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35화 (35/66)

35.

퇴근 후 동료들과 함께 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수영의 얼굴엔 약간의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 전부터 몇 명의 팀원들과 함께 새로 맡게 된 중요한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이번에도 기대대로의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가뜩이나 많지 않은 수면 시간을 쪼개 일에 투자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터라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수면부족에서 오는 피로를 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평상시보다 늘린 카페인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이런 강행군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아무리 기본적으로 좋은 체력을 가진 그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 쓰러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눈에 띠게 가늘어진 빗줄기를 뚫고 익숙한 골목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목적지인 건물 앞에 서있는 한 대의 고급 승용차를 발견하고 일단 차를 세웠다. 차종도 그렇지만 앞에 붙어 있는 번호판이 당장 수영으로 하여금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세워져 있는 차의 운전석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차를 몰아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수영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연 것과 동시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 그는 역시나 예상대로 자신의 것이 아닌 남성용구두가 현관에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선 수영이 태연하게 다가와 맞이해주는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특유의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해온 건 휘영이었다.

지금 수영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은 우휘영으로, 그는 수영의 9살 연상의 형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건실한 기업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휘영은 얼마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살다가 최근 들어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을 새롭게 구해 혼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치 제집인 것처럼 편안한 태도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손에 들고 있는 휘영을 슬쩍 한 번 쳐다본 수영이 걸치고 있던 외투를 차례로 벗어 근처의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미리 연락을 할까 하다가 어차피 비밀번호도 알고 있고 해서 그냥 멋대로 들어왔어.”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는 잔을 내민 휘영이 살며시 고개를 저어 사양하는 수영의 앞에서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지?”

휘영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별다른 대꾸 없이 넥타이를 풀고서 이어 셔츠의 윗 단추를 풀었다. 그로서 지금 당장 짐작이 가는 부분은 어젯밤 모친과의 통화에서 언급된 내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일단 제 생각엔 어머니께서 보내신 게 아닌가 싶네요.”

샤워를 하기 전 먼저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소파에 앉은 수영이 피로감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휘영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이 올라오고 있는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가 몇 모금의 커피를 목안으로 넘긴 그는 잠시 후 자신도 수영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너 어제 맞선 얘기 거절했다면서?”

휘영의 입에서 나온 건 수영이 머릿속으로 예상하고 있던 질문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성사여부와 상관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이 자리를 마련한 맞선을 대부분 수용했던 수영은 어젯밤 통화에서 여태까지와 달리 모친이 꺼낸 맞선 자리에 끝내 나가지 않겠다는 의견을 전달했었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오늘 모친이 굳이 일로 바쁜 장남을 이곳에 파견한 이유가 어제 미완으로 끝이 난 이야기를 그녀의 뜻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일 것임은 누가 봐도 명확한 것이었다.

“이번 맞선은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까지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길 바라실 만큼 좋은 자리야. xx건설 전무의 막내딸인데 슬쩍 사진으로 보니 외모는 딱히 네 눈에 찰 정도는 아니지만 듣기에 성격은 괜찮은 모양이더라. 미술을 전공해서 지금 유학하고 있는 중이라는데 귀국한 뒤엔 큰아버지가 대표이사로 있는 광고 회사에 바로 들어갈 것 같아.”

어제 수영이 모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휘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일단 자신부터가 상류층 집안들 사이에서 일종의 거래로 통하고 있는 정략적 결혼을 한 당사자인 그는 몇 번의 이혼 위기까지 가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나마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물론 그와 아내를 현재까지 가까스로 이어주고 있는 것은 자식들의 존재가 아닌, 두 집안 사이의 끈끈한 커넥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됐든 표면적으로는 한 상류층 가정의 모범적인 배우자이자 아버지의 모습을 잘 연기하고 있는 휘영은 사실 3년 전부터 남몰래 내연녀와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수영이 단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내연녀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남들의 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정 상 억지로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휘영에게 있어선 일종의 해방구처럼 여겨지고 있는 듯 했다.

“그동안 어머니가 직접 꺼낸 맞선 자리는 대부분 다 받아들이지 않았어? 지금까지 그렇게 잘 해오다가 어제는 왜 갑자기 싫다고 한 거야? 네가 뜻밖에 고집을 부리니까 어머니가 좀 놀라신 눈치더라.”

진지한 휘영의 질문을 받고 슬쩍 그를 쳐다본 수영이 조금 전 벗어 옆에 놓아두었던 재킷 안쪽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예의 상 먼저 휘영의 앞에 그것을 내밀어 보인 수영은 자신은 됐다고 하는 휘영의 고갯짓을 확인하고 자신 분의 담배만을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어차피 제가 그리 모범적인 아들이 아닌 건 두 분 모두 알고 계시는데 이제 와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예전에 네가 좀 지나치게 놀았던 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잖아. 지금까지 할 일도 제대로 했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입사했으니 그걸로 된 거야.”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평소의 지론에 대입해 그렇게 말한 휘영이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번 자리는 수락하는 게 좋겠다. 가능하면 결혼까지 가는 걸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어머니에 이어 형까지 이렇게 나선 것을 보면 꽤나 좋은 자리이긴 한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수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결혼이라.

올해로 서른하나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이니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기가 온 건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 집안에서 결혼이라고 해봐야 일종의 거래로 통용되고 있는 데다 자신 역시 결혼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으니 일단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는 것쯤은 큰 고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정작 만나서 정말 괜찮은 상대면 진지하게 관계를 진전시켜 봐도 괜찮을 터였다. 모친이 굳이 설득을 위해 직접 형을 이곳에 보낼 정도라면 그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지니고 있는 여자일 테니 아마도 결혼을 해서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분명 얼마 전이었다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을 이야기였다. 당장 결혼 날짜를 잡는 것도 아닌, 고작 맞선을 보는 것 정도에 구태여 고민의 시간을 들이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이제껏 만나온 사람이 몇인데 거기에 몇 명이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은 얼마 전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금일 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수영의 입에서 나올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어머니께는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이번 건을 포함해 앞으로도 맞선 자리에 나갈 생각은 없다고요. 제 생각은 그렇게 확고하니까 형이 이렇게 나서서 설득해봤자 달라질 건 없어요.”

모친에게 들었던 대로 확고한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있는 수영을 잠시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쳐다보던 휘영이 문득 테이블에 놓인 담뱃갑으로 손을 뻗었다.

“갑자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냐?”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휘영이 잠시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여자냐? 아니면 사내?”

오래 전 아직 대학생이던 수영이 집안에서 여자뿐 아니라 남자와도 뒹굴었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는 휘영은 자연히 수영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얼마간의 깊은 고민 뒤 그는 마땅치는 않아도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동생의 어두운 일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나마 수영이 남자와 관계할 시에도 여자처럼 박히는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 그가 유일하게 위안을 삼는 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자신의 동생이 바이라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비교적 열린 사고방식을 지닌 그에게 있어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조용히 담배만 피울 뿐 직접적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던 수영이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남자에요.’라고 대답했다.

원치 않는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미간을 좁힌 휘영이 깊이 들이마셨던 연기의 일부를 내뱉고서 말했다.

“누구와 만나고 있는 거야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그 이유로 맞선을 거절한 건 아니지?”

“새삼스럽긴 해도 그게 이유에요. 어쨌든 전 지금 당장 강제로 맞선을 볼 생각은 없어요. 어젯밤 통화에서 이미 어머니한테는 그렇게 대답했으니 형한테 어머니가 어떻게 됐냐고 물으시거든 설득에 실패했다고만 대답하시면 되겠네요.”

예상 밖으로 단호한 수영의 태도에 내심 당황한 휘영이 무척이나 심각해진 얼굴을 하고서 들고 있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나이 차가 많은 형의 입장을 내세운다고 해도 이제껏 늘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수영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잠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상대가 여자라면 한 번 만나볼 테니 데려오라는 말이라도 건넸겠지만 사내가 상대인 이상 그런 기회를 부여해줄 수도 없었다. 삼남 중 모친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자란 수영은 그녀에게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인 만큼 만에 하나 그 귀한 아들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남자와 동거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집안은 한바탕 크게 뒤집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까지 모친이 차남의 난잡한 사생활을 모두 묵인해온 것은 지금까지야 어쨌든 차후에 결혼을 한 뒤 마음을 잡으면 될 거라는 결과주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중간에 쉬는 타이밍을 두지 않고 꾸준히 사람을 사귀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결혼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지 않고 대부분의 맞선을 받아들였던 수영의 태도는 분명 그녀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희망적 미래를 예고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그와 같은 모친의 바람이 순탄하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휘영은 일단 새롭게 꺼내 불을 붙인 담배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사회인이 된 뒤로 좋게 좋게 가족의 의견에 따라왔던 수영이 다시 자유분방하게 살던 당시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집안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고집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과거의 충분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당장 결혼을 하라는 게 아니야. 일단 그냥 만나보기만 해. 맞선 자리를 주선한 사람의 입장도 있으니까.”

“전 싫다고 분명히 대답 했어요.”

“정말로 새삼스럽게 왜 이래? 이제 와서 지금 애인한테 의리를 지키겠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네가 그런 녀석이 아닌 건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당연히 어머니도 알고 계시고.”

“사람이 살다 보면 변하는 일도 있는 모양이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는 수영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휘영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담배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고서 깊이 한 모금의 연기를 빨아들였다. 성질 같아선 완력을 써서라도 말을 듣게 하고 싶은 게 솔직한 휘영의 심정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당장 몸싸움을 하게 될 경우 그가 수영에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었다. 이미 오래 전 수영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시점에서부터 주먹으로 그를 굴복시키는 것은 깨끗이 단념했던 휘영이었다.

“어머니한테 잘 들어보니까 정말로 놓치기 아까운 자리야. 내 생각으로는 결혼까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형, 대체 제가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해야 돼요?”

“만나서 이왕이면 결혼까지 해. 일단 결혼하고 난 뒤에, 그리고서 지금 만나는 상대와도 다시 만나. 난 결혼을 하라고 했지 마누라한테 얽매어 살라고는 안 했다. 날 봐. 겉보기엔 유부남이지만 연애는 연애대로 하며 재밌게 살고 있지. 이게 모범적인 예라고는 못하겠지만 이것도 분명 사람 사는 방법 중에 하나야.”

태연하게 불륜을 입에 담는 휘영을 보며 수영이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지금까지 난잡한 사생활을 즐겨온 자신이 휘영의 불륜을 두고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 수영이었지만 한편으로 늘 자신에게 친절한 형수의 얼굴을 떠올리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그였다.

“형이 사는 방식을 터치할 생각도 없고 비난할 생각도 없지만 전 그렇게 안 할 겁니다.”

“수영아.”

“제가 완전히 변한건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전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딴 데 마음 있는 남자와 결혼할 여자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불륜이 양심에 걸려서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해서 전 지금 맞선도 결혼도 전혀 머릿속에 없어요. 이번에 맞선을 거절한 이유는 그게 다고 결국 제 뜻대로 할 겁니다.”

반론의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수영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휘영이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거실에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 끝에서 조용히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엄하고 완고한 부친조차도 손쓰지 못하는 차남을 오롯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설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이곳을 찾은 휘영은 예상보다 훨씬 확고한 수영의 태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지금 슬슬 모친에게 어떤 대답을 가지고 가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떠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수영 스스로 마음을 돌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누구보다 동생을 잘 알고 있는 입장의 휘영은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어린 답을 내리고 있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내한테 진심이냐?”

“.......”

“.......”

“...현재로서 만나고 있다고 하기엔 애매한 관계지만... 지금까지처럼 가벼운 생각으로 대하는 상대는 분명히 아니에요.”

깊은 무게를 지닌 수영의 대답을 들은 휘영이 쓰게 웃었다.

지금까지 휘영이 우연히 동생의 집을 찾았다가 마주친 낯선 상대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수였다. 불과 네 달 전 반찬을 전해야 한다는 모친을 대신해 이곳을 찾았을 때도 처음 보는 여자의 다리를 크게 벌리고서 적나라하게 허리를 흔들던 수영의 모습을 목격했던 그로서는 지금의 이 믿지 못할 변화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정식으로 만나고 있지도 않은 상대가 신경 쓰여서 맞선을 안 보겠다는 거지? 대체 너한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모르겠다.”

“그러게요... 솔직히 저도 좀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해요. 어쨌든 그런 이유니까 어머니께는 적당히 잘 말씀드려주세요.”

설득을 하러 왔다가 도리어 수영의 부탁을 받는 신세가 된 휘영이 긴 한숨을 내쉰 뒤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자신을 이곳에 보내놓고 잔뜩 기대하고 있을 모친에게 좋지 않은 대답을 들려줘야 하는 입장의 그로선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여자면 조건은 둘째 치고 일단 부모님 앞에 한 번 데려와 보라는 말이라도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내놈이랑 잘되라는 응원은 못 해주겠다.”

한숨 섞인 휘영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낸 수영이 ‘가족의 응원은 바라지도 않아요.’라고 엷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결국 수영의 고집을 꺾는 것이 무리라고 냉정히 판단을 내린 휘영은 화제를 바꿔 얼마간 회사일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간 슬슬 다음 일정을 생각해야 할 타이밍을 재고서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껜 일단 네가 요즘 회사 일로 많이 바빠서 정신이 없는 상태라고 말씀드려놓을게.”

구두를 신고서 허리를 편 휘영이 그렇게 말하자 그와 마주한 위치에 팔짱을 끼고 선 수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보기엔 어머니가 고작 그런 이유로 상황을 납득하실 것 같아요?”

“...납득까지는 몰라도 중요한 일 때문이라고 하면 당분간은 조용히 물러서 계실 거야.”

“전 당분간이라고 기간 정한 적 없어요. 나중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게 아예 이참에 확실히 전해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조금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형님.”

수영의 입에서 나온 ‘형님’이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묘한 표정을 지은 휘영이 이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차 많은 형인 자신에게 평소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온 당돌한 동생의 입에서 비록 농담에 가까운 뉘앙스라고 해도 ‘부탁’과 ‘형님’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오는 것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온 그는 동시에 안 본 얼마 사이 자신의 동생이 어디 머리를 크게 다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진지하게 들고 있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귀에 익은 수영의 시니컬한 말투에 변함이 없었던 걸로 보아 다행히 그건 기우일 듯 했지만.

“어머니한테는 귀한 차남이 아무래도 머리를 크게 다친 것 같다고 전해둘게.”

휘영의 농담에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수영이 잠시 후 휘영이 나가고 열렸던 문이 닫힌 것과 동시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휘영의 도움으로 일단 당분간의 시간은 벌게 되겠지만 완전한 일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모친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영은 적당한 시일 내에 한 번 본가를 방문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만나온 이들 중 어느 누군가가 지금의 상대였다면 굳이 스스로 이런 귀찮은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을 수영이었다. 이제껏 연애와 결혼은 철저히 별개라는 인식을 가져왔던 그는 그 같은 인식 아래 앞으로 언제가 되던 자신의 인생에 플러스가 되는 조건을 갖춘 배우자를 맞아들여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늘 확고하게 가져 왔었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 궤도를 이탈하는 일 없이 잘 유지되어 왔었다. 결과적으로 불과 얼마 전까지 좋은 분위기로 만났던 상대인 호연조차 그런 수영의 생각을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만약 현재의 상황에서 수영이 맞선을 보고 결혼까지 이어진 뒤에도 호연이 원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재는 달랐다.

그를 상대로 가정하면 이제껏 당연하게 여기고 가져왔던 이기적인 계획을 차마 현실로 옮기겠다는 생각의 한 조각조차 들지 않는 수영이었다. 윤재와의 관계가 발전이 되던 안 되던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본질적인 문제까지 들어갈 것 없이 지금의 수영은 그저 적어도 윤재의 앞에 설 때만큼은 거짓 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을 뿐이었다.

조금 전 휘영과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진지하게 떠올리다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은 뒤늦게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

“이게 뭐예요?”

“가토 쇼콜라. 혹시 단 거 싫어해?”

“싫어하진 않는데...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이걸 왜 주시는 거예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케이크 상자를 내려다본 윤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묻자 그 사이 의자를 빼내 앉은 수영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저기 메뉴판에 찌개류 포장된다고 써있는데 지금 주문하면 포장해줄 수 있어?”

수영으로부터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윤재가 한층 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로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만드는 동안 좀 기다리셔야 돼요.”

“알았어. 그럼 포장 좀 해줘.”

“...오늘은 안 드시고 가시는 거예요?”

의아함이 묻어나는 윤재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서 말했다.

“왜, 서운해?”

“아뇨. 그냥... 지금까지는 포장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살짝 미간을 좁히고 말하는 윤재를 바라보며 잠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퇴근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간대라 그런지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손님들의 대부분은 회사원으로 보이는 수트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평소에 외식을 주로 하니까 냉장고에 오래 놔뒀던 반찬들이 다 상했더라. 그래서 일단 당장 내일 아침에 먹을 찌개나 하나 포장해가려고.”

덤덤한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그제야 상황을 납득했다.

종종 이곳에 들르는 수영의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회사 안에서의 수영은 무척이나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했는데 그런 그 역시도 일단은 독신 남성인지라 밖에서와 다르게 집안에서는 음식물을 방치해 썩게 만들어 결국엔 모두 버리고 마는 다른 평범한 독신 남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역시나 홀로 자취를 하고 있는 준석과 성호에게서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윤재였다.

“그럼 좀 기다리고 계세요. 끓여서 포장해 가지고 나올게요.”

“응.”

곧바로 몸을 돌려 주방 안으로 돌아온 윤재는 조금 전 씻어둔 냄비를 꺼내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일단 다른 손님들에게서 주문 받은 음식들은 조금 전에 전부 나간 상태인 지라 수영이 지금부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였지만 그래도 일단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윤재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 우대리님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홀에서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주방 입구 쪽에 시선을 던진 윤재가 잠시 후 안으로 들어선 성호의 손에서 비닐을 건네받았다. 그 안에는 간장을 비롯한 몇 가지 식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이 앞 마트의 무가 오래 돼서 속에 바람이 들었더라고요. 그래서 도로변 근처에 있는 가게에 다녀오느라 좀 늦었어요.”

“그래, 수고했어.”

“저기... 우대리님이 오랜만에 오셨네요. 지금 끓이는 찌개는 우대리님이 주문하신 건가요?”

“응.”

결코 대하기 편한 상대가 아님에도 첫 만남에서 수영에게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인지 성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영을 상대로 꾸준히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회사일이 많으신가 봐요. 지금도 서류 꺼내서 보고 계세요. 옆에서 떠드느라 시끄러울 텐데 말이에요.”

성호의 말에 윤재가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동료들이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회사 내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수영은 그와 같은 평가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남들의 눈이 닿는 곳이든 아니든 혼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거라고 윤재는 생각하고 있었다. 수년 전 대학생의 신분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던 과거의 수영을 떠올리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사회인이 된 이후의 수영이 여러 면에서 과거와 달라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밀린 주문이 없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완성된 생태찌개를 일회용 통에 담아낸 뒤 혹시나 중간에 가다가 쏟아지지 않도록 두 차례 비닐로 감싼 윤재는 잘 포장이 된 그것을 들고 주방을 빠져나와 수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벌써 다 됐어?”

다가오는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수영이 그때까지 들고 있던 서류를 모아 파일에 끼우며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됐네.”

“밀린 주문이 없어서요.”

“그래, 그럼 돈은 여기.”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낸 수영이 정확히 칠천 원을 꺼내 윤재에게 건넸다. 다른 술집을 찾을 땐 팁의 의미로 더 많은 돈을 얹혀주는 일이 잦은 그는 그러나 소신 있게 일한 대가만을 받기를 원하는 윤재를 상대로는 정직하게 가격표에 명시된 금액만을 지불해오고 있었다.

“그럼 갈게. 아참, 이거 두고 갈 테니까 맛 한 번 봐봐. 회사 근처에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에서 사온 거니까.”

그렇게 말한 수영이 돌아오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양손에 각각 서류가방과 찌개가 담긴 비닐을 들고서 입구로 향했다. 그의 긴 다리가 성큼 움직일 때마다 윤재와의 사이의 거리는 급격히 멀어졌다.

“잠깐만요.”

이제 막 가게를 나서기 위해 문을 열려던 수영이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손짓을 한 뒤 곧바로 주방 안으로 사라진 윤재는 잠시 후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나타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영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일단 잠자코 윤재가 건네는 비닐봉지를 받아든 수영이 물었다.

“이게 뭐야?”

“이틀 전에 가게에서 한꺼번에 만든 밑반찬들이에요. 집에 당장 먹을 게 없다고 했잖아요. 간단한 재료로 만든 것뿐이지만 괜찮으시면 찌개랑 같이 드세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지금 막 받아든 비닐봉지를 내려다봤다. 별 의미 없이 꺼낸 얘기로 인해 이런 보너스를 얻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그였다.

가토 쇼콜라를 받은 것에 대한 답례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뜻밖의 선물을 얻게 된 수영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네가 만들었으니 맛이 없진 않을 것 같네... 잘 먹을게.”

이어 수고하라는 말을 남긴 수영이 가게를 나선 뒤 입구에 홀로 남겨진 윤재는 어느 샌가 곁으로 다가와 있는 성호의 기척을 뒤늦게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 케이크, 선물 받으신 거예요?”

“아니... 선물이 아니고 그냥 맛이나 한 번 보라고 놓고 가신 것 같아.”

“이거 되게 유명한 브랜드에요. 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자기 생일날에 꼭 여기 케이크 사달라고 부탁해서 제가 지갑 털어서 사준 적이 있었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지갑을 털 정도로 비싸?”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뭐, 전 가난한 휴학생이니까요. 근데 대체 얼마나 좋은 재료를 쓰는지는 몰라도 욕 나오게 비싼 건 사실이에요. 적어도 일반인들이 그냥 맛 한 번 보겠다고 살 만한 가격은 절대 아니죠.”

성호의 대답을 들은 윤재의 시선이 자연스레 케이크 상자로 옮겨졌다.

과연 포장부터가 엄청나게 고급스럽기는 했다.

“반 잘라서 통에 담아놓을 테니까 이따가 퇴근할 때 가져가서 먹어.”

“네? 아니에요. 이 비싼 걸...”

“케이크 종류는 혼자서 다 먹으려면 오래 걸려. 음식은 뭐든 오래 놔두면 맛없잖아.”

“그래도...”

예의상 사양을 하면서도 케이크 상자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 성호는 재차 이어진 윤재의 말에 못 이기는 척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최근 급격히 살이 불어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서 슬슬 다이어트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언젠가 한 번 먹어봤던 동일 브랜드 케이크의 환상적인 맛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그는 운 좋게 공짜로 비싼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된 기회를 스스로 포기할 만큼 의지력이 강하지 못했다.

“사장님 덕분에 저만 호강하네요.”

진심이 담긴 성호의 말을 듣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윤재는 그 순간 문득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온 것에 이어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활기찬 성호의 인사를 받으며 적당한 자리를 선택해 이동하는 두 명의 남자 손님을 바라본 윤재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온 한 남자 손님의 시선을 마주하고 무심코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 중 특별히 세련된 인상을 풍기는 쪽의 남자는 가게 내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끌어 모을 정도로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성호 대신 주문서를 들고 새로운 손님이 차지한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윤재는 조금 전부터 뚫어지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절뚝거리는 다리 쪽으로 옮겨진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세밀하게 관찰하는 듯한 예리한 시선이었다.

아무래도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질 리는 없었지만 성치 않은 다리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이미 그에겐 충분히 익숙한 일인 만큼 특별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네요.”

윤재가 테이블 가까이에 멈춰 선 것과 동시에 한참 만에 윤재의 다리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둔 남자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정작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건 표정과 달리 이상할 만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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