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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67화 (67/67)

67화

“비서님 마음의 준비는. 끝나셨고?”

“…….”

요란스레 울리는 경보음이 이사영의 등장을 알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막강했다. 방독면을 쓰고 화장실에서 기어 나온 자칭 비서는 단숨에 묻힐 만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의재는 반질반질한 워커 끄트머리를 보고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안 올 리가 없지.’

이사영이 화장실에 오리라 예상하고 지른 도박이기는 했다. 이제 그 정도 믿음은 생겼다. 이쪽에 무슨 일이 나면 코빼기는 비출 것이라는. 물론 오지 않았더라도 연기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했을 테지만.

의재는 슬그머니 제 몸이 사영에게 가려지도록 서면서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죄,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

사영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전부 파악하지 못한 듯 조금 의아한 눈빛이었다. 의재는 장단을 맞추라는 뜻으로, 맞은편에 선 헌터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사영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러나 닿은 손끝에서 느껴진 촉감은 쿡이 아니라 툭, 이었다.

‘뭐 이리 탄탄해. 돌이야?’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눈을 크게 뜨고 마주 보았다. 한쪽은 사람 배가 뭐 이리 단단하냐는 뜻이었고, 한쪽은 내 배를 찌른 건 몬스터 외엔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사영의 자세가 조금 더 삐뚜름해지기 직전, 정신을 차린 의재는 슬쩍 시선을 보내며 냉큼 한마디를 덧붙였다.

“처, 청심환 먹었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처음이라 긴장을 해서….”

“…하.”

이사영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뱉어냈다. 슬쩍 가늘어진 눈이 의재의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차례로 훑었다. 어쩐지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에 오래 머문 것 같았으나, 시선이 금세 사라져 확실치 않았다.

“그래….”

말끝을 슬쩍 늘린 사영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비서님을 데려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줬으면 하는데.”

‘나이스.’

다행스럽게도 이사영은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누가 들어도 악덕 상사 그 자체 아닌가! 의재는 이사영이 이어준 패스로 골을 넣을 겸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안 되고 잘해야지.”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의재는 당황하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헌터들은 끼어들 타이밍을 놓친 건지 조용했다. 하지만 넓은 어깨 뒤로 언뜻 보이는 시선들이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해 보였다. 사영이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제 팔을 톡톡 두들겼다.

“비서님, 입사한 지 얼마나 됐더라.”

“한 달 됐습니다.”

“아, 한 달.”

“예, 그렇습니다.”

“한 달이나 됐는데 별로 변한 게 없네…. 오늘 잘 좀 해야겠어요?”

“아, 네.”

“비서팀이면 나한테 신경을 써야지. 본인 컨디션 조금 안 좋다고….”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의재는 욱하는 마음에 눈을 치켜떴다. 이사영은 부탁하지 않은 불꽃 같은 메소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물론 그 덕분에 누가 봐도 ‘간신히 파도 길드 비서팀에 입사했는데 이사영 길드장과 단둘이 외부에 나오게 되어 존나게 긴장한 나머지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해버리고 만 비서팀의 불쌍한 신입 직원’이 되긴 했지만….

원래도 사람 속 뒤집어 놓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던 놈이다. 작정하고 읊으니 말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실제로는 비서가 아닌 의재의 속까지 긁힐 정도로!

‘아니, 메소드가 아닌가.’

그냥 원래 이런 놈인가? 의재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잘…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으응. 앞으론 마음의 준비도 미리 끝내고. 이런 식이면 내가 평생 비서님을 기다리게 생겼잖아.”

‘하여튼 뒤끝 존나 긴 새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사영은 눈을 가늘게 휘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웃음기는 파도에 휩쓸리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팔짱을 풀고 화장실 입구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가지.”

“아, 예. 알겠습니다.”

사영이 몸을 돌리자, 흥미진진하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헌터들의 얼굴에 다시 긴장이 서렸다. 오직 홍예성만이 활발하게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이사영! 나 이제 인사해도 되나?”

실제로 본 홍예성은 꽤 멀끔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동그란 눈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묘한 안광이 어른거리는 것만 제외한다면. 잘못 보면 미친놈일 줄 알 정도로 맑았다. 사이가 나쁘지 않은지 사영도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그의 시선이 홍예성의 손에 들린 기계에 향했다. 여전히 화장실은 정육점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얗게 변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끄러운데. 못 꺼?”

“몰라. 간신히 작동시켰는데 오작동인 건지 뭔지 계속 울리네.”

“그게 뭔데.”

“미등록 티켓 감지기!”

홍예성은 자랑하듯 배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게 바로 인벤토리에 숨겨둔 미등록 티켓까지 탐지해내는 특급 아이템이란 말씀. 이 몸의 역작이다.”

“흐음….”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렇게 울리는 걸 보면… 미등록 티켓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거 아닌가?”

“원래 그렇긴 한데….”

예성이 금세 시무룩해져서 궁시렁댔다.

“세 시간 만에 급하게 만든 거라서. 진짜 미등록 티켓이 있는 건지 오작동인 건지를 확실히 모르겠단 말이지.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등록했거든? 너랑 네 비서님도 했을 거고.”

“했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호원이 슬쩍 물었다.

“혹시 티켓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 번만 확인을….”

사영은 별말 없이 인벤토리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티켓 표면에는 푸른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글씨를 확인한 헌터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에이씨, 설정값을 잘못 입력했나. 인증 티켓에도 반응하게 설정했나 본데….”

“…….”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의재는 조용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때마침 등장한 이사영이 아니었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뻔했다. 여기 있는 모든 헌터에게 물리적 기억 삭제술을 시행해야 했을 수도….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사영 ZONE은 고맙게도 해장국집을 제외하면 연전연승 중이었으니까. 티켓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사영이 중얼거렸다.

“거기에 쓴 기술을 응용하면… 타인의 인벤토리를 전부 스캔할 수도 있겠는데.”

타인의 프라이버시 침범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악독한 발상이었다. 홍예성도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존나 악당 같은 발상….”

“칭찬으로 듣지.”

“뭐… 재밌는 생각이긴 한데, 불가능해. 이 기계 메커니즘은… 뭐라고 설명해야 쉽지? 아, 내가 만든 아이템에 삽입한 칩을 추적하는 식이라서 말이야.”

“네가 만든 아이템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바로 그거지.”

맞장구를 친 홍예성이 끝이 구부러진 칼 같은 것으로 감지기에서 붉은 마석을 분리해냈다. 그제야 귀를 찢을 듯 울리던 경보음과 번쩍대던 붉은빛이 사라졌다. 휴, 짧게 한숨을 쉰 예성이 도구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복슬복슬한 머리를 긁적였다.

“회장에 입장하는 사람한테 전부 써보려면 좀 고쳐야겠다. 테스트도 확실하게 해봐야겠네.”

‘뭐라고.’

산 넘어 산이었다. 마석을 만지작대던 홍예성은 맑은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난 이거 고치고 들어갈 테니까 회장에서 보자. 그리고 부하 좀 적당히 족쳐!”

“족치다니.”

사영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내가 모시는 중인데….”

***

헌터들은 큰 방독면의 뒤를 따르는 작은 방독면을 의심하기는커녕, 불쌍하다는 듯 보았다. 어떤 헌터는 힘내라는 듯 작게 파이팅 포즈도 취해주었다. 의재의 연기와 이사영의 본심 조금 섞인 메소드 연기가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화장실에서 멀어지고, 둘만 남자 사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주변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꼬이는지….”

의재도 강력히 동의하는 바였다. 의재는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고 사영의 등을 쿡 찔렀다.

“…이사영 길드장님?”

“…….”

“잠시 둘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영의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한시가 급했기 때문이다. 주변을 휙휙 살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의재는 사영의 팔을 턱 붙잡고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사영은 얌전히, 의재가 당기는 대로 끌려와 주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사람의 기척은커녕 짐만 잔뜩 쌓인 고요한 곳이었다.

“후우…….”

차의재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방독면을 벗었다. 슬쩍 붉게 달아오른 뺨과 헝클어진 머리 따위가 드러났다. 그는 헝클어진 꼴을 정리하지도 않고 사영을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방독면의 양옆을 턱 짚었다.

“이사영 길드장님.”

“응.”

“우리 사이에 뭐 거짓… 그런 거 없어야 하잖아요? 그, 우린 계약 관계니까.”

“서론이 기네.”

팔 사이에 갇힌 꼴이었음에도 사영은 여유로웠다. 그는 의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닿았다. 장갑을 낀 손으로 장난치듯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던 사영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솔직하고 허물없는 사이였나 싶긴 한데….”

“어, 지금부터.”

“아하, 지금부터?”

“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솔직히 불겠습니다.”

“…….”

사영이 어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의재는 짧게 심호흡한 후, 사영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저한테… 미등록 블랙 티켓이 있습니다.”

“…….”

“…두 장.”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거리를 메웠다. 의재는 의뭉스러운 보랏빛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사영이 입을 열었다.

“으응. 슬슬 알겠네요.”

“…….”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형이 먼저 내 이름을 부른다는 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검은 가죽 장갑이 의재의 목덜미에 닿았다. 셔츠 깃 속으로 파고들 듯 곧은 목을 더듬던 손은 밑으로 내려와, 느슨하게 묶인 넥타이를 뱀처럼 휘감아 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끌려가지 않을 수도, 손을 쳐낼 수도 있었지만…

‘쯧.’

내가 져준다. 순순히 끄는 대로 끌려가준 의재는 슬쩍 시선을 위로 올렸다. 사영의 목덜미에선 여전히 달큰한 향이 났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구나.”

장갑이 느리게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어냈다. 다 풀린 넥타이를 움켜쥔 사영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방독면의 필터 부분과 의재의 이마가 맞닿았다. 사영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 티켓은 또… 어떤 새끼가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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