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윤재가 당장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던 해준이 멋대로 윤재의 곁을 스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돌아보는 윤재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잘 정리되어 있던 의자 하나를 빼내 엉덩이를 내려놓은 그는 대부분의 불이 꺼진 터라 어스름하게 변한 텅 빈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손님들로 떠들썩한 분위기가 풍겼던 가게 안은 이제 적막한 공기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게 문을 닫기 위해서는 어쨌든 지금의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윤재가 한참 만에 입구의 문을 닫고서 해준이 앉아 있는 테이블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청소를 시작하기 전 미리 난방 장치를 모두 꺼버린 탓에 가게 안엔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가선 윤재의 모습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해준이 문득 근처의 의자를 빼내고는 손끝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앉아요. 다리도 불편해 보이는데.”
해준의 제안에도 윤재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오늘 단 한 번 본 것뿐인 낯선 손님과 폐점을 코앞에 둔 시간에 느긋하게 담소를 나눌 마음은 없는 그였다.
그런 윤재의 생각을 읽어낸 듯 희미하게 입가를 비튼 해준이 재킷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 가게 안에 들어온 이후 처음 한동안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였던 표정을 깨끗이 지워버린 그는 먼저 깊이 한 모금의 연기를 빨아들인 뒤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 서있는 윤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전등의 대부분이 꺼진 상태에서 서로의 눈에 비친 상대의 모습은 어둠의 잔상을 머금고 있었다.
“아까 일은 미안해요. 갑자기 중요한 연락이 왔거든요.”
긴장감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아까의 일에 대한 사과의 말부터 꺼낸 해준이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그 안에 재를 털어냈다. 말의 내용과 달리 일말의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윤재를 다시 한 번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이거 뭐, 벽이라도 보고 얘기하는 거 같네.”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린 해준이 미동 없이 서있는 윤재를 향해 일순 스치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낮에 봤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남자라고, 윤재를 눈앞에 둔 그는 내심 생각했다.
따로 관리라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깨끗한 피부, 성인남자답지 않게 가늘고 긴 목, 두터운 스웨터 너머로도 충분히 가늠되는 바짝 마른 몸.
지금까지 봐온 미남들과 비교한다면 여러 모로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단정하고 청초한 인상이 묘하게 남자의 가학성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 해준은 아마도 그런 분위기가 제대로 작용한 덕분에 수영이 잠시나마 이 눈앞의 남자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이어가고 있을 거라고 확신을 담아 생각했다. 겉보기엔 번듯한 회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영이 침대 위에서는 꽤나 강한 가학성을 드러낸다는 점은 그와 잤던 파트너들이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녔던 탓에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소문으로 떠도는 정도의 강도 높은 플레이면 일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겐 충분히 기피당할 만한 수준이지만 그 고통 뒤에 따라붙는 쾌감을 자세히 설명 받은 자들은 고통보다 더한 쾌락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물론 그들의 욕망을 끌어내는 데에는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황홀한 경험담도 경험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꾸준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수영의 외모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단 피학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잘생긴 남자의 아래에서라면 구멍이 너덜하게 찢겨져도 좋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입에 담는 사람은 몇몇 유명한 게이바 내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별로 그런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도 마치 성직자처럼 순결한 인상을 풍기는 상대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살피며 속으로 생각한 해준이 이제 슬슬 뜸을 들이는 건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김윤재씨.”
“!”
뜻밖에 이름을 불린 윤재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눈에 띠는 균열이 일어났다. 몇 시간 전 처음으로 만난 상대로부터 이름을 불리는 일은 당장 그로 하여금 불쾌함보다도 섬뜩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윤재의 표정이 눈에 띠게 굳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해준이 그 사이 담뱃갑에서 새로 꺼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어스름한 공간 안에서 잠시 작게 피어올랐던 불이 사라지고 난 뒤 곧 매캐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우수영이라는 남자, 알고 있죠?”
조금 전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린 것만큼이나 예상 밖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한층 더 굳어진 표정을 짓자 그런 상대의 반응을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해준이 길게 연기를 내뿜고서 말을 이었다.
“요즘 두 사람이 꽤 좋은 분위기인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 남자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윤재씨가 걱정이 돼서 말이에요.”
“.......”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오는 상대를 경계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 윤재가 한참 만에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당신, 누구죠?”
“글쎄요. 지금은 입장 상 내가 누군지 밝히기가 어렵네요. 어쨌든 당신과 우수영 두 사람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는 알려주죠.”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모르는 사람이 하는 걱정의 말도 믿지 않고요.”
“보기보다 냉정하네요. 기껏 걱정이 돼서 조언을 해주러 온 건데.”
히죽거리는 투로 말하는 해준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윤재가 문득 등을 돌려 입구로 다가가더니 곧바로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이어 뒤를 돌아본 그는 해준에게 이만 돌아가 줄 것을 시선으로 부탁했지만 당연하게도 일부러 작정을 하고 이곳을 찾은 해준이 순순히 그 부탁에 응해줄 리는 없었다.
만만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예상 밖으로 다부지게 나오는 윤재의 태도에 내심 조금은 놀란 해준은 그러나 오히려 재미없는 샌드백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이제 가게 문을 닫아야 하니 나가주세요.”
“그럼 나가서 어디 조용한 곳이라도 갈까요? 난 딱히 여기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만.”
건들거리는 태도를 유지한 채 말하는 상대를 바라보는 윤재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져갔다. 지금 상황에서 어떤 부탁을 해도 상대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짐작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 정체 모를 상대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가게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거기에 수영과의 관계까지도. 그것은 곧 지금 단 한 번 이 상황을 넘긴다고 해서 끝이 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결국 이 상황을 회피함으로써 일이 마무리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윤재가 잠시 동안 열어놓았던 문을 닫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준이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서 다시 한 모금의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응당 가장 먼저 나올 만한 질문을 듣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긴 해준이 후-하고 연기를 내뱉고서 말했다.
“알아 봤으니 알고 있겠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
“뭐,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내가 아까 어디까지 말했죠? 아... 맞아. 거기까지였지.”
마지막엔 혼자서 낮게 읊조린 해준이 입구 앞에 서있는 윤재에게 다시 시선을 던지고 입을 열었다.
“그 남자와는 한시라도 빨리 관계를 청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서로를 위해서요.”
“.......”
“물론 그가 당장 손에서 놓기에 꽤나 아까운 남자인 건 나도 압니다. 일단 딱 보기에도 잘 생긴데다 침대 위에서 상대를 만족시키는 법도 잘 아는 남자죠.”
지금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를 의식해 평소답지 않게 순화해서 말한 해준이 침대 얘기가 나오자 한층 더 굳어버린 윤재의 표정을 읽어내고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눈에 띠는 상대의 동요를 알아차린 그는 역시 겉보기와 달리 수영과 꽤나 진득하게 즐겨온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아마 당신과 제대로 사귀거나 할 마음은 없을 겁니다. 보이는 대로 상대를 고르는 데 꽤 까다로운 남자죠.”
직접적인 말만 없을 뿐 해준이 자신을 무척이나 낮춰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윤재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 들려오고 있는 해준의 말이 상당수 사실이라는 건 인정하고 있는 윤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와 사귀던 아니면 일방적으로 버림을 받던 내 쪽에서 거절하던 그건 그와 나 사이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거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헤- 겉보기와 달리 꽤 탐욕스럽네. 당신.”
“!”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무심코 눈을 크게 뜬 윤재가 조금 전과 달리 명백한 냉소를 머금고 있는 해준을 쳐다보았다.
탐욕이라니, 그런 말은 태어나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윤재였다.
“우수영이 좀 사는 집안의 사람인 거 알고 있지?”
순식간에 말을 놓는 해준을 당혹스런 눈으로 쳐다본 윤재가 고요한 공기를 뚫고 다시 이어진 말을 그대로 귀에 담았다.
“일단 남들한테 보이기에도 자랑스러운 액세서리고 말이야. 섹스 테크닉이 죽여준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 쾌락을 알아버렸으니 쉽게 손에서 못 놓을 만도 하긴 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해한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당신이라도 꿈을 꾸는 기분일 테니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금 당신 주제에 가당키나 한 상대야? 마음 같아선 어떻게든 오랫동안 잡아두고 싶겠지. 내가 만약 여자였다면 무조건 임신부터 하고 봤을 거야. 신데렐라가 별 거 있나?”
명백한 멸시가 담긴 말투로 그렇게 말한 해준이 그쯤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윤재가 서있는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도 윤재는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켰다.
“그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아, 그래? 그럼 뭔데? 만나서 도란도란 담소나 나누는 건전한 친구 사이야? 고작 친구 만나겠다고 우수영이 이런 구질구질한 가게를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다고? 하.”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해준이 윤재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호연은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적당히 알아듣도록 위협을 가하라고 했지만 그간 아무리 쓰레기처럼 살아온 해준이라도 처음부터 장애인을 상대로 폭력을 가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약자를 억압하는 건 그것대로 즐거운 맛이 있긴 했지만.
우수영이라는 남자를 처음부터 모르면 모를까, 명색이 ‘노는 남자’로 유명한 그가 친구놀이를 하겠다고 주변을 정리해가며 한 사람만 만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해준은 조금 전 돌아온 윤재의 말을 듣고 난 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상대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해오는 상대의 뻔뻔함을 마주한 이상 구태여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고, 이미 그에 대한 적지 않은 수고비까지 챙긴 마당에 자신과 관계도 없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일일이 신경 쓸 이유가 그에겐 전혀 없었다.
“이런 말은 굳이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당신을 보니까 진짜로 주제를 좀 모르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좀 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윤재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본 해준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별로 장애인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다리를 하고 있으면 여자와 사귀기는 좀 힘들잖아? 몸에 하자가 있는 남자라도 괜찮다는 천사 같은 여자는 요즘 세상에 흔치 않으니까 말이야. 그나마 내세울 거라곤 가게 하나 가지고 있다는 건데 듣자 하니 그 가게도 안 망하고 굴러가는 게 다행인 수준이고. 이 상황에서 뭔들 재미있겠어. 남들처럼 좋은 가정 꾸리는 건 애초에 포기했다고 해도 당신의 상황이면 충분히 이해돼. 나라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몰라. 아니, 백퍼센트 걸렸을 거야.”
거짓된 연민과 모멸이 뒤섞인 해준의 말은 잔혹한 가시와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윤재의 가슴을 날카롭게 헤집어놓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냥 그가 서슴없이 이어가는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날카로웠다.
“괜히 높은 나무 올라가려다가 떨어지면 당신만 아프지 않겠어? 어차피 쾌락은 한 순간이야. 깊어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끊는 편이 좋다고. 아, 이건 경험담이야. 내가 예전에 마약으로 고생을 좀 한 적이 있거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어두운 곳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윤재를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던 해준이 다시 새 담배를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찰칵이는 소리에 이어 곧 매캐한 냄새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수영과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인지 눈앞의 남자가 수영에게 안겨 반응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 해준이었다. 몇 시간 전 처음 이곳에서 윤재를 봤을 때 가장 먼저 해준의 눈에 들어 왔던 건 예상 밖으로 성실하고 선한 윤재의 눈빛이었다. 목소리와 말투, 손님을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는 접객에 관한 교과서가 있다면 당장 기재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정중하고 조심스러웠으며 성실해 보였다. 다른 것을 떠나 우수영이라는 남자의 속성을 생각하면 분명 섹스로 얽혀진 관계는 분명한데도 정작 해준이 마주한 김윤재라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할 장면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거야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제껏 지저분한 뒷골목을 누비고 살아오는 동안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라면 이미 질리도록 겪어 온 해준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성치 않은 몸이라서... 어떤 사람과는 처음부터 만나면 안 된다는 건가요?”
한참 만에 윤재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무거웠다. 적어도 해준이 지금까지 들어본 윤재의 목소리 가운데선 가장 낮게 가라 앉아 있었다. 마치 몇 톤의 쇠구슬이라도 달아놓은 것과 같이. 바다라면 몇 천 미터의 아래까지 내려갈 듯한 목소리였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게 제일 좋아. 나도 그래서 높은 곳은 올려다보지 않아. 예전에 한 번 당신처럼 신데렐라 기분 좀 느껴보겠다고 있는 집 아들이랑 얽혔다가 피를 좀 보고 난 뒤에 교훈을 얻었거든. 어차피 그 사람은 당신과 사는 세계도 전혀 다른 인간인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죽어도 손을 못 놓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
“.......”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건가요?”
“!”
뜻밖에 되돌아온 질문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해준이 잠시 후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것과 동시에 냉소를 머금었다.
“하... 지금 그건 농담이지? 정신 차려. 형씨. 이건 진심으로 경고하는 거야.”
“.......”
“내가 정말로 당신이 걱정돼서 여기에 왔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지? 아무리 대가리가 나빠도 그 정도 눈치도 없진 않을 거야, 그치?”
“.......”
“그 남자와 연관되어서 당신이 득볼 거 없어. 섹스가 목적이면 그냥 게이바를 돌면서 상대를 찾아. 한동안은 아무도 눈에 안 차겠지만 지내다 보면 서서히 익숙해질 거야.”
“나는 그런 목적 따위...”
“그래? 그럼 더 잘 됐네. 어차피 여자도 아니고 임신해서 잡을 것도 아니잖아? 부잣집 아들 상대로 위자료를 왕창 뜯어내서 팔자 좀 고쳐보겠다는 것도 아닐 테고. 아까는 너무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그래도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을 거야. 당신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착하고 예쁘게 살 수 있는 여자가. 괜히 쓸데없는 고집 부리다가 안 좋은 일 당하지 말고 눈치 있게 처신해. 이게 그나마 내가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 조언이야. 이 정도로 알아듣게 얘기했으면 이해하겠지?”
윤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얽혀서 좋지 않은 인연이란 것도 있어. 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계급이란 게 나뉘어져 있는 사회에서는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이랑 끼리끼리 어울려 사는 게 현명해.”
그렇게 말한 해준이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한 때 자신보다 많이 잘난 누군가와 만나고 버려졌던 당시의 기억을 스치듯 떠올린 그는 이윽고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로 짧아진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집어넣었다.
김윤재는 참으로 운이 나쁜 남자라는 생각이 드는 해준이었다. 어쩌다가 하필이면 장호연의 마음에 든 상대를 만나서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인지 조금은 인간으로써의 연민이 들기도 했다. 호연과 제법 긴 시간을 알고 지내온 그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데다 고집이 센 장호연이 적으로 삼기엔 너무도 좋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치정극에 제삼자를 끼워 넣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호연은 일정의 자존심을 포기했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만큼 그가 진심과 절실함을 담아 이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해준은 언젠가 호연으로부터 받았던 도움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수고비로 챙긴 거액은 그저 부수적인 보너스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라고 해서 불쌍한 사람 상대로 이런 말해서 마음 편할 리 없어. 김윤재씨, 당신. 비록 상황은 이래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까지처럼 착실하고 평범하게 살아. 그게 당신을 위한 길이야.”
어스름한 공간 안에서 그저 바닥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재의 얼굴은 해준의 눈에 제대로 비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지금 이 순간 윤재가 더없이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 해준이었다.
“내가 또 다시 여기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마지막 말을 남기고 윤재의 곁을 스쳐 입구를 빠져나온 해준은 차로 향하던 중간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미동 없이 입구 근처에 서있는 윤재의 모습이 유리문 너머로 비치고 있었다.
평소대로였다면 좀 더 강한 태도로 협박을 가했을 해준은 어쨌든 상대가 얌전한 데다 몸이 성치 않다는 사실을 감안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시점까지도 나름의 신사다운 태도를 유지했다. 머리가 나빠 보이는 남자는 아니었으니 이쯤이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쪼록 그러길 바랐다. 괜히 자신이 또다시 이곳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도록.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건가요?’
문득 아까 전 들었던 윤재의 진지한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린 해준이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운전석에 올랐다. 그저 단순히 반항심에서 비롯한 가정 하에 던져진 질문이라면 다행이지만 그 질문에 절반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는 거라면 정말로 정신 차리라는 말 외엔 해줄 말이 없는 것이 해준의 입장이었다.
‘이제 슬슬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겠지.’
일이 잘 해결되면 지금 사귀는 연인과 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고 한 호연의 말을 떠올리고서 미소를 머금은 해준은 이제 이쯤에서 오늘 일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가게를 향해 차를 출발시켰다. 마지막으로 그가 슬쩍 시선을 던진 백미러에는 여전히 홀로 입구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재의 모습이 잠시 비쳤다 이내 빠르게 멀어져갔다.
*
“우대리님 오늘도 회식 빠지시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무사히 합류하셨네요. 수정안이 잘 처리되셨나 봐요.”
“아까 상훈씨가 자료 정리를 도와줘서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 됐어. 내일 다시 한 번 검토하고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이대로 가게 될 것 같아.”
“와- 좋으시겠어요. 전 아직 자료 정리부터 한참을 더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취기가 오르는지 특유의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재욱을 슬쩍 한 번 쳐다본 민욱이 테이블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냄비 안에서 얼큰한 국물을 적신 생태 살을 수저로 건져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손님이 많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요즘 계속 이랬던 것 같아요. 이틀 전에 여자 친구랑 둘이 왔었는데 그 때도 오늘처럼 많았어요.”
“아, 그래? 아까 보니까 저기 카운터 위에 광고 전단지가 놓여 있던데 그 효과인 건가. 저기, 성호씨! 여기 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성호가 물수건을 바구니에 옮겨 담던 손을 멈추고 수영의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아까 전 수영과 그의 동료 네 명이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평소 그대로 활기찬 인사를 건넨 그는 제법 많은 손님들을 상대로 거의 혼자서 서빙을 맡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윤재도 중간 중간 홀에 모습을 드러내왔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늘 홀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여기 소주 두 병이랑 과메기무침 하나만 더 갖다 줘.”
“네.”
시원하게 대답한 성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른 민욱이 슬쩍 주방 쪽에 시선을 던지고서 물었다.
“오늘은 홀에 사장님 얼굴이 안 보이네.”
들려온 민욱의 말에 그때까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수영이 성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타고난 주량이 센 그는 이제 겨우 소주 다섯 잔 정도를 비운 지금 당연하게도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주방 일이 많아서요. 안에서 계속 안주 만들고 계세요.”
성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민욱이 ‘아쉽네. 예쁜이 사장님 얼굴 좀 보려고 했는데.’라고 희미한 웃음을 섞어 말했다. 여러 번 이곳에서 회식을 가진 인연으로 윤재와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히고 있는 수영의 동료들 사이에서 윤재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착하고 성실하고 고운 청년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추가로 주문한 것들을 가져다놓고 다시 서둘러 다른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하는 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영이 어느새 최근 인기 높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동료들을 한 번 쳐다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우대리님 화장실 가시게요?”
“아니. 추가로 과일 안주 좀 시킬까 해서.”
“아, 그러면 저기 성호씨한테...”
“아니야. 내가 직접 주방에 가서 가져 올게.”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동료들이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긴 수영은 이제 막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는 손님들의 곁을 스쳐 지나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수영의 예상대로 윤재가 홀로 주방을 지킨 채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기껏 단골손님들이 왔는데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주는 거야?”
“!”
문득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에 채소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입구에 시선을 던진 윤재가 천천히 다가오는 수영의 모습을 잠시 그대로 시야에 담았다. 아까 전 수영의 일행이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 짧게 인사를 건넨 것을 마지막으로 주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그는 수영과 단 둘이 마주한 지금 조금은 곤혹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해준이 가게를 찾았던 날로부터 나흘이 지난 오늘.
윤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날 해준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면 자연스레 그 날의 일이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의지만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었다.
“죄송해요. 일이 좀 많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서 그렇게 대답한 윤재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수영을 다시 쳐다보고서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과일안주.”“아, 네. 금방 만들어 가져갈게요.”
수영과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애매한 곳을 바라본 윤재가 때마침 주방 안으로 들어서는 성호를 발견하고 말했다.
“성호야, 우대리님 테이블에 가져다드릴 과일 안주 좀 만들어줄래? 난 이거 마저 해야 해서.”
“네. 알겠어요.”
시원하게 대답한 성호가 아직 곁에 서있는 수영을 돌아봤다. 늘 그렇듯 오늘도 비싸 보이는 수트 차림이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수영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본 그는 잠시 윤재에게 향하고 있던 수영의 시선이 거두어진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다른 거 또 주문할 거 있으세요?”
“아니... 없어. 과일안주만 좀 부탁해.”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려 입구를 나서는 수영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호는 서둘러달라는 윤재의 말을 듣고 잠시 놀고 있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방까지 직접 와서 주문하시다니 별 일이시네요. 아무래도 우대리님이 사장님 얼굴이 보고 싶으셨나 봐요.”
“.......”
“아까 우대리님 동료분도 사장님 왜 안 보이시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사장님 은근히 인기 많은 거 아세요? 전에 저 앞 순대국집 아주머니도 저한테 사장님에 대해서 묻더라고요. 총각이 참 참하다고 어찌나 칭찬을 하시던지... 어, 밖에서 부르네요. 잠시만요.”
문득 홀에서 들려온 부름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성호가 주방 밖으로 나가고 난 뒤 조금 전까지 그가 완성해나가던 과일 안주 접시를 가만히 쳐다보던 윤재가 채소를 다듬던 손을 물로 씻어내고서 곧바로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접시를 마저 채우기 시작했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윤재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영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지금까지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그 날 들었던 해준의 협박과 같은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굳이 알지도 못하는 상대로부터 듣지 않아도 수영과 비교하면 자신의 조건이 한참 뒤진다는 것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저 윤재로 하여금 더는 예전처럼 수영을 대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이제까지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그와 자신의 관계를 이제는 싫어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그 사람은 당신과 사는 세계도 전혀 다른 인간인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죽어도 손을 못 놓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당연하게도 그런 감정 따위 느끼지 않는다고 틀림없이 생각하고 믿어왔다. 그러니 그렇게 말하면 간단히 끝이 나는 거였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질문을 받았던 당시 정작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제껏 의식적으로 품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윤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 사장님. 여기 과일안주...”
잠시 후 손님의 계산을 마치고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온 성호가 조금 전 자신이 놓아두고 간 접시를 찾던 중간 수영의 앞에 놓인 접시를 발견하고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예쁘게 완성되어 있는 접시를 윤재로부터 건네받은 그가 몸을 돌리기 전 접시 안에 담겨져 있는 과일들을 빠르게 훑어보며 말했다.
“역시 사장님 거랑 제 거랑 한눈에 보면 딱 구별이 되네요. 제가 깎은 건 되게 못생겼는데 사장님이 깎은 건 되게 예뻐요. 저도 나름대로 연습하고 있는데 아직 잘 안 되네요.”
“하다 보면 조금씩 늘어. 나도 처음에 어머니한테 배울 땐 토끼 귀가 다 뜯어지고 그랬어.”
“사장님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진심으로 놀라는 성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 윤재는 어서 손님에게 접시를 가져다드리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잠시 손에서 놓았던 채소를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개점 시간 이후로 한참동안 많은 손님으로 북적거렸던 홀은 조금 전 나간 손님을 마지막으로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에이, 이 아가씨들 또 안주랑 술 엄청 남기고 갔네요. 아까워라.”
테이블을 치우다 말고 남은 과일 안주를 집어먹기 시작한 성호가 다른 테이블을 닦고 있는 윤재를 불렀다.
“사장님, 잠시 좀 쉬다가 같이 해요. 여기 과일 많이 남았는데 좀 드세요.”
마음 같아선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서 쉬고 싶었지만 성호가 편히 먹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들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고 걸음을 옮긴 윤재는 그 사이에도 열심히 과일을 집어 먹고 있는 성호의 맞은 편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과연 조금 전 성호의 투덜거림대로 커다란 접시에는 절반에 가까운 과일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이미 꽤나 취한 상태에서 들어온 젊은 여자 손님들이 아무래도 충분히 배가 불러 있는 상태에서 얼마 먹지 못하고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토끼 모양 사과가 찍힌 포크를 성호로부터 받아든 윤재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좀 전까지도 쉬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며 은연중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이어 배와 사과 몇 조각을 연이어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사장님 어디 혹시 아프세요?”
갑작스런 성호의 질문을 듣고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까 우대리님이 계산하시면서 슬쩍 물어 보시길래요. 전 그냥 아까 저녁에 울며 난리 피운 손님 상대하느라 진이 빠지신 것 같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
“우대리님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계산한 뒤에 동료 분들과 같이 바로 나가시지 않고 슬쩍 주방 앞에 가셔서 사장님 모습 살피셨거든요.”
“.......”
“정말 괜찮으신 거죠?”
반복된 성호의 대답에 쓴웃음을 머금고 ‘그래.’라고 대답한 윤재는 잠시 동안 조용히 남은 과일안주를 입으로 옮기던 중간 문득 테이블 한쪽에 방치되어 있는 소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처음엔 단순히 남은 술병을 정리 하려는 건가하고 생각했던 성호는 윤재가 망설임 없이 비어있는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것을 알아차렸다.
갑작스런 윤재의 행동에 성호가 입 안 가득 방울토마토를 집어넣은 채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특별한 일 없지?”
“네? 네.”
“그래... 그럼 조금만 마실까?”
“네? 하지만 아직 청소가...”
“내가 내일 오후에 조금 더 일찍 와서 치우면 돼.”
“아니... 그래도 사장님 술 엄청 약하시니까 마시게 하면 안 된다고 준석 형님이...”
“조금은 괜찮아. 그래도 혹시 취하면 그냥 저쪽 방에 옮겨서 뉘어주고 가줄래? 갈 때 밖에서 문만 잠가 줘. 셔터는 내리지 말고.”
어딘가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윤재의 말에 결국 성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말 윤재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지금 성호의 눈에 비치고 있는 건 평상시답지 않은 윤재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성호가 몇 개월에 걸쳐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윤재가 먼저 술을 마시자는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응.”
세 잔째의 술이 들어간 뒤 발그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한 윤재의 뺨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성호가 일단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얌전히 비웠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자신에게라도 털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성호였지만 윤재는 조용히 잔을 비우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아무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째 반복되는 질문을 던진 성호는 그 질문을 받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는 윤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미 어느 정도 취한 듯 보이는 윤재는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헤실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르게 보면 그저 쓸쓸하게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장님...”
“정말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정말로 아무 일도...”
잠시 동안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성호를 바라보던 윤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결국 테이블 위로 허물어졌다.
“.......”
졸지에 혼자 남겨진 신세가 된 성호가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윤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결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윤재가 고개를 살짝씩 움직일 때마다 흐트러지며 바닥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 번 취해서 잠이 들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준석의 말대로 윤재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듯 했다.
이 상황까지 오면 성호도 괜찮다는 윤재의 말을 그저 무작정 믿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줄곧 옆에 붙어 있었던 자신보다 잠시 스쳤을 뿐인 수영이 먼저 윤재의 이상 징후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스스로가 반성이 되긴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어째서 윤재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가 너무도 알고 싶은 성호였다. 이제껏 성호는 종종 자신의 고민을 윤재에게 털어놓고 상담을 받아왔지만, 윤재의 경우 직접적인 질문을 받지 않는 한 스스로 나서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던 만큼 지금 이 순간 성호는 윤재에게 조금은 서운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흘깃 벽에 시선을 던진 성호는 어느새 새벽 네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걸음을 옮겨 아까 전 윤재가 자신이 취하거든 옮겨다 달라고 부탁했던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연 그는 이전에 한 번 봤을 때보다 실질적으로 몇 배는 더 협소한 공간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에 윤재의 모친이 잠깐씩 사용했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 쪽방은 몇 개월 전 홀을 넓히는 보수공사를 거치며 절반으로 줄어든 탓에 이제는 한 사람도 발 뻗고 쉬기 어려울 정도로 좁아져 있는 상태였다. 협소한 공간도 공간이지만 성호가 들어가서 뒤져본 쪽방 안에는 당장 덮을 이불도, 깔고 잘 전기장판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윤재는 상관하지 않을 듯 했지만 쪽방의 상황을 확인한 성호는 신경이 쓰였다. 부탁을 받았다고 하나 정말로 부탁받은 대로 이 좁은 방에 윤재를 두고 가면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좁은 공간에 춥게 잠들어 있을 윤재가 신경이 쓰일 것만 같은 성호였다. 마음 같아선 자신의 집에 데려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휴학생인 그가 살고 있는 곳은 간신히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비좁은 고시원이었다.
잠시 동안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홀로 조용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성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근처의 서랍을 열어 벗어둔 외투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성호가 검색해 찾은 이름은 ‘우대리님’이었다.
한참 전에 에서 수영으로부터 건네받은 명함에 적힌 번호를 혹시 모른다며 핸드폰에 일부러 입력해 놓았던 것이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4시 15분.
이 시간이면 당연히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사람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한참이나 번호를 누르지 못한 채로 망설이던 성호는 결국 전화 대신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만약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윤재를 쪽방에 뉘이고 갈 수밖에 없을 테고, 만약 답장이 온다면 먼저 정중하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건넨 뒤 윤재의 집주소를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엔 자신이 윤재를 집에 데려다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간 윤재에게 받아먹은 반찬이 얼마인데 이 정도 수고쯤이야 수고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성호였다.
[안녕하세요. 저 민들레의 성호입니다. 이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혹시 깨어 계시다면 저희 사장님 주소만 좀 문자로 알려주시겠어요?]
당장 몇 시간 뒤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잠을 깨우는 것에 극도의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문자 한통 정도면 큰 실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한 성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사실 절반은 답장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미 일을 저질러 놓은 시점에서 새삼스럽긴 하지만 막상 수영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를 화나게 하는 것에 두려운 기분이 들기도 하는 성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절반은 실망과 절반은 안도의 심정으로 이제 어쩔 수 없이 윤재를 쪽방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정한 성호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윤재의 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에 따라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본 성호는 ‘우대리님’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액정에 찍혀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무심코 꿀꺽 침을 삼켰다. 바라던 답장 대신 전화가 온 이 상황에서 그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혹시나 수영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올까 생각하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의 성호였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 수영의 신경을 긁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린 성호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꿀꺽 침을 삼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사장님 주소라니 무슨 소리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는 몇 시간 전 이곳에서 들었을 때와 비교해 확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듯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요, 저기. 사장님이 취하셔서... 주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집까지 바래다드리려고요. 전에 대리님께서 주소를 알고 계시다고 하신 게 기억이 나서...”
[.......]
“아, 저기 늦은 밤에 문자를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 없이 경솔했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잠시 이어진 침묵에 급격히 심장이 쫄아 붙는 것을 느낀 성호가 급하게 사과의 말을 건네고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어딘데?]
문득 들려온 수영의 질문에 무심코 빠르게 눈을 깜빡인 성호가 ‘민들레인데요...’라고 대답하자 잠시 텀을 두고 수영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게. 그대로 있어.]
곧 뚝-하고 통화가 끊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고 멍한 표정으로 몇 차례 눈을 깜빡인 성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쳐다봤다. 움직이는 시곗바늘은 이제 막 새벽 4시 20분을 지나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