재는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곤 앞치마를 벽에 걸었다.

해장국집에 딸린 쪽방에서 오징어 먹물 염색약 두 개를 꺼내 온 그가 가게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고유 특성, 숙련자의 손(S+)이 활성화됩니다.]

비닐장갑을 낀 의재의 손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모발 구석구석 염색약을 발랐다. 그의 고유 특성, ‘숙련자의 손’은 처음 해보는 일이어도 능숙하고 꼼꼼히 해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성이다.

처음 사용하는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 특성과 함께라면 난생처음 끓여보는 해장국을 30년 동안 해장국 외길을 걸어온 장인처럼 끓일 수 있었다. 의재가 주인 할머니 없이 홀로 해장국집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숙련자의 손 덕분이었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탐낼 만한 최고의 특성이었지만, 정작 소유자인 차의재는 보다 빠르고 깔끔하게 염색을 하는 데에나 이것을 활용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피눈물을 흘릴 만한 광경이었다.

의재는 빗을 내려놓고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빠진 곳 없이 고르게 발린 염색약을 보며 그가 뿌듯하게 웃었다. 완벽하다.

‘해장국집에서 일을 못하게 되면… 미용사로 일해볼까.’

좀비 동시통역에 이어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낸 의재가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불렀다. 뭐가 됐든, 훌륭한 특성 덕분에 헌터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구멍은 많았다. 의재는 염색약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고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앞으로 30분 동안 염색약을 바른 채 있어야 했다.

염색제를 정리하고 화장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핸드폰이 두 번 짧게 진동했다.


하은 : 삼촌

하은 : 문에이상한사람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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