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19화 (19/66)

19.

“이 부분 내가 분명히 고치라고 말해놨는데 그대로네요. 늦게까지 야근했다면서 대체 그 시간 동안 뭘 한 겁니까?”

“정말로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평소 듣기 어려운 수영의 날카로운 호통소리에 잔뜩 기가 눌린 범호는 벌써 몇 분 째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연신 사과의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비교적 큰 문제없이 일을 해왔던 그는 최근에 4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후로 눈에 띠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지금 그를 상대로 화를 내고 있는 수영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큰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범호가 작성한 서류에서 작은 실수를 발견하고 가볍게 주의를 주는 정도로 넘겼던 수영은 이후 또다시 비슷한 실수를 발견하고 수정을 지시했음에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수정이 이뤄지지 않자 마침내 상사의 입장에서 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의 범호는 자신에게 쏠려 있는 주위의 시선을 인식하고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처럼 처참하게 깨지는 모습이야 당연히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지만 특히나 지금 그의 수치심을 한계까지 자극하고 있는 건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지금의 이 상황을 모조리 눈에 담고 있을 여직원들의 존재였다. 남들에 비해 한참 빠지는 외모로 인해 여성을 대하는데 있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그는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반성을 하는 한편으로 이로써 자신이 여직원들의 티타임에 등장할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하필이면 지금의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상대는 회사 내 여직원들의 선망이 되고 있는 남자인 만큼, 그런 남자의 아래서 일방적으로 저자세를 취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범호의 자존감은 자연스레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이쪽 서류도 따로 지적받을 부분이 없는지 미리 알아서 검토하세요. 오후 미팅 전까지 다 끝내요.”

“아...”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지는 범호를 쳐다보는 수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서 더 나가면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의식적으로 입을 다문 채 서류만을 건넨 그는 양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건네받고 자리로 돌아가는 범호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철우가 잠잠해진다 싶더니 이번엔 평소 문제도 안 일으키던 범호가 대신해서 일거리를 늘리고 있었다. 입사 선배인 철우보다야 한참 후배인 범호 쪽이 상대하긴 편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듯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어야 할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사태는 수영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침에 일어난 뒤로 줄곧 나른한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오늘 자신의 신경이 평소보다 많이 날카로워진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만큼 어쨌거나 동료 직원들에게 최대한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틀 전부터 컨디션이 평소와 다른 상태임을 느끼고 있었던 수영은 정오를 훌쩍 넘긴 지금 몸을 감싸고 있는 열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감기일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씩 목을 간질이는 기분 나쁜 감각이 그 뚜렷한 증거였다.

‘옮은 건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사흘 전 만났던 윤재의 얼굴을 떠올린 수영이 쓰게 웃었다. 같이 있던 시간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금방 옮아버릴 정도로 자신의 면역력이 떨어져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한심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그였다. 평소 야근이 잦은 데다 약간의 불면증을 앓고 있던 것이 은연중에 몸 상태를 나쁘게 만들고 있었던 탓일 거라고 나름대로 면역 저하의 원인을 짐작한 그는 잠시 후 곁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알아차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책상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건 철우였다.

“잠깐 쉴까?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눈치 없는 철우가 알아차릴 정도면 피로한 기색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수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범호를 상대로 한바탕 싫은 소리를 하고 난 뒤 니코틴이 당기던 그였다.

“월요일부터 만원이네.”

언제나 그렇듯 이미 많은 선객들로 채워져 있는 흡연실 안으로 나란히 들어선 수영과 철우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터라 담배를 끊어볼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은 했던 수영은 그러나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금연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너무 그렇게 화내지는 마. 물론 같이 일을 하는 우대리의 입장에서야 충분히 화가 날 만도 하지만.”

더없이 진지한 철우의 말을 듣고서 별로 당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한 마디 쏘아붙여줄까 생각하던 수영은 결국 쓴웃음을 짓는 정도의 가벼운 대꾸만을 해주었다. 최근 실수를 많이 줄인 뒤로 기세가 등등해진 철우는 어느새 입장을 바꿔 실수를 하는 다른 직원들을 찾아가 사람 좋은 선배의 얼굴로 조언을 해주는 모습을 종종 보이고 있었다. 수영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일단 사회인의 가면을 덮어쓰고 있는 그는 철우가 입사 선배라는 점을 감안해 특별히 그에 대한 속내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소문 들었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받은 수영이 무슨 의미냐고 시선으로 묻자 슬쩍 주위를 둘러 본 철우가 이어서 말했다.

“우대리가 이번에 새로 생기는 기획팀의 팀장이 될 지도 모른다는 소문 말이야.”

철우의 말을 들은 뒤에야 속으로 ‘아아.’하고 납득한 수영은 그러나 일단 겉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 따위에 일일이 휘둘릴 마음이 없는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해서 이야기는 철우의 모습을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만약 이번에 자네가 팀장이 되면 역대 최연소라고. 승진이야 이미 따 놓은 당상인 건 말하면 입 아프고.”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잖습니까.”

“그래도 이번 이야기는 인사과에서 나온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꽤나 신빙성이 있지. 어때, 우대리도 사실 속으로는 엄청 기대되지?”

호들갑스런 철우의 태도에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대답했다.

“원래 일이 확정되기 전까진 믿지 않는 주의라서요. 만약 정말로 승진이 된다고 해도 그만큼 해야 하는 일도 늘고 부담도 커지니까 무턱대고 기뻐할 수도 없을 것 같네요.”

지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평생을 놀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재력가 집안에 태어난 수영은 승진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선망을 품고 있지 않았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말단에 머무르는 비참한 상황은 원치 않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른 승진이나 성공은 그만큼 부작용이 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냉정하네, 우대리는. 나라면 소문만 돌아도 벌써 가슴이 뛰어서 일이 손에도 잘 잡히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당신이 일을 못하는 거라고, 철우를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 수영은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연말이라 한창 떠들썩한 시기임에도 비즈니스의 중심지인 이 인근에선 전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단 몇 정거장만 지나치면 곧바로 다른 세계가 펼쳐지긴 했지만.

“우대리님, 과장님께서 찾으세요.”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동료 직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적당히 처리하고 입구로 향했다. 지금의 갑작스런 호출은 아마도 아까 전 범호가 실수한 일과 관련된 일일 거라고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먼저 갈게요.”

“아, 응. 수고해.”

철우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흡연실을 빠져나온 수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이 닿는 순간 느껴진 차가움의 정도로 보아 아무래도 지금 얼굴엔 꽤나 뜨거운 열이 올라와 있는 상태인 듯 했다.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은 부디 오늘 만큼은 야근이 없기를 바라며 사무실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

타이머에 맞춰 작동되는 공기청정기의 기계음이 평소보다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눈을 떠보니 침대 옆에 놓인 시계는 이제 겨우 열 시가 조금 넘어섰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 열을 느끼며 곧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은 수영은 그러나 그 상태로 몇 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시 수면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빌어먹게도 잠드는 타이밍을 놓쳐버린 듯 했다.

모처럼 칼 퇴근을 한 보람도 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악화되는 몸 상태를 느끼고 있는 수영은 귀가를 하는 길에 처방받은 약을 먹기 위해 억지로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 내일 아침에도 출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우선적으로 걱정부터 드는 수영이었다. 일단 아침이 되어서 지금보다 몸 상태가 더 악화되어 있을 경우 하루 병가를 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는 넓은 부엌 안으로 들어가 몇 시간 전 식탁 위에 놓아둔 약봉지를 집어 들었다. 평소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주치의로부터 진단을 받은 후 대부분의 약을 처방 받았지만 지금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건 회사 근처의 약국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냉수와 함께 처방받은 약을 목 안으로 흘려 넘기고 피로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 수영은 일단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 다시 침실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입맛이 없어 빈속에 약을 집어넣은 탓에 속이 쓰려왔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 정도의 통증은 온몸을 뒤덮고 있는 열과 욱신거리는 두통에 밀려 희미하게 인지되는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다.

“!”

커다란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른 채 넓은 거실을 지나던 수영이 문득 들려온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무심코 발을 멈추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10시 25분.

의아한 기분을 안은 채 인터폰 앞으로 다가간 수영은 잠시 후 화면에 뜬 얼굴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런 방문자는 호연이었다.

먼저 1층의 문을 열어준 뒤 현관 앞으로 다가간 수영은 잠시 후 기다렸던 초인종 소리를 듣고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자고 있었어? 미안. 온다고 말하려고 중간에 차에서 전화를 했는데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길래 그냥 와버렸어.”

그렇게 말하며 집안으로 들어서는 호연의 손에는 뭔가로 가득 채워진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야?”

“아까 전화 통화로 들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길래 걱정이 돼서. 지금 이렇게 눈으로 보니까 역시 괜한 걱정은 아니었던 것 같네.”

짧게 한숨을 내쉰 호연이 들고 있는 짐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녁 먹었어?”

“...아니.”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난 실력발휘 좀 할 테니까 당신은 누워 있다가 내 실력 좀 평가해줘. 미리 말해두는데 당신한테 거부권은 없어. 아, 전복죽 먹을 수 있지?”

마치 직장의 상사 같은 말투를 쓰는 호연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인 수영은 자신에게 죽을 끓여주기 위해 일부러 장까지 봐온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호연의 손에서 짐을 건네받아 부엌으로 향했다.

“안 들어줘도 되는데. 환자한테 이런 것까지 들어달라고 할 정도로 몰인정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머금은 호연이 짐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마자 돌아서려는 수영의 팔을 붙잡고 다른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곧바로 손바닥에 닿아온 열의 정도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호연의 미간이 일순간에 좁혀졌다.

“열이 꽤 높네. 약은 먹었어?”

“조금 전에.”

“그럼 빈속에 먹었겠네. 그게 안 좋은 건 알지? 아니, 잔소리 하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그건 넘어가기로 하고. 난 지금부터 죽 끓일 테니까 당신은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어.”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남자의 뺨을 부드럽게 손으로 쓸어준 호연이 돌아서서 부엌을 나가는 수영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코트를 벗어 근처의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사실 오늘은 가까운 지인들과의 중요한 모임이 있었지만 아까 전 수영과 통화를 한 뒤 계속 그쪽에 신경을 쓰고 있던 호연은 결국 그 중요한 자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었다. 아마 약속대로 모임에 참석했더라도 수영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제대로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그는 끝내 원하는 선택을 한 지금 더없이 만족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거의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 해온 호연은 모처럼만에 제대로 요리를 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수영 역시 집에서 요리는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듯 고급스런 싱크대의 선반에 놓인 냄비와 식기들은 마치 새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좀처럼 사용되는 일이 없어 보이는 물건들은 그럼에도 모두가 값비싼 브랜드의 제품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금 주방 내에 구비되어 있는 식기들을 구매한 것은 수영이 아닌, 그의 모친일 거라고 호연은 짐작하고 있었다.

유명한 한식조리사인 누나의 영향으로 기본적인 음식들은 준전문가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호연은 평소보다 많은 정성을 들여 미리 목표로 한 전복죽을 완성해 나갔다. 원래보다 푸짐하게 준비된 재료들 중에서 특히 전복은 평소 그가 지인들과 자주 가는 음식점에서 직접 공수해온 고급품이었다.

마침내 정성 속에서 죽이 완성된 뒤 일단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침실로 향한 호연은 그 사이 잠들어 있는 수영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처럼 무방비한 상태로 눈을 감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 호연이었다. 평소의 모습도 멋지지만 눈을 감은 얼굴 역시 멋진 그림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수영의 얼굴은 확실히 나쁜 컨디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미 수없이 겹쳤던 모양 좋은 입술은 메마른 느낌을 주고 있었고, 전체적인 안색은 열이 오른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한동안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수영이 문득 미간을 좁히고서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은은한 조명에 비춰지고 있는 그의 잘 생긴 얼굴은 안쓰러울 만큼 피로해 보였지만 동시에 묘한 색기(色氣)를 머금고 있었다.

“죽... 다 됐어?”

“응.”

천천히 팔을 뻗어 수영의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댄 호연이 짧게 대답했다. 역시나 손등에 닿는 열이 상당했다.

“가져다줄까?”

“...아니, 내가 갈게.”

사실은 입맛이 없었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음식을 만들어준 상대의 성의를 생각해 억지로 몸을 일으킨 수영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며 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일 하루는 회사를 쉬는 편이 좋지 않겠어?”

식탁 앞에 앉은 수영이 호연의 질문을 받고 입을 열었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상태를 보려고. 최근 일이 좀 밀려 있어서 가능하면 출근할 생각이긴 하지만.”

짧은 기침과 함께 대답한 수영이 숟가락을 들어 호연이 이제 막 앞에 놓아준 그릇에 담갔다.

“맛, 괜찮아?”

수영이 몇 숟가락을 뜰 때까지 조용히 마주한 자리에서 기다리던 호연이 긴장과 기대감이 절반씩 섞인 표정을 짓고서 물어왔다.

“응. 아마도 괜찮은 것 같아. 지금 코가 막혀서 맛이 잘 안 느껴지긴 하지만.”

수영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작게 웃음소리를 낸 호연이 자신 분으로 떠온 죽을 맛보았다. 오랜만에 요리를 한 것치고는 꽤나 괜찮은 맛이라고 자평을 한 그는 자신의 그릇을 다 비운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수영이 전부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자신이 만든 죽을 먹고 있는 수영을 보는 내내 호연은 아픈 연인을 돌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영 이전에 사귄 사람들과는 대체적으로 무미건조한 관계만을 유지해왔던 그는 이제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는 통속적인 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그 사이 눈치껏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호연을 향해 물었다.

“가려고?”

“응, 어차피 죽만 끓여주려고 온 거니까.”

“...고마워.”

코트의 단추를 채우던 호연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하는 수영을 돌아보고 곧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다 더 농염한 색기(色氣)를 드리우고 있는 남자를 그냥 내버려두고 가려니 아까운 생각이 드는 그였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이 들 듯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는 상대를 보고서 달려들 만큼 그는 어리지 않았다.

“다음번에 만날 땐 쌩쌩해져 있어야 돼. 오늘 베푼 은혜는 그 날 다 돌려받을 테니까. 그럼 잘 자.”

짧은 인사를 남긴 호연이 현관문을 나서는 것을 제자리에 서서 지켜본 수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피로한 눈을 감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호연의 방문에 놀란 것도 잠시, 서서히 돌기 시작한 약기운에 취해 다소 몽롱한 상태로 그와의 짧은 시간을 보낸 수영은 다시 혼자가 된 상황에서 조금 전까지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머릿속에 떠올리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호연의 입장에선 허무하게도 바로 몇 분 전에 있었던 일들은 수영의 머릿속에 마치 스쳐가는 환상처럼 흐트러진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내일 전화를 걸어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지.’

그쯤에서 짧게 이어지던 생각을 정리한 수영은 긴 한숨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렸다.

*

평소보다 많은 수면을 취한 탓에 다소 노곤한 상태에서 눈을 뜬 수영은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탁상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어스름한 가운데 시야 안에 들어온 숫자는 6과 29. 미리 알람을 맞춰둔 것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꽤나 깊은 잠에 취해 있었던 듯 그 긴 시간 동안 스쳐가는 꿈조차 꾸지 않은 수영은 잠시??그대로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의 효력 덕분인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점에서 판단할 때 잠이 들기 직전까지 느꼈던 두통과 피로감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의 몸 상태면 미리 계획해두고 있었던 병가는 내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이른 시간에 일어난 만큼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커피를 내리기 위해 주방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문득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는 냄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뚜껑을 연 것과 동시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어젯밤 호연이 만들어놓고 간 전복죽이었다.

아침이 되어 약간의 시장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폭면의 후유증으로 인해 당장은 입맛이 없는 상태의 수영은 일단 도로 뚜껑을 닫고서 커피메이커를 작동시킨 뒤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주방 안을 채우기 시작한 커피의 향이 점차 농도를 더해가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평소의 컨디션을 회복한 수영은 냉장고 문을 열고서 잠시 안을 들여다보던 중 무언가를 발견하고 곧바로 그리로 손을 뻗었다. 이내 그의 손에 들려 냉장고에서 꺼내진 것은 나흘 전 그가 윤재로부터 받았던 감자조림이 담긴 통이었다.

-‘맛은 기대하지 말고 드세요.’

문득 귓가에 떠오른 윤재의 나직한 목소리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수영은 손에 든 통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주말의 이틀 동안 연말 모임에 참석하느라 잠시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던 감자조림을 손가락으로 하나 집어 입에 넣은 그는 제자리에 선 채 혀에 느껴지는 맛을 가만히 음미했다.

첫맛은 싱겁다 못해 다소 밍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씹을수록 조금씩 입안에 퍼져가는 맛과 향은 어느 샌가 딱 좋은 정도의 간에 맞춰져 있었다. 며칠을 냉장고 안에 있었던 상태임을 감안하면 갓 만들어졌을 당시엔 적어도 이보다 몇 배는 좋은 맛과 식감을 유지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수영은 처음 맛만 보려던 생각을 바꿔 몇 개의 감자를 더 입안에 넣었다.

통의 윗부분이 비워져감에 따라 조금 전까지 없던 식욕이 서서히 생겨나는 것을 느낀 수영은 결국 근처에 놓인 선반에서 즉석밥 하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스위치를 누른 뒤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반찬을 더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지금 집에 있는 밑반찬들은 일주일 전쯤 본가에 들렀던 차에 모친으로부터 건네받은 것들이었다.

모처럼 만에 갖는 아침 식사는 비교적 긴 시간을 들여 이루어졌다. 따끈한 찌개나 국도 없이 간단한 몇 가지의 밑반찬으로 이뤄진 조촐한 식단이었지만 홀로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움직이는 수영의 손은 평소보다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는 건 윤재에게서 받은 감자조림이었다. <민들레>에서 먹었던 몇 가지 안주들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던 수영은 윤재가 만들어낸 또 다른 종류의 음식을 맛보고 있는 지금 신기하게도 마치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윤재가 만든 요리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입에 잘 맞는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많지 않았던 양의 감자조림을 모두 먹어치운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은 곧바로 남은 출근준비를 이어갔다. 양치질을 한 뒤에도 조금 전 먹었던 감자조림의 맛이 여전히 혀에 남아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안은 채 셔츠 한 장을 시작으로 완벽하게 수트를 갖춰 입은 그는 마침내 외출준비를 모두 마친 뒤 서류가방을 손에 들었다.

8시 4분.

소매를 걷어 아직 출근 시간까지 일정의 여유가 있는 상태임을 확인한 수영은 마지막으로 거실에 놓인 커다란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 빠르게 넥타이의 매무새를 정리한 뒤 그대로 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나섰다.

언제나와 같이 완벽한 아침의 모습이었다.

*

해질녘을 기점으로 조금 잦아드는가 싶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뒤로 어두컴컴한 거리엔 제법 많은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덕분에 거리 곳곳에선 꺅꺅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상인들의 입장에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새하얀 장관을 마냥 환영할 수가 없었다.

감기로 며칠을 쉰 것이 역시나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다시 문을 열고 사흘째를 맞은 오늘 <민들레>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단 두 팀의 손님뿐이었다. 퇴근 시간을 이제 막 넘긴 시점에서 원래대로라면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손님을 받아야 했지만 눈이 많이 내리고 있는 탓인지 거리를 지나는 차량의 수는 평소보다 눈에 띠게 줄어들어 있었다.

잠시 입구에 서서 유리문 너머의 광경을 지켜보던 윤재가 문득 걸음을 옮겨 주방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 치운 그릇에 남아 있는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고 있던 성호가 곧바로 그의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왔다.

“성호야, 그거 치운 뒤에 설거지 좀 해줄래? 지금 한산하니까 난 가게 앞에 쌓인 눈 좀 치우려고.”

“아, 눈은 제가 치울게요.”

“아냐, 괜찮아. 내가 할게.”

“힘드실 텐데...”

“힘들기는. 내가 이래봬도 군대시절에는 눈 잘 치우기로 부대 내에서 유명했다고. 아마 지금도 너보다 나을 걸.”

“.......”

전혀 믿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보인 윤재가 ‘고무장갑 끼고 있는 김에 설거지 좀 부탁할게.’라는 말을 덧붙인 뒤 곧바로 등을 돌렸다.

두툼한 카키색 야상점퍼와 머플러,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장갑으로 나름대로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온 윤재는 며칠 전 눈이 내렸을 때 사용하고 근처에 세워두었던 넉가래를 집어 들어 몇 시간 사이 꽤나 높이까지 쌓여 있는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요 며칠 한파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걷어낸 눈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빙판은 여전히 단단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와- 예쁘다! 엄마, 눈 와. 눈!”

“조심해서 걸어. 넘어지겠다.”

“나 눈사람 만들래.”

“손 시려서 안 돼. 집에 가서 만화 틀어줄 테니까 그거 엄마랑 같이 보자.”

“싫어. 눈사라암- 눈사람 만들래애-”

“엄마가 집에 가면 우리 수진이가 좋아하는 도너츠 만들어줄게. 수진이 도너츠 먹고 싶지?”

좋아하는 도넛을 만들어준다는 말을 듣고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던 아이가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벌써부터 맛있는 도넛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듯 조금 전까지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투정을 부리던 아이는 어느 샌가 꺄르륵대며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모녀가 서서히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윤재가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치워낸 자리에 새롭게 쌓이기 시작한 눈들이 윤재의 의욕을 꺾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은 채 가게 앞에 눈이 쌓이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성호에게 자랑스레 말했듯 제법 능숙한 실력으로 당장 사람들이 오가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까지 쌓여 있는 눈을 걷어낸 윤재가 한동안 쉼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바람에 차가워진 뺨을 살짝 쓸었다. 이제 나머지는 영업이 끝난 뒤 다시 쓸어내기로 한 그는 들고 있던 넉가래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놓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뗐다. 그 순간이었다.

“-!”

이제 막 눈을 치워낸 길 위로 몇 걸음을 내딛던 도중 착지 지점을 잘못 짚어 크게 미끄러진 윤재의 몸이 일순간 붕하고 떠올랐다가 곧바로 단단한 빙판 위에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지나는 행인들이 돌아볼 정도로 큰 마찰음이 한 차례 좁은 골목에 짧게 울려 퍼졌다. 그나마 다행히 바닥에 부딪친 부분은 허리나 다리가 아닌 엉덩이 부분이었지만 사실 엉덩이라고 해도 윤재의 경우 워낙 살집이 없는 탓에 딱딱한 바닥에 부딪친 통증과 충격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어지고 있었다.

탕-

어쨌든 통증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찬 바닥에 손을 짚으려던 윤재가 문득 멀찍이서 들려온 차문이 크게 닫히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이제 막 운전석에 내린 듯한 수영이 수트와 구두 차림으로 서둘러 빙판길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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