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뒷좌석의 창문이 열리자 며칠 만에 다시 차가워진 바람이 순식간에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바람에 이리저리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올려 정리한 윤재가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준석에게 껍질을 벗겨낸 귤 한 뭉텅이를 건넸다. 어제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는 준석의 얼굴은 평소보다 눈에 띠게 피로해 보였다.
“내가 운전할까? 아니면 휴게소에 잠시 들를래?”
“아니, 됐어. 좀 전에 커피 마시니까 그래도 좀 나아진 것 같다. 어휴, 진짜 그 자식 생각만 하면 지금도 짜증이 나네. 하여튼 선후배라고 있는 인간들이 툭하면 실수나 해대서 귀찮은 일거리나 만들고 말이야.”
어젯밤 준석이 갑작스럽게 야근을 하게 된 이유는 그의 후배가 저지른 실수 때문인 듯 했다. 한동안 이어진 야근에 피로가 누적된 상태임에도 일단은 선배 된 입장에서 모르는 척 지나칠 수는 없었던 그는 문제를 일으킨 후배를 따끔하게 야단친 뒤 결국엔 일이 해결될 때까지 함께 회사에 남아 있었던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너 정장 입은 거 오랜만에 본다.”
갑작스런 준석의 말에 귤을 까던 손을 멈춘 윤재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외출 준비를 위해 미리 다려둔 셔츠를 몸에 걸치며 자연스레 회사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렸던 그는 조금 그리운 기분을 느꼈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로 수트를 입은 건 얼마 전에 있었던 맞선 자리가 처음이었고 오늘이 두 번째였다.
지금 윤재는 고등학교 동창생인 후영으로부터 청첩장을 받고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준석과 함께 김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2년 전 김천에 있는 작은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서울에서 생활할 때는 종종 셋이서 만남을 가졌던 후영은 최근에야 빚을 다 갚고 간신히 결혼식을 올릴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게 된 모양이었다. 후영의 신부될 사람은 그와 같은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지나는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는 윤재는 결혼식 당일인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벌써 몇 년 동안 동창회에 안 나왔었지. 오늘 가면 애들 얼굴 오랜 만에 보겠네.”
하품이 섞여 있는 준석의 말을 들은 윤재가 무릎 위에 모아둔 귤껍질을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성철이 결혼했다는 얘긴 민호한테 들었어. 나한테는 청첩장이 안 와서 못 가봤지만.”
“나도 청첩장 못 받았어. 어차피 잘 됐지 뭐.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괜히 축의금 낼 필요 없잖아.”
솔직한 준석의 말을 듣고 옆의 차창에 시선을 둔 채 엷은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잠시 후 문득 목 언저리에 느껴진 손길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준석이 다른 한 손으로 윤재의 넥타이를 슬쩍 잡아당긴 것이었다.
“넥타이 색깔 괜찮네. 연분홍인가?”
“아... 이거 얼마 전에 이모한테 받은 거야. 집 근처에 있는 의류 매장에서 반값 세일하는 것 중에 제일 눈에 들어온 걸로 고르셨대.”
“좋은 이모님이시네. 근데 진짜 너한테 잘 어울린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가.”
준석의 말대로 연분홍색의 넥타이는 윤재의 하얀 피부를 한층 더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때때로 피부 트러블이 일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준석의 입장에선 참으로 부럽게도 체질적으로 좋은 피부를 타고난 윤재는 한창 사춘기를 겪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드름 한 번 난 적이 없어서 당시 친하게 지냈던 같은 반 친구 놈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었다. 개중에는 피부 결이 보드라워서 만지면 기분이 좋다며 윤재를 볼 때마다 그의 뺨에 제 손등을 들이댔던 녀석도 있었다.
“어제 쉬는 날이었지? 그럼 오늘까지 이틀 연속 쉬게 됐네.”
“응.”
“어제는 뭐했어?”
준석으로부터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윤재가 일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질문이었지만 어제 낮에 수영과 잠시 시간을 보냈던 일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그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스치듯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대단할 것도 없는 약속이었고 그 일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괜히 찜찜한 기분을 남기기 싫어 답례를 하겠다고 한 그는 어제의 약속으로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하나의 앙금을 털어냈을 터였다.
“조금 있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여주 들러서 그 때 갔던 그 집 갈까?”
“그 때 갔던 그 집? 여주에... 아, 강된장에 나물이랑 찌개 나오던 그 식당?”
“맞아, 거기. 너 그 때 보니까 되게 맛있게 먹던데. 밥 다 먹고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도 엄청 칭찬했었잖아. 너희 가게에도 수정과 메뉴를 새로 넣을까 생각 중이라면서.”
벌써 일 년이 된 일을 잘도 기억하고 있는 준석을 슬쩍 쳐다본 윤재가 비닐봉지 안에 남아 있는 귤 세 개를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일 년 전에 갔던 건데 그 가게 아직 그대로 있을까? 맛 집이라고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까 손님이 별로 없었잖아.”
“망해서 없어졌으면 근처 다른 데로 가면 되지.”
“어제 야근해서 피곤하다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고 싶지 않아?”
“아까 여주 휴게소를 지나는 길에 갑자기 그 때 먹었던 게 생각나서 말이야. 그때 같이 나왔던 청국장도 구수해서 좋았지. 냄새도 거의 안 났고. 콩비지로 만든 것도 좋았어.”
운전대를 잡은 채 당시 나왔던 메뉴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듯한 준석에게 귤 한 덩어리를 건넨 윤재가 ‘그럼 오랜 만에 한 번 가볼까.’라고 말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준석이 당시 상에 나왔던 음식들을 하나씩 차례로 입에 올림에 따라 자연스레 그때의 맛이 떠오른 윤재는 어느 샌가 다시 한 번 가게에 들러보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명색이 요식업을 하고 있으면서 볼 때마다 말라가는 것 같은 윤재를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준석은 모처럼 먹는 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윤재를 옆에서 지켜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윤재가 살을 찌우겠다는 의지만 보인다면 월급이라도 털어서 실컷 먹여주고 싶은 게 지금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럼 예식장에선 조금만 먹어야겠다.”
문득 옆에서 들려온 윤재의 말에 피식 작게 웃음소리를 낸 준석은 아주 오래 전 후영의 소개로 한 번 보았던 신부의 얼굴을 찬찬히 머릿속에 떠올리며 액셀을 밟았다.
*
청첩장에 인쇄되어 있는 약도대로 찾아간 예식장은 부근의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은 꽤나 그럴 듯 했지만 평소 관리가 잘 되고 있지는 않은지 건물 곳곳에 붙어 있는 현수막은 시커먼 때를 탄 채 펄럭거리고 있었다.
“백합 홀 제2관이라고 쓰여 있네. 건물 앞에 사람이 많은데 좀 전에 있었던 결혼식의 하객들인가 보다.”
차의 시동이 꺼진 뒤 먼저 조수석에서 내린 윤재가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청첩장을 꺼내 다시 한 번 장소를 확인하고서 건물의 입구 쪽에 시선을 던졌다.
한눈에 봐도 하객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정한 정장 차림을 사람들이 각자 대화를 나누며 한꺼번에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춥다. 빨리 들어가자.”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준석이 바로 옆에서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윤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곧 몇 년 동안 만나지 않았던 동창생들과 마주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옆의 윤재는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들 볼 생각하니까 떨려? 아니면 첫사랑의 그녀와 만날까 생각하니 긴장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준석이 장난치듯 묻자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을 던져온 윤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첫사랑의 그녀는 초등학교 졸업한 뒤로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그럼 여기 온 사람 중에 몇 번째 사랑이라도 있겠지.”
“고등학교 때는 계속 공부만 하느라 그쪽엔 아예 신경을 못 써서...”
남들이 들으면 범생이의 재수 없는 대답 정도로 여기겠지만 지금 윤재가 한 대답은 사실 그대로였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형편상 반드시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윤재는 고등학교 시절 누구보다 성실한 학생이었고 그와 같은 노력에 따라 졸업할 때까지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었다. 고2와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준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윤재는 수업 중엔 항상 칠판과 교과서만 보고 있던 학생이었다.
수많은 하객들 사이로 준석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윤재는 자신의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그 정도의 반응에는 익숙해져 있는 그였다.
길을 걸을 때면 어떤 이들은 대놓고 동정의 눈길을 보내왔고, 어떤 이들은 조금 신기해하는 시선을 보내오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은 배려의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모르는 척 지나치는 일이 많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일면식도 없는 윤재의 등을 두드려가며 쯧쯧 혀를 차는 동정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아무리 윤재라도 솔직히 말해 자신을 향한 그와 같은 노골적인 동정의 반응들이 기분 좋게 느껴질 리는 없었지만, 상대가 나쁜 뜻을 품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는 어차피 한순간 스쳐 지날 뿐인 관계라는 생각으로 덤덤히 그 때 그 때의 상황을 넘겨왔다. 그러니 지금의 이 불편한 상황도 이전처럼 덤덤히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아, 이쪽인가 보다. 준석아. 이쪽으로 가자.”
조금 전 지나쳐온 사람들의 반응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준석을 향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인 윤재가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 층만 올라가면 되는데 굳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탈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축의금 잘 챙겼지? 혹시 차에 두고 내린 거 아니야?”
“아, 맞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준석을 조금 당황한 눈으로 쳐다본 윤재가 곧바로 이어 들려온 준석의 웃음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농담이야. 놀라긴. 내가 그렇게 허술한 성격이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준석에게 한소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일단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꾸를 해준 윤재가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백합 홀>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한층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꽃 장식만 아니면 일반 회사 안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만큼 내부의 디자인은 단조로웠다. 외관 공사에 돈을 다 써버린 탓에 안은 최대한 저렴한 비용으로 처리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진지하게 들 정도였다. 만약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지방에 있는 예식장이나 병원은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 만큼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화장실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다가 갈 테니 먼저 가있으라는 준석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윤재는 점차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몇 년 만에 동창들과 만날 생각으로 긴장이 된 그의 얼굴이 한참을 길게 이어지고 있는 복도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굳어져가고 있었다.
사고를 당한 뒤 처음으로 동창들과 만나는 자리인 만큼 당연하게 자신을 향해 올 동정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또 각오하고 있는 윤재는 문득 멀리서 들려온 대화의 한 부분을 듣고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또렷이 들려온 건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윤재랑 준석이는 같이 오는 모양이지?”
“둘이 워낙 친하니까 그럴 걸.”
“준석이는 작년 동창회 때 봤는데 윤재는 진짜 오랜 만에 보는 거 아니야?”
“맞아. 몇 년 동안 못 봤지. 안 그래도 아까 중요한 일 때문에 못 온다고 전화한 성희가 윤재 온다는 얘기 듣고 많이 아쉬워하더라.”
“맞아. 예전에 성희가 윤재 많이 좋아했지. 본인은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라고 했지만 솔직히 그게 거짓말인 거 윤재 빼곤 다 알았을 걸.”
“그러고 보면 윤재가 이상하게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던 것 같아.”
졸지에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윤재가 차마 지금의 타이밍에서 동창들 앞에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떠들썩한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솔직히 별로 이상할 건 없지. 윤재는 공부도 잘 했고 거기에 얼굴도 예쁘장했으니까. 성격도 진짜 좋고.”
“야,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 몇 년 전에 교통사고 크게 나서 다리 절게 됐다며.”
지금 막 들려온 다소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을 윤재는 알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여자애가 윤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 노골적으로 윤재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왔던 조정민이라는 이름의 동창생이었다.
“아니 뭐...”
“솔직히 그걸로 끝난 거 아니야?”
“끝나다니 뭐가?”
“막말로 다리병신인데 어떤 여자가 좋다고 시집오겠냐? 너희들 같으면 여동생이나 딸이 다리 저는 남자한테 시집간다고 하면 좋다고 보내겠어?”
떠들썩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멈추고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야, 정민아. 여기서 그런 얘긴 좀...”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솔직히 그렇잖아. 너희들 다리 저는 남자랑 선 보라는 얘기 아는 여자한테 할 수 있어? 그런 말 했다간 이 새끼가 날 뭘로 보나 하는 얘기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뺨 맞는다고.”
제자리에 선 윤재의 표정이 서서히 얼어붙었다.
무슨 말을 하며, 대체 어떤 얼굴로 저들의 앞에 나서야 할지 한순간에 알 수 없어진 그가 희미하게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순간 문득 익숙한 스킨향이 그의 곁을 스쳐갔다.
조금 전까지 앞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뒤에서 다가온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윤재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빠르게 멀어져가는 뒷모습의 주인이 준석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반사적으로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어, 이준석...”
기둥을 돌아 갑자기 나타난 준석을 발견한 동창들이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을 짓고서 일제히 그에게 몸을 향했지만, 자신을 향한 인사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무리 안으로 섞여든 준석은 곧장 정민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큭-!”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날아온 준석의 주먹에 코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정민이 간신히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 준석을 쳐다봤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불쾌한 비린내가 느껴지는 코에선 어느 샌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 갑자기 나타나서 뭐야, 이 새끼야!”
뜬금없이 폭행을 당한 정민이 한 차례 머릿속을 채운 패닉이 가신 뒤 곧바로 자신이 당한 일을 인식하고 준석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인 준석이 양손으로 거칠게 정민을 멱살을 잡았다.
“좀 전에 뭐라고 했어, 이 씨발 새끼야!”
준석이 이처럼 흥분한 채 험한 욕을 하는 것을 처음 보는 동창들이 일제히 당혹감으로 얼어붙어 있는 사이 맞붙어 있는 두 사람의 언성은 점점 더 거칠고 높아져갔다. 지금 이곳이 예식장이라는 사실 따윈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져 있는 듯 했다.
“좀 전에 뭐? 아, 김윤재 그 자식 얘기 말이야?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다리병신을 다리병신이라고 한 게 뭐!”
높은 언성을 듣고 모여든 주변 사람들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끝내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정민이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날아든 주먹에 입 부근을 얻어맞고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근처에 서있던 화병 위로 쓰러지는 바람에 넓은 복도는 곧 유리가 깨어지는 요란한 소음으로 채워졌다.
“이준석!”
불편한 다리를 움직여 뒤늦게 동창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윤재가 짧은 사이 아수라장이 된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사이 또다시 정민에게 달려들려는 준석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좀 전까지 엉겨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동창들은 뒤늦게 나타난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준석과 윤재를 알고 있는 그들은 조금 전 정민이 한 얘기를 준석이 들었다면 당연히 그와 함께 있던 윤재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 정민의 말을 들으며 그의 의견에 침묵으로 동조했었던 이들은 이야기 속의 당사자가 나타난 지금 조금은 불편한 기분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놔.”
뒤에서 자신을 붙잡는 윤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준석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평소 사리분별이 확실한 모습만을 보여 온 그답지 않게 이곳이 이제 곧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열릴 장소라는 중요한 사실을 차갑게 외면하고 있는 준석은 조금 전 자신의 언사에 대해 일말의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상대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크나 큰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정민은 코에서 흘러나온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준석아, 그만해. 여긴 예식장이야.”
“그래, 준석아. 그리고 조정민. 너 아까 말이 심했어.”
“이제 곧 후영이 결혼식 시작할 텐데 우리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냐. 빨리 정리하고 들어가자, 응?”
“정민아 너도 빨리 가서 세수하고 와. 그리고 피 묻은 셔츠는 일단 벗어. 셔츠는 내가 차에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거 일단 빌려줄 테니 그거 입고.”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로 뒤늦게 나타난 윤재의 눈치를 살피던 동창들 중 몇 명이 이제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서 아직도 대치하고 있는 준석과 정민 사이에 서서 적극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을 만류하고 나섰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보면 정민이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피해자였지만, 아까 전 그의 난폭한 발언을 들어 알고 있는 그들 가운데에는 어느 누구 하나 정민을 옹호하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욕설을 내뱉고 있는 정민을 누군가가 반강제적으로 화장실로 데리고 간 뒤에야 간신히 주변의 분위기가 정리되기 시작하자 그 때까지 복도에 잔뜩 몰려들어 있었던 구경꾼들도 하나 둘씩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준석아.”
아까 전 준석이 정민에게 달려들기 직전 바닥에 내팽개쳤던 코트를 주워서 털어낸 혜선이 아직도 완전히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준석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주워든 그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저, 이쪽 화분은 누가 깨신 겁니까?”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듯 보이는 정장 차림의 직원이 준석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동창들을 훑어보며 묻자 각자 침묵을 지킨 채 서로의 눈치만 보는 상황에서 재철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곳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 평소 정민과 가장 친하게 지내온 걸로 알려진 동창이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있다가 제 친구가 오면 얘기하겠습니다.”
조금 전 화병이 깨진 직접적인 원인을 생각하면 준석도 변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우선 자신의 친구가 애초에 지금의 상황을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고 판단을 내린 재철은 이쯤에서 준석이 기분을 풀 수 있도록 마주한 직원을 상대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예식이 10분도 채 안 남았다는 누군가의 말이 들려온 뒤 그제야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현실로 돌아온 준석은 뒤늦게 윤재를 중심에 싸고서 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는 동창들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교통사고 얘기를 들었다며 과도하게 걱정스런 표정과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은 조금 전 정민의 발언에 침묵으로 동조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정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결혼식은 빠른 시간 내에 끝이 났다.
사회인이 된 뒤로 이미 수없이 많은 결혼식에 참석했던 윤재와 준석은 이전에 보았던 장면들과 마치 판박이처럼 닮아 있는 상황을 그저 말없이 눈동자 안에 담아 넣은 뒤 식순에 따라 진행된 사진촬영에 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의자 다리에 살짝 발이 걸린 윤재가 휘청거리자 미리 나가서 대기하고 있던 동창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따라 뒤를 돌아본 준석에게 괜찮다고 눈짓으로 표시한 뒤 사진사의 안내에 따라 동창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선 윤재는 살짝 고개를 돌려 아주 오랜 만에 보는 후영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신부의 옆에서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다행히 아까 전 있었던 소란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분명 그도 아까의 일에 대해 알게 될 것을 생각하자 자연스레 윤재의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결정적으로 소동을 일으킨 건 준석이고 그 원인을 제공한 건 정민이라고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 소동의 중심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그는 당장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보다도 자신으로 인해 준석이 괜히 안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 걱정이 됐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사진촬영을 마치고서 신랑신부와 간략하게 인사를 나눈 뒤 동창들 틈에 섞여 예식장을 빠져나온 윤재는 줄곧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힐끔거리고 있는 동창들의 시선을 씁쓸한 기분으로 받아넘기며 그들과 인사를 교환했다.
“내일 장사 준비하느라 빨리 올라가야 된다며? 너도 참 바쁘게 산다.”
“바쁜 건 다 마찬가지잖아. 나중에 시간 한 번 내서 얼굴 제대로 보자.”
“그래. 준석이 너도 잘 가. 갈 때 조심해서 운전하고.”
“나중에 연락할게.”
아까 전의 일로 인해 서로 서먹한 분위기에서 이어진 인사를 뒤로 하고 준석과 나란히 그의 차에 오른 윤재는 출발한 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한참을 달리는 동안에도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준석의 굳은 옆모습을 잠시 그대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책망하는 주변의 분위기를 읽어낸 정민이 예식에 참석하지 않고 소리 없이 사라진 뒤 다행히 준석의 흥분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집안 교육을 잘 받아 경우가 바르다는 말을 자주 들어온 그는 뒤늦게 친구의 결혼식에서 소동을 피웠다는 사실을 현실로 인식하고 그에 대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를 유지한 채로 서울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 윤재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한참 만에 불편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왜 나보다 네가 더 화를 내?”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준석이 그제야 앞의 차창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떼어 윤재에게 돌려왔다.
“네가 화를 안 내니까 나라도 내야지.”
“네가 안 냈으면 내가 냈을 거야. 너 때문에 기회를 잃었잖아.”
조금 투덜대듯 윤재가 말하자 준석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아까 예식장에서의 소동 이후 처음으로 보는 그의 미소였다.
“기회를 뺏어서 미안하다. 아깝네. 모처럼 김윤재가 날뛰는 걸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을 하고 나서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흥분해서 날뛰는 김윤재라니,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일보다 세상에 종말이 오는 걸 기다리는 편이 더 현실적일 터였다.
“아까 그 자식이 한 말...”
순식간에 진지하게 가라앉은 준석의 목소리를 듣고 지금 그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을 알아차린 윤재가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신경 안 써. 그런 말 한 두 번 들어온 것도 아니고...”
“.......”
“아, 여기 휴게소 잠깐 들르자.”
다시 가라앉기 시작한 차안의 공기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실은 윤재가 저 멀리 보이는 휴게소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 들르게?”
“아니, 오랜만에 휴게소 표 호두과자가 먹고 싶어서.”
“돌아가면 가게에서 저녁 만들 거라면서.”
아까 전의 소동 이후 급격히 쌓인 정신적 피로를 생각한 윤재는 김천 톨게이트를 통과한 것과 동시에 여주에 들르는 대신 자신이 가게에서 저녁을 만들 테니 곧바로 돌아가자고 말했었다. 오랜만의 기분전환으로 먼 곳에서 외식을 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지만 윤재와 마찬가지로 아까의 그 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의 준석은 순순히 윤재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다음 행선지를 여주에서 서울로 변경했다.
텅 빈 휴게소 주차장 한 켠에 차를 세운 준석이 히터의 온도를 조절하며 말했다.
“20분만 쉬었다가 가자. 커피도 좀 마시고.”
“응, 내가 가서 사올게. 넌 눈 좀 붙이고 있어.”
“내가... 아니, 그래 갔다 와. 난 카푸치노로 사다 줘.”
“응.”
불편한 윤재의 다리를 생각해 습관적으로 먼저 움직이려던 준석이 그렇지 않아도 아까의 일로 생각이 많을 윤재를 배려해 잠시 떼었던 엉덩이를 다시 운전석에 내려놓았다.
-‘막말로 다리병신인데 어떤 여자가 좋다고 시집오겠냐? 너희들 같으면 여동생이나 딸이 다리 저는 남자한테 시집간다고 하면 좋다고 보내겠어?’
눈을 감자 또다시 생생히 떠오른 정민의 폭언에 자연스레 운전대를 잡고 있는 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때 더 심하게 패지 못한 게 후회되는 그였다.
“...씨발 새끼.”
흥분해서 대들던 정민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린 채 낮게 욕설을 내뱉은 준석은 그대로 피로한 눈을 감은 채 머지않아 선잠에 빠져들었다.
*
두 사람이 <민들레>가게 앞에 도착한 건 이제 막 해가 질 무렵이었다.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는 준석을 두고 먼저 조수석에서 내린 윤재는 늘 지겹게 봐온 익숙한 골목을 슬쩍 한 번 둘러본 뒤 가게 앞으로 향했다. 줄곧 따뜻한 히터의 온기에 노출되어 있던 탓일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닿아온 바깥의 공기가 아직은 춥기보다 서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장롱에서 꺼낸 수트 재킷을 팔에 걸친 채 가게 입구로 향하던 윤재가 문득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눈에 들이고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며칠 새 비바람을 맞아 너덜해진 박스 옆에서 깡통의 바닥을 핥고 있는 떠돌이 개를 발견한 그의 뺨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이리 와.”
혹시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서 달아날까 싶어 최대한 느릿하게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춘 윤재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려온 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누런 털에 시커먼 주둥이를 하고 있는 녀석은 한눈에 봐도 시골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믹스견이었다.
미리 놓아둔 먹이를 다 먹고 난 뒤에도 열심히 깡통 바닥을 핥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라고 짐작한 윤재는 조금 전 조수석에서 내리기 전 손에 들었던 종이봉투 안에 손을 집어넣어 먹다 남은 호두과자를 꺼냈다.
“자, 이리 와.”
호두과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쭈뼛쭈뼛 윤재의 앞으로 다가온 개가 잠시 망설이다 윤재의 손에 놓인 하나의 조각을 입에 물었다.
“괜찮아. 다 먹어도 돼.”
다정한 윤재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일까, 다시 용기를 내어 그의 손에 놓인 빵의 파편을 하나하나 물어 넘긴 개는 슬그머니 몇 번을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나섰다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조심스런 윤재의 손길을 허락했다.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윤재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아직 완전히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녀석이 그의 눈에는 너무도 예쁘게 보이고 있는 듯 했다.
“.......”
아까 예식장에서 만난 뒤로 무거운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온 친구와 조금 긴 통화를 마치고 뒤늦게 차에서 내린 준석은 멀찍이서 개를 쓰다듬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서히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한눈에 봐도 떠돌이 생활을 많이 한듯 꼬질꼬질한 몰골을 하고 있는 개를 연신 쓰다듬고 있는 윤재는 중간 중간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윤재의 마른 뒷모습 위에 아까 예식장에서 있었던 불쾌한 기억을 겹쳐 떠올린 준석이 잠시 제 자리에 멈춰서있던 다리에 힘을 실은 순간,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서늘한 침묵을 깨고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석아. 이 녀석 귀엽지?”
“...좀 씻겨야겠다. 너 이제 손에서 엄청 냄새 날 걸.”
“...응. 씻으면 되지 뭐.”
“.......”
“준석아.”
“왜?”
“...넌 날 동정하지 않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고 일순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준석이 잠시 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해줘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지금 여기서 평소와 다른 목소리가 나오게 되면... 그게 무서웠다.
마지막 호두과자를 내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잠시 동안 정성스레 쓰다듬어 주었던 떠돌이 개를 품에서 놓아준 윤재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난 뒤 준석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들려온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준석을 향하고 있는 윤재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들어가자. 저녁 해줄게.”
탁탁 손을 털고 앞서 걷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그대로 말없이 지켜본 준석은 윤재가 가게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한 감정이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