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인디고블루와 버밀리온, 로즈 매더로 각각 하나씩 주세요.”
“인디고블루와 버밀리온... 또 뭐라고?”
“로즈 매더요.”
“그래, 로즈 매더.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고 있어.”
“네.”
턱을 긁적이며 코너를 돌아 어디론가 향하는 주인아저씨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윤재가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가게를 열 준비를 하기 전 몇 가지 물건들을 살 계획에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선 터라 아직 시간에는 여유는 있는 상태였다.
지금 현재 윤재가 머물고 있는 곳은 시장 근처에 있는 오래된 화방으로, 이곳의 주인아저씨와 그는 벌써 몇 년 동안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자, 여기. 인디고블루와 버밀리온, 로즈 매더.”
“네, 고맙습니다.”
물감 세 개의 값을 계산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고 있는 윤재를 바라보던 주인아저씨가 다소 괴팍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 위로 엷은 미소를 머금고서 물었다.
“요즘에도 많이 그리나봐?”
돈을 건네받은 뒤 곧바로 거스름돈을 준비하는 아저씨를 쳐다본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아뇨, 최근엔 가게 일로 바빠서 거의 못 그리고 있어요. 오늘은 오랜만에 그동안 그려뒀던 스케치 위에 채색 좀 해보려고 했는데 통을 열어보니까 자주 쓰는 물감이 다 써서 없더라고요. 전에 사둔다는 걸 깜빡한 모양이에요.”
<민들레>를 맡기 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 당시만 해도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그림을 그렸던 윤재는 아까 전 모처럼만에 붓을 들었다가 너무도 생경한 기분을 느끼고서 쓰게 웃었다. 소소한 취미생활 하나를 누리기에조차 현실은 너무도 팍팍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최근에 그린 그림도 한 번 보고 싶은데. 언제 한 번 보여줘.”
아저씨로부터 거스름돈을 건네받으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바빠서 못 그렸더니 안 그래도 없던 실력이 더 퇴화됐어요. 보면 실망하실 거예요.”
“어차피 프로 화가도 아닌데 실망은 무슨. 난 전에 봤던 그 그림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고. 바다 위에 뜬 배에서 노인이 낚시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지. 물의 색이 독특하고 예뻐서 한참 들여다봤었어. 대체 색을 어떻게 섞었길래 바다색을 그렇게 잘 표현했나 하고 말이야.”
오래전에 봤던 윤재의 그림을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아저씨의 얼굴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종종 화구를 사가지고 가는 윤재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뒤 몇 번을 부탁한 끝에 간신히 볼 수 있었던 그의 그림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 있을 만큼 주인아저씨의 마음을 빼앗았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의 눈에야 기술적인 단점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는 일반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좋은 감상을 느끼게 할 정도로 당시 그가 보았던 윤재의 그림은 평화로운 동시에 예쁜 느낌을 주었었다.
“혹시 완성된 게 있으면 가져와. 좋은 액자에 끼워서 이쪽 벽에 걸어놓게. 여기 오는 손님들이 다 볼 수 있게 말이야.”
아저씨의 말을 들은 윤재가 ‘부담되니까 사양할게요.’라고 웃음 섞어 말하고서 이어 짧은 인사를 남긴 뒤 화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 너머로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 춥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훅 하고 불어온 강풍에 무심코 목을 움츠린 윤재는 물감이 담긴 비닐봉지를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분간 한파가 몰아칠 거라는 기상예보대로 바깥의 날씨는 무척이나 추워서 한창 활동을 할 대낮의 시간대임에도 거리를 지나는 행인의 수는 평소와 비교해 눈에 띠게 적었다. 그냥 집에 있는 게 최고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날씨였다.
일부러라도 운동을 하기 위해 시장까지의 거리 정도는 습관처럼 도보로 이동해온 윤재도 오늘은 차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가게로 향하고 싶었지만 어제의 장사로 인해 간당간당하게 남아 있는 양파와 감자, 오징어는 반드시 새로 사둬야 하는 만큼 그의 다리는 자연스레 재래시장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징어 굽기 전에 버터를 조금 더 바르는 편이 좋을까...’
어젯밤 손님으로부터 ‘버터의 양이 늘면 더 맛있겠어요.’라는 말을 들은 것이 문득 떠오른 윤재가 쇼핑목록에 버터를 추가했다. 재료를 아껴야 이윤이 남는다는 장사치 입장으로서의 생각보다는 자신의 가게를 찾는 손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그였다.
자꾸만 안으로 새어드는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목에 감은 머플러를 좀 더 바짝 조이던 윤재가 문득 곁을 지나는 한 여성과 스치듯 눈이 마주친 순간 무심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저기... 윤재씨 아니세요?”
먼저 말을 걸어온 상대는 세련된 코트와 하이힐 차림을 하고 있는 키가 큰 여성으로, 그녀는 윤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희씨?”
“네.”
“아... 안녕하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도 못한 상대와 만난 윤재의 얼굴 위에는 명백한 당혹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 그가 마주하고 선 상대의 이름은 주세희로, 그녀는 윤재의 죽마고우인 준석이 가장 최근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였다. 최근이라고 해도 벌써 2년 전의 일이었지만.
전(前)남자친구의 친구라는 애매한 입장에서 일단 세희와 짧게 인사를 교환한 윤재는 특별히 이어갈 주제가 없는 상황에서 적당히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저야 뭐...”
짧게 대답한 세희가 문득 시선을 아래로 옮겨 윤재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자신의 다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어오는 세희를 향해 애써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인 윤재가 괜찮다고 대답했다.
짧은 안부가 오간 뒤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실질적으로 친분이 끊어진 상태이니 이쯤에서 적당히 인사를 하고 가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 윤재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로 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준석씨는 잘 지내나요?”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질문을 받은 윤재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내기 직전 입을 다물었다.
세희와 자신 사이에 있는 공통 화제라고 해봐야 준석밖에 없는 만큼 상대로부터 그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윤재는 진심으로 궁금해 하고 있는 듯한 세희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세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면 돌려주기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로부터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뒤이니 아마도 괜찮을 거라고 윤재는 생각했다.
“그렇군요. 하긴, 그 사람은 그럴 거예요. 저와 헤어진 뒤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었겠죠.”
어딘가 책망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세희의 말에 윤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들려온 그녀의 말은 정말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세희와 헤어졌다는 짧은 보고만을 한 준석은 헤어진 직후에도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었다. 물론 준석이 은밀한 연애사 문제를 남에게 시시콜콜 발설하고 다니는 남자는 아닌 만큼 그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시 윤재가 봤던 준석에게서는 시련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준석과의 이별을 떠올리고 급격히 기분이 상한 듯한 세희가 잠시 그대로 선 채로 뭔가를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우리들이 왜 헤어졌는지 혹시 준석씨가 윤재씨에게 말했나요?”
“...아니요.”
돌아온 윤재의 대답을 예상한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차였어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죠. 그땐 정말 어찌나 창피하고 화가 나던지 헤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그 일을 생각하며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었어요.”
당시 준석으로부터 이별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듣지 못했던 윤재는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그 날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지금 조금은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남의 연애사에는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지금 그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준석이 없는 자리에서 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사한 붉은 코트를 입고 있는 세희는 2년 전보다 더해진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복장으로 봐서 데이트에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세희는 이 시간에도 흐르고 있을 시간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지금의 상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준석으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것이 자존심 강한 그녀에게 있어 아직까지도 큰 수치이자 아픔으로 남아 있는 듯 했다.
사실 이런 불편한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인 윤재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모처럼 만난 세희가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도록 잠시나마 기회를 주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윤재씨 다리가 다친 뒤로 준석씨가 많이 변한 거 알아요?”
“!”
뜻밖의 말을 들은 윤재가 세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간 주말엔 거의 저와만 만났었는데 윤재씨가 사고로 입원한 뒤엔 주말 이틀 중 하루는 꼭 윤재씨 문병을 갔었죠.”
세희의 말을 들은 윤재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조금 전 세희가 한 말대로 준석은 주말 이틀 중 하루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반드시 자신의 문병을 왔던 것을 윤재는 기억하고 있었다. ‘심심할 것 같아서 말동무 해주러 왔어’라며 과일을 비롯한 각종 먹을거리를 사들고 와서는 몇 시간동안 자신의 곁을 지켰던 그였다.
“저라고 해서 처음부터 불만을 가졌던 건 아니었어요. 윤재씨 사고 난 걸 알고 저도 많이 놀라고 걱정 했었고요. 제가 준석씨랑 같이 몇 번 문병 갔던 거 기억하시죠?”
“네... 기억해요.”
윤재의 짧은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다시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남자들 사이에 우정도 중요한 건 알지만 그래도 제 입장에선 솔직히 많이 섭섭했었어요. 그거 알아요? 준석씨, 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웬만해선 다른 사람 전화는 받지 않았는데 그래도 윤재씨 전화만큼은 꼭 그 자리에서 받았던 거요.”
당연히도 윤재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생각이 깊은 준석이 스스로 그런 것을 윤재에게 말할 리가 없었다.
“결국 그 일로 한 번 크게 싸웠죠. 전 좀 더 우리들의 관계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준석씨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평소 제가 부탁할 땐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때에도 알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 그 부탁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어요. 결국 저도 그런 태도에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준석씨에게 전화가 왔죠.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이어지는 세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벌써 2년 전의 일임에도 당시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까지 그녀에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듯 했다.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자신이 이유가 되어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윤재는 당장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윤재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준석과 세희의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연인이었다. 배려심 많은 준석은 여자를 대할 때 한층 더 신사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그의 곁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행복한 얼굴을 했었고, 세희 역시 다르지 않았었다. 가끔 회사가 끝난 뒤 준석으로부터 같이 식사를 하자는 문자를 받았던 윤재는 언젠가 한 번 두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영화에나 나올 듯한 커플의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보며 당시의 그는 약간의 부러움과 함께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당연하게도 그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두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이별을 하게 될 거라고는 그때의 윤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미안해요. 세희씨.”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리고 윤재가 입을 열었다. 직접적으로 자신이 잘못을 한 것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관련되어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사실이라면 짧게라도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때의 일을 아직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듯한 세희가 지금 자신의 사과로 조금이나마 당시의 상처를 지워낼 수 있기를 윤재는 진심으로 바랐다.
윤재의 사과를 받은 세희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윤재씨를 원망하는 거 아니에요. 사실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윤재씨 얼굴 보니까 자연스레 나왔네요. 아무래도 그동안 계속 응어리로 남아 있었나 봐요. 제 주위에는 준석씨와의 일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거든요. 사귀던 남자에게 차였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도 창피해서...”
아마 보통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입장에서 충분히 서운함을 느꼈을 거라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세희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윤재는 우울한 지금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바꾸기 위해 애써 화제를 돌렸다.
“어디 중요한 자리에 가시는 길인가 봐요. 코트가 예쁘네요.”
윤재의 말을 듣고 일순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세희가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사실은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요.”
“아... 그럼 늦으신 거 아니에요?”
“아뇨. 중간에 뭘 살 게 있어서 좀 빨리 출발한 거라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한 세희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등 뒤로 쓸어 넘겼다. 윤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2년 전의 세희는 지금보다 훨씬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어서 지금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윤재씨, 저기... 준석씨에게는 오늘 저와 만난 일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윤재씨.”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고 말하고서 짧게 인사의 말을 남긴 세희는 곧바로 등을 돌린 뒤 조금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이힐 굽이 또각또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녀의 새빨간 코트자락이 춤추듯 부드럽게 흔들렸다.
조금씩 멀어지는 세희의 뒷모습을 얼마간 조용히 시선으로 배웅하던 윤재는 그녀의 모습이 마침내 행인들의 틈에 섞여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다시 발길을 돌렸다. 또다시 오늘과 같은 우연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희와는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은 애초에 이준석이라는 중간 다리가 사라진 시점에서 그녀와 윤재가 만날 접점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던 것이었다.
우연히 만난 상대로부터 알지 못했던 하나의 사실을 전해들은 뒤로 윤재는 조금은 미안하고, 또 조금은 착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도 준석이 의리가 강한 성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의리로 인해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재는 미안한 마음 한 편으로 준석을 탓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왜 그때 조금만 더 연인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았느냐고. 아까 전 준석의 이름을 말할 때 보였던 세희의 표정은 아직까지도 그녀가 준석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윤재의 눈에는 비쳤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안타까웠다. 이전에 두 사람이 얼마나 예쁜 커플이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 이 이야기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준석에게 전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오늘의 일은 비밀로 하겠다고 세희와 약속을 했으니까.
시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문득 점퍼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생각난 김에 준석에게 직접 전화를 걸까 생각하던 그는 슬쩍 소매를 걷어 지금쯤 준석이 회사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을 시간임을 확인하고서 전화 대신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시간 날 때 전화해줘.>
간단한 메시지를 전송하고서 다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윤재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에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발신자는 역시나 준석이었다.
[응, 왜?]
설마 이렇게 빨리 전화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윤재는 놀라운 마음 반, 반가운 마음 반으로 입을 열었다.
“일하는 중 아니야?”
전화 너머로 간간이 남자들의 진지한 대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사무실 안인 듯 했다.
[괜찮아. 말해.]
돌아온 대답을 듣고서 살짝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윤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끝나고 가게에 올 수 있어?”
[오늘?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날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왜?]
“아니, 별 일은 아니고... 혼자서 신 메뉴를 개발해봤는데 맛이 어떤지 네가 냉정히 좀 평가해줬으면 해서.”
윤재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신 메뉴? 뭐야, 그게.]
“오면 보여줄게.”
[음... 오늘은 잔업이 좀 있어서 힘들 것 같은데... 조금 있다가 외근이 있거든. 나가는 길에 삼십 분 정도 들를 수 있을 거야. 아마 한... 두 시간 정도쯤 뒤에.]
두 시간 뒤면 슬슬 가게 열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오지 않은 신 메뉴의 시식인 만큼 손님이 오기 전에 진행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윤재는 돌아온 대답을 듣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봐. 아, 대단한 건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고 오진 말고.”
[알았어.]
짧은 통화를 끝낸 뒤 핸드폰을 점퍼 주머니에 넣은 윤재는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다리를 다시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그의 머릿속 쇼핑 목록에는 몇 가지 재료가 추가되고 있었다.
*
“일단 비주얼은 괜찮은 것 같은데?”
이제 막 앞에 내어진 냄비를 쳐다본 준석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기 전 잠시 시간을 내서 <민들레>에 들른 준석은 당연히도 정갈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서로를 알아오며 평상시 그가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의 입장에선 이렇듯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준석을 보며 때때로 조금 신기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 얘기를 하면 분명 준석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테지만 아직 어린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그의 모습을 봐온 윤재는 어느 샌가 능력 있는 멋진 사회인이 된 친구의 모습을 내심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일단 국물부터 맛 본 준석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들어간 거야? 주재료로.”
“고구마하고 돼지고기.”
기묘한 조합이었다.
국물에 이어 주재료인 돼지고기와 고구마를 한 젓가락씩 크게 집어 입에 넣은 준석이 어느 정도 맛을 음미하다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좀... 이상해?”
기대 반 우려 반이 섞인 윤재의 질문을 받은 준석이 ‘음...’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크게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맛. 솔직히 말해서 내가 손님이면 돈 내고 주문하지는 않을 것 같아.”
냉정한 준석의 평가에 윤재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아무리 친구라도 냉정할 땐 냉정하게 대하는 준석의 성격을 알고서 일부러 그에게 신 메뉴 시식을 부탁했던 윤재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을 들은 지금 조금은 힘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소스를 바꿔봤는데 역시 별로인가 보네.”
“신 메뉴를 개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몇 번 실패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서 좋은 결과로 이어질 거야.”
“그럼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실패할 거라는 말이지?”
윤재의 질문을 받고 잠시 말을 멈춘 준석이 이내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한 번에 뚝딱 하고 결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원래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으니까. 하지만 넌 노력도 많이 하고 센스도 괜찮은 편이니까 또 모르지. 솔직히 이것도 나쁘진 않아. 나름 특징도 있고. 하지만 문제는 돈과 연결이 될 정도의 메리트는 없다는 거야.”
철저하게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말을 이어가던 중간 다시 한 번 수저로 국물을 떠서 맛본 준석이 이어서 몇 가지 시식평을 더했다. 특별한 미식가가 아닌 평범한 식성을 가진 그의 평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윤재의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찌개를 가운데에 둔 채로 한동안 준석과 진지하게 신 메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윤재가 잠시 후 문득 딸랑거리며 들려온 종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입구에 시선을 던졌다.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건 성호였다.
“아, 어서와. 오늘은 조금 일찍 왔네.”
반가운 얼굴로 그렇게 말을 건넨 윤재가 평소와 비교해 눈에 띠게 굳어 있는 성호의 표정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윤재에 이어 준석에게도 짧게 인사를 건넨 성호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늘 놓아두던 선반에 놓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래도 이유를 알지 못하면 이대로 영문 모를 무거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 윤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그 사이 외투와 가방을 선반에 놓고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성호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무거운 표정으로 봐서 역시 그냥 지나칠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닌 듯 했다.
윤재와 준석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성호가 잠시 후 한 차례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저 조금 전에 여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
성호의 말을 들은 순간 윤재는 기시감을 느꼈다. 몇 시간 전 거리에서 우연히 세희와 만났던 일이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갑자기 왜... 며칠 뒤 이브 날에 여자 친구한테 거한 이벤트 해줄 거라고 했잖아?”
윤재의 질문을 받고 다시 한 번 쓰게 웃은 성호가 이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들려온 윤재의 말대로 성호는 며칠 뒤 이브 날에 여자 친구와 온종일 즐거운 데이트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목인 크리스마스에는 가게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에 윤재의 배려가 담긴 허락 하에 그 전날에 약속을 정해놓은 그는 약속된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설레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자 친구가 바람피우는 걸 제 친구가 봤대요. 그래서 아까 전 직접 만나서 물어보니까 맞다고 인정 하더라고요. 정말 미안한데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사람이 너무 좋다고요. 하, 진짜 웃기죠.”
그렇게 말한 성호의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허탈함의 감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 밖으로 상대가 너무도 쉽게 인정해오자 화를 낼 타이밍조차 놓쳐버린 그는 아직도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어제도 오늘 여자 친구와 만날 거라고 한창 신나서 윤재에게 자랑을 했던 그였다.
어째서 성호가 저기압 상태로 가게 안으로 들어선 것인지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된 윤재는 줄곧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준석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뒤 다시 성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운 내. 성호야. 분명 앞으로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다정한 윤재의 위로에도 성호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저 진짜 걜 좋아했단 말이에요. 며칠 전에 만났을 때도 자기야 자기야 하면서 그렇게 애교를 부렸었는데 어떻게 며칠 만에 그렇게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말할 수 있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하더라고요. 그 남자를 좋아한다고.”
“.......”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었어요. 뭐라고 큰 소리를 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울기 시작해서 결국 화도 제대로 못 내고 헤어졌죠.”
몇 번째인지 모를 긴 한숨을 내쉰 성호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왼쪽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더니 곧바로 근처에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힘껏 던졌다. 무게감도 없는 반지는 어딘가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후련해졌는지 침묵을 지키는 윤재와 준석을 앞에 두고 애써 웃음을 머금은 성호가 준석과 마주한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걸로 이벤트는 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업체에 전화해서 취소해야겠어요.”
이브 날 여자 친구에게 이벤트를 해주기 위해 업체까지 섭외해 놓았던 성호는 그 날의 일정을 오늘 내로 전부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사장님, 저 그 날 출근하는 게 좋을까요?”
질문을 받은 윤재가 텀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 쉬어도. 어차피 그 날은 휴가를 준 거니까 너 좋을 대로 편하게 사용해.”
대답을 들은 성호가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윤재에게 옮겼다. 마주 앉은 준석이 그런 그의 행동을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사장님도 쉬실 거죠?”
“나 혼자선 할 수 없으니 그래야겠지.”
“저기... 그 날 저녁 xxx 내한공연 티켓 끊어놓은 게 있거든요. 원래는 여자 친구랑 같이 갈 예정이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가실래요?”
갑작스런 제의를 받은 윤재의 얼굴 위에 일순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건 저도 기대하고 있던 공연이라 취소하려니 아까워서요. 자리도 꽤 좋거든요. 티케팅 시작하자마자 열심히 클릭해서 겨우 잡은 자리라...”
자연스레 자신에게 시선을 던져온 윤재를 향해 준석이 말했다.
“가지 그래? 너도 그 밴드 좋아하잖아. 기분전환 할 겸 같이 갔다 와.”
바쁜 일상에 치우쳐 살아가는 윤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준석이 슬쩍 등을 떠밀었다.
“아, 사장님도 xxx 좋아하세요? 잘 됐네요. 같이 가요!”
준석의 말을 듣자마자 좀 전까지 드리워져 있던 우울감을 일시에 떨쳐낸 성호가 한층 더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몇 시 표인데?”
준석에게 등을 떠밀린 윤재가 슬쩍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성호가 대답했다.
“저녁 6시 표요. 같이 저녁 먹고 보면 딱이죠. 공연 끝나고 난 뒤엔 나이트 가요! 거기서 우리 둘 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거예요. 어때요?”
신이 난 성호가 한층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하자 윤재가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순간 잠시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준석이 윤재의 이름을 불렀다.
“밥 좀 있으면 갖다 줄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아예 저녁 먹고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아, 그럴래? 그럼 잠시만 기다려.”
곧바로 몸을 돌린 윤재가 주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준석이 마주한 성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몇 초 사이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도와주셔서 고마...”
“공연은 실컷 즐기다가 와. 대신.”
잠시 말을 멈춘 준석이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나이트나 클럽에 가더라도 그런 데서 함부로 윤재한테 여자는 붙여주지 마. 그 녀석은 가벼운 연애는 못 해. 그러니 상대를 만나더라도 좀 더 진지한 장소에서 제대로 된 상대와 만나야 해. 내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마치 무서운 직장 상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준석과 시선을 마주한 성호가 상대의 기세에 완전히 눌린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밑반찬도 가져왔어.”
잠시 후 쟁반 가득 밥과 반찬을 담아 들고 나오는 윤재에게 시선을 옮긴 준석은 어느 샌가 지금껏 성호가 봐온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성호 밥도 가져왔는데 먹을 거지?”
“아, 네...”
이름을 불린 뒤에야 윤재에게 시선을 옮긴 성호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젓가락을 손에 든 그는 반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윤재와 준석의 얼굴을 조심스레 번갈아보았다.
지금 윤재에게 향해 있는 준석의 시선은 아까 전 순간적이나마 자신을 향할 때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빛을 품고 있었다. 겉으로 대놓고 따뜻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윤재를 대하는 준석의 표정이나 시선엔 선명한 온기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성호는 지금 눈으로 생생히 확인하고 있었다.
‘뭘까...’
뭔가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이 뭔지는 알아내지 못한 성호는 그쯤에서 복잡하게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고 젓가락을 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며칠 뒤 윤재와 좋아하는 밴드 공연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자고, 그는 아직까지도 실연의 아픔으로 욱신거리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