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8화 (8/66)

08

“기껏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왔는데 추워서 나가지도 못하겠네.”

연신 불어대는 강풍 탓에 본의 아니게 따뜻한 펜션 안에 쳐 박힌 신세가 된 호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며칠 내내 내린 눈으로 인해 새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은 나름대로 멋진 그림을 선사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눈요기만 할 거였으면 애초에 굳이 서울을 떠나 멀리 지방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정 나가고 싶으면 드라이브라도 할까?”

“길이 미끄럽잖아. 난 아직 죽기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그러고 보니 최근에 가게 증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지.”

“뭐, 그것도 신경 쓰이긴 하지만...”

커다란 소파에 앉아 흥미 없는 얼굴로 리모컨 버튼을 누르고 있는 수영의 곁으로 다가간 호연이 천천히 팔을 뻗어 수영의 넓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위치까지 다가와 있는 호연의 얼굴 위에 야릇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수영이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하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조금 전 수영의 뒤를 이어 샤워를 하고 나온 호연은 아직 가운만을 걸친 상태로, 아까부터 그의 주변은 은은한 바디샴푸의 향이 맴돌고 있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담하게 뻗은 손을 눈앞에 벌어진 가운 사이로 집어넣은 수영이 곧바로 닿아온 작은 돌기를 부드럽게 매만지기 시작하자 한쪽 무릎을 소파에 댄 채 구부정한 자세로 서있는 호연의 숨소리가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가벼운 애무에도 선명한 반응을 보이는 그는 비단 가슴뿐 아니라 몸 전체가 민감한 감도를 지니고 있어서 마주하는 상대로 하여금 애무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일정 이상 달아오른 상태에서 이제 한시라도 빠른 삽입을 원하고 있는 호연이 스스로 자세를 바꾸어 수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운으로 가려진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아직 거의 일어서지 않은 상태임에도 충분한 부피감을 지니고 있는 그것을 잠시 동안 새하얀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어루만지던 호연은 수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수영의 눈빛에서 선명한 정욕을 읽어낸 그는 이제 곧 하나로 이어지게 될 상황을 즐겁게 머릿속에 그리며 슬슬 손 안에서 단단한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한 페니스를 단숨에 작은 입 안에 품었다.

열기가 감도는 고요한 방 안이 이내 강하게 빨고 핥는 음란한 소리로 채워져 갔다. 펠라를 하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드는 호연을 반쯤 감은 눈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던 수영이 적당한 타이밍에서 손을 뻗자 곧바로 그의 손에 어깨를 붙잡힌 호연이 그제야 작은 입을 벌려 줄곧 품고 있던 것을 해방시켜주었다.

“엎드려.”

연하의 남자의 명령에 따라 카펫 위에 양 무릎을 대고 개처럼 엎드린 호연은 잠시 후 윤활제를 머금고 서서히 뒤 쪽 입구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거대한 부피감을 느끼며 짧게 신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고 아까 전 샤워를 하는 중간에 미리 스스로 안의 근육을 풀어놓았음에도 애초에 손가락과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물건이 다소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오자 바짝 조여진 점막에선 꽤나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으...”

약간의 통증을 동반한 저릿한 감각이 서서히 몸 안을 어지럽혀 나갔다. 아직 삽입에 익숙해지지 않은 내부의 근육이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아주 잠시간의 시간만을 준 수영은 곧바로 호연의 의견도 묻지 않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푹 안을 찌르고 들어오는 거센 힘에 맞물린 점막이 윤활제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풀어져나갔다.

“아... 윽, 좋...아... 더... 더 세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대한 페니스가 안을 파고들었다가 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서서히 불편한 이물감이 무뎌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 호연이 뒤에서 몰아쳐오는 힘에 밀려 흔들리는 양 팔로 간신히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았다. 원래는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체위를 선호하는 그였지만 지금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차피 이 자세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거칠게 변해가는 정사를 잔뜩 흥분된 기분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사람 많은 장소에 있을 때는 신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 걸친 옷을 벗어내고 나면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짐승처럼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상대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 호연은 잠시 후 일시에 몸 밖으로 빠져나간 뒤 곧바로 자신의 몸을 뒤집어 올라타 오는 수영을 마주하고 달콤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마치 기저귀를 가는 아기가 된 것처럼 엉덩이를 치켜들어 올린 자세를 유지한 채 윤활제로 번들거리는 굵은 페니스가 조금씩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본 그는 마침내 상대의 굵은 뿌리 부분까지 삼키게 된 순간 들뜬 흥분으로 크게 흐트러진 숨소리를 흘렸다.

“좋아, 잘 조이고 있어...”

호연의 벌어진 허벅지를 양팔로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인 수영이 조금 상기된 얼굴 위로 스치듯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거... 너무 커서 힘들어...”

“그래도 힘들기만 한 건 아니잖아?”

엷은 웃음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이 곧장 손을 뻗어 호연의 페니스를 감싸 쥔 것과 동시에 이미 한껏 흥분한 상태에 있는 호연의 날씬한 허리가 움찔 떨렸다.

“더... 더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줘.”

스스로의 부피를 생각해 일단은 자제하는 모양새로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수영의 팔을 붙잡은 호연이 아직 부족하다며 달콤한 말로 유혹하자 잠시 허리의 움직임을 멈춘 수영이 크게 벌어진 호연의 허벅지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 말했다.

“진짜 내 마음대로 하다간 찢어질 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어.”

호연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뺨을 누그러뜨린 수영이 이내 눈빛을 바꾸고서 잠시 멈춰 세워져 있던 허리를 급격히 속도를 높여가며 흔들기 시작했다.

호연의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방안을 크게 뒤흔든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커피.”

운전석의 등받이를 젖혀놓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수영이 문득 조수석의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은 덕분에 온기로 채워진 차 안으로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오자 순식간에 한기를 느낀 그는 일단 자신에게 내밀어진 일회용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문 닫아 줘. 추워.”

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뒤 피로한 눈가를 매만지며 수영이 말하자 그때까지도 아직 밖에 서있던 호연이 그제야 조수석에 올라 문을 닫았다. 수영과 달리 달달한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손에 들고 있는 그는 커피와 같이 사들고 온 빵을 자신의 무릎에 내려놓고서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많이 졸리면 내가 운전할까?”

“아니. 눈을 좀 붙였더니 나아졌어. 커피 마시면 완전히 깰 거야.”

이틀 동안 몇 번의 격렬한 정사를 벌인 것이 결국 피로로 이어진 것인지 수영과 호연 두 사람의 얼굴엔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특히 오늘 새벽에도 잠을 포기한 채 다소 거칠게 호연을 안았던 수영은 관계를 주도하는 입장 상 자연스레 더 많은 피로도가 쌓인 듯 했다.

“결국 지방까지 내려와 놓고 실컷 섹스만 한 것 같네. 뭐, 난 이쪽도 나쁘지 않지만.”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한 호연이 아직 김이 나고 있는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레 한 모금 목안으로 넘겼다.

“앉아 있으면 아프지 않아? 중간에 찢어져서 피 났었잖아.”

피로한 눈가를 누르며 수영이 말하자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 살짝 미소를 머금은 호연이 종이컵을 양손으로 감싸고서 대답했다.

“찢어져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진짜로 찢어질 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지금도 이렇게 보면 멀쩡한데 침대 위에 올라가면 당신 꽤 무섭게 변하는 면이 있어. 뭐, 좀 아프긴 했지만 그만큼 좋았으니까 상관없어.”

솔직한 호연의 대답을 듣고 살짝 입꼬리를 올린 수영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무시무시한 부피를 자랑하는 것을 정신없이 박아댔으니 끝내 호연의 좁은 그곳이 찢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와중에도 괜찮으니 계속 하라고 지시한 호연의 말에 수영이 착실히 따른 덕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사정을 마친 뒤 확인한 침대의 모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튀어 있는 붉은 핏자국과 정액, 윤활제가 한데 뒤섞인 흔적은 조금 전 당시의 정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고스란히 증명해주었었다.

“내일은 또 출근이지? 조금 있다가 서울에 도착하면 같이 가게에 들르면 좋겠는데 괜찮아? 유민이가 이번에 새로 가져온 술이 있거든. 내가 먼저 마셔 보니 괜찮아서 당신한테도 좀 맛을 보게 해주고 싶은데 말이야.”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는 호연을 슬쩍 쳐다본 수영이 어느새 절반 이상 비어져버린 종이컵을 살살 흔들며 대답했다.

“내일 출근하기 전에 미리 봐둬야 할 중요한 서류가 있어. 아침 미팅 때 발표해야 하는 거라서 실수가 나오면 안 되거든.”

돌아온 대답에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은 호연은 그러나 일과 관련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서 깨끗이 뒤로 물러났다. 자신도 일로 한창 바쁠 때는 상대에게 연락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 만큼 지금 수영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그였다. 불과 두 살 차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연상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무턱대고 조르는 행동을 할 마음은 없는 그는 차가 휴게소를 빠져나가는 시점에서 줄곧 무릎 위에 놓아두고 있던 빵을 집어 들었다.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그는 까다로운 여자들 못지않게 체중조절에 신경을 써오고 있었지만, 서울을 벗어난 이틀 동안 격렬한 운동으로 체력을 소모한 탓인지 오늘은 평소보다 느슨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4월이나 5월쯤 날씨가 따뜻해지면 유럽으로 여행을 갈까 생각 중인데 어때?”

“유럽?”

앞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수영이 반문하자 그 사이 미지근하게 변한 커피를 두 모금 마신 호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일단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만약 당신도 같이 간다면 다른 곳을 생각해볼 수도 있고.”

부모님의 사업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호연은 이미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땀이 나는 걸 싫어해서 동남아 쪽의 여행은 기피하는 듯 했지만 습도만 높지 않다면 온도 자체가 높은 건 괜찮은 것인지 이집트를 포함한 아프리카 쪽의 몇 나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해외여행이라면 수영도 일반 사람들의 평균치를 웃도는 정도로 경험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호연처럼 여행 자체를 취미로 여기지는 않았다. 애초에 낯선 곳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는 특히 사회인의 이름을 달게 된 이후 휴식의 필요성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 뒤부터는 시간이 생길 때면 노는 일정을 계획하기보다 우선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것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대학시절까지의 그의 모습을 아는 친구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며 놀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단 몇 년의 사이 수영의 삶은 무척이나 많이 변해 있었다.

“나중의 일은 모르지만 어쨌든 긴 휴가를 내기는 어려울 거야.”

“일정이야 그 때 상황에 맞추면 되지.”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는 호연을 슬쩍 쳐다본 수영이 다시 정면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일단 생각은 하고 있을게.”

“당신과 둘이 여행 갈 생각하니 기대되는데.”

“우리 지금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아니야?”

“하루 종일 펜션 안에만 있느라 바깥 구경은 하나 못했잖아. 뭐, 대신 더 좋은 걸 실컷 하긴 했지만.”

몇 시간 전의 일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린 호연이 의미심장한 표정 위로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모처럼 만에 만족스런 관계를 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좋은 기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다소 나른한 표정으로 최근에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유행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먼저 가게에 들러 증축에 관한 세부 계획을 세워야 할 터이지만 그 전까지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은 그였다.

“피곤하면 말해. 언제든 자리 바꿔줄 테니까.”

“응.”

수영의 대답을 들은 호연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을 스치는 차가운 풍경이 거짓말인 것처럼 따스한 차 내에는 더없이 기분 좋은 커피향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

“와- 배부르다! 오랜만에 제대로 먹은 것 같네.”

“영훈씨,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하더니 벌써 포기한 거야?”

“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요.”

돌아온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민성이 이유를 묻자 잠시 망설이는 영훈을 대신해 그의 옆에서 걷고 있던 석우가 앞으로 나섰다.

“이 친구, 어제 여자 친구랑 헤어졌대요.”

“야, 장석우!”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본 영훈이 뒤늦게 제지하려 나섰지만, 어젯밤 영훈에게 호출된 뒤로 꼬박 새벽까지 붙들려 있었던 복수라도 할 작정인지 석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예전부터 여자 친구가 살 안 빼면 헤어지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결국 그렇게 돼버린 모양이에요.”

석우의 말을 듣고 자연스레 영훈에게 시선을 옮긴 민성이 살짝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중요한 사실이 발설된 이상 이제 와서 숨기고 말 것도 없다고 체념한 듯 석우를 슬쩍 한 번 노려보는 것으로 짧게 불만을 표시하고 입을 다문 영훈은 잠시 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온 민성의 손길을 느끼고 한층 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힘내. 세상 여자는 많으니까. 살 좀 쪘다고 헤어지자니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몇 년이나 만난 여자야?”

“...2년이요.”

“꽤 오래 만났네. 근데도 겨우 그런 이유로 헤어지자고 해? 에이, 잘 헤어졌어. 그런 여자랑은 어차피 오래 가봤자 나중에 후회한다고.”

“그래도 정말 좋아했는데...”

“어차피 좋아하는 감정도 다 한 때뿐이야. 이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미련하게 한 여자한테 목을 매. 안 그래, 우대리?”

그때까지 말없이 일행들과 속도를 맞춰 걷던 수영이 문득 민성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에이, 그걸 우대리님한테 물어보시면 안 되죠. 솔직히 우대리님이랑 저희랑 같나요, 뭐. 세상에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처럼 인기 없는 남자들한텐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잠깐, 우리라니. 왜 나까지 거기에 껴 넣어? 나 이래봬도 소개팅 자리 가면 인기 많다고.”

“전에 술자리에서 왜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 하신 거 지금도 기억하는데요.”

“그건 그냥 겸손으로 한 얘기고...”

“중간에 우셔서 혜리씨가 손수건도 빌려 드렸...”

“으악, 그 얘긴 하지 마. 안 그래도 그 회식 자리 이후로 혜리씨 볼 때마다 민망해 죽겠구만.”

“하하하.”

옆에서 들려오는 일행의 대화를 반쯤 흘려들으며 걷고 있는 수영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한정식 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즐겁게 수다를 늘어놓는 일행들과 달리 직접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있는 그는 지금부터 회사로 돌아간 뒤 작성을 시작해야 하는 서류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근데 가격에 비해 반찬 수가 별로 없지 않았어?”

“전 괜찮았던 거 같은데.”

“우리 동네에 아까 거기보다 2천원이나 싼데 반찬은 훨씬 많이 주는 데가 있거든.”

“그래요?”

“그래. 아까 먹어 보니까 겉절이도 좀 너무 짜고 생선도 덜 익은 거 같더라. 새로 생겼길래 어떤가 하고 한 번 가본 건데 앞으로는 그냥 원래 가던 식당으로 가야겠어. 우대리는 어땠어? 괜찮았어?”

또다시 민성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수영이 코트의 깃을 여미며 대답했다.

“별로.”

“그치? 한 끼에 8천원이 뭐야. 그 돈이면 편의점에서 몇 끼는 때우겠다. 안 그래?”

수영의 동의를 얻자마자 기세등등해진 민성이 ‘요즘 같은 불황에 어쩌고’로 시작되는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와 같은 열변은 민성처럼 높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 직원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그의 말에 동조하고 있는 일행들은 마치 운동권 소속의 일원들이라도 된 것 마냥 결의에 찬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쫓기듯 평소보다 빠른 걸음을 옮기던 수영과 일행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선 뒤에야 간신히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점심시간의 절반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1층의 넓은 로비는 이동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어. 저기 과장님 아니야?”

앞서 걷던 민성의 말에 따라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예기치 못한 장면에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로비의 한 켠에 양과장과 마주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몇 번을 다시 봐도 틀림없는 윤재였다.

단순히 외형 자체로만 놓고 보면 한 눈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만큼 크게 눈에 띠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가 입고 있는 평범한 일상복은 단정한 정장차림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곳의 풍경 안에 홀로 낯선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친구, 어디서 봤는데...”

“저번에 과장님 따라 회식 갔던 주점의 주인이잖아. 아니, 주인 아들이라고 했나.”

“아, 맞다. 이제 기억나네. 다리 절던 그 친구 맞지?”

“다리도 불편한데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윤재에 대한 대화를 짧게 나누다가 식후엔 담배 타임을 가져야 한다며 흡연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일행을 슬쩍 쳐다본 수영은 그들과 동참하기 전 다시 한 번 윤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

한눈에 봐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의 윤재를 한 번씩 쳐다보고 스쳐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그대로 자리를 지키던 수영은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조금 전 일행이 향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과장이 뒤늦게 수영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멀리서 그를 불렀다.

과장의 적극적인 부름을 받고 발길을 돌려 두 사람이 서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수영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는 윤재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외출을 한다고 신경을 쓰기는 한 듯 가까이 마주한 윤재는 가게에 있을 때보다는 한층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목이 길어서인지 두터운 야상점퍼 안에 입고 있는 엷은 회색의 터틀넥 스웨터가 꽤나 잘 어울렸다.

“우대리, 김윤재씨 알지? 민들레 가게.”

친절히 가게의 이름까지 붙여 설명하는 과장에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한 수영은 일단 과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밤에 친구랑 거기서 거하게 한 잔 걸쳤었거든. 근데 또 필름이 끊겨서 집에 돌아온 모양이야. 어제 술자리에서 중간에 뭘 꺼낸다고 가방을 뒤적이다가 떨어졌는지 오늘 아침에 아무리 찾아도 중요한 서류가 안 보여서 계속 걱정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민들레’에 전화해 보니까 어제 청소하면서 주워놓은 게 있다잖아. 두 시 미팅에 꼭 필요한 서류라서 내가 가지러 가겠다니까 이 친구가 글쎄 고맙게도 직접 이렇게 와줬지 뭐야.”

“...그렇습니까.”

하나의 중요한 일을 해결하고 화색이 만연한 과장의 말에 가볍게 동조를 해준 수영이 힐끗 윤재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고마워. 윤재씨. 사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좀 정신없이 바빴거든. 덕분에 살았어.”

“아닙니다. 저야말로 평소 저희 가게를 자주 찾아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가게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운동도 할 겸 움직인 것뿐이니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윤재가 그쯤에서 양과장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려는 찰나, 곧장 윤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양과장이 마주 선 수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에 두 사람 아는 사이라고 했지? 난 지금부터 이 서류 빨리 체크해 봐야 해서 시간이 나지 않으니까 우대리가 윤재씨 가게까지 좀 바래다주겠어? 점심시간 끝나고 좀 늦게 들어와도 괜찮으니까 부탁 좀 할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앞에서 버스 타면 가게까지 금방입니다.”

양과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사양의 말을 꺼낸 윤재를 무시하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선 수영이 양과장을 향해 ‘알겠습니다.’라고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영의 대답을 들은 것과 동시에 미소를 머금은 양과장은 ‘그럼 부탁하네.’라고 말하고서 마지막으로 윤재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류파일을 한 손에 든 채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양과장의 뒷모습을 잠시 서서 바라보던 수영이 말없이 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재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졸지에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해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가 잠시 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 혼자 갈 테니 조금 시간을 두고 돌아가세요. 나중에 양과장님껜 절 바래다주셨다고 말씀드릴게요.”

“나더러 상사한테 거짓말을 하라고?”

“.......”

곤란한 질문을 받고 입을 다문 윤재를 잠시 그대로 내려다보던 수영이 재킷 안쪽에서 차 열쇠를 꺼냈다.

“로비 입구 의자에 잠깐 앉아 기다리고 있어. 차 빼 올 테니까.”

“아뇨, 정말로 저 혼자...!”

“추우니까 안에 있어.”

다시 한 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이내 빠르게 멀어져가는 수영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곤혹스런 얼굴로 쳐다본 윤재는 그 사이 한 번씩 자신을 훑어보고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늦게 깨닫고서 마지못해 로비 입구 쪽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이내 불안정한 걸음을 탄 그의 어깨가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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