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몇 분간 침대 맡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수영은 곧 입구에서 느껴진 기척에 따라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서 밖으로 나온 윤재는 허리에 타월 한 장만을 두른 채였다. 쇄골이 선명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마른 몸을 하고서 천천히 수영의 곁으로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그는 당장 자신을 향해오는 시선을 차마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작은 등불에 비쳐지고 있는 어스름한 침실 안의 어딘가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 있었다. 윤재가 지금 얼마나 많이 긴장을 하고 있는지는 잔뜩 경직된 주변 공기의 흐름을 통해서 충분히 수영에게 전달되어지고 있었다.
침대 맡에 걸터앉아 있는 수영과 단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제자리에 멈춰 선 윤재는 그 상태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수영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갑자기 뻗어온 손에 팔을 붙잡힌 윤재가 곧바로 강한 힘에 끌어당겨져 바로 옆 넓은 침대에 쓰러지듯 눕혀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기분을 수습하기도 전 곧 수영의 무게의 일부가 윤재의 위를 덮쳐왔다.
허리에 타월 한 장만을 두른 윤재와 달리 외출복 차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수영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윤재의 머리카락 사이로 긴 손가락을 집어넣은 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벌어진 입술의 감촉과 살짝 흐트러진 숨결에 이어 곧 뜨거운 혀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훤히 드러나 있는 목덜미 위로 선명한 감촉을 남기기 시작했다.
수영의 한 손에 머리를, 다른 한 손에는 어깨를 끌어안긴 채 젖혀진 목으로 흡사 물어뜯는 듯한 거친 키스를 받아내고 있는 윤재의 손가락이 잠시 허공에서 헤매다 곧 가까운 위치에 있는 얇은 시트를 힘껏 붙잡았다.
윤재의 물기어린 머리카락을 꽉 쥔 손가락은 한참이나 그 상태로 미동이 없었다. 익숙한 샴푸 향과 비누향이 주변의 공기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가느다란 윤재의 목덜미에 한 차례 사나운 키스를 퍼부은 수영은 그대로 천천히 입술의 위치를 아래로 옮겨 초라하게 말라붙은 가슴 위를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흐...!”
왼쪽 유두를 잘근 깨물린 윤재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것을 알아차린 수영은 한참동안 윤재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낸 뒤 곧 그 손을 아래로 뻗어 벌어진 윤재의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그의 이와 혀는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가슴 돌기를 능숙하게 희롱하고 있었다. 약간씩 힘을 넣어 깨물 때마다 한손에 눌린 어깨에서 느껴지는 경직된 반응이 조금씩 수영을 부추기고 있었다. 수영의 예상대로 살집이 잡히지 않는 윤재의 허벅지는 딱딱했지만 그럼에도 피부 결은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끄러워서 그 위를 쓰다듬는 손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활기를 띠어갔다.
윤재의 다리를 양쪽으로 크게 벌린 채 그 사이에 몸의 중심을 두고 깊숙이 고개를 숙인 수영은 얼마간 단단한 이와 혀로 지분거리던 유두를 간신히 해방시켜준 뒤 이어 배꼽으로 이어지는 피부 위로 혀를 미끄러트렸다. 결 좋은 피부에서는 익숙한 비누향이 풍기고 있었다.
“하...”
윤재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새어나오고 있는 한숨과도 같은 억눌린 숨소리만이 넓은 침실 안을 간간이 채울 뿐, 농밀한 행위를 주도하고 있는 수영은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윤재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몸을 겹치는 행위를 벌써 몇 년째 까맣게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윤재는 수영이 주는 강렬한 자극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애써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배 위에 뜨거운 키스를 남기던 수영의 숨결이 이제 막 그 아래로 옮겨지는 것을 느낀 윤재가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목은 곧 어딘가에서 날아온 수영의 커다란 손에 단단히 휘감긴 채로 침대에 내리눌러졌다.
“!”
줄곧 윤재의 허리에 둘러져 있던 타월이 순식간에 벗겨진 것과 동시에 뻗어온 수영의 손이 아직 힘을 잃은 채인 윤재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감싸왔다. 처음 얼마간 리드미컬하게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던 커다란 손은 그 안에 쥐어진 것의 형태가 이제 막 갖춰질 때쯤 아래쪽으로 서서히 이동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떠나간 손을 대신해서 윤재의 중심을 휘감아 온 건 데일 것처럼 뜨겁고 축축한 감촉이었다. 일어선 끝부분으로 예상하지 못한 감촉을 느낀 것과 동시에 줄곧 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 본 윤재는 자신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수영이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아...으...”
망설임 없이 윤재의 페니스를 입안에 품은 수영이 천천히 목을 움직이고 있었다.
뿌리부터 기둥을 지나 발갛게 봉우리 진 끝부분까지 섬세하게 혀로 핥아 올리고 있는 수영의 움직임은 능숙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평소 당연하게 봉사를 받아온 입장에서 남에게 서비스를 받은 적은 있어도 해준 적은 없었던 그는 그동안 자신이 수많은 상대로부터 받으며 느꼈던 경험에 비춰 최대한으로 윤재가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쏟고 있었다. 애써 억누르지만 조금씩 흐트러진 채 크게 들려오는 윤재의 숨소리가 어느 샌가 단단한 형태를 갖춘 기둥을 정성껏 핥아 올리는 수영의 움직임을 부추기고 있었다.
보드라운 주머니를 조심스레 혀끝으로 핥아 올리던 수영이 잠시 동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자신과 달리 성기에 닿는 자극에 익숙하지가 못한 탓에 금세 사정감을 느끼게 되어버린 윤재의 상기된 얼굴을 시야 안에 들인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히 일어서 있는 기둥을 다시 한 번 뿌리째 입 안 가득 품었다.
“흐... 으...”
잔뜩 미간을 찌푸린 윤재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 정도의 자극이 가해지다 곧 해방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좀처럼 입에서 놓아주지 않는 수영의 끈질긴 행동이 서서히 그를 한계로 몰아가고 있었다. 중간 중간 단단한 이가 기둥을 긁고 지나칠 때마다 흠칫거리며 허리를 세운 그는 이제 머지않아 사정할 것을 예감하고 줄곧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뻗어 수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와중에도 한껏 벌어진 윤재의 허벅지 사이에 위치한 수영의 머리는 위 아래로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해요. 이제...”
고집스레 놔주지 않는 수영을 물기로 일렁이는 눈으로 쳐다본 윤재가 넓은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에 좀 더 힘을 실었지만 야속하게도 수영은 그런 윤재의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더 강한 자극을 가해오고 있었다. 마치 괜찮으니 내보내라고 재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영과 짧게 사귀었던 당시 그의 부탁에 따라 몇 번인가 서툰 실력으로 펠라를 시도한 적은 있어도 이처럼 반대로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은 처음인 윤재는 한계의 한계까지 내몰린 지금 이를 악문 채 힘겹게 사정감을 참아내고 있었다. 애초에 누군가의 입에 사정을 한다는 것 자체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그는 그것도 우수영이라는 남자를 상대로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놔...줘요- 이제 정말... 아... 놓...아... 큭-.”
수영의 어깨를 밀어내던 윤재의 손에서 힘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그의 긴 목이 뒤로 젖혀졌다. 한계에 내몰린 채로 끝까지 참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억눌린 신음과 함께 수영의 입에서 새하얀 해방을 맞이하고 말았다.
뜨거운 점막에 휘감긴 상태에서 움찔 떨며 마지막까지 사정을 마친 윤재의 헐벗은 어깨가 희미하게 들썩였다.
꿀꺽.
몇 미터 사이를 두고 들려온 수영의 목울림 소리에 침대에 너부러진 듯 누운 채로 흐트러진 숨을 고르고 있던 윤재가 천천히 젖은 눈을 떴다.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극상의 쾌감을 느꼈던 데에 대한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따라붙은 수치심이 윤재를 현실의 상황으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수영이 자신의 것을 입에 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윤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가 자신의 정액을 깨끗이 삼켰다는 사실에 결정적인 충격을 받고 있었다.
윤재가 기억하는 수영은 결코 그런 걸 스스로 나서서 해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로지 봉사를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관계 시에도 자신의 쾌감을 위주로 생각하는 그는 설령 변덕에 의해 펠라를 시도하더라도 굳이 상대의 정액을 입으로 받아 삼킬 정도의 서비스는 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이 정도의 정성어린 봉사를 해주었다는 사실은 윤재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동시에 강한 부담을 안겨주고 있었다. 수영이 해준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성의는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천성적으로 성실한 성격의 윤재에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수영이 처음부터 이 정도의 성의를 보였다는 건 이 이후부터 그가 적지 않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이 윤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욕실에서부터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윤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한 차례 사정을 마치고 난 뒤 힘을 잃은 페니스를 수영의 눈앞에서 감추기 위해 조심스레 다리를 오므린 그는 그가 쏟아낸 것을 삼킨 뒤로 좀처럼 행동을 이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수영을 잠시 그대로 말없이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쳐도 수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은 윤재로선 이 일에 관해서 만큼은 수영이 주도해주기를 원했지만 어째서인지 수영은 그 이상 손을 뻗어오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작은 움직임조차 보여 오지 않았다. 마치 오직 혼자만이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언제까지나 이대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윤재는 마침내 마음의 결심을 굳히고 수영과의 거리를 좁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 최후의 망설임을 떨쳐내고 조심스레 손을 뻗은 그는 곧장 그 손끝을 수영의 허리에 채워진 벨트로 가져갔다.
“!”
손끝이 버클에 닿기 직전 갑자기 뻗어온 수영의 손에 손목을 붙잡힌 윤재가 고개를 들어 수영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팔을 붙잡힌 채로 침대에 눕혀진 그는 상체만을 겹친 채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수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윤재와 달리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고 있는 수영이 잠시 후 무겁게 닫혀 있었던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똑같이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더 이상은 안 할 거니까.”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를 스치듯 쳐다본 수영이 미간을 좁힌 채 말을 이었다.
“전에 말했잖아. 강제로 안지 않을 거라고.”
“...강제...?”
“그래.”
“지금 이건... 강제가 아니에요. 난 분명 내 의지로 여기까지 왔어요.”
“의지...? 지금 네 표정이 어떤지 알고나 말하는 거야? 지금 널 보면 내가 꼭 강간범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한 상대를 너 같으면 좋다고 안고 싶겠어?”
예상치 못한 수영의 말에 일순 표정을 굳힌 윤재가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줄곧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상태인 그는 자신을 안지 않겠다는 수영의 확언을 들은 직후 일시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도감인지 허탈감인지 모를 감정이 대신해서 그의 마음을 서서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안지도 않을 거면 조금 전엔 왜 내게 그런 걸 한 거죠?”
명백한 책망이 담긴 질문을 받은 수영이 쓰게 웃었다. 당장은 윤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는 그는 그러나 단단히 붙잡힌 윤재의 손목만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서 해방시켜주지 않고 있었다.
“뭘 바라고서 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
“.......”
“...혹시 이런 비쩍 마른 몸을 보고 나니 그럴 기분이 사라진 건가요?”
조금은 자조 섞인 윤재의 질문에 수영이 일순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이내 윤재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실어 그의 손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이끈 수영은 잠시 후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윤재의 얼굴을 응시한 채 말했다.
“그게 이유가 아닌 건 알겠지?”
“.......”
손바닥을 통해 수영의 벨트 아래 솟아나 있는 단단한 감촉을 확인한 윤재가 대답 대신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로 분명한 반응을 보여 오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수영이 마음을 접은 이상 혼자서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인식한 윤재가 다시 옷을 걸쳐 입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잠시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던 수영이 곧 다시 손을 뻗어 윤재의 팔을 붙잡았다. 곧바로 강제로 눕혀진 윤재가 그 위로 그림자를 만들고 올라온 수영을 올려다봤다.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
윤재의 말에 수영도 동감했다. 자신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당장 벗은 윤재를 아래 두고서 심지어 아랫도리를 발딱 세운 상태에서도 그를 안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히 자포자기와 같은 바람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이유 이상의 뚜렷한 이유가 있다는 걸 수영은 자각하고 있었다.
한 번 안고 나면 자신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라는 윤재의 말을 시험하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차라리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당장 그를 안고 깨끗이 이 감정을 정리해버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수영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알고 있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포기하듯 몸을 내어주겠다고 한 윤재가 정말로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갖고 난 뒤엔 어떤 결과를 얻게 되던 분명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는 걸.
수영은 윤재와 재회한 뒤로 몇 번이나 그의 벗은 몸을 상상하고 또 그를 안기를 원해왔었다. 그걸 생각하면 상상하던 장면이 현실이 된 지금의 이 상황은 그에게 있어선 더없는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특별한 노력 없이도 바라던 것을 이룰 수 있는.
그러나 수영은 지금 그 기회를 스스로 놓으려 하고 있었다. 당장은 아쉬울지언정 결론적으로 이것이 틀리지 않은 선택이라고 그는 마음으로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수영은 윤재가 스스로의 가치를 상대에게 있어 단 한 번의 잠자리 대상으로 낮추어 인식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에게 그런 바람을 가지는 것이 우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수영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윤재만큼은 한순간의 분노나 가벼운 마음에 휩쓸려 안고 싶지 않았다. 이 바보처럼 순진해 빠진 남자만큼은.
이것은 윤재가 샤워를 하는 동안 냉정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 번을 반복해 머릿속을 정리한 끝에야 나온 수영의 결론이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건 본래가 자기중심적인 성향인 수영에겐 낯선 일이었다. 기분이 내키면 그것이 범죄가 아닌 한 별다른 제어 없이 생각대로 움직여 왔고 그와 같은 행동 안에는 당연히 섹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에 상대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든 당장 자신 앞에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하는 일은 이제껏 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던 수영이었다. 훗날 상대가 울고 매달리면 냉정히 거절하면 되는 일이었고, 행여 책임질 일이라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돈으로 지불하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니 지금의 이 이례적인 상황에서 수영은 스스로를 두고 수많은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서늘한 공기에 살짝 어깨를 떠는 윤재를 본 수영이 천천히 긴 팔을 뻗어 한쪽에 밀어놓았던 이불을 끌어 와 그것을 헐벗은 윤재의 몸 위에 적당히 덮어주었다. 이불 위로 드러난 윤재의 목덜미에 아까 전 자신이 만들어놓은 키스마크가 남아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다시 윤재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펠라를 당하는 내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던 윤재의 뺨은 어느 샌가 다시 평소대로 하얗게 돌아와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라고 새삼 수영은 생각했다.
갸름한 턱, 그리 크지 않은 눈,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은 코.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데다 무척이나 깨끗한 피부 톤을 하고 있어서 조금은 중성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얼굴은 20대 중반의 남자답지 않게 청초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이 단정한 얼굴이 조금 전 절정의 순간에서 쾌락으로 발갛게 상기된 채 일그러졌던 것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린 수영은 그로 인해 조금씩 가라앉아 가던 아랫도리가 순간적으로 반응을 보여 온 것을 느끼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쯤에서 위험한 회상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은 수영이 근처 테이블에 놓아둔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너는 지금도 한 번 자고 나면 내가 너한테 흥미를 잃을 거라고 믿고 있지?”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윤재가 고개를 돌려 수영을 바라보았다. 근처에 앉아 깊이 한 번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수영은 곧 짧은 한숨과 함께 빨아들였던 연기의 일부를 내뱉었다.
“...아닌가요.”
나직한 윤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수영이 짧은 텀을 두고서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 톤으로 대답했다.
“그래, 아니야.”
“.......”
“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애초에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게 네 몸이었으면 취한 너를 여기로 데려왔던 날 얌전히 재우기만 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그 정도로 신사적인 인간이 아닌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반문 섞인 수영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당장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윤재에게는 지금 들려온 대답이 단순한 허세에 의한 것이나 의식적인 거짓말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나한테 자자는 말은 앞으로 두 번 다시 하지 마. 내가 예전에 저지른 일이 있으니 지금 여기서 억울하네 상처받았네 하는 피해자 행세는 안 하겠지만 그런 취급을 당하면 아무리 나라도 기분 좋을 리는 없어.”
“.......”
“그런데도 만약 또다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면 그땐 지금처럼 얌전히는 안 보내. 아주 뒤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실컷 박아서 나 없이는 못살 몸으로 개발시킬 거니까 그래도 상관없다 싶으면 말하던지. 난 환영이야.”
지금 들려온 수영의 말이 단순히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가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중간 문득 들려온 수영의 짧은 한숨소리에 다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윤재에게 넓은 등을 보인 채 돌아앉은 수영이 두 개비 째의 담배를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
“널 보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 아니, 아리다고 할까. 처음엔 동정인가 싶었고 그게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다는 아닌 모양이야.”
읊조리듯 그렇게 말한 뒤 윤재에게 고개를 돌려온 수영이 길게 한 번 연기를 내뱉고서 스치듯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그 말은 취소할게. 내 흥미에 어울려달라는 말.”
“!”
“그땐 정말로 가볍게 흥미라고 생각했어. 뭐,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은 대놓고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
“그래... 네 말대로 이제 이런 관계는 끝내자. 이런 이도저도 아닌 관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에게 잠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둔 수영이 곧 침대 맡에 걸쳐 있던 긴 몸을 일으켰다.
“출출해서 뭘 좀 시킬까 하는데 뭐가 좋겠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윤재가 잠시 깊이 떠올리던 생각을 멈추고 말했다.
“아뇨, 전 이만 집에...”
“집에 가면 어차피 혼자 먹을 거잖아. 여기서 먹고 가. 바래다줄게.”
어느새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에 든 수영이 번호를 누르기 전 다시 윤재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피자 시킬 건데 괜찮아?”
“.......”
“.......”
“...네.”
딱히 끝까지 거절할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체념하듯 대답한 윤재가 이불을 붙든 채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펠라를 당한 끝에 수영의 입안에 사정까지 해놓고서 이제 와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차례 폭풍이 물러가고 다시 냉정하게 이성이 돌아오자 아무래도 수영의 앞에 아무렇지 않게 알몸을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윤재는 이불로 대충 몸을 감싼 채로 아까 전 수영이 벗겨 침대 밑에 던져놓은 타월을 집어 들었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서서 전화로 피자를 주문하던 수영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중간 그런 윤재를 쳐다보고 스치듯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전 샤워 후 침실에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에 타월만을 두른 채 욕실로 향하는 윤재의 몸에는 이전과 다른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유난히 하얀 목덜미에는 선명한 키스마크가 새겨져 있었고 수영의 정성스런 애무를 받았던 왼쪽 젖꼭지는 살짝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욕실 안으로 들어와 샤워기를 튼 윤재가 시원스런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눈을 감았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면 그땐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몸 상태가 되어 있을 거라고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는 뜻밖에 멀쩡한 상태로 다시 물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조금은 허탈하지만 그 이상으로 안도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쩌면 말을 뱉은 이후로 내내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껏 자신이 딛고 서있던 자리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수영과 함께 있으면 마치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평범한 일상 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때때로 그가 하는 행동이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만 지금 윤재가 단 하나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수영이 예전과는 다른 태도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누칠을 하기 위해 몸 이곳저곳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던 윤재가 문득 왼쪽 가슴에서 느껴진 통증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슬쩍 내려다보니 왼쪽 젖꼭지가 발갛게 변한 채로 부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까 전 수영의 단단한 이에 깨물렸던 감촉을 떠올린 윤재가 잠시 멈춰 있던 손을 움직여 서둘러 비누칠을 이어갔다. 순식간에 귀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고 있는 그는 가슴을 애무당한 뒤 그보다 몇 배는 더 부끄러운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십여 분의 시간을 들여 샤워를 마친 윤재가 미리 들고 온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갖춰 입은 뒤 욕실을 나와 침실로 향했다.
넓은 침실 안은 조금 전과 달리 서늘한 공기로 들어차 있었다. 어느 샌가 나무 재질의 블라인드가 절반쯤 걷혀진 채로 올라가 있었고, 환기를 위해서 인 듯 커다란 창문이 조금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 너머의 멋진 야경을 향한 채로 수영이 가만히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윤재가 다가오는 기척도 놓쳐버릴 만큼 그는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딩동
결국 수영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잠시 후 들려온 초인종 벨소리였다. 벨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수영이 침실 입구에 서있는 윤재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어. tv보면서 먹을 거니까.”
그 말을 남기고 윤재의 곁을 스쳐 지난 수영은 곧장 인터폰을 통해 피자배달원과 짧게 말을 나눈 뒤 현관 앞으로 향했다.
“.......”
잠시 그대로 홀로 남겨진 윤재는 거실로 향하기 전 다시 한 번 넓은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불과 몇 십분 전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생생히 벌어졌던 장소를.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탄 블라인드가 춤추듯 살랑거리고 있었다.
*
“세진이한테서 연락 없었어?”
손에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묻는 정우에게 슬쩍 시선을 던진 호연이 담뱃재를 털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어제 저녁에 전화 왔었어. 내일 귀국 한다던데.”
“환영파티 참석해달라는 말 들었지?”
“응.”
지금 화두에 올라 있는 세진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호연의 대학 동기로서 3년 전 프랑스로 건너간 뒤로 아예 그곳에서 정착해 생활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 때는 호연과 동업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1년 전쯤 프랑스에서 지금의 애인을 만난 뒤로 한국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그는 어쨌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한 목적으로 일주일 정도에 걸쳐 잠시 애인과 귀국을 할 모양이었다.
“갈 거야?”
이율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인 호연이 ‘글쎄’라고 말하고서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옆의 술병으로 손을 뻗으려다 쯧하고 짧게 혀를 찼다. 두 시간에 걸쳐 셋이서 마시는 동안 처음 가득 차 있던 두 병의 술이 어느 샌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내가 가져올까?”
옆의 정우가 일어서려는 것을 손을 뻗어 제지한 호연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하던 차인 만큼 직접 내려가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두 병이면 되겠지?”
“응, 이왕이면 발렌타인으로.”
살짝 취한 상태로 손을 들어 말하는 이율을 슬쩍 돌아본 호연이 말 대신 눈짓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방을 나섰다.
늘 그렇듯 는 오늘도 여전히 많은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먼저 화장실을 들른 뒤 휘청거리는 손님들을 훑어보며 계단을 내려온 호연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오는 종업원들에게 고갯짓으로 답인사를 보내고 곧바로 바테이블 앞으로 향했다.
자주 보는 얼굴의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텐더들을 슬쩍 둘러본 뒤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유민에게 다가간 호연이 직접 가져갈 테니 두 병의 술을 꺼내달라고 말했다. 물론 두 병 중 한 병은 아까 전 이율에게서 요청받은 대로 발렌타인이었다.
오너의 등장에 급격히 태도를 진지하게 바꾼 바텐더들 사이에서 주문받은 두 병의 술을 꺼내 들고 온 유민이 그것을 호연에게 건네 왔다.
“안주도 추가로 가져다드릴까요?”
“그건 석현이에게 시켜. 과일 위주로 준비해 오라고 하고.”
“네.”
간단히 용건만을 말한 뒤 돌아선 호연이 다시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문득 뒤에서 유민의 부름이 들려왔다.
“사장님.”
뒤를 돌아본 호연이 곧 셔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 유민을 잠시 그대로 말없이 지켜보았다. 잠시 후 유민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작은 메모 한 장이었다.
이게 뭐냐고 호연이 눈짓으로 묻자 곧바로 유민이 손에 든 메모를 호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전에 알아내라고 하셨던 거예요. 조금 전에 그때 일행이었던 휴학생이 친구랑 셋이서 왔었거든요.”
“!”
유민의 말을 이해한 것과 동시에 건네받은 메모를 펴서 들여다본 호연이 일순 눈을 가늘게 떴다.
‘민들레’라는 단어 옆에 주소가 쓰여져 있었다.
“술집이라는데 거기 사장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름은 김윤재고 나이는 올해로 스물여덟이라고 들었어요. 그 휴학생이 거기서 알바를 하는 모양인데 인심 좋은 사장님이라고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요.”
덧붙여진 유민의 말을 들은 호연은 당장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수고했어’라고 짧은 말을 유민에게 건넨 뒤 천천히 돌아선 그는 손에 든 쪽지를 접어 바지 주머니 안에 잘 집어넣었다.
‘김윤재...’
마음속으로 조금 전 들은 이름을 가만히 한 번 읊어본 호연은 그대로 천천히 특유의 우아한 걸음을 옮겨 계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