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26)화 (26/67)

26화.

“선물이에요. 제 것도 붙여두세요.”

“…….”

“뭐, 이 정도 팬서비스는 기본이니까. 공깃밥이 고마웠던 건 아니고.”

허니비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누가 봐도 자신의 팬을 만나 기뻐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별꼴이라며 그녀를 실컷 놀려먹었을 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허니비의 옆에는 백지처럼 새하얀 눈치의 소유자인 배원우뿐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 알바님, 허니비 팬이었어요?”

“…느에.”

“야, 자주자주 와라. 팬이시라잖아.”

닥쳐.

“뭐, 너무 바쁘지만 한 번쯤 더 올 수도 있고.”

절대 다시 오지 마세요.

허니비와 배원우가 사이좋게 가게를 나섰다. 의재는 사인 포스터를 옆구리에 낀 채 텅 빈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사인만 팔아도 부자가 되겠군.’

하지만 의재의 토마토 마켓 계정은 봉인당했으니 허니비 친필 사인 포스터는 팔리지 못하고 정빈의 사인 옆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하교한 하은은 허니비의 포스터를 발견하고 냉큼 그 앞으로 달려갔다.

“삼촌, 이게 뭐야?”

“허니비 포스터잖아.”

“진짜 허니비라고?”

어쩐지 목소리가 좀… 커지지 않았나? 장 본 것들을 정리하던 의재가 의아한 얼굴로 하은을 보았다. 하은은 금방이라도 포스터에 뺨을 댈 듯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허니비가 왔다 갔어? 오늘?”

이제 목소리는 숫제 비명에 가까웠다.

“응. 거기 직접 사인도 했어.”

“나, 나….”

포스터에 뺨을 비빌 듯 가까이 다가간 하은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응?”

“삼초온, 나….”

“왜, 왜 그래?”

“나 허니비 보고 싶어!”

‘씨X.’

다신 오지 말라고 저주를 내렸건만. 의재는 단 몇 시간 만에 저주를 취소해야 했다.

* * *

“사영이 너 또 식사 걸렀냐!”

쿵쿵쿵쿵.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길드장실 문을 쾅 열어젖힌 이는 바로 부길드장 배원우였다. 이사영은 살풋 인상을 찌푸렸지만, 안대 덕에 드러나진 않았다.

그는 길드장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검은 안대에 귀마개까지 야무지게 착용한 채였다. 근처에 다가온 배원우는 습관처럼 잔소리를 시작했다.

“사람이 말이야, 밥심으로 사는 거야. 요즘엔 좀 잘 먹는다 싶었는데 갑자기 왜 또 안 먹는 거냐.”

사영이 입이 짧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배원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곧 태블릿을 가져와 그의 앞에 섰다. 귀마개를 끼고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어차피 이사영에게 귀마개는 소리를 조금 줄여주는 물건에 불과하다니까. S급 각성자란 그런 존재였다.

“각성자 관리국에서 공문 왔어. 랭킹 발표 날 비상 대응 체제 발동할 건데 협조 부탁한대.”

“…….”

사영은 대답 대신 발을 까딱였다.

“오케이.”

배원우는 화면을 넘겼다.

“종로 3가 던전은 우리 팀이 공략한다. 선발대가 먼저 클리어하면 연구원들이 후발대로 진입해서 던전 자원 조사할 거야.”

까딱.

“그리고 서원 길드에서 하루 날 잡고 방문해달래.”

까딱.

“급한 안건은 이 정도고… 아, 그리고 나도 광고나 하나 찍어보려고.”

“…….”

누가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건진 모르겠지만, 대답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사영은 까딱거리기를 멈췄다. 그러나 배원우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해장국집 알바님도 허니비 팬이래. 헌터에는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역시 공중파 인지도는 무시 못하나 봐.”

“…뭐?”

사영이 슬그머니 안대 한쪽을 밀어 올렸다.

“다시 말해봐.”

“뭘? 공중파 광고 인지도 무시 못한다고?”

“아니, 그거 전에.”

“나 광고 찍을 거다?”

“씨X…. 일부러 그래?”

“아니, 내가 뭘.”

“알바 어쩌고 했잖아.”

“아, 알바님? 허니비 팬이라던데?”

“…뭐?”

배원우가 안면을 틀 만한 아르바이트생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

“허니비가 직접 포스터에 사인해서 주더라. 나도 그런 팬서비스를 본받아야겠어.”

배원우는 바람직한 헌터의 자세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사영은 어정쩡하게 밀어 올린 안대를 그대로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차의재는 자신과 정빈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게다가 허니비의 팬이라고?

정빈과 허니비의 공통점이라….

‘광고 스타.’

허, 사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차의재는 인지도 높은 사람만 좋아하는, 뭐 그런 기이한 취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칠게 안대를 벗어 던진 그는 멋쟁이 헌터가 되는 방법 365가지에 이어 어느새 광고를 찍었더니 인지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여 랭킹 5위가 된 자신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늘어놓고 있던 배원우에게 손짓했다.

“망상 그만하고 홍보팀장 불러와.”

“와, 사영아. 나 진짜로 광고 찍게 해주려고?”

“빨리.”

* * *

가게에서 적당히 손님이 빠져나간 저녁 시간, 의재는 해장국집 카운터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지폐를 던져놓고 뛰쳐나간 비운의 헌터가 그래도 적은 편이라 그런지 계산이 수월했다.

그때, 의재의 핸드폰에 문자 두 통이 도착했다.


사영 : CBS

사영 : 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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