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침대 옆 테이블 위의 작은 스탠드 불빛 하나로 간신히 밝혀지고 있는 방안은 어둡고, 조금은 농밀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한동안 유지되고 있었던 침묵을 간헐적으로 깨뜨리고 있는 것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목을 움직이고 있는 남자가 내고 있는 소리로, 그것은 지금 그가 주도하고 있는, 결코 빈말로라도 고상하다고는 표현할 수 없는 행위를 생생히 청각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
침대 끝에 걸터앉아 정성어린 봉사를 받던 상대-수영이 흐트러진 숨소리를 흘린 직후 줄곧 그의 것을 입 안에 품고 있던 연석의 목이 짧게 울렸다. 펠라를 하는 와중에 틈틈이 자신의 것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바닥 안엔 아직 단단한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분신이 붙들려 있었지만, 이미 사정을 마친 뒤 여운을 느낄 사이도 없이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수영은 연석의 뒤처리를 해줄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정말 더 안 할 거야?”
“말했잖아. 지금부터 갈 데가 있다고.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면 곤란해.”
“그런 것 치곤 순순히 하게 해줬잖아.”
“시킨 적 없어.”
냉정한 수영의 말을 듣고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 연석이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감싸 쥐고 있는 손을 위 아래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수없이 몸을 섞었던 상대를 멀쩡히 눈앞에 두고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더없이 처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눈앞의 남자가 이렇듯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인 만큼 이제 와 그와 같은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자신 이외에도 몸을 섞는 상대를 숱하게 가지고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와 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는 입장의 연석은 입구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수영의 시선 속에서 마침내 절정에 도달했다.
‘빌어먹을.’
손바닥에 남아 있는 비릿한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연석이 문득 근처에서 느껴진 기척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트위드 재킷에 팔을 꿰고 있는 수영은 이어 미리 침대 위에 꺼내놓은 코트를 집어 들며 연석을 돌아보았다.
“빨리 뒷정리 해. 나가봐야 하니까.”
이쪽의 사정 따위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지극히도 냉정한 수영의 말을 듣고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린 연석이 자신이 토해낸 흔적이 남아 있는 손바닥을 스치듯 쳐다본 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마음 같아선 욕이라도 한바가지 해주고 싶었지만 결국 이런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좋다고 붙어 있는 건 자신 쪽인 만큼 이제 와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반쯤 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였다.
우수영(禹秀領).
성격은 나쁠망정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을 놓고 보면 그는 분명 타인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소위 말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마치 3종 세트처럼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회사에 입사한 뒤 현재, 굳이 뒷배경의 도움 없이도 순수하게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 제대로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남들이 인생을 살아가며 적어도 한 두 번은 겪었을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는 매끈한 삶의 이력을 가진 남자였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재력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현재의 그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수영이라는 인간을 이토록 오만한 성격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것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그의 외모였다. 연석만 해도 처음 수영과 만났던 날의 기억을 지금까지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와의 첫 만남에서 느낀 첫인상은 차라리 충격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이쪽의 세계에 제법 오랜 시간을 몸담고 있었음에도 단순히 눈에 보이는 남자의 외모만으로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경험은 오직 그때가 유일했던 것으로 연석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만 안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지극히도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에 성생활은 난잡하기가 짝이 없고 더러는 가학적인 부분까지도 있는 남자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일단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단정한 인상을 지닌 미남으로, 큰 키와 날씬한 체형은 덤이요 하다못해 손끝에 붙어 있는 손톱까지도 까다로운 심미안을 가진 여자들의 눈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만한 최상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 그를 잘 알지 못하는 몇몇 게이들의 입에서 저 아름다운 손가락이 자신의 거기를 만져주면 얼마나 황홀한 기분이 들까라는 둥의 이야기가 오갔던 것을 연석은 자주 가는 게이바에 앉아 술을 마시며 몇 번이나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저속한 이야기라며 코끝으로 비웃으면서도 자신 역시 몇 번이나 비슷한 상상을 했었던 기억에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도 했던 연석은 실제로 수영과의 잠자리를 통해 상상 이상의 쾌락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스스로의 의지로 그의 곁을 지켜오고 있었다. 수영의 그날 기분에 따라서 때론 조금 전의 상황을 가볍게 비웃을 만큼 비참한 취급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차마 그의 곁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리지는 못했던 이유는 역시 간단히 손에서 놓기에는 우수영이라는 남자가 곁에서 감상하기에나 잠자리의 대상으로서 너무도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고 전화로 협박하는 여자에게 ‘그건 상관없는데 귀찮으니까 유서에 내 이름은 쓰지 마.’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정도의 냉혈한이지만 그럼에도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런 썩은 성격이 예상만큼 큰 흠으로 작용되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사실 이렇듯 방관적인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고 있는 연석 역시도 현실적으로 보면 수영의 주변을 맴도는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는 처지였다. 그나마 지금의 그가 내세울 거라고는 용케도 3년이 넘도록 수영과 꾸준히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 정도랄까. 그래봤자 속을 알고 보면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먼저 연락을 주고서야 간신히 만날 약속을 받는 처량한 입장이긴 해도.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입을 헹군 뒤 손을 씻고 나온 연석이 그 사이 넓은 거실의 중앙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수영에게 시선을 던지고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만나러 가는 거야?”
“그 남자?”
코트의 단추를 채우며 수영이 되묻자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연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의 오너. 최근 좋은 분위기가 됐다고 바텐더가 귀띔해주던데.”
연석의 말을 듣고 묘한 미소를 머금은 수영이 긴 목에 머플러를 감으며 말했다.
“처음엔 별 반응이 없어서 대충 넘기려고 했는데 이틀 전에 오랜만에 찾았더니 웬일로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더라.”
“흐응...”
초반에 살짝 튕기다가 결국 불안감에 져서 먼저 수그리고 들어오는 패턴이라면 이미 질리도록 경험해온 수영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는 이름의 꽤나 규모가 큰 바(bar)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도 이제 겨우 서른 초반에 불과한 오너는 겉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외모 그대로 관계 시 제대로 된 교태를 부릴 줄 아는 남자였다. 평소 잘 관리를 하고 있는지 그의 벗은 몸은 까다로운 수영의 취향 안에 여유롭게 들어올 정도로 딱 보기 좋은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를 받아들일 때의 그는 적당히 듣는 이의 귀를 간질이게 하는 제법 좋은 소리를 냈다. 본인은 스스로가 경험이 많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미 수영은 상대가 침대 위에서 보이는 하나하나의 반응을 통해 분명 이 바닥에서 꽤나 많은 경험치를 쌓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 역시도 경험이야 넘칠 만큼 쌓여 있는 만큼 그다지 그쪽으로 결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구멍이 제대로 조이는 역할만 해준다면 섹스 경험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평소 그가 잠자리와 관련해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 오너와 데이트하러 가는 거야?”
묘하게 비꼬는 듯한 연석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긴 수영이 이내 현관문을 열고 연석을 돌아봤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달라는 재촉을 고요한 시선 안에 담은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도 결국은 마지못해 밖으로 나서는 연석의 뒷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어두운 방안을 채우는 농밀한 기운에 더해 점점 더 격해지는 날선 교성은 이제 차라리 비명에 가까워져 있었다.
남자를 안에 들인 채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리듬을 맞춰가고 있는 호연의 얼굴은 욱신거리는 쾌감에 도취되어 한껏 상기되어 있었고, 뒤에서 그런 그의 엉덩이를 양 손바닥으로 붙잡고서 거친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수영 역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극한으로 치닫는 쾌락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의식적으로 수영의 것을 힘껏 조이던 호연은 잠시 후 마침내 줄곧 거친 정사를 주도하던 수영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절정을 맞이한 것을 느끼고 달뜬 신음을 흘렸다. 곧바로 안을 적셔오는 질척한 느낌에 무심코 잘게 어깨를 떤 그는 거의 동시에 사정을 마친 뒤에도 아직 일정의 경도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것을 매만져오는 수영의 손길을 느끼고 농밀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다양한 상대들과 몸을 섞어 오는 동안 이 정도로 강렬한 쾌감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호연은 상상을 뛰어넘는 만족스런 섹스 테크닉을 지닌 등 뒤의 남자를 돌아보고서 유혹어린 미소를 흘렸다. 양쪽이 다 지칠 정도의 길고 격렬한 정사가 방금 전에야 간신히 끝이 났지만 아직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는 수영의 얼굴을 보자 호연은 또다시 자신의 몸속 깊은 곳이 뜨겁게 움찔거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몇 번이고 더 달아오른 몸을 겹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는 호연은 그러나 잠시 후 단숨에 자신의 안에서 빠져나가는 수영의 움직임을 막지 못하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짧게 신음을 흘렸다. 자신과 달리 순식간에 여운에서 벗어난 수영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그런 기분을 솔직히 표현하자니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 내키지 않은 호연은 일단 불편한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아직 농밀한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은 딱 적당한 정도의 열기와 피로를 머금고 있어서 이대로 눈을 감으면 얼마 있지 않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매몰차긴. 필로우 토크도 없이 바로 움직이는 거야?”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하는 상대의 멋진 등 근육을 감상하며 호연이 반쯤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잠시 그에게 고개를 돌려온 수영이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곧 가게에 나가봐야 하잖아? 오늘은 중요한 일정이 잡혀있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어?”
“그건 그런데...”
수영의 말에 반론을 할 수 없는 입장의 호연이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과 관련된 중요한 일정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취소하고 이대로 수영과 한판 더 진하게 달렸을 테지만 지금으로썬 아쉬워도 우선은 일정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거짓말이었던 것 같네. 아니면 지나친 겸손이라고 해야 하나?”
갑작스런 수영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호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응?’이라고 묻자 희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수영의 말이 이어졌다.
“어찌나 세게 물고 안 놔주는지 그대로 먹히는 줄 알았어.”
그제야 뒤늦게 수영의 말을 이해한 호연이 일순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무게로 크게 흔들렸던 침대에 홀로 누워있는 그는 아직도 조금 전 정사의 여운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듯 다소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고급 수트 아래 감춰져 있을 수영의 몸이 분명 자신의 취향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호연이었지만 실제 눈으로 확인한 실물은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뛰어넘는 정도라 한층 더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세상에서 대머리만큼이나 싫은 것이 축축 늘어진 지방덩어리인 그는 옷을 벗은 순간 당장 눈에 보이는 장면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순식간에 마음이 식어버려 그대로 상대를 남겨두고 홀로 방을 떠나버린 일을 일전에 몇 번이나 경험했었다.
“어차피 당신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지는 않았잖아? 애초에 남을 진지하게 속이기는 어렵단 말이지. 특히나 당신 같이 약은 남자는 말이야.”
색기 어린 눈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한 호연은 잠시 후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여 욕실로 향하는 수영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이내 피로한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너무 깊이 빠지면 곤란하다고 스스로에게 당부를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조금 전 있었던 정사의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는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고 절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이제껏 연애에 있어서 늘 주도권을 쥐는 입장만을 고수해온 그도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를 상대로는 그와 같은 역사를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장담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외모만이 취향이었다면 한결 편했을 텐데 이 경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육체적 궁합까지 최상인 걸 알게 된 이상 지금의 이 새로운 관계를 이전의 엔조이처럼 간단히 손에서 놓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2년간 사귀었던 남자와 끔찍한 이별을 한 뒤로 앞으로는 되도록 스테디한 관계는 맺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던 호연은 아무래도 그와 같은 다짐이 머지않아 무너지게 될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취향에 맞는 외모에 더해 만족스런 섹스 테크닉은 물론, 이상적인 페니스의 사이즈마저 갖춘 상대를 만나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적어도 한동안은 우수영이라는 만만치 않은 남자와의 관계에 몰입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영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던 호연이 문득 나른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호연을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던 수영이 어느 순간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신의 것을 감싸 쥐는 호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시간, 촉박한 거 아냐?”
“식사를 포기하면 짧게 한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어.”
세상에 다시없을 호색한의 얼굴로 그렇게 대답한 호연은 이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온 수영의 손길을 느끼며 아직 느슨한 상태의 그의 것을 작은 입을 힘껏 벌려 깊숙이 안에 품었다.
*
“오늘 하루도 수고가 많았네. 윤팀장이 자네의 일처리 능력이 굉장히 좋다고 칭찬하더군. 그 사람, 평소 남 칭찬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말이야.”
뺨을 누그러뜨리며 그렇게 말하는 양과장을 향해 대답 대신 살며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 보인 수영은 잠시 뒤 ‘모처럼인데 같이 술 한 잔 하지 않겠나?’라는 양과장의 제안을 받고 일순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 그래도 평소 수다쟁이인 양과장이 술에 취하면 더욱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영으로썬 모든 뒤처리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단 둘만의 술자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부하직원의 입장에서 상사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굳이 뒤처리의 문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제 간신히 일에서 해방된 시점에서까지 불편한 상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누구나가 사양하고 싶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처음에 자네를 봤을 때는 아, 이 친구 때문에 여직원들이 난리가 나겠구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설마 일에 있어서도 이렇게나 제대로 된 실적을 보일 줄은 몰랐네. 이래서야 면접관이 자네 얼굴을 보고 뽑았다는 농담도 할 수 없게 되었지 뭔가. 하하.”
여직원이라는 단어를 꺼내며 잠시 부러운 표정을 짓던 양과장이 마지막에서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자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영이 조용히 예의상의 미소를 머금었다. 원치 않는 술자리를 가지게 된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아 가고 있었지만 거기에 상대가 다름 아닌 수다쟁이 양과장이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어떻게든 당장에 무리한 핑계라도 만들어내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끔 하고 있었다.
“자네 차는 어디에 있나?”
“지하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오늘은 자네 차로 갈까?”
“...네.”
결국 내키지 않는 술자리를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수영이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양과장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 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뒤 수영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양과장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 아무래도 부하직원으로 짐작되는 상대를 향해 조금 매서운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과 관련해 특별히 지적받을 부분이 없는 수영을 상대로는 나름대로 온화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 다소 히스테릭한 성격을 가진 양과장이 평소 부하직원들을 험하게 대한다는 사실은 이미 사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옆에서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반쯤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수영은 잠시 후 차에 시동을 걸고 먼저 운전석에 오른 뒤 서둘러 조수석에 놓여 있던 가방을 뒤로 옮겼다. 꽤 길었던 통화를 마치고 뒤늦게 조수석에 오른 양과장의 얼굴엔 쓴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라니, 쓸모없기는. 대학에서 대체 뭘 배워온 건지.”
차가 출발한 뒤에도 한참이나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던 양과장은 차가 중앙 차도로 들어선 뒤 수영이 목적지를 묻자 그제야 표정을 바꾸고 앞과 옆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도로를 타고 올라간 뒤에 좌회전해서 쭉 들어가면 돼. 그 근방에 내가 자주 가는 술집이 있지.”
워낙에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남자이니 자주 가는 술집도 몇 군데는 될 거라고 생각한 수영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마음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상사와 단 둘뿐인 술자리는 부하직원의 입장에선 말 그대로 가시방석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긴밀한 자리를 마련해야 할 명분이 있거나 혹은 상대가 눈에 띠는 미남미녀이기라도 하다면야 이것도 하나의 기회로 여기고 태도를 바꿀 수도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수영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가발을 덮어쓰고 있는 배불뚝이 중년상사일 뿐이었다. 그것도 평소 수다쟁이로 유명한.
적당히 상황을 봐서 중간에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양과장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술집은 수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허름한 곳이었다. 열 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 테이블은 일곱 개도 채 안 되어 보였고 그나마 테이블을 채운 손님이라곤 단 두 팀뿐이었다.
“보기엔 허름해도 이 집 안주로 나오는 찌개가 아주 맛있어. 여기 주인아주머니가 솜씨가 좋으시거든.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계셨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가게에 나와 계시네.”
가게 안을 둘러보는 수영의 얼굴에서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읽어냈는지 가장 먼저 그 말부터 꺼낸 양과장이 곧바로 주문을 받기 위해 곁으로 다가온 가게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저희 집이 허름하긴 하지요.”
“아,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소박하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어요.”
곤란한 표정으로 그렇게 변명하는 양과장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아주머니가 손에 들고 있던 물병과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깊긴 했지만 젊었을 적엔 꽤나 미인이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는 수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같이 오신 분은 부하직원이신가 봐요. 정말 미남이시네요. 제가 여기서 십여 년간 장사를 해왔는데 지금까지 본 중에 최고로 잘생긴 남자 분이에요.”
“에이, 여기 오는 손님들한테마다 다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고요?”
“보통 손님들께 최대한 좋게 말씀을 드리긴 하지만 방금 전 드린 말씀은 진심이에요. 양과장님께서 데려오시는 직원 분들 중엔 미남미녀가 참 많네요.”
“미녀가 많은 건 좋지만 미남이 많아 봐야 뭐...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직 퇴원하신 건 건 아니죠?”
“네. 오늘은 잠시 병원에서 나와 옷을 가지러 왔다가 들러봤어요. 아들한테만 맡겨놓으려니 영 걱정이 돼서 말이지요. 제 빈자리를 대신 채우겠다고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는데 부족한 요리 실력도 그렇지만 뭣보다 얌전한 성격상 사람들을 대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해서 앞으로 이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짧은 한숨으로 말을 맺은 아주머니가 앙상한 손을 들어 이마를 덮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세월 동안 꽤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끝이 뭉툭하게 닳아 있는 그녀의 손은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거칠어 보여서 잘만 꾸미면 고운 중년의 여인으로 보일 법한 얼굴과는 괴리감을 보이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평생 고생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모친의 고운 손을 떠올린 수영은 양과장의 추천에 따라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먼저 나서서 조금 전 아주머니가 내어주고 간 컵에 물을 따라 양과장의 앞에 놓아주었다.
“주인아주머니와 많이 친하신 것 같네요.”
수영의 말을 듣고 그에게 시선을 옮긴 양과장이 컵을 들며 말했다.
“여기에 손님으로 온지도 벌써 2년이나 됐으니까. 이 집 안주로 나오는 찌개에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끓여주셨던 맛이 나서 입에 잘 맞거든. 그래서 친구랑 직장 동료들 몇 명도 데려왔었는데 가게의 겉모습이 허름해서인지 아니면 위치가 영 그래서인지 올 때마다 늘 지금처럼 한산해.”
조금 안타까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부장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수영의 등 뒤로 문득 가게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아, 버리고 왔니?”
“네. 음식물찌꺼기가 생각보다 많아서 비닐을 한 번 더 갈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아 참, 그 전에 일단 저기 쟁반에 담아둔 걸 저쪽 테이블 손님들께 가져다드릴래?”
“네.”
아마도 주인아주머니의 아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양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으며 주방으로 들어간 뒤 잠시 후 커다란 쟁반을 들고 양과장과 수영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
어딘가를 다치기라도 한 것인지 부자연스럽게 다리를 절며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잠시 동안 집중해서 쳐다보던 수영이 잠시 후 마침내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진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김윤재?”
수영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것과 동시에 마주 선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