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가게를 찾는 손님들로부터 종종 들어 이미 익숙해져 있는 말에 직접적인 대답 대신 의식적으로 드리운 미소로 상황을 넘기려 했던 윤재는 ‘어디 다니시려면 불편하겠네요.’라는 남자의 이어진 말을 듣고 결국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당장 생활하는데 큰 불편도 없고요.”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본인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어딘가 묘하게 가시가 돋친 것 같은 상대의 말투에도 윤재의 표정은 침착했다. 이곳을 맡아 운영하는 동안 수많은 진상 손님을 경험했던 그에게 있어 이 정도의 손님이야 평균보다 조금 더 대하기 불편한 정도의 상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여긴 처음 오는데 어떤 안주가 제일 맛있죠?”
문득 들려온 허스키한 목소리에 따라 윤재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묘하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던져온 건 조금 전부터 윤재에게 다소 무례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남자의 일행이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보통사람들과 비교해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마치 지금 막 회사에서 퇴근해서 온 듯한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주로 주문하시는 건... 찌개류는 생태찌개나 김치찌개, 마른안주로는 과메기무침, 오징어 버터구이를 많이 주문하세요.”
“그래요? 그럼 일단 생태찌개랑 방금 말한 마른안주 두개로 가져다줘요. 술은...”
흘긋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가 일행을 한 번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소주로 한 병만 갖다 줘요.”
“알겠습니다.”
펜으로 주문서에 체크한 윤재가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자 자연스레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던진 화려한 인상의 남자가 이윽고 자신에게 향해지고 있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묘한 웃음을 흘리는 상대를 향해 짜증스런 표정을 지어보인 남자가 날씬한 다리를 꼬고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봐?”
“호연이 네가 이 정도까지 반응하는 게 좀 신기해서.”
“여기서 이름은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 그랬지. 미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건 마주 앉은 남자-호연과는 고등학교시절 만난 이래로 지금까지 쭉 친분을 이어오고 있는 사이인 송해준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현재 호연이 운영하고 있는 바(bar)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룸살롱의 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한때 어두운 세계에 속해 있던 중간 대규모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1년여 기간 동안 감옥생활을 한 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회사원에 가까운 평범한 인상이지만 실제로는 그리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그는 고등학교 선후배의 인연으로 쭉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호연으로부터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받은 이래 과거의 은혜를 갚겠다는 차원에서 호연과 관련된 지저분한 일에 직접 나서는 해결사의 노릇을 자처해오고 있었다. 오늘 그가 호연과 함께 이곳을 찾은 것 역시 그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주방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호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많은 수의 손님을 받을 수도 없어 보이는 좁은 가게 안을 채우고 있는 건 족히 몇 년은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낡은 테이블들과 의자, 그나마 인테리어의 일환으로 구색을 갖춰놓은 선반 위에 놓여 있는 몇 종류의 화분들이 전부였다. 애초에 취급하는 것이 서민적인 메뉴인만큼 자신이 자주 봐온 세련된 인테리어가 이곳에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호연이었지만, 처음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초라한 가게의 모습은 억지로 자리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끔 하고 있었다.
-‘그 남자, 특이하게도 다리를 절더군요.’
조금 전의 만남으로 연석에게 전해들은 증언 중 하나는 분명한 사실로 판명이 난 상태였다.
어쩌면 연석이 본 남자는 또 다른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서 오늘 이곳을 찾았던 호연은 그 날 연석이 본 남자가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지금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는 차라리 이편이 해결하기엔 더 낫다는 긍정적인 측면의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석이 본 남자와 자신이 본 남자가 각각 다른 사람이길 바랐던 기대가 깨어지는데서 온 실망감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호연은 내내 마음속으로 연석과 자신이 본 것이 다른 사람이길 바랐다. 그랬다면 각각 다른 그 두 사람 역시 지금까지 수영이 가볍게 만나온 이들 중 한 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해석을 낳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와 같은 호연의 바람을 냉정히 져버린 현실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껄끄럽고 불유쾌한 것이었다. 조금 전 <민들레> 근처에 도착해서 주차할 곳을 찾던 중간 문득 멀찍이서 떠나가는 익숙한 차량을 발견했던 호연은 그 차에 붙어 있는 번호판을 통해 그 운전석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신한 순간 일시적으로 숨이 멎는 것을 느꼈었다.
설마 처음 찾은 이곳에서 비록 스쳐 지날지언정 수영과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호연이었다.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단번에 목적지인 이곳에서 수영과 마주친 사실은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자신이 품어온 짐작들이 결코 날카로운 신경이 만들어낸 망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정말로 독특한 취미라도 생긴 건가.’
지금도 악몽처럼 기억되고 있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의 앞에서 단 한 번 스쳤을 뿐인 남자의 얼굴을 조금 전 이 자리에서 다시 마주한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던 호연은 이어 연석에게 들었던 증언대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남자의 다리를 확인한 뒤엔 자연스레 냉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허름한 가게의 외견을 확인한 순간부터 머릿속에 ‘어째서’라는 의문을 품었던 그는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을 쳐다보는 내내 머릿속에 품고 있는 그와 같은 의문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늘 호연의 상상 속에 갇혀있다 막상 그의 눈에 선명하게 비친 현실 속의 김윤재는 너무도 평범한, 아니, 평범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남자였고, 그 사실은 곧 일부러 바쁜 시간을 투자해 이곳을 직접 찾은 호연을 더욱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여기, 주문 좀 할게요!”
“버터오징어 한 접시 더 갖다 주세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외침에 따라 덩치 큰 종업원이 바쁘게 홀과 주방을 오가고 있었다.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정황 상 바로 눈앞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종업원이 유민으로부터 전해들은 휴학생일 거라고 짐작한 호연은 잠시 후 주방에서 끓는 냄비 몇 개가 놓인 쟁반을 들고 나오는 윤재를 발견하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찌개를 제외한 다른 마른안주는 조금 전 성호를 통해 미리 전달받은 호연은 그러나 마주앉은 해준과 달리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에 일체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테이블에 냄비를 내려놓자마자 서둘러 다른 손님들에게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관찰하듯 쳐다보던 호연이 문득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네. 후미진 곳에 있는 가게치고는 손님이 꽤 있다 싶었는데.”
“음식 평가하러 온 거 아냐.”
차가운 호연의 대꾸에도 몇 차례 더 냄비에 숟가락을 담가 국물을 떠먹은 해준이 흘깃 고개를 돌려 멀찍이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 호연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던 해준은 물론 수영의 존재도, 얼마 전까지 호연이 그와 관계를 맺어왔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호연과 마찬가지로 진성 게이인 그는 사실 호연으로부터 직접적인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부터 게이바에서 우연히 봤던 수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와 같은 사실이 그를 이번 일에 한층 더 집중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준이 수영을 상대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아무리 수영의 외모가 취향의 정중앙에 있다고 해도 오래 알고 지내온 만큼 그 집요함과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호연을 적으로 돌려가면서 무모한 시도를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는 그였다.
“네 애인, 생각보다 상대를 가리는 편은 아닌가 보네. 생긴 거 보면 이것저것 장난 아니게 따질 거 같은데.”
건너편에서 들려온 해준의 말에 미간을 좁힌 호연이 앞에 놓여 있는 안주들을 훑어봤다. 겉보기엔 꽤나 먹음직스런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기분 탓인지 그 어디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그는 마주앉은 해준이 몇 젓가락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엔 착실한 남자 같은데? 얼굴도 저만 하면 괜찮은 편이고. 다리가 에러지만 벌리는데 방해될 정도는 아니겠지.”
수위가 높은 해준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호연이 다행히 각자의 대화에 열중해 있는 다른 손님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의 대화야 게이바에선 흔히 나눌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어쨌거나 이곳은 게이바가 아니었다.
주문받은 음식이 전부 나온 것일까, 좀 전까지 호연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주방 안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볶고 끓이는 소리가 멎은 뒤 그를 대신해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누군가라고 해봐야 주방 안에 있는 건 이 가게의 주인과 종업원 둘 뿐이었지만.
조금 전 윤재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확인했던 호연은 지금 들려오고 있는 다소 굵은 톤의 목소리가 종업원의 것이라는 걸 인식한 채 잠자코 들려오는 대화를 귀에 담았다.
“그런데 확실히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한 뒤로 손님이 많이 늘어난 것 같지 않아요?”
“응.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
“그쵸? 이참에 아예 이벤트 같은 것도 하는 게 어때요?”
“이벤트?”
“네. 할인 이벤트 같은 거요. 원 플러스 원이나 인기가 많은 메뉴는 얼마 기간 동안 좀 할인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요. 저희 매형이 지방에서 호프집을 운영 하는데 중간 중간 그런 이벤트로 손님을 많이 모았다고 했거든요.”
“그래?”
“근데 그게 좀 일시적인 효과라서... 이벤트 끝나면 손님이 또 확 줄었다고...”
주방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말없이 귀에 담고 있던 호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후미진 장소에 있는 가게에서 어떤 이벤트를 하던 큰 재미를 보기는 힘들 거라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그는 어쨌거나 가게를 살리고자 전단지까지 뿌리고 있는 실태를 확인하고 난 뒤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사람들로 채워진 테이블은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 그나마 이것도 전단지를 돌리고 나서 늘어난 거라면 이제까지 가게의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았을 지 대략 짐작이 가는 호연이었다.
처음 앞에서 스치듯 윤재를 봤을 당시 그가 입고 있던 단정한 옷차림새와 더불어 아무래도 수영이 상대하는 남자인 만큼 일정 이상의 조건은 갖추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따라 당연하게도 윤재를 어느 정도의 수준 위에 놓고서 생각해왔던 호연은 바로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확고하게 이어져 왔던 그와 같은 생각들이 완전히 빗나간 것을 깨달은 지금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김윤재.
호연이 일부러 바쁜 걸음을 해서 직접 만나 본 상대는 비단 그뿐만 아니라 동행한 해준 역시도 정말로 수영이 관심을 갖고 있는 상대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어느 한 부분 눈에 띠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이 정도면 차라리 실망스럽기까지 한 수준이었다.
“그만 가자.”
문득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호연이 마주하고 앉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해준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다른 손님들의 눈 때문에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수도 없는 만큼 이 이상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에 이어 해준까지 재킷을 들고 자리에 일어서자 그제야 손님이 떠나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오는 윤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가까워지는 윤재의 얼굴을 잠시 관찰하듯 쳐다보던 호연이 일순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얼굴로 순진한 척 홀리는 건가.’
주변에 몇 명 얌전한 컨셉을 내세워 상대를 유혹하는 방법을 쓰는 지인을 알고 있는 호연은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 역시 어쩌면 그들과 같은 족속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얼마 전 만난 연석이 스치듯 내뱉은 말대로 정말로 썩 괜찮은 ‘구멍’을 가지고 있던가.
예상 밖으로 초라한 가게와 보잘 것 없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난 뒤로 새로운 의문이 생겼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는 호연이었다. 안 그래도 그 영악하고 눈이 높은 남자가 이런 상대에게 진심으로 빠졌을 리는 없다는 확신이 그에게 위안을 안겨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 언밸런스한 관계는 결국 머지않아 깨끗이 정리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 호연이었지만 애초에 자비롭지 못한 성격의 그는 그나마의 짧은 시간조차도 얌전히 허락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겉으로는 이렇듯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당장 자신의 주변에서 좀처럼 만날 일이 없을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남자를 상대로 굳이 진심을 다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에 호연은 불쾌함을 넘어 비참한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상대가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가씨였다면 불쾌할망정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호연이 눈으로 확인한 진실은 처음의 방향과 다른 의미로 잔혹한 것이었다.
물론 이와 동시에 호연은 수영에게도 적지 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수영을 찾아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힘껏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것이 지금 이 순간 호연이 느끼고 있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실제로 만약 수영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만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뜻대로 움직였을 그였다. 시원하게 뺨을 때린 뒤엔 지금까지처럼 당연하게 ‘버리는 자’의 입장에 서서 너 따위는 내 쪽에서 사양이라고 차갑게 비웃음을 날렸을 터였다. 정말로 자존심을 포기해가면서까지 그와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비참한 바람만 깨끗이 버릴 수 있었다면.
너무나도 분하고 화가 나지만 수영과의 관계를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호연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지는 입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 대한 대가는 수영에게도 확실하게 물릴 다짐을 하고 있는 그였다. 남들의 선망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결코 자신만이 이처럼 비참한 상황을 맞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거의 처음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접시와 냄비를 확인한 윤재가 계산을 위해 카운터 앞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뒤에서 ‘손님.’이라고 짧게 그들을 불렀다. 갑작스런 부름에 해준과 동시에 뒤를 돌아본 호연이 테이블에 놓인 접시를 정중히 손으로 가리키는 윤재를 쳐다봤다.
“많이 남은 안주는 원하시면 따로 포장을 해드리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드릴까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필요 없으니 그냥 버려요.”
“아... 네.”
윤재의 말을 끊고서 대답한 건 해준이었다. 윤재로서는 나름의 배려 차원에서 꺼낸 말이었지만 정작 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떠올린 건 그저 구질구질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늘 넘칠 듯 풍요로운 삶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에게 있어선 남는 음식을 싸가지고 가는 발상이 이해되지 않을 만도 했다.
나름의 배려가 단칼에 거절당하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된 윤재는 어쨌든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채소를 손질하다 나온 탓에 물기로 젖어 있는 양손을 재빨리 앞치마에 닦아내고 카운터에 선 그는 계산서에 명시된 가격을 눈으로 읽고 말했다.
“3만 2천원입니다.”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낸 호연이 오만 원 권 지폐를 꺼내 윤재에게 건넸다.
호연에게서 돈을 받고서 곧바로 거스름돈을 준비하던 윤재가 그 사이 태연하게 문을 열고 나가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손님, 거스름돈 안 받아가셨어요.”
뒤에서 들려온 윤재의 부름을 듣고 해준보다 먼저 걸음을 멈춘 호연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차림 그대로 밖으로 나온 윤재는 손에 들고 있는 거스름돈을 다시 한 번 세어 호연에게 내밀었다.
절뚝거리는 걸음새가 참 볼 품 없다고 속으로 비웃음을 흘린 호연이 윤재가 건네는 돈을 받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팁으로 준 거니까 그냥 받아요.”
자신을 향한 호연의 시선과 말투에서 어딘가 사람을 낮춰보는 기색을 느낀 윤재는 호연을 향해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장사치의 입장에서 수입이 중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의미도 없는 돈을 얼싸쿠나 하고 받을 생각은 없는 그였다.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남겨진 음식과, 마치 내버리듯 포기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의 거스름돈.
자선을 베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두 남자가 무슨 의도로 이곳을 찾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꽤나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당장 보이는 외견만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윤재였다.
“저희 가게에선 팁 같은 건 받지 않습니다.”
얌전한 생김새와 달리 의외로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윤재를 잠시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던 호연이 문득 몸을 돌려 조금 전 미리 시동을 걸어놓은 고급 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 사이 해준은 운전석에 올라 앉아 있었다.
“손님.”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호연의 곁으로 다가선 윤재가 다시 자신에게 향해온 시선을 마주하고 미간을 좁혔다.
“아까 포장도 된다고 그랬죠?”
“...네.”
“그래요, 그럼 그 거스름돈 내에서 적당히 빨리 만들 수 있는 마른안주로 포장해서 좀 가져다줘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호연의 말을 들은 윤재가 잠시 손에 쥐어진 거스름돈을 내려다보다 이내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등을 돌려 가게로 향했다.
팁이라면 받지 않고 돌려주겠지만 손님에게 주문을 받았다면 그에 따라야 하는 것이 가게의 주인이 된 윤재의 입장이었다.
“어, 사장님 밖에 나갔다 오셨어요?”
비워진 테이블을 정리하던 성호의 말을 들은 윤재가 ‘마른안주 세 개 포장할 건데 좀 도와줘.’라고 말하고서 먼저 주방으로 들어섰다. 남은 금액 내에서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마른안주 가운데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세 종류를 선택한 윤재는 뒤늦게 주방 안으로 들어온 성호에게 먼저 과메기무침부터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밖에 손님이 기다리고 계셔. 빨리 좀 부탁해.”
“네. 근데 왜 밖에서 기다리시는 거예요?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나...”
“조금 전에 나간 손님이야. 차에서 기다리시겠대.”
“조금 전에 나간 손님이면 그 남자 두 분이요? 안주랑 술 거의 다 남기고 일어난?”
“그래.”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가운데 윤재가 짧게 대답하자 곧바로 성호의 말이 이어졌다.
“나온 것도 다 남긴 사람들이 포장은 무슨. 돈이 썩어나나 봐요. 하긴, 옷 입은 거 보니까 좀 사는 티가 나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젊어서부터 이렇게 돈 아까운 거 모르고 쓰다간 나중에 빈병 줍는 신세 될지도 모르는데 하여튼...”
투덜대면서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인 끝에 부탁받은 과메기무침을 무사히 완성해낸 성호는 그 사이 두 개의 마른안주를 만들어 포장하고 있는 윤재의 앞에 과메기무침이 담긴 일회용 접시를 내려놓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생각해서인지 평소보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윤재의 손을 쳐다보는 성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아까 전 과일안주를 준비하던 도중 과도에 베어 벌어진 윤재의 손가락 상처가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연고를 바를 새도 없이 줄곧 물에 담가졌다 나왔다를 반복했던 터라 아마도 아직까지 쓰라린 통증이 남아 있을 터였다.
어느 정도 주방 일에 익숙해져 있는 윤재는 평소 덜렁거리는 면이 있는 성호와 달리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간혹 딱딱한 껍질을 까거나 할 때는 나름 단련된 그 역시도 예상치 못한 상처를 입는 일이 종종 있었다.
포장을 무사히 마친 안주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손에 든 윤재가 벽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했다. 서두른 보람이 있게도 주문을 받은 뒤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가져다주고 올게.”
“네.”
혹시나 애써 만든 안주가 흩어지지 않도록 비닐을 잘 움켜쥐고 가게를 나선 윤재는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고급 외제차가 세워져 있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바삐 움직이던 발을 멈췄다. 혹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싶어 세심하게 주위를 둘러봤지만 몇 번을 둘러봐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가 평범한 국산차들뿐이었다.
‘...그냥 간 건가.’
결과적으로 괜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떠난 차를 뒤쫓을 수도 없는 현실에서 잠시 그대로 침묵을 지키던 윤재는 결국 주인을 잃은 안주를 그대로 든 채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
윤재의 손에 그대로 들려 있는 비닐봉지를 확인한 것과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성호가 일단 다른 손님의 계산을 마친 뒤 윤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들 그냥 갔어요?”
“그런 것 같아. 나가 보니 차가 없어.”
졸지에 헛수고를 한 입장이 되어 허탈감이 들긴 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을 윤재를 생각한 성호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드리우고 말했다.
“바빠서 그냥 갔나 보죠. 그래도 돈은 미리 받으셨죠?”
“응.”
“에이, 그럼 된 거예요. 이 맛있는 거 못 먹으면 자기들만 손해죠 뭐. 잘 됐네요. 이 기회에 다른 손님들한테 서비스하는 걸로 해요. 네?”
“그래.”
가라앉아 있을 자신의 기분을 생각해서 일부러 더 씩씩한 목소리를 내 말하는 성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윤재가 자신도 애써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가게를 맡은 뒤로 다양한 손님들을 상대해 오는 동안 이제 어느 정도 불쾌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윤재는 오늘 겪은 이 씁쓸한 일도 며칠 뒤쯤이면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기억되리라 생각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에 얽매어 있어 봤자 결국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나 감정이 있는 사람인 터라 속상한 기분이 아주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늘 그렇듯이 새벽 두 시를 기점으로 점점 손님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가게 안은 폐점 시간이 되기 전 완전히 비어졌다. 아직 폐점까지는 한 시간 가량이 남아 있었지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휑한 바깥의 분위기 상 지금부터 들어오는 손님 수는 많아봐야 한 두 테이블을 채울 정도에 불과할 듯 했다.
“성호야, 오늘은 이만 문 닫을 준비하자.”
“네? 아직 한 시간 남았는데요.”
“내가 보기에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이 안 올 것 같아. 분위기 상.”
윤재의 말에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홀을 정리하기 시작한 성호는 잠시 후 문득 테이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윤재를 돌아보았다.
“지금 잘라서 나눌 건데 맛 좀 볼래?”
그렇게 말한 윤재의 앞에는 아까 전 수영이 주고 간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었다. 성호 분의 케이크를 담을 유리통도 함께.
사실 처음 케이크 상자를 본 뒤부터 일하는 중간 중간 아마도 엄청나게 달콤할 케이크의 존재를 떠올리느라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성호는 윤재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손을 털고 윤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달려왔다.
“와- 엄청 맛있게 생겼네요. 장식도 예쁘고.”
윤재가 잘라놓은 조각 하나를 손으로 집어든 성호가 크게 한입을 베어 물고서 이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원래부터 빵 종류라면 다 좋아하는 그는 특히나 초콜릿이 들어간 것을 아주 좋아했다.
먼저 맛을 본 윤재도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입을 우물거리는 동안 무의식중에 살짝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유명한 가게의 케이크답게 무작정 달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막상 맛을 본 가토 쇼콜라는 적당히 깔끔한 단 맛을 내고 있었다.
“와- 진짜로 지금까지 먹어본 케이크 중에 제일 맛있는 거 같아요.”
연신 찬사를 늘어놓으며 입을 우물거리던 성호는 결국 잘라놓은 열 개의 조각 중 세 개를 그 자리에서 해치워버렸다. 아직 한참은 더 먹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 비싼 케이크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인식하고 한발 뒤로 물러난 성호는 괜찮으니 계속 먹으라는 윤재의 말이 세 차례 반복된 뒤에야 슬쩍 눈치를 살피고서 다시 남은 케이크 조각으로 손을 뻗었다.
“그냥 따로 싸가지 말고 여기서 다 먹는 게 낫겠다. 주스 가져올 테니까 먹고 있어.”
처음 맛만 보려고 했던 윤재는 이미 절반 이상을 해치워버린 이상 차라리 성호와 한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주방에서 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평소 케이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신의 입에도 이렇게 잘 맞을 정도면 보통의 사람들의 입에는 얼마나 맛있게 느껴질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 윤재였다.
“아, 근데 사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뭘?”
“아까 손님들 대화하는 걸 듣다가 알게 된 건데요. 전 깜빡하고 있었는데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래요. 아, 날짜 바뀌었으니까 어제가요.”
성호의 말을 들은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은 윤재가 무심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반쯤 남은 가토 쇼콜라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윤재의 생각을 읽어낸 것일까, 성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나니까 우대리님이 오늘 같은 날에 초코 케이크를 주고 가신 게 좀 신기하지 않아요? 남자끼리니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긴 하지만 재미있는 우연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간 성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앞에 놓인 남은 케이크 조각들을 차례로 해치워나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우연...인 건가.’
수영이 평소 생각 없이 움직이는 타입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윤재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그저 단순한 우연인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의도에 의한 상황이라는 증거 역시 찾을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으로 수영의 얼굴을 떠올린 채 조금 시간을 들여 마지막 한 조각을 해치운 윤재는 약간의 부스러기만이 남았을 뿐 깨끗하게 비워진 상자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뜻밖에 가진 풍요로운 야식 타임 이후 십여 분에 걸쳐 이루어진 뒷청소가 끝이 나고 늘 그렇듯 홀에 이어 주방의 정리까지 끝난 뒤에야 외투를 걸쳐 입은 성호가 입구 앞에 서서 윤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응. 수고했어. 내일 봐.”
“참, 덕분에 케이크로 포식했어요.”
“인사는 나중에 우대리님한테 해.”
“아, 안 돼요. 사장님 케이크 뺏어먹은 거 알면 대리님이 절 때리실 지도 몰라요. 그 분 주먹 엄청 셀 거 같은데 무섭단 말이에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성호의 말에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은 윤재는 다시 한 번 짧게 인사를 건네고 입구를 나서는 성호의 등을 향해 ‘조심히 가.’라고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을 건넸다.
성호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이제 자신도 슬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린 윤재는 그 순간 문득 한 대의 승용차가 가까운 위치로 다가와 멈춰서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윤재의 눈에 들어온 고급 승용차의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고 있었다.
‘!’
어둠이 걷히고 불빛에 드러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윤재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그와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 서있는 남자는 아까 전 윤재에게 포장을 부탁하고 멋대로 떠나버렸던 두 손님 중 한 명인, 상대적으로 수수한 인상을 하고 있는 남자-해준이었다.
“다행히 문을 닫기 전에 잘 온 것 같네요.”
“.......”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할까요?”
차의 시동을 끄고서 천천히 <민들레>의 입구로 다가온 해준이 어딘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