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빌어먹을.’
온몸이 삐걱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는 연석이 속으로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젯밤 이곳 게이바 에서 만난 상대와 하룻밤 잠자리를 하고 남은 후유증이 온종일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테크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주제에 무식한 힘만 앞세워 연신 공격을 퍼붓는 상대에게 한참을 시달린 점막이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보니 꽤나 심하게 부어있었다. 거친 섹스라면 이미 우수영이라는 남자와 관계를 가진 뒤부터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던 연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어제의 상대는 그저 단순히 거칠기만 할뿐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빌어먹을 섹스 초짜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애초부터 수영과는 하드웨어 자체에서부터 큰 차이가 났지만 그보다 더한 차이를 보인 건 상대를 쾌락으로 몰고 가는 테크닉의 존재여부였다.
한껏 눈만 높여놓고서 최근 들어 거의 상대를 해주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며 홀로 잔을 기울이던 연석이 잠시 후 바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다가온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오랜만이에요. 제이.”
“어서 와. 연석씨. 오랜만이네.”
“춘천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응. 친한 동생이 거기서 결혼식을 했거든. 웬만하면 축의금만 내려고 했는데 어릴 때부터 봐온 동생이라 안 갈 수가 없더라고.”
그렇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인 상대는 이곳 바(bar)-정확히는 게이바-의 오너인 제이였다. 정복철이라는 다소 향토적인 느낌이 나는 본명을 가진 그는 게이바의 오너답게 일찍이 대대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뒤로 숨김없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체형과는 어울리지 않게 여성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그를 보며 언뜻 혐오감을 내비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겉보기와 달리 내면적으로 진중한 그와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게 되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그의 첫인상도 어느 샌가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되곤 했다.
“혼자 온 거야?”
“네.”
“어머나, 가엾게도.”
커다란 손을 입가에 대며 짧게 중얼거린 제이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던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평소 연석이 자주 마셔온 술이었다.
“수영씨랑 같이 오지 그랬어.”
제이의 입에서 나온 ‘수영’이라는 이름에 무심코 움찔 반응한 연석이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얼굴 못 본지 꽤 됐어요. 최근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던데 거기에 꽤 열중하고 있나 봐요. 여기엔 온 적 있나요?”
“글쎄... 내가 없을 때 왔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얼굴 본 지 꽤 오래 된 거 같아. 최근엔 통 모습을 안 보이더라고. 그 잘생긴 얼굴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에 힐링이 되는데 말이야.”
수영의 얼굴을 떠올린 것과 동시에 뺨을 누그러뜨린 제이가 그 사이 바텐더가 만들어 가져온 술을 받아 연석에게 건넸다.
“조심하세요. 그 얼굴에 속아서 운 사람 많아요.”
“어머, 본인 얘기 하는 거야?”
“네. 저도 포함해서요. 제이는 아픈 거 싫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 남잔 쳐다도 보지 마세요. 겉보기엔 엄청 시니컬해 보이는데 침대 위에선 완전 사디스트에요. 어떨 땐 진짜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싶어서 무섭기까지 하다고요.”
몇몇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짓는 연석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이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그 말 어쩐지 자랑처럼 들리는데.”
“진심으로 조심하시라고 경고한 거예요.”
“그래도 그게 정말로 그렇게 싫었으면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겠지.”
“.......”
정곡을 찔린 연석이 대답 대신 잔을 입으로 옮겼다.
그 말 그대로였다.
그저 단순히 아프기만 했다면 마조도 아닌 자신이 지금까지 애써 관계를 이어갈 노력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연석은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괜히 멀쩡한 사람들을 마조로 개발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될 만큼 수영은 고통을 뛰어 넘는 쾌락을 줄 줄 아는 남자였고, 무엇보다 한창 흥분해서 상기된 그의 얼굴은 단순히 보는 자체만으로 사정감을 일으킬 만큼 섹시해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한창 일을 벌일 땐 흥분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아깝게도 그 얼굴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되어버리곤 했지만.
“안녕하세요.”
잠시 수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술을 넘기던 연석이 문득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 주호씨.”
주호는 현재 바(bar) 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남자로, 예전에 잠시 이곳 에서 일했던 인연으로 연석과는 친분이 있는 상대였다. 얼마 전 의 오너인 호연과 수영의 관계 변화에 대해 귀띔해주었던 것도 바로 그였다.
중요한 손님을 맞아 제이가 자리를 떠난 직후 곧바로 주호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몸을 튼 연석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쉬는 날인가 보죠?”
“네, 대신 내일 또 죽어라고 일해야죠.”
“거기 가게 오너는 직원들을 독하게 부려 먹나 봐요?”
연석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하게나마 호연에 대한 반감이 담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석의 입장에서 호연은 순식간에 자신의 남자를 채간 연적일 뿐이었다. 물론 스테디한 관계가 아니었던 만큼 소유권을 주장해가며 상대를 책망할 수 없는 게 지금 연석이 처해 있는 안타까운 입장이었지만.
언젠가 주호의 초대를 받고서 찾았던 에서 봤던 호연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연석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크고 좋은 바(bar)의 오너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젊고 화려한 외모를 하고 있던 호연은 한눈에 봐도 상류층의 인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나른한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 만큼 누구와 마주해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로 우수영이라는 남자와 닮은 면이 있어서 호연과의 첫 만남에서 연석은 자연스럽게 수영을 머릿속에 떠올렸었다.
-‘요즘 두 분 사이의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위축된 기분에 빠져 있던 연석이 결국 수영와 호연이 그런 관계로 발전했다는 말을 주호로부터 전해 듣고 느꼈던 상실감이란 실로 큰 것이었다. 애초부터 수영과 제대로 된 연인 관계로 발전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던 만큼 그동안 수영이 쭉 한 사람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적당히 떨어진 상태로 유지된 그와 자신의 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연석은 최근 들어 호연에게 꽤나 진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수영의 태도가 불만스럽게, 혹은 불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희 사장님은 일과 관련해서는 좀 엄한 면이 있으시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능숙하게 이끌어가세요. 직원들도 잘 챙겨주시고요.”
주호의 입에서 나온 호연의 칭찬에 한층 더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낀 연석이 잠시 텀을 두고 이어진 말을 듣고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어제 수영씨가 잠깐 가게에 오셨었는데요, 웬만해선 중요한 손님과 만나는 자리에서 중간에 나오는 일이 없으셨던 사장님이 잠깐 들른 수영씨 보겠다고 홀로 나오셨다니까요. 그걸 보면 이제 두 사람 진짜 제대로 사귀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자신에게 수영과 호연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해왔던 연석이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한다고 생각했는지 주호는 친절히 최근의 정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일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면 잠시나마 얼굴 정도는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몇 번을 연락해도 일로 한창 바쁘다며 최소한의 시간마저 내주지 않는 수영에게 잔뜩 불만을 안고 있던 연석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호의 이야기를 다소 자학적인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분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주호에게 시선을 던진 연석이 한손에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시니컬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요?”
“어째서라고 물으시면 글쎄요... 일단 같이 서있으면 기막힌 그림이 된다고 할까요.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잖아요.”
평소 좋게 봐온 지인이 지금은 밉살맞은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점점 더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가는 것을 느끼며 잔 안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목안으로 넘긴 연석은 마침 곁으로 다가와 있는 바텐더에게 좀 더 독한 술을 주문했다.
“어, 괜찮으세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뒤늦게 연석의 기분 상태를 알아차린 주호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일단은 적당히 무난한 대답을 한 연석은 슬슬 취기로 뜨거워지는 뺨을 차가운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 상태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돌아가서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여기 나왔습니다.”
조금 전 주문한 술이 담겨 있는 잔을 바텐더로부터 건네받은 연석이 그것을 주호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죄송한데 좀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이건 선물로 줄게요.”
“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지금 좀 빨간데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택시 타면 금방이니까요.”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서 벗어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어 그 안에 팔을 꿴 연석은 조금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주호를 향해 짧게 인사를 남긴 뒤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빌어먹게 우울한 밤이었다.
*
들어선 가게 안은 꽤나 넓었고 많은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앉아 있는 손님들의 대다수가 먹고 있는 것은 회색 면의 국수로, 벽에는 가격이 나란히 적힌 몇 가지의 메뉴와 ‘메밀의 효능’이라는 설명글이 붙어 있었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대화소리를 들으며 점원의 안내에 따라 비어 있는 구석 자리에 앉은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마주한 자리에 앉은 윤재를 쳐다보았다.
착석한 뒤 줄곧 몸에 걸치고 있던 두터운 점퍼를 벗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은 윤재는 조금 얇아 보이는 엷은 하늘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긴 다른 메뉴보다 막국수가 유명해요. 육수를 과일로 만들어서 맛이 산뜻하죠.”
“그럼 그걸로 주문해.”
“달리 먹고 싶은 메뉴가 있으면 그걸로 하세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어. 제일 유명하다면 그게 제일 맛있는 거겠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옆에 놓으며 말한 수영이 잠시 후 점원이 가져온 컵에 물을 채우기 시작한 윤재의 모습을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점원에게 막국수 둘과 만두 하나를 주문한 윤재는 먼저 채운 컵을 수영의 앞에 놓아주었다.
“사람이 많네.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야. 일단 주말이기도 하지만.”
“이 근처에선 가장 유명한 가게에요. 값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요.”
가격 이야기가 나오자 수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드리워졌다.
명색이 ‘답례’라는 타이틀을 걸고 마련한 자리인 만큼 좀 더 좋은 장소에서 약속을 잡고 싶었던 수영은 지금도 아쉬운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답례를 받을 상대가 직접 고른 장소이니 더 이상 가타부타 할 마음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장소도 음식 메뉴도 그리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수영이었다.
“여기엔 자주 와 본 모양이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의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수영이 묻자 물수건을 쥐고 있던 손을 멈춘 윤재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 근방에서 오래된 가게의 주인끼리는 대부분 친분이 있어요. 어머니가 여기 막국수를 좋아하셔서 가끔 오기도 했고요.”
“.......”
“.......”
“휴일엔 주로 뭘 해?”
“.......”
잠시 만났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다시 묻지 않았을 테지만 수영에게 있어 자신과의 소소한 기억은 이미 오래 전에 머릿속에서 잊혀졌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는 윤재가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tv를 봐요. 가끔 친구와 만나면 영화를 보기도 하고요.”
“그림?”
“...간단한 밑그림 같은 거예요. 주로 집에서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나 사람을 스케치하는데 가끔 시간이 나면 채색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케치 단계에서 끝나요.”
“전공자도 아닌데 조금 독특한 취미네.”
윤재의 대답을 듣고 묘하게 무언가가 마음속에 걸리는 느낌을 받은 수영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다가온 점원의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차례로 테이블 위에 놓이는 음식을 쳐다보고서 젓가락을 손에 쥔 수영은 거의 동시에 젓가락을 든 윤재가 국물에 잘 배게 면을 섞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자신도 젓가락을 움직였다.
과연 추운 계절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게의 자리를 빽빽이 채우고 있는 게 납득이 될 만큼 먼저 한 젓가락으로 맛을 본 막국수는 제대로 산뜻한 맛을 내고 있었다. 평소 국수 종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자신에게서 괜찮다는 감상을 끌어낼 정도이니 아마 까다롭지 않은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면 꽤나 입에 잘 맞을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그때까지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는 완전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식사에 열중한 윤재는 겉보기와 달리 제법 먹는 속도가 빨랐고, 수영 역시 보통의 일반적인 남자 수준의 식사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대신 해서 채워주기라도 하듯 가게 내 여기저기서 수많은 손님들이 만들어내는 대화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에 시집 간 딸이 남편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하던 한 아주머니는 점차 격앙되다 못해 끝내 젓가락을 손에 쥔 채로 엉엉 울기 시작했고, 반대편에서는 한 중년의 남자가 마주한 노인을 상대로 이번에 정말 좋은 투자처가 나타났다며 한눈에도 사기일 게 뻔한 허술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평소 일상에서 오가는 장소에서는 그다지 들을 일이 없는 이야기들을 반강제적으로 귀에 담고 있던 수영은 대강 식사가 끝난 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과일육수로 만들어진 국물이 산뜻한 맛과 향을 내고 있는 덕분에 뒷맛이 개운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이어가던 윤재의 그릇도 상당 부분 비워진 상태였다. 아직 식사를 끝내지 못한 그에게 괜히 재촉하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일부러 벽에 걸린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긴 수영은 잠시 후 문득 근처에서 들려온 중년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다소 호들갑스런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반갑게 불리워진 이름이 다름 아닌 윤재였기 때문이었다.
“윤재 총각 와 있었네.”
“안녕하세요.”
통통한 체격을 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한 윤재가 슬쩍 수영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잠시 이어지는 말과 분위기를 통해 지금 윤재의 옆에 서있는 중년의 여성이 아무래도 이 가게의 주인인 모양이라고 짐작한 수영은 눈이 마주친 낯선 상대에게 예의상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어머나- 이쪽 총각은 누구야? 친구 분이신가? 너무 잘 생겼네~ 우리 딸내미들이 봤으면 분명히 눈도 못 뗐을 거야.”
“아...”
딱히 맞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애매하게 말을 흐린 윤재가 잠시 후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어제 어머니랑 통화했는데 얼마 전에 선 봤다며? 잘 좀 해보지 그랬어? 괜찮은 아가씨였다며.”
다른 누구도 아닌 수영의 앞에서 나온 사적인 화제가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느껴진 윤재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아주머니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야무지게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 걱정이 얼마나 크신지 몰라. 솔직히 본인 앞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윤재 총각만큼 괜찮은 사람이 요즘 어디 있나. 사람 성실하지, 얼굴 곱지... 아니, 남자니까 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심성도 곱지, 술 담배도 안 하지, 여자놀음도 모르지...”
“저, 아주머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만류하는 윤재를 지켜보는 수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윤재가 맞선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 수영은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김윤재와 여자라는 그림이 아무래도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때였다고 해도 자신의 ‘여자’였던 윤재가 여자를 안는 장면이 그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만드는 것이 결혼 뒤 밟게 되는 당연한 절차임을 생각하면 어째서인지 윤재는 그 과정에 맞지 않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수영이 갖고 있는 이미지 안에서는.
물론 수영은 자신 역시도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버지’라는 자리에 맞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시기가 오면 결혼은 할 예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나 가장의 역할에 충실히 임할 거라는 기대는 이미 그 스스로부터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림이 그려지고 말고를 떠나 굳이 한 쪽을 선택하자면 ‘남편’이라는 역할에는 애초에 의지자체가 없는 자신보다야 눈앞에 있는 남자가 더 어울릴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아직 결혼 생각할 나이는 아니지 않아?”
실컷 하고 싶은 말을 떠든 아주머니가 마침내 주방으로 사라지고 난 뒤 줄곧 닫혀 있던 입을 연 수영이 천천히 자신에게 시선을 던져온 윤재를 마주보았다.
요즘 추세로 보면 남자 나이 스물일곱이면 결혼을 생각하기엔 꽤나 이른 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올해 서른인 수영의 주위에도 기혼보다는 미혼이 많았다.
“...제 입장은 보통의 경우와는 다르니까요.”
그렇게 대답하고서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윤재가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점퍼로 손을 뻗으며 ‘그만 일어날까요.’라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 눈치 없는 아주머니가 수영의 앞에서 온갖 얘길 다 꺼낸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그의 표정이 처음 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잘 먹었어요.”
계산서에 찍힌 건 겨우 만 팔 천원.
잘 먹었다는 말을 듣는 것도 민망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든 수영이 따로 대답을 하지 않자 잠시 텀을 두고 윤재가 말을 이었다.
“먼저 가세요. 전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
“들를 데?”
“병원에 가져갈 과일이랑 반찬통을 좀 사야 해요. 이 근처에 시장에 있어요.”
간략한 대답에 이어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려는 윤재를 수영이 불렀다.
“어차피 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좀 남으니 식후 운동도 할 겸 같이 갈게.”
예상치 못한 수영의 반응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윤재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서있자 그 사이 그의 곁에 바짝 다가선 수영이 코트에 팔을 꿰며 말했다.
“걸어갈 만 한 거리야?”
차 키를 손에 든 채 묻는 수영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윤재가 곧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대답했다.
“...별로 멀지는 않아요.”
“그럼 차는 두고 갈게.”
이 이상 불편한 시간이 연장되는 건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만류한다고 해서 착하게 뜻을 접을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윤재는 어차피 제한된 시간 내에서의 동행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먼저 시장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추위가 풀린 덕분인지 주말의 시장은 모처럼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의 대다수는 중년의 여성들이었지만 주말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일까, 데이트 코스로 거치는 듯한 젊은 남녀커플의 모습도 중간 중간 눈에 띠고 있었다.
“고등어 싸게 드립니다~ 세 마리 사시면 오징어 한 마리 서비스로 얹어 드려요~”
“따끈따끈한 김치전입니다~ 한 장에 삼 천원, 두 장에 오 천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상인들의 호객 멘트와 지나는 행인들의 대화소리가 한 데 뒤섞여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식사는 대부분 바깥에서 해결을 하고 귀가를 하는 만큼 집에 들어가도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 수영은 간단한 과일이나 빵 외에 요리에 필요한 식재료를 사본 경험이 없었다. 회사에 취직을 하며 분가를 하기 전까지는 집안에 상주하고 있는 가사도우미나 모친이 만드는 음식을 주로 먹었었고, 분가를 한 뒤엔 바깥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가끔씩 집에 불러들인 여자들이 한껏 솜씨를 뽐내 만들어놓은 요리를 먹어왔으니 자연스레 그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시장 내에서는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일상용품점 안으로 들어간 윤재가 식기구가 진열된 앞에 서서 진지하게 반찬통을 고르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통은 색이나 냄새가 배기 쉬운 만큼 가격은 좀 더 비싸지만 사용하기 용이한 유리로 된 용기를 위주로 살펴본 그는 잠시 간의 고민 끝에 작은 크기와 중간 크기의 반찬 통을 각각 세 개씩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그대로 계산대로 향하려던 그는 ‘이왕 여기까지 들른 김에’라는 생각이 미친 것인지 문득 발길의 방향을 돌려 조금 전 지나쳐온 옆의 코너로 이동했다. 주로 냄비와 양푼, 소쿠리들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였다.
요식업의 특성 상 자주 사용되는 식기구들은 수명이 짧기 때문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여분의 냄비와 양푼들은 미리 준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틀 전엔 물을 끓이던 오래된 양은 냄비의 손잡이 부분이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성호가 손에 화상을 입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평소 사용해온 것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의 냄비 두 개와 가게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크기의 양푼 두 개를 골라 바구니에 넣은 윤재가 갑자기 바구니를 든 손에 느껴진 강한 힘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완력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윤재의 손에 들려 있던 장바구니를 빼앗아간 수영이 ‘더 살 거 있어?’라고 물어왔다. 바구니의 무게가 무거워지며 덩달아 윤재의 걸음걸이가 더 크게 흔들리는 것을 알아챈 그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이거 계산한 뒤에 나가서 과일만 좀 사면 될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수영에게서 다시 장바구니를 가져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을 내린 윤재가 체념하듯 고개를 돌리고서 먼저 계산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모처럼 영상의 온도를 찾은 바깥은 딱 기분 좋을 정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리 일기예보를 챙겨보고 그에 맞춰 다소 가벼운 옷차림으로 시장 나들이에 나온 행인들 틈에서 홀로 두터운 점퍼를 입고 있는 윤재는 조금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서 와요, 윤재 총각. 뭐 줄까?”
“이쪽의 귤 세 바구니 각각 따로 담아주시고요... 저쪽에 있는 삼천 원짜리 바나나도 두 개 주세요.”
“오늘 아침에 가져온 딸기도 참 맛있는데. 윤재 총각이 사면 내가 삼천 원 깎아줄게.”
평소 자주 찾는 과일가게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윤재가 결국 딸기도 담아달라고 말했다. 딸기는 어머니보다도 이모가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옆에 계신 분은 친구 분이신가? 아유, 훤칠하니 정말 잘 생겼네.”
“아...”
아까 전 막국수 집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받은 윤재가 아주머니에게서 과일이 든 비닐봉지를 건네받으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표정이 곤란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수영의 외모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아주머니는 윤재의 반응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자못 아쉬운 표정으로 수영을 향해 ‘딸만 있으면 사위 삼고 싶네.’라는 말을 반복했다.
당장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사는 것으로 장보기는 간략하게 끝이 났지만 각각의 부피와 무게가 꽤 되는 탓에 결국 수영의 차를 타고서 가게 앞에 도착한 윤재는 먼저 잠가두었던 문을 열고 장을 봐온 물건들을 안으로 옮겼다. 오늘 새벽까지 영업을 한 뒤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은 가게 안은 평소와 달리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만 갈게.”
무거운 냄비와 유리그릇이 든 짐을 옮겨준 수영이 그렇게 말하고 운전석에 오른 순간 가게 입구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한 윤재가 곧바로 등을 돌려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조금 서두른 걸음으로 수영의 차량 앞으로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고 한손에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부스럭거리는 비닐에 가려진 채 상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건 조금 전 수영이 시장에서 산 귤 세 봉지 중 하나였다.
“무거운 짐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조심히 가세요.”
스치듯 수영의 얼굴을 쳐다보고서 그렇게 말한 윤재가 곧바로 조수석 문을 닫고 등을 돌린 뒤 그대로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
윤재가 사라진 뒤 잠시 동안 가만히 조수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쳐다보던 수영이 이내 현실로 돌아와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대 옆 시계에 표시되고 있는 시간은 정각 네 시.
통상적으로 다음 약속 장소까지는 10분이면 충분했지만 오늘은 주말이라 예상대로 작은 동네를 벗어나자 곧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한 시에 만나서 네 시에 헤어진 지금, 결국 윤재와 보낸 시간은 단 세 시간에 불과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세 시간 동안 같이 밥을 먹고 장을 보는 보통의 일과를 보내며 수영은 줄곧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었다. 젓가락을 손에 쥔 모습이나 당황해서 굳어지는 표정 등 윤재가 보이는 행동은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느낌을 주었었다.
‘한때나마 사귀었으니 당연한 건가...’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수영은 잠시 후 지겨운 정체를 뚫고 간신히 도착한 약속장소에서 차를 세운 뒤 약속 시간에 맞춰 모습을 나타낸 호연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중간에 티켓을 두고 온 걸 알고 다시 돌아갔다 왔지 뭐야.”
“좀 늦었어도 별로 상관없었는데. 전화 하면 되잖아.”
“응. 그래도 늦는 건 싫으니까... 어, 이건 뭐야? 귤?”
조수석 문을 연 것과 동시에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한 호연이 일단 먼저 착석한 뒤 봉지 안에 손을 집어넣어 귤 하나를 꺼냈다.
“먹어도 되는 거지?”
“...응.”
이미 껍질을 까며 묻는 호연에게 짧게 대답을 해준 수영은 그 순간 문득 하나의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아까 전 식당에서 윤재가 그림에 대한 대답을 했을 때 묘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끝내 그 자리에서는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을.
오래 전의 어느 날,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는 윤재의 말을 듣고 직접 실력을 보고 싶으니 나를 모델로 한 번 그려달라고 했던 자신과, 몇 번의 사양 끝에 결국 승낙하고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윤재의 모습.
오랫동안 새카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신기할 만큼 순식간에 또렷이 되살아났다.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당시의 아직 후텁지근했던 날씨도, 드문드문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며 춤추던 커튼의 움직임도, 좀처럼 연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집중해 그림을 완성시켜 가던 윤재의 모습도.
-‘와, 잘 그리네.’
-‘아직 다 완성되지 않았어요.’
-‘실물보다 나은 거 같아. 너한테는 진짜 내가 이렇게 멋지게 보이는 거야?’
-‘.......’
-‘대답해봐. 응?’
-‘손가락 모양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요. 다시 앞에 가서 아까처럼 서주세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안 그려도 되는데. 공모전에라도 출품하려고 그래?’
-‘오랜만에 그리는 거니까 제대로 완성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알았어. 일단 시작했으니 끝까지 협력해 줄게. 대신 색칠까지 해줘.’
-‘그럼 이따가 집에 돌아갈 때 물감도 같이 사야겠네요.’
-‘굳이 미화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 편하게 그려.’
-‘...네.’
잠시 동안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린 수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쓰디쓴 그의 마음과 달리 더없이 산뜻한 귤의 향기가 차안의 공기를 점점 더 짙게 물들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