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21화 (21/66)

21.

뜨거운 열을 머금은 혀가 순식간에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잠시 떨어지는가 싶던 입술은 살짝 방향만을 바꾼 채로 다시 강하게 덮쳐왔고, 타액을 머금은 채로 얽혀온 혀의 움직임은 마치 강한 주장을 펼치기라도 하듯 점점 더 활기를 띠어갔다. 그 사이에도 얇은 벽 너머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나누는 대화소리가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오고 있었지만 윤재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수영의 행동은 조심스럽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대범해져가고 있었다.

수영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시원한 스킨향이 주변의 공기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처음 몇 초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윤재는 급격히 호흡이 점점 가빠져가는 시점에서 현실을 자각한 것과 동시에 곧바로 저항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어째서?’

혼란스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수영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윤재는 먼저 붙잡혀 있는 양 팔에 최대한으로 힘을 실어 넣었지만 그와 같은 윤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영은 오히려 한층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 왔다.

뜨겁게 얽히는 혀의 움직임은 무서울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순식간에 흐트러지기 시작한 호흡과 계속해서 손목에 가해지고 있는 강한 힘. 믿기지 않지만 지금 눈에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은 분명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경험한 이후로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열띤 감각이 깨어나려 하는 것을 자각한 윤재는 순식간에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 사이에도 거칠게 이어지는 키스를 끝내기 위해 질끈 눈을 감았다.

“!”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 수영이 윤재 위에 겹쳐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하...”

지금 막 윤재로부터 혀를 깨물렸다는 사실을 인식한 수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입가를 비틀었다. 혀에 남아 있는 쓰린 통증과 비릿한 피 냄새가 잠시 열에 취해 있던 그를 단숨에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이제껏 살아오며 질릴 만큼 많은 키스를 해왔지만 이처럼 삭막한 마무리를 경험하는 건 그에게 있어 틀림없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주선 윤재가 흐트러진 숨소리를 낸 채 붉어진 눈으로 수영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윤재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향하고 있는 잔뜩 날이 선 그의 태도를 수영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순간 평상심을 잃고 충동에 휘둘렸던 그의 머리와 가슴은 여전히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은 알겠지? 아무나와 자는 거, 너한테는 무리야. 왜냐하면 넌 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니까.”

“.......”

“그러니까 쓸데없는 허세 부리지마. 네가 정말로 나와 동류의 인간이었다면 이 정도 저항으로는 멈추지 않았어.”

여전히 혀에 남아 있는 쓰라린 통증을 느끼며 잔뜩 미간을 좁힌 수영이 윤재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손에 잡혀 있던 윤재의 손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스스로 저질러놓은 거친 행위가 뒤늦게 아프게 눈에 박혀왔다.

“나는 허세도 부리면 안 되는 건가요?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당신은 이제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이 얼굴 위로 엷은 냉소를 드리웠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관계...? 원하면 만들어 줄 수도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구체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윤재는 어리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수영의 움직임을 포착한 윤재가 입구를 등지고 뒷걸음질을 쳤다. 또다시 잡히게 되면 이번에도 수영이 간단히 물러서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층 경계의 태세를 높인 그는 그렇게 조심스레 뒷걸음질을 치던 중간 문득 발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윤재의 발뒤꿈치가 건드린 것은 근처에 있던 선반의 다리였다. 하필이면 길이가 맞지 않아 종이를 접어 덧대놓은 쪽으로 순식간에 덧대놓은 종이가 밀려 균형을 잃은 낡은 선반은 크게 휘청거리며 윤재가 서있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

식탁에 가로막혀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윤재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기울기가 크지 않은 덕분에 선반 자체가 낙하하지는 않을 터였지만 그 위에 쌓아둔 각종 식기들이 자신의 위로 쏟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일정의 통증이 닥쳐올 걸 각오하고 있던 윤재는 그러나 다음 순간 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내 각오하고 있던 요란한 소리가 한바탕 좁은 주방 안을 채운 순간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좁은 틈을 사이에 두고 그의 시야를 채운 건 잘 다려진 차콜의 넥타이였다.

지금 자신이 수영의 팔에 감싸여 마치 안기듯 그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고개를 든 윤재가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시선을 마주했다.

“뭘 멍청하게 웅크리고 있는 거야? 그러나 큰 물건에 맞아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대답이 없는 윤재를 놓아주고 몸을 돌린 수영이 내뱉듯 말했다.

“그렇게 굳은 표정 짓지 마.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한 사람에게 두 번 손대는 짓은 안 해. 네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안지 않아. 그러니 거기에 대해선 걱정할 거 없어.”

조금 전 강제로 키스를 해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이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쓰게 웃은 수영은 그 사이 요란한 소리에 따라 주방 앞으로 몰려든 손님을 슬쩍 쳐다본 뒤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으로 단 둘만의 시간도 종료였다.

“정리는 그 알바생이 오면 같이 해.”

짧은 한 마디를 남긴 수영은 그대로 몰려든 구경꾼들을 지나쳐 짐을 놔둔 자리로 향했다.

더없는 불쾌함이 지금 수영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분은 단순히 키스를 거부당했다는 사실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윤재와 자신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자각한 것과 동시에 이미 한 번 버렸던 상대에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욕정을 느꼈던 사실을 분명히 확인한 지금 수영은 스스로에게 질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윤재에게 친구라도 나쁠 게 없다고 잘도 말해놓은 주제에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아랫도리를 세울 뻔한 게 바로 조금 전의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그간 절조 없이 놀아온 그에게조차 평범한 친구는 잠자리 대상에서 깨끗이 제외되어 왔었다.

조금 전 단 한 번의 강렬한 접촉으로 수영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윤재와 평범한 친구의 관계를 가질 수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을.

“어, 벌써 가시는 거예요?”

코트를 걸치며 입구로 향하던 수영이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성호의 말을 듣고 짧게 대꾸를 해주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어지럽혀진 상태였다.

“주방 안에 물건들이 쏟아졌어. 사장님 도와서 같이 정리 좀 해줘.”

“아...”

“돈은 테이블 위에 놔뒀어.”

“아, 네.”

“또 올게. 사장님껜 그렇게 전해줘.”

불과 십여 분 전과 비교해 눈에 띠게 냉랭해진 분위기를 품고 있는 수영의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쫓던 성호는 이내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별 일 아닌 모양이네.”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했지.”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가는 손님들 사이로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한 성호는 잠시 후 눈에 들어온 광경에 일순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방 안에는 윤재가 홀로 서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가게를 나선 수영이 전한대로 주방의 바닥에는 냄비며 양푼들이 이리저리 엉망으로 널려져 있었다.

문득 조금 전의 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수영의 분위기를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자신이 없는 사이 그와 윤재가 한판 몸싸움을 벌이기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성호는 그러나 곧바로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가 아는 윤재는 몸싸움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수영 역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를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일이야 모르는 것이었지만 만약 몸싸움이 있었다면 윤재의 몸에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성호의 입장에서 냉정히 객관적으로 분석할 때 윤재가 수영을 힘으로 이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제로였다.

“사장님, 말씀하신 거 사왔어요. 복숭아 통조림은 앞의 슈퍼에 없길래 다른 마트에서 사오느라 좀 늦었어요.”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성호가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네자 그제야 그에게 시선을 돌려온 윤재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아... 그래. 수고했어.”

어딘가 묘하게 굳어 있는 윤재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호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성호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닥에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어서...”

성호의 말에 따라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 윤재가 어질러진 물건들을 시야에 들이고서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건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한 목소리였다.

“이건 좀 전에 내가 실수로 선반 다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위에 쌓아뒀던 게 쏟아진 거야.”

“아- 그렇구나. 아유, 전 또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큰 일이 있었나 해서 놀랐잖아요. 어휴, 놀래라.”

윤재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마음을 놓은 성호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이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봤던 윤재의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은 모습 때문에 내심 단단히 긴장을 하고 있었던 그는 최악으로 강도가 다녀갔을 가능성마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아직 이른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멀쩡히 주변에 손님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도 허름한 주방을 어지른 것은 현실적으로 그쪽의 가능성을 점치게 하기에 많이 이상한 상황이긴 했지만.

어쨌든 하나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함으로써 잠시 찌푸렸던 마음이 개는 것을 느끼고 있는 성호는 어느 샌가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와 있었다.

“조금 전에 혼자 오셨던 남자 손님이 가셨어요. 또 오겠다고 사장님께 전해달라고 하시고요. 아, 돈은 테이블에 놔뒀다고 하셨어요.”

“...그래.”

“근데요, 사장님.”

“응?”

“그 손님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요? 전 진짜로 저렇게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회사원은 처음 봤어요. 얼굴도 그런데 몸매나 비율까지 대박이잖아요. 그런 몸으로 수트를 입으니까 무슨 정장 모델 같은 느낌이 나서 꼭 가짜 회사원 같다니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그 손님 지금까지 연예기획사에서 스카웃 엄청 받았을 걸요?”

“.......”

“아아- 진짜 나도 다음 생애엔 저렇게 태어나고 싶다. 저렇게 태어나면 의자왕처럼 여자들 실컷 후리면서 한 번 살아봐야지.”

진심어린 부러움이 담긴 성호의 말을 들은 윤재가 그의 곁에서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테이블은 내가 치울 테니까 사온 재료들 좀 정리해서 놔줄래?”

“아, 네.”

성호의 대답을 듣고서 근처에 놓여 있던 쟁반을 집어 들고 주방을 나선 윤재는 아직까지도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아까 전 수영이 앉아 있었던 자리로 다가갔다.

“.......”

완전히 비워지지 않은 접시들 옆에는 아까 전 윤재가 따로 가져다주었던 녹차가 거의 처음 그대로의 상태로 놓여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빳빳한 상태의 샛노란 오만 원 권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메뉴에 적혀 있지 않은 음식이라 가격을 알 수 없어 수영이 적당히 놓고 간 것이리라 윤재는 짐작했다. 사실은 내오기도 민망한 반찬들이라 굳이 따로 돈을 받을 마음도 없었던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지폐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수영이 자신을 상대로 키스를 해온 건지 윤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인지도. 그저 그와 겹쳤던 입술의 감촉과 스치듯 혀에 닿은 피의 비릿한 맛만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넌 아니잖아?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랑 연애하고 결혼하는 거, 어차피 넌 못 하잖아?’

사실은 윤재도 알고 있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다만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신은 바보처럼 예전 그대로 변한 게 없어서 아직까지도 미련하게 옛일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고 수영에게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치 다 안다는 듯한 수영에게 지는 것만 같아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어리석은 오기라고 해도, 허세라고 해도 그렇게라도 맞서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저기, 여기 버터 오징어 좀 더 갖다 주겠어? 아이 참,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 맛있네. 호호호~”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아주머니 손님의 말에 그제야 회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윤재는 애써 얼굴 위로 웃음을 드리우고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수영이 머물렀던 자리의 테이블을 치우는 그의 손이 곧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오랜만이네~”

바테이블 앞에 엉덩이를 내려놓는 수영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다가온 제이가 함박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기쁜 마음을 표시했다. 소도 때려잡을 듯이 생긴 투박하고 커다란 그의 손끝엔 화려한 형광색의 인조손톱이 붙어있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응?”

기쁜 마음을 안고서도 살짝 삐진 척 질문을 던진 제이가 대답 없이 술을 주문하는 수영의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지금 수영의 기분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건 특별히 눈치가 빠르지 않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수영은 애써 자신의 기분 상태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평소 습관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온 남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영의 주문을 받은 바텐더가 활발히 손을 움직이는 동안 잠시 그대로 말없이 자리를 지키던 제이가 눈에 띠게 진지해진 표정을 지은 채 수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수영의 등장과 함께 주변의 시선은 한곳에 몰려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긴 하겠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몰고 다니는 남자의 얼굴을 한동안 진지하게 쳐다보던 제이는 잠시 후 주문되어 나온 잔을 바텐더에게 직접 전달받은 뒤 그것을 수영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거 알아? 조금 전까지 연석씨가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거.”

제이의 말을 듣고 슬쩍 그에게 시선을 옮긴 수영은 그러나 아무런 대꾸 없이 곧장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당신 요즘 의 사장과 분위기가 좋다면서? 이름이 장호연이라고 했나... 나도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꽤 잘 생긴 남자였지. 일단 그런 큰 바(bar)의 오너이기도 하고 본인도 워낙 잘난 남자라 여기저기서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역시 당신 정도는 되어야 그런 남자를 차지할 수 있는 건가보네. 너무 그렇게 잘난 사람끼리만 어울리면 우리 같은 사람은 소외받는 기분이 든다는 거 알아?”

반짝거리는 인조손톱을 매만지며 제이가 말하자 단숨에 잔의 절반을 비운 수영이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정도면 충분히 잘난 사람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나요?”

수영의 말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제이가 자신의 앞으로 나온 칵테일을 바텐더로부터 받아들며 말했다.

“그렇게 봐주니 일단 기쁘긴 한데 말이야, 여기나 저기나 나이만 차면 점수가 팍 깎이니까 그게 문제지. 왕년에는 잘 나갔다는 말 같은 거 괜히 스스로 나이 든 티 내는 것 같아서 하기 싫지만 역시 나도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이 추억으로 먹고 사는 느낌이야. 아직 한창 젊은 당신은 이런 기분 이해할 수 없겠지.”

“저도 며칠 뒤엔 서른하나인데 한창 나이라기엔 많지 않은 가요?”

수영이 담배를 꺼내며 말하자 곧바로 라이터를 손에 쥔 제이가 수영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주었다.

지금은 비록 나이가 들어 주름도 늘고 살도 쪄서 볼품없는 외모를 하고 있지만 한창 때의 제이는 외모보다는 배려 있는 행동과 어른스러운 태도로 꽤나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비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말투와 태도는 지금도 예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당신은 나이가 들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타입이니까 별로 나이에 신경 쓸 필요 없어. 나이가 들어 슬퍼지는 건 확실히 남자보다는 여자들 쪽이지. 우리 세계에선 받아들이는 쪽이고 말이야. 늙어 헐어빠진 구멍에는 넣기 싫다는 사람이 많잖아. 아, 말이 너무 적나라했나.”

먼저 말을 해놓고 살짝 입을 가린 제이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잔을 들었다. 남들은 연말이라고 축제 분위기이지만 마흔이 넘은 뒤로 하루하루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처지에 있는 그는 주변의 지인들과 달리 좀처럼 흥겨운 연말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때?”

“...뭐가요?”

“정말로 소문대로 의 사장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야?”

제법 끈질기게 물어오는 제이를 슬쩍 쳐다본 수영이 길게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고서 잔을 들었다. 확신이 담긴 제이의 표정으로 보건대 아마도 이곳에 자주 들르는 연석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온 모양이라고 수영은 내심 짐작했다.

“물어봐 달라는 사주를 받은 건가요, 아니면 본인이 궁금해서 묻는 건가요?”

눈치 빠른 수영의 질문에 살짝 눈을 크게 뜬 제이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둘 다. 일단은 둘 다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크다고 할까.”

수염자국이 무성한 얼굴 위에 분을 칠한 채 예쁜 척 웃고 있는 제이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은 마침 곁으로 다가와 있는 바텐더에게 좀 더 독한 술을 한 잔 추가로 주문했다. 열 한 시가 넘은 시간이니 내일 아침의 출근을 생각하면 슬슬 일어나야 했지만, 아까 전 <민들레>에서 있었던 윤재와의 일을 생각하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쉽게 잠을 이룰 수는 없을 것 같은 그였다.

스치듯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윤재와 닿았던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처럼 진지하게 키스에 열중했던 것은 최근에 없던 일이었다.

“대답을 안 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문득 옆에서 들려온 제이의 중얼거림을 들은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당신이 말한 대로 괜찮은 상대죠.”

“그쪽 궁합도 좋고?”

묘한 미소를 머금은 제이의 질문에 수영이 말을 이었다.

“뭐, 확실히 그쪽으론 잘 맞는 것 같네요.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눈치 빠르게 알아서 잘 해주니 귀찮은 일도 없고... 또 다소 하드한 것도 좋아하고 잘 받아들이죠. 일부러 제어할 필요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나름...”

거기까지 말하던 수영이 자신의 앞으로 나온 잔을 받아들었다.

제이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터라 허물없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애초에 수영은 아무에게나 사적인 이야기를 발설하고 다니는 가벼운 남자는 아니었다.

조금 전 대답한 대로 호연은 나무랄 데 없이 좋은 파트너였고 섹스의 상성도 좋았다. 아마도 객관적인 조건으로 볼 때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자신과 잘 맞는 상대일 거라고 수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스테디한 관계로 발전하는 거야? 아니면 벌써 그런 관계를 이어가고 있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수영이 잔을 든 채 말했다.

“아까부터 자꾸 취조당하는 기분이 드네요.”

“아,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 난 그저 평소 궁금하던 걸 한꺼번에 물어보려 한 것뿐이야. 자기가 요즘 얼굴을 통 안 내미니까 기회가 있었어야지.”

가볍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담배 한 개비를 새로 꺼내 불을 붙였다. 오늘처럼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날엔 실컷 취하면 좋으련만 그런 것을 바라기에는 그의 주량이 너무나도 셌다.

“글쎄요, 스테디한 관계라... 어차피 나한테 있어 연애란 무한정의 놀이일 뿐이라서요. 예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선 몇 년을 갈 수도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그런 관계는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수영의 담백한 대답을 들은 제이가 쓰게 웃었다. 이미 연석을 통해 질리도록 들어온 만큼 수영이 진지한 연애를 할 남자가 아니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럼에도 막상 본인에게 확답을 들은 지금 그는 조금 안타까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끝이 났지만 몇 년 전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는 제이는 진실한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벅찬 기쁨과 감동을 주는지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그런 상대와 몸뿐이 아닌 마음을 함께 하는 섹스를 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지 지금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아마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자 제이는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질리도록 많은 섹스를 해왔다고 하지만 수영은 알지 못할 터였다. 그런 아찔하고 아련한 감정은.

“누군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어?”

문득 이어진 질문에 수영이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제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았어?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눈이 가는 사람.”

“.......”

얼마간 제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째서인지 그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수영씨?”

들릴 듯 말듯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수영을 옆에 앉아 있는 제이가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이런 명확하지 않은 감정을 수영은 알지 못했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세상은 너무도 선명한 색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대하는 사람의 얼굴도 몸도 오가는 감정도.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치 밤손님처럼 스리슬쩍 들어와 그의 가슴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감정은... 불분명한 색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동정일 거라고 생각했고 틀림없이 그렇게 믿어온 감정은 애초에 그것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어, 수영씨?”

문득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수영은 어느 샌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는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회사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타이트한 라인의 수트를 입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의 남자는 이전에 수영과 두 번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 상대였다.

“오랜 만에 보는 것 같네요. 요즘 여긴 잘 안 왔었죠?”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남자의 얼굴은 코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어딘가 묘하게 윤재와 닮아 있었다.

“지금부터 같이 나가지 않을래요?”

노골적으로 유혹을 해오는 남자를 잠시 관찰하듯 쳐다보던 수영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서 말했다.

“오늘은 이 잔만 비우고 돌아갈 거라서.”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그럼 다음에 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멀어지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앞에 놓인 잔을 든 수영은 곧 입안으로 쓰디쓴 술을 흘려보냈다.

알코올에 닿은 혀의 상처가 쓰라린 통증을 호소해왔다. 차라리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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