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27화 (27/66)

27.

익숙한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달콤한 선율이 귓가에 들려왔다. 늘 그렇듯 한껏 멋을 내고 온 손님들은 끼리끼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그들 가운데에 여성은 단 한 명도 섞여 있지 않았다. 공식적인 게이바이니 만큼 떳떳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커플들 중 몇몇은 바로 곁을 지나가는 손님들의 시선을 오히려 즐기기라도 하듯 대담한 손길로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 하나 변한 게 있다면 한동안 바(bar)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물들이 신년을 맞이한 뒤로 깨끗하게 사라져 있다는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잔을 닦던 손을 멈춘 정수가 근처로 다가오고 있는 수영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퇴근길이라고 하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회사에서 곧바로 온 듯 수영은 짙은 네이비의 단정한 수트를 입고 있었다. 큰 키에 슬림한 체형인 그가 걷는 모습은 무척이나 눈에 띠어서 어느 샌가 주변의 시선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광경이라면 이미 질리도록 봐왔지만 역시 몇 번을 봐도 거듭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정수였다.

“제이는?”

바 스툴에 앉으며 수영이 묻자 조금 전까지 그의 긴 다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수가 곧바로 현실로 돌아와 대답했다.

“아, 오너는 지금 VIP룸에 계세요.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요. 들어가신지 꽤 되셨으니 조금 뒤면 나오실 것 같은데... 지금 가서 전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여기서 기다릴게.”

“네. 그럼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술은 별로 생각 없으니 적당히 마실 만한 걸로 줘.”

“녹차 괜찮으세요?”

“그래.”

짧게 대답한 수영이 재킷을 벗어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외모 탓인지 그 별 것 없는 행동 하나조차도 정수에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이고 있었다. 비즈니스맨으로서 힘을 빼고 깔끔한 화이트 셔츠 한 장에 심플한 넥타이를 매고 있을 뿐인 수영은 당장 한껏 멋을 내고 이곳에 와 있는 누구보다도 눈에 띠고 있었다.

잠시 후 앞에 나온 녹차를 흘깃 쳐다본 수영이 문득 들려온 문자수신음을 듣고 옆자리에 놓아둔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동생인 재영이었다.

<시간 날 때 한 번 집에 와. 형 선물 사놨어.>

얼마 전 남미 쪽으로 여행을 다녀온다고 하더니 어제나 오늘쯤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특별히 살가운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나이차가 나는 두 사람은 이제껏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무난한 형제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물론 동생인 재영이 대들었다면 애초에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의 수영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날 때 한 번 들르겠다고 짤막하게 답신을 전송한 수영은 전송과 거의 동시에 새 메시지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까 전엔 정말 미안했어. 이번에도 덕분에 살았어. 다음에 한 잔 살게.>

철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 또다시 중요한 부분에서 실수를 저지름으로 인해 같은 팀 동료들에게 귀찮은 잔업을 떠맡게 만든 그는 아마도 이제 막 회사를 나서는 길인 듯 했다. 그의 민폐야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닌 만큼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는 수영으로선 이제 화가 난다기보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서 한숨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내용의 간략한 답문을 작성하던 수영이 문득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작은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지금 막 자신이 사진으로 찍힌 것을 알아차린 수영이 문자를 입력하던 손가락을 거두고서 바로 앞에 서있는 무례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단발에 가까울 정도의 긴 머리끝이 구불구불하게 말려져 있는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 어디 되지도 않는 예술을 한답시고 설치고 돌아다닐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몇 개의 구멍을 뚫었는지 길게 늘어진 귀걸이를 양 귀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대박이네. 당신, 여기 몇 번 온 적 있지? 나 기억하고 있어.”

초면부터 말을 놓는 상대를 쳐다보는 수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대쉬하는 상황이야 이곳에서는 일상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을 만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풍기는 분위기 상 가까이 가기에 높은 벽이 느껴지는 수영에게 이렇듯 누군가가 당당히 말을 거는 장면은 자유분방한 이곳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상대를 고르러 온 거면 난 어때?”

혼자 앉아 있는 수영을 잠시 멀찍이서 지켜보다 기회를 포착하고 다가온 남자는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약 두 달 전쯤 이곳에서 처음 수영을 보고 한 눈에 반한 뒤로 그와 다시 만날 목적에 줄곧 이곳을 찾았던 그는 간신히 재회에 성공한 지금 조금 흥분한 기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혹시 더 시간을 끌다가 영영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행동에 나선 그는 벌써부터 은밀한 기대감으로 살짝 달아올라 있는 상태처럼 보였다.

꽤나 예쁘장한 스스로의 얼굴을 믿고 있기 때문일까, 이미 긍정의 답을 들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한참 만에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생각 없어.”

수영으로부터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한 차가운 거절을 당한 남자가 일순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 이곳을 찾으며 상대를 고르는데 곤란함을 느낀 적이 없었던 그는 단숨에 거절을 당해버린 지금의 상황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야, 파트너도 없이 여기 왔다는 건 그럴 목적으로 온 거 아냐? 그럼 뺄 거 없잖아?”

어느 정도 당혹감이 사라진 뒤엔 거절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남자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스물셋의 파릇한 젊음과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이곳에서 나름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와 같은 상황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귀찮지만 어쨌든 직장 동료인 철우에게 형식상이라도 짧게 답문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영이 다시 핸드폰 액정에 시선을 던지는 것을 바라본 남자가 순식간에 자신이 수영의 관심권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나마 그에게 있어 다행인 건 마침 떠들썩한 음악이 나오고 있는 덕분에 주위의 관심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믿음이 안 가서 그래? 나 병 같은 거 없어. 평소에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고...”

“.......”

“정말이야, 늘 신경 쓰고 있다니까.”

“관심 없다고 했지. 뒷구멍에 박아줄 상대가 필요하면 다른 데 가서 구걸해. 여기서 쓸데없는 힘 빼지 말고.”

멸시가 담긴 수영의 차가운 대답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남자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과 얼굴이 순식간에 오른 열로 인해 짧은 사이 붉게 변해 있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이곳에서 성(性)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야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 들려온 수영의 말이 가볍게 웃어넘길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머리가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 진짜 잘 났네. 잘 생긴 새끼는 얼굴값 한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지?”

“.......”

“그 잘난 좆은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직접 봐야겠어.”

분노가 담긴 남자의 말에 억지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 수영이 문득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것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남자가 내밀어 보인 것은 그가 소유한 핸드폰으로, 액정에는 독특한 의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조금 전 찍힌 수영의 얼굴이 떠 있었다.

“무슨 생각이야?”

“뭐겠어? 협박이지.”

“협박?”

당당한 남자의 대답에 희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수영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이 상황에서도 수영의 손가락 어디에도 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남자는 능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던져온 수영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내가 게이바에 왔다는 증거로 그 사진을 어디에 뿌리기라도 하려고?”

“맞아. 잘 알고 있네.”

그 정도 단순한 생각이야 굳이 노력해서 읽어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수영은 마치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한동안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그 사이 희뿌연 연기가 몇 번인가 두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냥 가.”

한참 만에 입을 연 수영이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상대는 물론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극해 봐야 좋을 거 없잖아? 당신처럼 잘난 사람은 여기에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잃을 게 많아 보이는데.”

들려온 남자의 말에 수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는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듯 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눈높이가 순식간에 역전이 되었다.

“화장실로 갈까.”

“왜? 근처에 괜찮은 호텔이 있는데...”

“별로 길게 쓸 시간은 없어.”

수영의 대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몇 마디를 투덜거린 뒤 앞서 화장실로 향했다. 쾌적한 장소에서 제대로 된 섹스를 즐기고 싶었던 그로서는 그다지 만족스런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드디어 노렸던 타깃을 먹어치울 수 있게 된 사실을 앞세워 스스로를 다독인 그는 다행히 화장실이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어떤 커플이 진득하게 한바탕 섹스를 해댔는지 그리 넓지 않은 화장실 안에는 비릿한 정액 냄새가 남아 있었다.

“당신, 진짜 운 좋은 거 알아? 내 펠라 실력은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하거든. 오늘 모처럼 실력발휘를 해서 제대로 증명해줄게.”

히죽거리며 뒤를 돌아선 남자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화장실 문을 닫고서 곧바로 걸쇠를 걸어 잠근 뒤 바리게이트처럼 그 앞에 선 수영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 삭제해.”

“!”

싸늘한 상대의 명령에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낀 남자가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처음엔 단순한 거래 전의 조항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당장 그의 눈에 비친 수영은 아무래도 섹스를 할 의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날 자극하지 말라고 했지. 이러면 손해는...”

속았다는 생각에 허탈감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 남자가 또다시 자신이 가진 무기를 내세워 협박을 하기 위해 말을 이어가려던 중간 갑자기 날아온 구둣발에 배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밀려 나자빠졌다. 지저분한 화장실 바닥에 웅크린 채 쓰러진 그는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 배를 끌어안고서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설마 이렇듯 갑자기 자신에게 발길질이 날아올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남자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곧바로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묵직한 구두 굽 소리를 울리며 쓰러진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선 수영이 천천히 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흐...크흐...”

억눌린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남자의 앞에 천천히 긴 다리를 구부리고 앉은 수영이 조금 전 집어 든 핸드폰을 내밀었다.

“해제하고 삭제 해.”

명령이 내려진 뒤에도 좀처럼 움직이려하지 않는 남자를 향해 스치듯 미소를 지어 보인 수영이 손에 든 핸드폰을 들어 곧바로 남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아악-!”

딱딱한 모서리가 이어 세 차례 강하게 치고 지나간 남자의 코에서 곧바로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강한 만큼 지는 것이 싫어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던 남자는 연이은 폭력으로 인한 통증에 어느 샌가 끅끅거리며 울고 있었다. 조금 전 들려온 소리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아 코뼈 어딘가가 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걸로 왜 고집을 부려서 화를 자초해. 병신새끼.”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수영이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동시에 터져 나온 비명이 좁은 화장실 안을 짧게 채웠다 사라졌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남자가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급하게 소매로 닦은 뒤 조금 전 명령받은 대로 움직이기 위해 곧바로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뻗어진 그의 손은 그대로 위에서 내려온 수영의 발아래 깔리고 말았다.

“아아악--!”

수영의 무게 째로 딱딱한 구두 밑창에 손을 깔린 남자가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것 같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곧바로 이어진 강한 발길질에 그대로 멎었다. 반복된 협박과 고집에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벗어난 상태의 수영은 살려달라고 우는 남자를 향해 몇 차례나 더 강한 응징을 가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멀쩡했던 남자의 얼굴은 짧은 사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튄 피의 일부가 수영의 새하얀 셔츠의 허리 부분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줄곧 좋지 않은 기분 상태를 유지했었던 수영은 마치 이참에 그 동안에 안고 있던 스트레스를 풀 작정이라도 한 듯 최소한의 이성만을 남긴 채 거친 행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차라리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이처럼 자신에게 행동에 나설 빌미를 만들어주기를.

천성적으로 가학적인 성향이 강한 수영은 사회인이 된 뒤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본능을 모처럼 만에 행동으로 표출한 지금 조금은 후련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진 삭제해.”

낮은 목소리로 다시 떨어진 명령에 이번에는 곧바로 몸을 움직인 남자가 핸드폰을 집어 들어 급하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수영의 구둣발에 참혹하게 짓밟혔던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전 찍혔던 자신의 사진이 삭제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수영은 젖은 화장실 바닥에 앉아 숨죽이고 있는 남자를 잠시 쳐다본 뒤 발길을 돌려 닫혀있는 문으로 향했다. 걸쇠를 걷어내고 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남자를 돌아본 그가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서 정리하고 나와. 미리 경고하는데 앞으로도 이 근방에서 돌아다닐 거면 복수니 어쩌니 하며 괜한 짓거리할 생각은 하지 마. 너 같은 새끼 하나 찾아서 병신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

잔뜩 위축된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잠시 쳐다보던 수영이 곧바로 문을 열고 화장실을 나와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는 자리에 도착한 뒤 의자에 앉는 대신 옆에 놓아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 다른 손님에게 칵테일이 담긴 잔을 건네고 돌아온 정수가 이제 막 지갑에서 꺼낸 지폐를 테이블에 놓는 수영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어, 벌써 가시게요? 지금 오너한테 가서 말씀드릴까요?”

“아니, 오늘은 이만 갈게. 내일 출근해야 하기도 하고.”

“아... 그러시겠어요?”

“내가 왔던 건 따로 전할 필요 없어. 그럼 수고해.”

정수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을 빠져나온 수영은 곧바로 입구 근처에 세워둔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들고 있던 재킷을 조수석에 놓던 중간 문득 바테이블에 담뱃갑을 놓아두고 온 것을 떠올린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서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

한동안 꽁꽁 얼어 있었던 날씨가 어젯밤 눈이 내린 뒤 조금은 풀려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깥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어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외투를 걸쳐 입고 나온 윤재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새벽까지 평소보다 많은 손님들을 받아 바쁘게 움직이고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곯아떨어졌던 윤재는 늘 그렇듯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완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으로 눈을 떴다. 그나마 오늘은 휴일인 날이라 내일 오후까지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이 지금 그의 마음에 작은 평안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으, 추워.”

갑자기 뺨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바람에 살짝 목을 움츠린 윤재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목에 걸려 있는 비닐봉지가 바람이 스쳐 지날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란스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윤재가 평소 즐겨 먹는 종류의 라면과 음료수로, 그것은 오늘 그의 점심 메뉴였다. 조금 전 간단한 샤워를 마친 뒤 출출함을 느낀 그는 모처럼 점심으로 라면을 먹기로 하고 지금 막 집 근처의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조금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빌라 건물 입구로 향하던 중간 문득 곁을 스쳐가는 한 대의 차량을 발견하고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차량이 이 허름한 골목에서 쉽게 접할 일이 없는 고급 승용차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의 발은 자연스레 제자리에 멈춰 섰다.

칼 같이 바로 옆에 멈춰선 은색 차량의 조수석 문이 내려가자 곧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고급 승용차와 맞춤처럼 잘 어울리는 잘 생긴 얼굴. 수영이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곧바로 운전석에서 내리는 수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점심 먹었어?”

갑작스런 질문에 무심코 빠르게 눈을 깜빡인 윤재가 점퍼에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 와중에도 줄곧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비닐봉지는 차가운 바람을 맞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뇨. 아직. 이제 먹으려고...”

윤재의 대답을 들은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쉬는 토요일이지?”

확신이 담겨 있는 질문을 받고서 긍정의 의미로 침묵을 지킨 윤재는 잠시 후 차의 앞을 돌아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수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윤재의 바로 앞에 멈춰 선 수영이 직접 손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 점심 먹으러 가게.”

“.......”

“혼자서 라면 끓여 먹을 생각이었어?”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비닐에 라면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수영이 묻자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너랑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해서.”

“제가 집에 없었으면 어쩌려고요?”

“그럼 그냥 돌아갔겠지.”

심플한 수영의 대답에 윤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수영이 오늘 같은 주말에 같이 밥 먹을 사람 하나 없어서 굳이 이곳을 찾았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같이 있을 때마다 자주 듣게 되는 수영의 핸드폰 벨소리가 평상시 그의 인기를 반증하고 있었다.

“타. 라면보다는 맛있는 걸로 사줄게.”

“.......”

윤재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사람을 헛걸음시키고 나면 그 후에는 또 다른 의미로 불편한 기분을 안게 될 터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었고 휴일인 것도 사실이었으며, 휴일임에도 별다른 약속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서 억지로 거짓말이라도 지어내면 어떻게든 거절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거짓말에 서툰 윤재는 당장 눈앞의 예리한 남자를 속아 넘길 자신이 없었다. 만약 운 좋게 속아 넘긴다고 해도 일부러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여기까지 온 수영이 순순히 물러설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겨우 점심 한 끼를 같이 먹는 정도에 굳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는 적당한 선에서 고민을 끝내고 문이 열려 있는 조수석에 올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수영도 곧 운전석에 올랐다.

“회 먹을 수 있지?”

“...네.”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차를 출발시켰다.

안정된 승차감을 느끼며 차가 비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을 앞 유리창으로 지켜보는 윤재의 얼굴 위엔 약간의 긴장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집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뒤 tv를 시청하려던 그의 소박한 계획은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횟집에 가는 건가요?”

익숙한 골목을 완전히 빠져 나오자마자 서서히 차에 속도가 붙는 것을 느끼고 있는 윤재가 수영을 쳐다보고서 물었다.

“잘 아는 곳이 있는데 좀 멀어. 괜찮겠어?”

“얼마나 먼데요?”

“주문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윤재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와 같은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수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넌 평소 늘 답답한 가게에만 묶여 살잖아.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멀리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왕 이면 탁 트인 바다 같은 데로.”

이어진 수영의 말을 들은 뒤에야 그가 왜 느닷없이 회 이야기를 꺼냈는지 윤재는 이해했다. 그로선 가까운 곳에서 적당히 식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조금 전 들은 장소가 터무니없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제 막 정오를 지난 시간인 데다 내일 오후까지는 휴일인지라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윤재의 입장에선 수영과 단둘이 바다에 놀러가는 것이 마음 편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냥 근처로 가요.”

“주문진이 너무 먼 것 같으면 인천으로 갈게. 이 이상은 양보 못해.”

이게 무슨 흥정이기라도 하냐고 묻고 싶어진 윤재는 그러나 더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기 전에 이 정도에서 타협하기로 하고 ‘알겠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인천이면 거리상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조금 전 수영이 말을 꺼냈기 때문인지 조금은 모처럼만에 바다가 보고 싶어지기도 한 그였다. 아주 어릴 적 잠시 해안가 근처에서 살았던 기억으로 인해 특별히 파도치는 소리를 좋아하는 윤재는 그와 같은 기억이 반영된 것인지 오래 전부터 스케치북을 펼치면 은연중에 바다를 그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나 그는 낮보다도 잔잔한 밤바다의 풍경을 좋아했다.

운전에 몰두하고 있는 수영의 옆에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윤재가 문득 무릎 위에 놓아두고 있던 비닐봉지 안에 손을 넣었다. 이내 그의 손에 잡혀 나온 것은 유리병에 담긴 망고주스였다. 평소 좋아해 냉장고에 몇 개씩 저장해두었던 터라 아까 슈퍼마켓에 들르는 김에 네 병을 추가로 구매했던 그는 그 중 두 병을 손에 든 채 수영을 쳐다보았다.

“마시겠어요?”

윤재의 질문을 받고서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곧 다시 앞 유리창으로 시선을 되돌리고서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마실게. 일단 가지고 있어.”

보통의 상황이었으면 대충 됐다고 거절했을 그는 평상시의 그답지 않은 대답을 했다. 옆에서 병뚜껑이 따지는 소리에 이어 간헐적인 목울림 소리가 들리는 것을 가만히 귀에 담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스치듯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윤재의 집으로 행선지를 정한 뒤 운이 나쁘면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충분히 만족스럽게 여겨질 만도 했다.

우스웠다. 대단할 것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 뚜렷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이거야 마치 소풍을 앞둔 전 날 설렘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비슷한 기분일 터였다. 실제 수영은 학창시절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럴 거라고 적당히 짐작할 뿐이었다.

주말 치고는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은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서울을 벗어난 차는 이후 얼마를 더 달린 끝에 수영이 목적지로 정해두었던 해변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서 먼저 문을 연 윤재와 거의 동시에 차에서 내린 수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고 해도 아직 한겨울인 만큼 해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를 품은 강한 바람을 잠시 그대로 서서 맞던 수영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근처에 서있는 윤재를 돌아보았다. 운 좋게 장소를 잘 택한 것인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해변을 바라보는 윤재의 눈동자가 또렷한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한 뒤에 둘러보자.”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보일 듯 말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집 근처 슈퍼마켓에 다녀올 생각으로 나온 탓에 제대로 된 외출복 대신 낡은 청바지에 점퍼라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수영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중간 중간 옆에 펼쳐져 있는 해변을 향했다. 정확하게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밀려오는 파도에.

윤재가 다시 바다를 찾은 건 너무나도 오랜 만의 일이었다.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쉬운 것을 그동안은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느라 이 정도의 노력조차 기울일 생각을 하지 못한 채로 지냈었다.

꼬박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새벽녘에 귀가해서 잔 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일어나 또다시 가게를 열 준비에 돌입하는 단순한 패턴의 반복.

휴일이라고 해봐야 하는 일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혼자서 식사 후 tv를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정도였다. 물론 그것들도 엄연한 취미생활의 일부인 만큼 특별히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분을 전환하는데 있어서는 가끔씩 이렇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는 편이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윤재였다.

줄곧 코 안으로 들어오는 비릿한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당장 주변에 막아줄 건물 하나가 없어 있는 그대로 몸을 치고 지나가는 강한 바람도. 무엇보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주차한 곳으로부터 몇 분을 이동해 수영을 따라 꽤 널찍한 가게 안으로 들어선 윤재는 점원의 안내에 따라 비어 있는 창가 한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마주한 위치에 앉은 수영은 이전에 이 가게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는지 능숙하게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몇 가지의 메뉴를 추천했다. 특별히 가리는 게 없다고 대답한 윤재는 수영에게 주문의 주도권을 넘긴 뒤 조금 전 점원이 가져다준 두 개의 컵에 차례로 물을 따라 그 중 하나를 수영의 앞에 밀어주었다.

그 사이 대기하고 있는 점원에게 몇 가지 종류의 회를 주문한 수영은 마주한 윤재와 마찬가지로 햇빛차단막에 절반쯤 가려져 있는 넓은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한낮의 볕을 받은 바다의 물결이 저 멀리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연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해변 가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주말을 맞아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로 보였다.

“바다에 온 건 얼마만이야?”

문득 건너편에서 들려온 질문에 그제야 창밖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앞으로 옮긴 윤재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꽤 오래 됐어요. 3년 전쯤에 친구와 함께 간적이 있었죠.”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자연스레 이전에 봤던 한 남자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차로 윤재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던 길에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봤던 남자였다. 꽤나 다정하게 보였던 두 사람의 모습을 짧게 떠올리던 수영은 이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윤재가 워낙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나 지인이 몇 명쯤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텐데 그것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땐 종종 그림을 그린다고 했는데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어?”

양쪽 소매를 차례로 걷으며 수영이 물었다. 지금 그는 흰 셔츠 위에 연베이지색의 단정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단순히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 때문인지, 아니면 장소의 변화 때문인지 이제껏 주로 그의 각이 잡힌 수트 차림을 봐온 윤재의 눈에는 지금의 수영이 평상시와 달리 느슨하게 힘을 빼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tv를 보면서 편하게 보낼 생각이었어요.”

“모처럼의 휴일인데 아깝지 않아?”

“별로 아깝지는...”

수영의 질문에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윤재가 근처로 다가오고 있는 점원을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곧 점원의 손에 의해 차례로 테이블에 놓이기 시작한 커다란 접시들에는 몇 가지 종류의 회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때를 훨씬 지나쳐 가진 점심식사는 느긋하게 이루어졌다. 그 사이 수영의 핸드폰 벨소리가 세 번 울렸지만 한참 만에 마지막 접시를 비울 때까지 수영은 단 한 번도 핸드폰이 들어 있는 외투로 손을 뻗지 않았다.

30분 정도의 비교적 긴 시간을 들여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다행히 아까 전보다 약해진 바람이 불고 있는 해변 가를 걷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앞뒤로 그들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꼭 한번 씩 수영과 윤재를 돌아보았다. 멀리서도 눈에 띠는 수영의 외모와, 조금은 부정적인 의미로 눈에 띠는 윤재의 걸음걸이가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는 듯 했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이상하게 걸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근처에 서있는 한 꼬마 아이를 발견하고 쳐다봤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윤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는 곧바로 아이를 안아 들고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모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긴 윤재가 조금 앞에 멈춰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무시해.”

들릴 듯 말듯 나직하게 들려온 수영의 말에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 ‘신경 안 써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이런 상황들엔 충분히 익숙해져있는 그였다. 애초부터 상대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말도 아닌 만큼 그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게 오히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동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해변 가를 걷던 윤재가 문득 발을 멈추고 바다 정면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물결 위로 갈매기 떼가 멋진 비행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원스런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목청껏 울고 있는 갈매기 떼는 오가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일 없이 그들의 주변을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

문득 윤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장면을 스케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고 느끼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의 일부 정도는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모처럼 만에 찾은 바닷가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잠시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여 수영의 곁으로 다가간 윤재는 그렇게 얼마간 느긋한 산책을 즐기다가 문득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있는 구멍가게를 발견하고 수영에게 말했다.

“뭐라도 마시고 싶지 않아요?”

“목말라?”

“네. 조금.”

“그럼 가자.”

한참 만에 해변 가를 벗어나 건물들이 늘어선 길로 올라온 두 사람은 멀찍이 보이는 구멍가게를 향해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주말이라 그런지 좁은 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

스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잠시 후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서있는 누런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런 그의 행동에 따라 곁에서 걸음을 옮기던 수영도 발을 멈췄다.

윤재의 시선이 누런 개한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수영이 먼저 긴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개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오라는 표시로 짝짝 두 번 박수를 치고 다시 손을 뻗자 물끄러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녀석이 슬금슬금 뒤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영의 기(氣)에 눌려 겁을 먹은 듯 했다.

수영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재가 잠시 후 이번에는 자신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손을 뻗었다. 그러자 좀 전까지 뒤쪽으로 움직이던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윤재의 앞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리는 좁혀져 이내 녀석을 양손으로 안은 윤재가 부드럽게 녀석의 머리와 등 부분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한동안 정신없이 윤재의 손을 핥던 녀석이 잠시 후엔 배까지 뒤집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예쁘지. 예쁘다~”

누런 개를 쳐다보는 윤재의 시선엔 자애가 담겨져 있었다. 앞에서 헥헥거리는 녀석을 너무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금 전 보았던 햇볕을 머금은 물결보다 한층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영롱한 보석처럼.

그리고 그런 윤재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수영이 지켜보고 있었다.

본능적인 눈의 깜빡거림조차 잊어버릴 만큼 집중한 채 그렇게 한동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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