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한 시간 전부터 서서히 흩날리기 시작하던 눈발이 오후 네 시를 넘어선 시점에서 조금씩 굵게 변해가고 있었다. 창밖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골목은 어느 샌가 하얀 옷을 덮어쓰고 있었고, 간혹 새하얀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는 행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외투에 붙어 있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창문의 중앙 부근을 지나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 빠르게 새하얀 종이 위에 옮겨 그려지고 있었다. 목에 두른 머플러의 무늬와 걸음걸이의 형태까지 비교적 디테일하게 표현되어지고 있는 창밖의 모델은 눈이 쌓인 빙판길을 지나던 도중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크게 미끄러졌다. 그리고는 이어 콰당-하는 제법 큰 소리가 고요한 골목 안에 짧게 울려 퍼졌다.
“!”
예상치 못한 장면을 시야에 들인 것과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멈춘 윤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조금 전 엄청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미끄러졌던 아주머니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빨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혹시 누군가 본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흘깃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괜찮으신 건가...’
자신의 모델이 되어준 대상을 향해 잠시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던 윤재는 결국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들고 있던 연습장과 연필을 근처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모처럼 만의 습작 역시 앞의 장에 남은 그림과 마찬가지로 미완인 채로 남겨지게 되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 욱신거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을 확인하고 아주 오랜만에 연습장과 연필을 들었던 윤재는 이번에도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씁쓸한 표정으로 내려다본 뒤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역시나 평소보다 높은 열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처음엔 단순히 늦잠을 잔 탓에 아직까지 나른한 기운이 남아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열이면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분명 정상의 범위 내는 아니었다. 나흘 전 대규모 단체 손님을 받고난 뒤 이상할 정도로 가게에 손님이 밀려들어 연속 나흘을 바쁘게 움직이고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후유증이 이제야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일도 일이지만 운영하는 가게의 특성 상 종종 취객들과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얻는 스트레스가 지금의 상태를 만든 더 큰 원인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윤재는 열로 뜨거워진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생각했다.
가는 한숨으로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침대 옆 탁상시계에 시선을 던진 윤재가 이제 슬슬 가게에 나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전 식재료를 많이 사두었던 덕분에 오늘은 따로 장을 보지 않아도 여유 있게 버틸 수 있을 듯 했지만 급격히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 상태를 보면 장보기는커녕 당장 가게에 나갈 채비를 하는 것마저 쉽지 않을 듯 했다.
어쨌든 미리 사둔 채소의 신선도를 생각해 무리해서라도 출근을 하기로 결심한 윤재는 먼저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아직 흥건히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에 전원을 넣으려던 그는 무심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스스로가 봐도 수척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단순히 열이 있어서라고 보기엔 그 느낌이 꽤나 강해서 평소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없는 윤재는 이제야 새삼 자신을 향한 모친의 당부를 진지하게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볼 때마다 수척해지는 것 같다고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모친의 우려 섞인 말들이 아무래도 괜한 조바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아직 회사에 다니던 시절과 비교해 눈에 띠게 갸름해진 턱을 잠시 거울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재는 천천히 피로한 눈을 감았다가 뜬 뒤 어쨌든 출근 준비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열의 기운이 있던 몸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점점 더 노곤해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하루 이대로 푹 쉬고 싶었지만 하루 장사를 쉬게 될 경우 보게 되는 손해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몸이 자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서둘렀음에도 평소보다 이십 분은 더 걸려 외출채비를 마친 윤재는 두터운 코듀로이 바지에 얼마 전 시장에서 저렴하게 산 점퍼로 중무장을 하고서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시점에서 잔기침이 나기 시작했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갈 마음은 없는 그는 아까 전 일기예보에서 본대로 꽤나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뚫고 좁은 골목 한 켠에 주차해놓은 차 앞으로 다가갔다.
아까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덮여 있는 소형차는 1년 전 윤재가 아는 친구를 통해 저렴하게 산 중고차로, 가끔 장을 보거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되고 있었다. 또래의 친구들과 달리 그다지 차에 대한 욕심이 없는 윤재는 벌써 1년을 사용한 자신의 차를 평소 가끔 세차를 해주는 정도로만 간단히 관리해주고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후드를 벗은 윤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눈발은 좀 전보다 눈에 띠게 굵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적어도 한 두 시간 이내로는 그치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어쩔 수 없나...’
아무래도 차를 이용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을 내린 윤재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끄러운 길을 불균형한 걸음걸이로 이동하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직접적으로 찬바람을 쐰 뒤로 급격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는 와중에도 가게 문을 열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앗!”
꽁꽁 얼어붙은 바닥 한 켠에 왼발이 닿은 것과 동시에 크게 균형이 흐트러진 몸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짧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단단한 빙판에 엉덩방아를 찧고 만 윤재가 순식간에 꼬리뼈를 강타한 통증을 느끼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엄청난 통증이었다.
“으...”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윤재가 차가운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지금 자신이 넘어진 구간이 아까 전 습작의 모델이 된 아주머니가 넘어진 부근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단 몸을 일으킨 뒤 근처에 쌓여 있는 눈의 일부를 손으로 그러모아 주변에 흩뿌렸다. 후미진 곳에 위치한 이 동네에는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큼 방금 전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사고가 연이어 발생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은 마음에 의한 행동이었다.
양손 가득 눈을 집어 뿌리는 행동을 몇 번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손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조금 전 정면으로 딱딱한 얼음바닥에 부딪친 충격으로 허리와 엉덩이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걷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심각하게 다친 곳은 없는 듯 했다. 가뜩이나 살집이 없는 터라 마찰 과정에서 남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을 감안하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서서히 걸음의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무래도 몸을 뒤덮은 열이 심상치 않았다. 예전에도 몇 번 심하게 독감을 앓은 적이 있었던 윤재는 지금 급격히 오르고 있는 열이 당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병원에 계신 모친이었다. 이틀 뒤 반찬을 전해주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기로 이미 모친과 약속을 해놓은 그의 입장에서 감기에 걸리는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잠시 제자리에 선 채 고민을 하던 윤재가 결국 가게로 향하는 것을 포기하고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성호에게 전화를 건 그는 잠시 동안 이어지던 통화 연결음이 끊어지고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낸 채 짧게 기침을 했다. 찬바람을 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잔기침의 횟수가 늘어나 있었다.
[사장님?]
“아, 응. 나야.”
[네. 근데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성호에게 목소리를 지적받은 윤재가 살짝 쓴웃음을 머금었다. 처음엔 단순히 늦잠을 잤기 때문에 잠겨있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아무래도 그 사이 더 심하게 가라앉아버린 듯 했다.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 그래서 말인데...”
[네? 감기요? 괜찮으세요?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진심어린 걱정이 담겨 있는 성호의 말을 듣고서 다시 짧게 기침을 한 윤재가 말을 이었다.
“조금 열이 있는 정도라 괜찮아. 그래도 일단 악화되지 않게 조심해야지. 저기,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하루 가게를 쉬려고 해. 그러니까 오늘은 성호 너도 나오지 말고 쉬어.”
갑작스런 휴일이 주어진 만큼 조금은 기뻐할 거라는 윤재의 기대와 달리 짧은 텀을 두고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걱정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가게를 쉴 정도면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평소 웬만한 일로는 아픈 티를 내지 않는 윤재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성호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왔다.
“응, 그냥 초기 때 떨쳐내려고 조심하는 것뿐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아무튼 오늘은 쉬는 걸로 할 테니까 가게에 나오지 않아도 돼. 알았지? 최근엔 계속 바빴으니까 오늘은 성호 너도 푹 쉬어.”
애써 평소보다 조금 톤을 높인 목소리로 적당히 통화를 마무리 지은 윤재는 핸드폰을 다시 점퍼 주머니에 넣은 뒤 천천히 오던 방향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두터운 점퍼와 머플러로 중무장을 한 덕분에 찬바람이 안으로까지는 파고들지 않고 있었지만 이 상태로 밖에 오래 머물면 자연히 몸 상태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서둘러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잔기침은 기침으로 변해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일러를 켰음에도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 바닥 위에 두꺼운 이불을 깐 윤재는 아까 얼음판에서 미끄러진 충격으로 여전히 욱신거리는 몸을 그 위에 누이고 눈을 감았다. 피로와 열, 통증으로 덮인 몸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아직 방안에 한기가 돌고 있기 때문인지 자리에 누운 지 한참이 지나도록 윤재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콜록 콜록...
점차 간격은 짧아지고 강도는 세지는 기침에 서서히 등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문득 따끈한 국물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는 냄비를 손에 들기는커녕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열이 있는 상태에서 샤워를 하고 곧장 찬바람까지 쐬었으니 몸 상태가 악화되는 건 차라리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렇게 가게를 쉬는 결정을 내릴 거였다면 애초에 외출 채비를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와서 후회를 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손바닥을 이불 밖의 바닥에 대 조금 데워진 바닥의 온기를 확인한 윤재가 몸을 웅크린 채로 또다시 기침을 했다. 내일 가게 문을 열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둬야 했지만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기침 탓에 아무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그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걱정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틀이나 쉴 수는 없는데...’
가게도 가게지만 이틀 뒤 모친의 문병을 가기 위해서는 한 시라도 빨리 몸 상태를 회복시켜야만 했다. 최근 며칠 동안 장사가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 하루 가게 문을 닫는 결정을 내린 것만으로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는 윤재는 이 이상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몸을 추슬러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결국 하루 사이 독감에 걸린 몸은 꼬박 하루가 지나자 전날에 비해 몇 배는 더 무거운 상태로 변해 있었다. 중간에 보일러를 끄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깊은 잠을 잔 덕분에 새벽 즈음 펄펄 끓던 열은 많이 내려간 상태였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침으로 인해 배와 허리에는 근육통이 생겼고 목안은 많이 부어 있었다. 더불어 어제 빙판에서 넘어지며 부딪친 꼬리뼈 부근도 여전히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쪽 근처엔 틀림없이 시퍼런 멍이 들어있을 터였다.
지금의 몸 상태로 가게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윤재는 씁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약 억지로 문을 연다고 해도 당장 찌개 하나 끓일 기력이 지금의 그에게는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성호에게 자신의 몫까지 무리하게 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서빙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성호는 어디까지나 보조의 개념으로 주방을 오고 갔을 뿐 사실 상 그가 혼자서 손님 테이블에 내갈 수 있는 건 고작 해야 간단한 마른안주를 담은 접시 정도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성호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까지 가게를 쉬겠다는 이야기를 전한 윤재는 3일 연속 가게를 쉬어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심각한 것인지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하며 묻는 성호에게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사실 다소 무리를 한다면야 일상생활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듯도 했지만,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사람을 상대하거나 바쁘게 요리를 하기에 그의 몸은 현재 체력 면에서나 집중력 면에서 많이 떨어져있는 상태였다. 나흘간 괜찮은 수입을 올려 기뻐한 것도 잠시, 연이은 사흘을 홀랑 날려버리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 가뜩이나 두통으로 아픈 머리가 정신없이 교차하는 수많은 생각들로 더 지끈거려왔다.
몇 번째인지 모를 긴 한숨을 내쉰 윤재가 억지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여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가게 안에서 손님을 맞을 준비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잔 탓에 더 이상은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윤재는 줄곧 마음에 걸리고 있던 부분을 진지하게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가게를 쉬게 됨으로 인해 평소대로 <민들레>를 찾은 손님들에게 헛걸음을 시키게 된 데 대한 미안함이었다. 특히나 요 며칠은 한창 손님들로 붐볐던 터라 그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슴 안에서 더욱 커져만 갔다.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윤재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당장 가게 문은 열 수 없더라도 적어도 일부러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휴무의 기간을 알리는 종이 한 장 정도는 붙여둬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가장 먼저 밤새 뜨거운 바닥에서 열에 시달리며 흘린 땀을 씻어내기 위해 간단히 샤워를 한 뒤 서둘러 나머지 외출 채비를 이어갔다. 이왕 가게를 방문하는 김에 당장 내일 쓸 거라고 생각하고 주방 안에 그대로 놔두고 온 몇몇 채소들의 상태도 살펴 볼 필요가 있었다.
아픈 목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목 부분이 타이트한 검은색의 터틀넥 니트를 입은 윤재는 그 위에 자주 입는 두터운 야상점퍼를 걸치고 다시 한 번 머플러를 둘둘 감는 것으로 나름대로 중무장을 했다. 잠깐 창문을 열어 보니 다행히 어제와 비교해 바깥 온도가 오른 것 같았지만, 지금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외출을 자제하는 편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최대한 빨리 갔다 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현관문을 나섰다.
집안에서 창을 통해 느낀 것과 달리 정작 나와 보니 바깥의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오늘 새벽까지 내린 눈으로 인해 꽁꽁 얼어붙은 길 위로 옮겨지는 걸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서 평소 5분 정도 걸렸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는 데 오늘은 그 두 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집에서 가게까지 버스를 타고 걸리는 시간은 약 20여분.
빈 좌석이 없는 버스에 올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선 윤재가 문득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그의 앞에 앉아 있는 한 젊은 여성이 스치듯 윤재를 흘겨보았다. 혹시나 자신에게 병균이 옮을까 잔뜩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기침을 억지로 참아낼 수도 없어 이번에는 점퍼의 소매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 윤재는 결국 뒷자리로 옮기는 여성을 슬쩍 쳐다본 뒤 눈앞에 생겨난 빈자리에 천천히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자 일시에 나른함이 밀려왔다. 좌석 아래에서 올라오는 히터의 열이 그렇지 않아도 노곤한 몸을 한층 더 노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약 이동하는 구간이 길었다면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른한 상태에서도 애써 정신을 놓지 않고 정확히 목적지에서 내린 윤재는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 <민들레>앞에 도착한 뒤 평소보다 좀 더 많은 힘을 들여 셔터를 올리고 가게 문을 열었다. 이틀 만에 찾은 가게는 기분 탓인지 묘하게 휑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루에 못해도 두 번 이상씩은 바닥을 쓸고 닦는 청소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기력이 없는 윤재는 곧바로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시들었네...’
역시나 예상대로 살짝 시들어 있는 채소들을 냉장고 안에 집어넣은 윤재는 이틀 전 새벽 자신이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고 간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주방 안을 천천히 둘러본 뒤 가게 입구를 나섰다. 이틀 뒤 아침에 출근하면 그때 제대로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역시나 평소보다 많은 힘을 들여서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잠근 윤재가 미리 집에서 가지고 온 종이를 셔터 위에 테이프로 붙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정으로 3일간 쉽니다.
지극히 간략한 문구가 윤재 특유의 정갈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혹시나 강한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까 싶어 누런 박스 테이프를 몇 번이나 덧대어 붙인 윤재는 남은 테이프를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고 길을 나서려다 문득 발길을 돌려 가게 부근의 한 구석으로 향했다.
깡통에 담긴 사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걸 확인한 윤재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드리워졌다. 몇 번인가 텅 비어있는 깡통을 발견하고 기뻐했던 그는 이전에 몇 번 직접 손으로 쓰다듬어 준 적이 있는 꼬질꼬질한 떠돌이 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처음엔 경계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에게 활기차게 꼬리를 치며 몸을 내맡겼던 녀석을 윤재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따뜻한 사람의 손을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순순히 자신을 따랐던 녀석을.
벌써 며칠 전에 놓아둔 사료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 다른 먼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기도 한 윤재는 잠깐 사이 더 차가워진 바람을 뺨으로 느끼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당장 해야 할 일은 했으니 이제 빨리 돌아가서 푹 쉬자고 생각한 그는 잠시 한 곳에 머물러 있던 발을 움직여 아까 걸어온 방향을 향해 되걷기 시작했다.
‘집에 가면 간단하게라도 뭘 먹어야 할까. 일단 가다가 슈퍼 들러서 참치죽을 하나 사서...’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몸을 움츠린 채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문득 이제 막 곁을 스쳐가는 행인의 대화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완전 찌그러져 있었다니까!”
“난 잘 못 봤는데 개였어? 고양이였어?”
“나도 깜짝 놀라서 제대로는 못 봤는데 얼핏 보기엔 개 같던데? 주위에 막 핏자국 있고...아, 다시 생각하니까 진짜 끔찍하다.”
“나 학교 갈 때 맨날 그 길로 다니는데 빨리 누가 좀 치워주지. 내일 아침에도 또 보는 거 아냐?”
“아, 싫어. 자꾸 떠오르니까 이제 그 얘기 그만 하자.”
멀어져가는 대화를 듣던 윤재가 재빨리 몸을 돌려 나름대로 멋을 낸 옷차림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저기 미안한데 지금 봤다는 개, 어디쯤에 있었는지 좀 알려줄래?”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온 낯선 남자의 존재에 잠시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던 두 명의 여학생이 뜻밖에 산뜻한 느낌이 드는 윤재의 얼굴을 훑어보곤 이내 경계심을 풀고 대답했다.
“저기 앞에 골목 돌아서 쭉 가다보면 둘리 슈퍼라고 나오거든요. 그 앞의 차도요.”
“그래, 고맙다.”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돌린 윤재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길 바랐지만 어째서인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필 이 골목 부근에서 개가 차에 치어 죽었다는 사실은 윤재로 하여금 자꾸만 하나의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가끔씩 가게 앞에서 보면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꼬질꼬질한 녀석을.
잠시 후 조금 전 여학생들로부터 전해들은 장소에 다다른 윤재는 차도 부근에 널브러져 있는 한 마리의 동물 사체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갔다.
누런 털에 시커먼 주둥이의 믹스견이 터진 배 밖으로 내장의 일부를 드러낸 채 인도 쪽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윤재가 부디 아니길 바랐던 녀석이었다.
“.......”
잠시 못 박힌 듯 그대로 서서 죽은 개를 내려다보던 윤재가 이내 등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그 사이 부근을 지나던 행인들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눈앞에 보이는 죽은 개에 대한 이야기를 옆의 일행들과 나누고 있었다.
“어머, 불쌍해.”
“차도를 지나다가 차에 치었나봐.”
“근데 이런 건 누가 치우지? 아니면 그냥 썩을 때까지 방치하는 건가?”
“이런 추운 날씨에 썩을 때까지 언제 기다리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아침에 청소부들이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을까?”
“불쌍해...”
동정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차창으로 스치듯 쳐다본 수영이 마침내 신호가 바뀌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점점 가깝게 보이는 개의 사체를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본 그는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시야에 들어온 눈에 익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일순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스쳐 지난 뒤 사이드미러에 비쳐 들어온 것은 분명 그가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김윤재?’
갓길에 차를 세운 수영이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헌 박스를 접어 옆에 내려놓은 윤재가 믿을 수 없게도 죽은 개의 사체 앞으로 다가가더니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옆에 만들어둔 종이 박스 안에 들고 있던 개의 사체를 넣은 그는 놀란 행인들의 시선 속에서 상자를 안아들었다. 당장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부자연스러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잠시 사이드미러로 지켜보던 수영이 문득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
갑작스럽게 시야 한 쪽에 등장한 수영의 모습에 무심코 걸음을 멈춘 윤재가 이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걸 들고 어디 가는 거야?”
“...근처에 작은 야산이 있어요.”
“가게는 어쩌고?”
늦은 약속까지 사이의 남는 시간 동안 윤재의 가게에 들르려던 수영이 질문을 던지자 양손으로 박스를 안아든 채로 서있는 윤재가 대답했다.
“내일까지는 문을 닫아요.”
윤재의 낮게 잠겨 있는 목소리를 듣고 눈치껏 그 이유를 짐작한 수영이 윤재의 품안에 있는 상자를 흘깃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타. 가는 길까지 바래다줄게.”
갑작스런 제의에 살며시 눈을 크게 뜬 윤재가 곧바로 미간을 좁히고 대답했다.
“아뇨. 멀지 않으니 그냥 갈게요.”
“타. 괜히 몸 상태 악화시키지 말고.”
한눈에 봐도 아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왜 이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미간을 좁힌 수영이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 윤재를 대신해 자신이 직접 조수석 문을 열고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오는 수영의 시선을 마주한 채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던 윤재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리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는 통증을 느끼고 있는 그는 문득 자신의 손안에 있던 박스의 무게가 일시에 사라진 것을 느끼고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수영의 손으로 옮겨 간 박스가 조수석에 놓여지고 있었다.
그 이상 재촉하는 대신 운전석에 오르는 수영을 잠시 그대로 바라보던 윤재는 문이 열린 조수석에 놓인 상자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또다시 시작된 기침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근처의 야산까지는 가깝다고 해도 걸어서 삼 십 여분.
아까 전 셔터 위에 써 붙여둔 대로 정확히 이틀 뒤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 이상 몸 상태를 악화시켜선 안 된다고 생각한 윤재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 기침을 이어가는 와중에 무거운 걸음을 옮겨 수영의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나마 침묵을 깨뜨리는 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윤재의 기침소리로, 그때마다 슬쩍 윤재를 쳐다본 수영은 그러나 차가 멈춰 설 때까지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목적지인 야산에 도착한 건 차로 출발한지 십 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굳이 높이 올라갈 필요도, 기력도 없는 상황에서 적당히 개의 사체를 묻을 만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긴 윤재는 아마도 봄이 오면 화려한 꽃들로 장식될 화단 근처의 한곳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박스의 한 면을 찢어 대충의 형태를 만든 뒤 그것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찰칵-
어둠 속에서 불꽃이 한순간 생겨났다 사라진 뒤 이어 희뿌연 연기가 수영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윤재의 곁에 선 수영은 그저 말없이 개의 사체가 묻히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생각보다는 간단한 과정이었다.
“아는 개야?”
문득 침묵을 깨고 들려온 수영의 질문에 잠시 손을 멈춘 윤재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네에서 가끔 본 적이 있어요. 몇 번 밥을 준 적도 있고요.”
“이름은?”
“.......”
“.......”
“...괜히 정이 들까봐 이름은 붙이지 않았어요.”
덤덤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윤재의 옆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수영이 들고 있던 담배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연신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창백한 윤재의 뺨 위로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은 마치 한순간 눈을 감았다가 뜨면 영영 사라질 것처럼 아련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수영으로 하여금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죽은 개의 무덤을 만들어준 윤재가 손을 털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죽어 있는 모습을 봤을 땐 분명히 놀랐었지만 마지막까지도 끝내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슬프지 않은 게 아닌데도.
아까 전 도로 옆에서 개의 사체를 목격했을 때, 윤재는 기시감을 느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묵직한 감정과 함께. 수년 전 그의 부친도 새벽녘, 차에 치어 방치된 채 도로변에서 발견이 됐었다.
“!”
문득 들려온 핸드폰 벨소리에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수영이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고 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많이 남아 있었지만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찍 일이 해결된 듯 했다.
“가보세요. 이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전 그쪽으로 갈게요. 여기까지 태워다줘서 고마워요.”
눈치껏 수영에게 말을 건넨 윤재가 박스를 집어 들어 접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버스 정류장까지는 멀지 않으니 충분히 혼자 갈 수 있었다.
“...갈게.”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윤재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수영은 또다시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곧바로 등을 돌려 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벨소리가 끊긴 뒤 곧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잠시 들려왔다가 이내 멀어졌다.
잠시 후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린 뒤 자신도 몸을 돌린 윤재는 들고 있던 박스를 근처의 폐품 함에 세워놓은 뒤 추위로 벌겋게 변한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조금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많이도 추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