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남자가 정면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는 술주정이 좀 지나친 정도로 넘길 수 있지만 이 이상 가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것은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와 있는 수영이었다.
갑작스런 제3자의 개입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남자는 그러나 이내 다시 사납게 표정을 바꾸고 입을 열었다.
“다치기 싫으면 괜히 상관하지 말고 갈길 가쇼. 형씨.”
의식적으로 목소리 톤을 낮춘 남자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수영이 문득 코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럼 어디 계속해 봐요.”
“잠깐, 뭘 할 생각이야?”
“신고할 겁니다. 취객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뭐야? 이 새끼가--!”
수영의 대답을 듣자마자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곧바로 윤재의 멱살을 놓고 수영에게 덤벼들었다.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는 만큼 스스로의 힘에 자신이 있는 데다 술기운까지 돌고 있는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몇 시간 전 직장에서 겪은 불쾌한 일로 인해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잔뜩 심기가 뒤틀려있던 그는 마치 가슴 안에 품고 있는 울분을 토해낼 작정이라도 한 듯 새롭게 나타나 그의 성질을 긁어대고 있는 수영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탁-
어렵지 않게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했지만 그 과정에서 핸드폰을 손에서 놓친 수영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고 연이어 덤벼오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하게 공격이 가로막힌 남자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얼어붙는 것을 확인한 그의 눈매가 일순간 가늘어졌다.
“이 씨발 새끼가, 이거 안 놔?! 진짜 뒤지고 싶어?!”
자신을 향한 욕설을 무시한 수영이 필사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남자의 팔을 비틀자 이내 고통스런 비명이 좁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팔꿈치 부분을 거의 한계까지 꺾인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댔지만 이미 작정하고 힘을 쓰기 시작한 수영은 그리 쉽게 상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인간쓰레기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찜찜한 기분이 드는데 그에 더 나아가 어떤 형태로든 몸을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수영에겐 더없이 불쾌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쓸데없이 덩치만 클 뿐 제대로 된 실전 경험도 없어 보이는 남자를 상대하는 건 그에게 있어서 한숨이 나올 만큼 시시한 일이었다.
겁 없이 덤벼든 남자의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고2가 되어 제대로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전까지 부모님의 눈을 속이고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살았던 수영은 당시 다니던 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주먹질로도 유명했던 남자였다. 천성적으로 가학적인 기질을 지니고 태어난 그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은 곧 유쾌한 놀이이기도 했기 때문에 몇 번인가는 그와 같은 쾌락에 깊이 빠져 제어를 잃어버린 끝에 상대를 정말로 위험한 상태로 몰아간 적도 있었다. 결국 나중에 그에 대한 소문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면서 전격적으로 모범생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도 당시에 익혔던 실전 감각은 어느 정도 살아남아 있는 듯 했다.
“이거 안 놔? 당장 폭행으로 신고할 거야, 너 이 새끼!”
악에 찬 남자의 말을 코끝으로 비웃은 수영이 일순 차갑게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정당방위라는 말은 알아? 조금 전에 누가 먼저 쳤는지 본 사람이 이 앞에 셋이나 있어. 여기 주인 입술은 터져 있고, 술병은 바닥에 깨져서 널려 있고, 넌 취해 있는 데다 인상도 더럽지. 신고 받고 온 경찰이 이 현장을 보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할까? 아, 그러고 보니 먼저 간 내 동료들도 아까부터 네가 꼬장 부리는 걸 본 증인이지. 경찰서로 부르면 당장에라도 와서 증언해 줄 거야. 잘 됐네, 지금부터 경찰서에 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따져볼까?”
침착하게 이어지는 수영의 말을 들은 남자가 허옇게 말라붙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론을 펼치고 싶어도 지금의 이 상황을 말해주는 증인과 증거가 뚜렷이 남아 있는 이상 앞으로의 일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그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을 본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그저 질 나쁜 전과자가 술 먹고 행패를 부린 상황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을 터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이것저것을 계산하던 남자가 때마침 들려온 일행의 돌아가자는 말을 듣고 슬쩍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장 보이는 옷차림은 영락없는 회사원이지만 사실은 본래 직업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남자를 앞에 둔 그는 조금 전에 비해 한층 더 불쾌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윤재를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상대가 다리가 온전치 못하다는 약점을 잡아 일말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더라도 자신보다 부족한 부분 따위 없을 듯한 다른 상대를 마주하고 선 지금 마음속 깊은 곳을 헤집어 놓는 더러운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철아, 그냥 가자. 괜히 일 시끄러워지기 전에.”
영철이라고 이름을 불린 남자가 취기로 인해 발개진 눈을 신경질적으로 비비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취한 가운데에 남아 있는 이성을 짜내 지금의 상황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차리고 있는 그는 이어지는 일행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한 발작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아, 씨발...진짜 조금이라도 더 나이 먹은 내가 참아야지.”
“그래, 영철아. 가자. 빨리 돌아가서 씻고 푹 자자. 내일 또 일 구하려면 일찍 일어나야지. 저기,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의 행패를 무책임하게 방관하고 있던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수영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확신하자마자 적극적으로 태도를 바꿔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참동안 질 나쁜 행패를 부리던 남자와 그의 일행이 술값을 모두 지불하고 떠난 뒤 다시 조용해진 가게 안에는 이제 윤재와 수영 단 둘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 겪는 일에 많이 놀란 듯 보이는 성호를 평소보다 일찍 귀가시킨 윤재는 이미 급격히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늦게까지 장사를 하는 것이 무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도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형식적인 예를 갖춰 말하는 윤재의 목소리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역시 조금 전의 일로 인해 적지 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의 목소리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격식차려서 말할 필요 없어. 서로 생판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
불을 붙인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수영이 말하자 그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선 윤재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냥 술값만 받고 보내도 됐던 거야? 가게 안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워서 영업 방해를 한 데다 너, 얼굴까지 맞았잖아.”
찢어져 부어 있는 윤재의 입술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한 수영이 ‘이걸로 됐어요.’라는 윤재의 대답을 듣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 상 손님과의 일을 크게 만드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윤재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이해를 하는 한편으로 일방적으로 실컷 당해놓고 그저 참고 인내하겠다는 그의 결론이 조금은 안타깝게도 느껴지는 수영이었다.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내내 수영의 시선은 윤재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이 흐른 탓일까, 처음 만났을 당시보다 눈에 띠게 깊어진 분위기를 품게 된 윤재는 그럼에도 여전히 고운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윤재를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다 피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참고 살면 답답하지 않아?”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수영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이내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별로 참고 산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럼 아예 자각 자체가 없는 건가.”
두 개비 째의 담배에 불을 붙인 수영이 근처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아직 손님들의 테이블이 치워지지 않아 어수선한 분위기의 가게 안을 크게 한 번 둘러본 그는 한 모금의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 뒤 이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날에도 그랬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날, 일방적으로 끝내자는 내 말을 듣고서도 넌 아무 반론도 하지 않았어. 그냥 한동안 말없이 날 쳐다보다가 알겠다고만 대답했었지.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끝까지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을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조금 신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윤재와의 이별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으므로.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다 슬슬 상대에게 질리거나 더 관심을 끄는 상대가 나타날 때면 가차 없이 이별의 말을 꺼냈던 그는 당연하게도 이미 수차례 시끄러운 일들을 경험했었다. 그 가운데에는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며 사람 많은 거리에서 울고불고 했던 여자를 끝내 차갑게 내친 적도 있었고, 또 언젠가는 잠시 몸을 섞었던 연상의 남자가 헤어질 경우 주변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발설하겠다고 협박을 해와 정말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한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던 입장으로서 중간 중간 좋지 못한 일들을 경험했던 수영에게 있어서 단 한 마디의 반론도 없이 사실을 받아들였던 윤재의 존재가 특별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묻어두려 했던 과거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놓는 수영의 태연함에 일순 쓴웃음을 머금은 윤재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내가 싫다고 말했으면 그때, 당신은 마음을 돌렸을까요?”
책망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읊조리듯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윤재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와서 당신을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때의 난 이미 완전히 돌아선 당신의 마음을 그 어떤 말로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했다는 것 치곤 꽤 상처받은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헤집어놓는 수영의 말에 테이블을 치우려던 손을 멈춘 윤재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내가 그 일로 인해 특별히 미안한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건가. 그렇게 이해해도 되는 거겠지?”
“언제는 꼭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말하는군요.”
조금 전에 비해 미세하게 가라앉은 윤재의 목소리를 듣고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 수영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를 입으로 옮겼다. 일부러 화를 부추긴 결과물 치곤 미약한 수준의 반응이었지만 어찌 됐든 김윤재의 입에서 저 정도의 말이나마 나오게 했다는 사실에 자그나마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그는 싸구려 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잠시 동안 테이블을 치우는 윤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접시들을 큰 쟁반에 옮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윤재의 손가락이 앙상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비단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가. 마른 어깨와 등을 감싸고 있는 엷은 베이지색 니트는 아마도 오랫동안 입은 듯 단순히 낡은 정도를 넘어서 군데군데가 해져 있었고, 아래에 받쳐 입은 청바지 역시 마찬가지로 최근의 유행에 한참 뒤떨어지는 디자인의 것이었다. 그나마 옷걸이는 썩 괜찮은 편이어서 그다지 촌스러운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확실히 말해 수영의 주변에 있는 지인들 가운데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지는 옷차림을 선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더 마른 것 같네. 일이 많이 힘든 모양이지. 뭐, 하긴, 아까 그 자식 같은 질 나쁜 손님들까지 상대하려면 고생이기도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코트를 팔에 걸쳤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 이제 슬슬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다는 생각한 그는 이제 막 테이블을 치우고 주방으로 들어간 윤재를 따라 자신도 주방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갑자기 좁은 공간 안으로 들어선 수영의 기척을 알아챈 윤재가 그때까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만 가볼게. 다음번엔 동료들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 올 지도 몰라.”
“!”
짧게 자신이 할 말만을 남기고 등을 돌리려던 수영이 갑자기 들려온 윤재의 부름을 듣고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제 이곳엔 더 이상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직설적인 상대의 말에 살며시 눈을 크게 뜬 수영이 이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그렇게 의식할 필요 없어. 난 단지 여기의 음식이 마음에 들어서 다시 오겠다는 것뿐이니까.”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난 아무렇지 않게 당신과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김윤재.”
“이 동네 근처만 해도 술집은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려 있습니다. 제가 굳이 따로 소개하지 않더라도 당신이라면 이미 충분히 많은 장소를 알고 있겠죠.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이곳은 그냥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주세요. 저도 그렇지만 분명 당신도 절 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단 두 마디의 말을 듣고서 윤재가 자신에게 전달하려는 말을 곧바로 이해한 수영은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들은 뒤에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말의 의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하게 상대의 의견을 따라줄 마음은 조금도 없는 그였다. 누구나가 납득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붙어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줄곧 낮춰 보고 있었던 상대로부터 거부를 당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넘어서 조금은 어이없는 기분마저도 느끼고 있는 그는 오히려 조금 전의 말로 인해 반드시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는, 오기에 가까운 결심을 품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 이곳에서 너와 다시 만났을 때는 꽤 놀랐던 게 사실이야. 설마 너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것도 나름 인연이 아닐까 싶어. 인간관계란 건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거니까 굳이 그쪽의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어?”
이어지는 수영의 말을 잠시 동안 미동 없이 듣던 윤재가 굳은 표정 그대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저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겁니까? 손님과 주인? 아니면 친구라도 되고 싶습니까?”
다소 날이 서있는 질문을 받고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수영이 잠시 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친구라... 나쁘지 않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그렇게 굳이 억지로 날 밀어내려고 하지 마. 네가 그런다고 해서 ‘네,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물러설 내가 아니란 거 알잖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그저 여기 안주가 마음에 들어서 오겠다는 것뿐이야. 그러니 이렇게 오버할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네가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일수록 오히려 의심만 더 생긴다는 거 알아? 아직도 날 잊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럴 리 없잖아요!”
재회한 뒤 수영의 앞에서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낸 윤재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아까 전 취객의 난동을 겪은 이후 줄곧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은 이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안색을 띠고 있었다.
‘쓸데없이 진지하긴.’
속으로 짧게 혀를 찬 수영이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 세워져 있던 다리를 움직여 입구로 향했다. 마지막 전언은 잊지 않고 남기고서.
“그럼 됐잖아? 또 올게.”
뒤에서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중간에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곧바로 문을 열고 가게를 빠져 나온 수영은 그대로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한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 그의 단정한 얼굴은 바람보다 몇 배는 더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어제 그 가게 괜찮았지?”
“어제? 아, 회식하러 갔던 그 가게?”
“응. 겉보기엔 좀 그래서 과장님이 그냥 싼 맛에 여기로 우릴 데려왔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안주 맛이 괜찮더라고. 특히 생태찌개하고 과메기 무침이 입에 잘 맞더라.”
“맞아. 나도 생태찌개 맛있었어.”
넘겨받은 자료를 들고 복도를 걷던 수영이 문득 멀찍이서 들려온 대화소리를 듣고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는 그의 동료인 세민과 형주로, 두 사람 모두 넓은 창문 방향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어 뒤에 서있는 수영의 존재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반응 보니까 여직원들도 그 가게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혜리씨가 아침부터 난리던데. 거기 주인이 꽃미남이라고.”
형주의 말에 피식 웃음소리를 낸 세민이 최근 들어 급격히 머리카락이 빠져 횅해진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얼굴이 잘나 봤자 다리가 그래서야 뭐. 너도 봤지? 다리 저는 거.”
“응. 주방으로 걸어가는 걸 보니까 절뚝절뚝 거리길래 첨엔 그냥 살짝 좀 삔 건가 싶었는데 중간에 과장님이 그러셨잖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서 다리를 절게 된 거라고. 그 얘기 듣자마자 여직원들이 되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라.”
“가끔 보면 이상하게 여자들이 그렇게 이쁘장한 남자를 좋아하더라고. 내가 보기엔 남자로서의 매력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우리야 남자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고. 원래 남자한테 인기 많은 남자랑 여자한테 인기 많은 남자는 별개라고 하잖아.”
“칫, 그래서 여자들의 마음은 통 알 수가 없다니까.”
투덜거리며 그렇게 말한 세민이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어제 가게 안에서 큰 싸움은 안 일어났겠지?”
“아아-. 그 술 취한 새끼? 딱 봐도 막노동이나 하게 생겼던데 술 쳐 먹더니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았지. 원래 그런 하류층 인간들이 세상에 불만이 많잖아.”
“인상 참 더럽던데 그 가게 주인이 잘 처리 했나 몰라. 알바생도 딱 보니 아직 어린 것 같던데 괜히 그 새끼 성질 건드렸다가 얻어맞은 거 아냐? 마음 같아선 내가 나서서 처리해주고 싶었는데 같은 자리에 여직원들도 있고 하니까 일단은 그냥 갔지.”
“나도 그 새끼가 하도 시끄럽게 지랄을 해대서 중간에 일어나서 조용히 좀 시킬까 하다가 참았다.”
소란이 있었던 당시 취객의 눈치를 보며 여직원들보다도 먼저 밖으로 나갔던 두 사람의 뒤늦은 호언을 들은 수영의 입가에 일순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괜한 일에 말려들었다가 피해보기가 싫어 제일 먼저 가게를 빠져나간 주제에 이제 와 센 척 허세를 보이는 두 사람이 더없이 한심하게 느껴진 그였지만, 사실 그 역시도 어제의 그 현장에서 곤란에 처한 사람이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눈앞의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행동했을 것임을 순순히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일부러 나서서 누구를 도와주겠다고 할 만큼 정의감이 넘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괜히 귀찮은 남의 일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는 주의의 그는 어제의 그 상황에서 모르는 척 재빨리 가게를 빠져나간 직원들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금 전 그의 비웃음을 자아낸 것은 비겁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아닌, 난동을 부린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상대로 때려눕히겠다느니 하며 강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는 부분이었다.
“뭔가 큰 일이 생겼으면 뉴스에 나왔겠지. 잘 해결 됐을 거야.”
“하긴, 뭐. 거기 주인 딱 봐도 만만하게 생겼잖아. 그동안 취객들이 툭하면 시비 걸었을 것 같은데 그런 일 많이 당하다 보면 자연히 경험치가 쌓이니까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
“그보다 오늘 끝나고 술 한 잔 어때? 이 근처에 새로운 가게가 문을 연 것 같은데 아까 민철이 얘기 들으니까 한창 행사하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 근데 나 오늘 집에서 일찍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아서... 오늘따라 먹고 싶은 게 많다면서 사오라잖아.”
“출산 예정일이 언제랬지?”
“다음 달 22일.”
“그럼 어쩔 수 없네. 임신했을 때 잘 해주지 않으면 평생 원망 듣는다더라.”
“아후... 요즘 들어 부쩍 괜히 일찍 결혼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너나 민철이 퇴근한 뒤에 실컷 놀러 다니는 거 보면 진짜 부럽다.”
“대신 얼마 뒤엔 집에 돌아가면 토끼 같은 자식이 기다릴 거 아냐? 그 땐 자식 자랑에 아주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살 텐데 뭐.”
“토끼 같은 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앞으로 허리 빠지게 살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우울하다.”
“뭐야, 벌써부터 엄살이냐? 지옥문은 이제 막 열린 거라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를 뒤로 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긴 수영이 문득 들려온 문자 수신음을 듣고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조금 전 받은 문자의 발신자는 호연이었다.
[슬슬 퇴근 시간이지? 오늘 괜찮아?]
일주일 동안 각자 바빠 얼굴을 보지 못했던 차에 받은 연락이라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든 수영이 소매를 걷어 먼저 시간을 확인한 뒤 퇴근 후 만나자는 답신을 보냈다. 잠시 텀을 두고 돌아온 문자에는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7시. Martin
Martin은 수영이 다니는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보름 전 호연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었다. 최고의 셰프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말이 아무래도 거짓은 아닌 듯 일반인들의 눈높이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은 가격이 당연시 여겨질 정도로 주문되어 나온 음식들은 각각 최상의 감탄사를 끌어낼 정도의 수준을 선보였었다. 물론 사람들마다 각자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맛의 평가는 얼마든지 갈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호연의 추천으로 주문해서 맛본 Martin의 주 메뉴들은 수영의 입에는 꼭 맞았었다.
“아, 저기 수영씨. 미안한데 오늘 혹시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죄송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아니야, 별일 아니니 됐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철우의 말을 중간에서 한 번 끊고 대답한 수영은 돌아온 대답에 급격히 실망한 기색을 드리운 채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책상 구석으로 밀어 넣는 철우의 모습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았다.
‘또 퇴근 후에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려던 건가.’
이미 얼마 전 그와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는 수영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는 철우에게서 냉정히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한번이면 몰라도 몇 번이나 귀찮은 부탁을 받아들임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그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상황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는 그였다.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는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기브만 있을 뿐 테이크를 기대할 수 없는 상대와는 굳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움은커녕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폐만 끼치고 있는 철우 역시 만약 직장의 선배가 아니었다면 일찍이 관계를 끊었을 대상이었다.
*
서둘러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온 수영은 호연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딱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미 이전에 두 번 방문한 적이 있는 고급 레스토랑은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주문은 조금 뒤에 일행이 도착하면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가는 직원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수영이 가게 입구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세련된 옷차림을 보이고 있는 호연은 서둘러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급하게 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약속에 늦는 건 질색이라서.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오는데 길이 막혀서 생각보다 시간이 좀 지체됐어.”
“그러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길이 막히는지. 주변에 무슨 행사일정이라도 잡혀 있나... 여기요!”
짙은 차콜색의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내려놓은 호연이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직원을 불렀다. 마주한 수영과 짧게 의견을 나누고서 몇 가지 메뉴를 주문한 그는 잠시 뒤 두 번에 걸쳐 들려온 문자 수신음을 듣고 핸드폰을 꺼내 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확인과 동시에 그의 미간이 좁혀진 것으로 보아 그리 환영할 만한 내용의 문자는 아닌 모양이라고 내심 짐작한 수영이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누나한테서 온 문자야. 어머니가 오늘 밤 서울에 도착하신다고.”
“그래?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다고 했지. 오늘 오신다면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마중은 누나와 매형이 갈 거야. 사실 내 입장에선 괜히 일찍 만나겠다고 나설 필요 없어. 어차피 만나봤자 또 결혼 얘기나 실컷 듣게 될 테니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한 호연이 잘 관리되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 참에 아예 커밍아웃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그건 무리겠지.”
“지금까지 잘 숨겨 왔잖아.”
“이제까지는 결혼 얘기가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았거든. 근데 서른이 넘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선 얘기가 쏟아져 들어와. 오지랖 넓은 친척들이 서로 주선을 하겠다고 전화를 해대는데 무섭기까지 하다니까.”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수영의 질문을 듣고 미간을 좁힌 호연이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결혼해서 여자랑 살을 섞고 살아야 한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아.”
정확히 중간 지점의 바이 성향인 수영으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당장 눈앞에서 상대가 보이는 반응을 통해 적당히 그런 모양이라고 이해를 하고 넘긴 그는 잠시 후 문득 들려온 호연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나중에 결혼할 거야?”
좀 전에 비해 눈에 띠게 진지해진 호연의 표정을 통해 그의 머릿속 생각을 읽어낸 수영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하겠지.”
이제까지 스스로 정해둔 선은 틀림없이 지키는 가운데서도 원하는 것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온 수영은 남들과 다름없이 적당한 시기에 좋은 조건의 상대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미래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물론 결혼을 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성향을 단숨에 버리고 한 사람에게만 정착할 자신도, 생각도 없는 그였지만 적어도 남들의 눈에 보기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정을 이루겠다는 정도의 의지는 가지고 있었다. 실제 여자와의 접촉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되는 정도가 아닌 한, 스스로의 성적 취향을 숨겨가며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에서 평범하게 여자와 관계를 할 수 있는 입장의 수영이 굳이 결혼을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남들이 가져온 것 이상의 것을 가져온 그로서는 어느 한 곳 남들의 눈에 있어 흠 잡힐 부분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가 규정한 정론을 따라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보통은 사귀는 사람 앞에서는 빈말이라도 아직 예정에 없다느니 하고 둘러대는데 말이야.”
주문되어 나온 음식들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한 호연의 얼굴에 쓴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전 스스로가 말했듯 들려온 대답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의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작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쓰디쓴 기분이 느껴지는 그였다.
“빈 말 같은 거 당신도 별로 듣고 싶지 않잖아?”
건너편에서 돌아온 말에 반론을 펼칠 수 없어 그저 입을 다문 채 살짝 고개를 끄덕인 호연이 포크를 집어 들어 가장 앞에 있는 접시로 뻗었다.
‘뭐, 어쩔 수 없나... 저런 가차 없는 성격도 싫지 않으니까.’
지금 현재 수영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앞으로 자신이 바꿔나가는 것도 꽤 즐거운 도전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와인이 담긴 잔을 손에 든 호연은 뒤늦게 시선을 마주해온 수영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