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들려온 수영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을 지은 윤재는 이후 얼마간의 침묵이 더 이어진 뒤에야 간신히 말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설마 수영의 입에서 이런 의미의 직접적인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윤재였다. 그간 수영이 자신을 상대로 보여 온 명백한 ‘호의’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쪽의 의미로 어프로치 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였다. 아니,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 정확할 터였다. 간간이 옆에서 있었을 뿐인 성호마저도 분명하게 알아차린 그 선명한 호의를 당사자인 윤재가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사라질, 그저 한순간에 스쳐가는 감정이리라 생각해왔었다.
얼마의 시간 동안 어스름한 방안은 침묵만으로 채워졌다. 생각에 잠긴 윤재는 당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수영 역시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 채비를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머릿속 한켠에 또렷이 박혀 있음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고요한 침묵에 동조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수영의 시선을 마주한 윤재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 시간은 yes와 no를 가르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아니었다. 수영의 말을 이해한 시점에서 이미 명백하게 답은 나와 있었다. 그저 대답을 입 밖에 내기 직전의 마지막까지도 미련에 기인한 일말의 가능성이 그를 망설이게 했던 것뿐.
윤재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었고 동시에 인정하고 있었다. 어느 새부터인가 수영과 함께 있는 시간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자신을. 수영이 일방적으로 주는 호의를 더 이상 무조건적으로 경계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자신을. 알게 모르게 가게의 입구에서 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혹시’하는 생각을 품은 채로 돌아보게 된 자신을.
그것이 아직 어렸던 시절의 자신이 수영을 향해 품었던 것과 같은 감정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언뜻언뜻 그것이 이미 한참을 잊은 채로 지내왔던 빛바랜 감정의 일부와 닮아 있다는 것을 깨끗하게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윤재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들과 별개로 윤재가 내린 답은 명확했다.
과거의 일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우수영이라는 남자는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상대였다.
“그러니까... 거절인 거지?”
“...죄송해요.”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반복한 윤재는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수영의 짧은 한숨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래... 어쩔 수 없네.”
수영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담겨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수영이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아 있는 윤재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깨끗이 차이고서 출근하려니 기분이 좀 그렇긴 하네.”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덤덤한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세 번째 반복된 사과의 말을 입 밖에 낸 윤재가 곧바로 들려온 희미한 웃음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긴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고 있는 수영이 그런 윤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 네가 그러면 내가 더 불쌍해져.”
“.......”
“그래도 혹시 정 마음에 걸린다면 위로라도 해줄래?”
뜻밖의 말을 듣고 살짝 굳어진 윤재의 얼굴을 확인한 수영이 쓰게 웃었다.
침대 위에서 나온 ‘위로’라는 단어에 연관적으로 떠올릴 만한 장면이야 뻔한 만큼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오는 윤재의 경직된 반응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오해는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수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이 쉬는 날인 걸로 아는데 같이 식사하자.”
잠시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의 제안을 듣고 도리어 의아해진 표정을 지은 윤재는 그러나 곧 냉정히 머릿속을 정리하고 말했다.
“제가 방금 전에 한 말은... 거절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관계도 이제...”
“그래, 조금 전 네 말이 거절인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평범한 손님과 가게 주인의 관계까지 지우겠다는 뜻은 아니잖아?”
“.......”
“같이 식사하는 정도의 위로도... 해줄 수 없겠어?”
어딘가 조금은 기운이 빠진 듯한 수영의 목소리에 윤재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평범한 손님과 가게 주인의 관계. 너무도 건조한 단어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분명 수영과 재회한 뒤 그와 자신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유지되어 왔었다. 그 사이 레일을 벗어난 감정의 변화가 그 관계 안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식적으로 그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내릴 수 있는 단어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래, 차라리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처럼 평범한 손님과 가게 주인이라는 관계에서 앞으로도 선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쪽이 더 안정적일지도 몰랐다. 저번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을 처음으로 지금의 이 상황까지 벌써 세 번째,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자신을 안을 수도 있었을 기회를 놀랄 만큼 신사다운 태도로 포기한 수영이라면 분명 명백한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예전처럼 스스로의 뜻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어느 샌가 윤재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서 윤재는 이제 더 이상 처음 재회했을 당시처럼 무조건적으로 수영을 경계하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의 거절로 자신을 포기한 수영이 다시 자연스럽게 새로운 상대를 만들어 더는 <민들레>를 찾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윤재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걸로 위로가 된다면.”
“괜찮아?”
“...네. 당신은 중요한 단골손님이잖아요.”
대답 뒤 덧붙여진 말에 희미한 웃음소리를 낸 수영을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일 새벽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흔쾌히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 준 사람이었다. 분명 현실적으로 심신에 무리가 갈 만한 상황인데도 의식적으로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는 수영의 모습을 보며 새삼 조금 전 그가 자신에게 했던 진지한 말을 다시 떠올린 윤재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거절을 당한 뒤 수영은 어째서 안 되느냐고 흔히 뒤따를 법한 질문을 던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윤재는 지금 이 순간 그런 수영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있는 자신으로 하여금 무리하게 힘든 정리의 과정을 강요하지 않아줘서.
문득 소매를 걷은 수영이 시간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줄곧 벽에 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고 긴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자신을 따라오는 윤재의 시선을 슬쩍 눈으로 확인한 그는 어스름한 가운데에서도 눈에 띠게 아름다운 형태를 자랑하고 있는 손으로 빠르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이제 가야겠어. 지금까지 입사 이래로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는데 그 기록을 깨면 아까울 것 같아.”
“...그렇겠네요.”
피로한 얼굴 위로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한 윤재가 예의 상 배웅을 하기 위해 침대에서 나오려하자 수영이 곧바로 ‘됐어. 혼자 갈 테니까 더 자.’라는 말로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토요일에 데리러 올게.”
“...네.”
“나중에 봐.”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려던 수영이 문득 뒤에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이어서 고개를 돌린 그가 어스름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혹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요?”
“.......”
“그래서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건가요?”
진지한 윤재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뜬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문을 등진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긴 팔을 교차해 팔짱을 낀 그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예상하고 있었어. 그래도 내심 좋은 대답이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은 갖고 있었지만.”
“.......”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 건 너무 짐작 가는 부분이 많아서랄까... 듣는 게 무서운 건지도 몰라.”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수영이 다시 한 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너한테 한 말은 그냥... 내 욕심이었어.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도 약해진 너를 보고 못 참고서 일단 무모하게 부딪쳐 본 거야.”
수영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거였다.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결과를 맞이한 그로서는 이제 와 새삼 크게 실망하거나 충격을 받을 것도 없었다.
이제껏 셀 수 없는 사람과 짧게든 길게든 관계를 맺어왔던 과거를 통틀어 수영이 굳이 ‘정식으로’라는 말을 사용해 가며 진지하게 사귀자는 요청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질리면’이라는 전제도 ‘섹스’라는 목적도 빠져 있었던 그것은 그저 순수하게 연애 자체가 목적이고 전제가 되는 제안이었다. 지금까지 만남의 목적이 되었었던 ‘섹스’가 오히려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 중 하나가 될 뿐인. 다른 사람에겐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게까지 여겨지고 있는 수순이었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적어도 수영에게 있어선 많이 낯설고 또 그만큼 특별한 것이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했던 건 아닌 것 같네요.”
별다른 동요가 없는 수영의 모습을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윤재가 조용히 읊조리듯 말하자 문득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낸 수영이 순간적으로 살짝 날카로워진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여?”
“.......”
“표정으로 잘 안 드러나고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실망한 거 티 안 내려고 노력하고 있어.”
한때는 의식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포커페이스가 어느 샌가 자연스레 얼굴의 일부가 되어 있는 수영은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다.
“정말로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내 속도 태연할 거라고 생각해?”
직접적으로 날아온 질문에 윤재가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키자 잠시 동안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던 수영이 일순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차인 상태로 바로 출근하려니까 솔직히 지금 기분은 엄청나게 안 좋아.”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나름 순화해서 표현한 수영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채 말을 이었다.
“실망한 건 분명히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일을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 쓰진 않아. 왜인 줄 알아?”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입 밖에 내지 않는 윤재를 잠시 그대로 지켜보던 수영이 순식간에 단호해진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포기할 생각 없으니까.”
“!”
“그래서 앞으로 필요한 만큼 더 시간을 가질 거야. 그게 얼마가 되던 그렇게 할 거야. 난 그럴 각오를 하고 있어.”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고 당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윤재를 얼마간 가만히 지켜보던 수영이 말을 이었다.
“그냥 상황 봐서 말이나 한 번 해보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어쭙잖은 신사 흉내 내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를 상대로 얼마나 진지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그건 분명하게 알아줬으면 좋겠어.”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은 그쯤에서 다시 한 번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려 입구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을 촉박해진 것을 확인한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 여기서 포기할 게 아니라면 어째서 위로를 해달라는 말을 한 거죠?”
곧바로 등 뒤에 따라붙은 윤재의 질문을 듣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발을 멈추고서 고개를 돌린 수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너랑 같이 보낼 시간이 갖고 싶었다고 꼭 직접적으로 말해야 알겠어?”
“.......”
“토요일에 봐.”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뒤 방을 나서는 수영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은 윤재는 잠시 후 콰당하고 들려온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입구에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 남아 있는 가운데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은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조금 전 수영이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 내가 너를 상대로 얼마나 진지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그건 분명하게 알아줬으면 좋겠어.’
묵직한 펀치처럼 날아왔던 한 마디가 한참이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서 천천히 고개를 든 윤재는 조금 전 수영이 떠난 방안 입구를 잠시 그대로 바라보다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머리를 조여 오는 통증이 단순히 숙취가 불러온 것인지 아니면 혹 다른 생각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진 그였다.
*
이른 시간에 가게로 나와 청소를 시작한지 삼십 여분 만에 전날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린 윤재는 주방에서 소독한 수저들을 홀로 가지고 나와 각각 테이블에 놓인 통에 정해진 숫자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어제 문을 닫기 전 성호가 나름대로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해주고 간 덕분에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한 윤재는 생각 밖으로 혼자서도 빠른 시간 내에 홀 청소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서둘러 출근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집에 있었어도 마음 편하게 쉬지는 못했을 그였다.
가게로 출근한 지금도 윤재는 몇 시간 전 있었던 수영과의 일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남아 있어 비몽사몽한 상태였던 터라 일부는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몇 시간 전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에 들어갔다가 식탁 위에서 발견했던 숙취해소용 음료 두 병은 이른 아침에 보았던 수영의 존재가 분명한 현실이었음을 증명해주었다. 믿을 수 없게도 수영이 정말로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잘 닦인 수저를 차례대로 통에 집어넣던 윤재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종소리를 따라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아직 영업 시작을...”
거기까지 말하던 윤재가 뜻밖에 눈에 들어온 반가운 얼굴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이 시간에 웬일이야?”
“중국 출장 갔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왔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윤재에게 다가오고 있는 건 안 본 사이 조금 살이 빠진 듯한 모습의 준석이었다. 그래도 귀국 후에 잠은 푹 자뒀는지 다행히 얼굴에서 피로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청소 도와줄까 해서 좀 일찍 왔는데 벌써 다 끝낸 모양이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홀을 크게 한 번 둘러본 준석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가장 최근에 봤을 때만 해도 일이 많아서 매일매일 수면부족에 시달린다는 하소연을 했던 그는 이제야 정상 컨디션을 회복한 듯 한참 전에 보았던 건강한 안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홀 청소는 다 했어. 지금부터 장 보러 가야 되는데 같이 갈래?”
“그래. 가자.”
준석의 대답이 떨어진 뒤 곧바로 마지막 수저를 통에 집어넣고서 근처에 벗어두었던 점퍼를 집어 몸에 걸친 윤재가 필요한 목록을 적어둔 수첩과 장바구니를 들고 준석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셔터는 내리지 않고 문만 잠근 그는 먼저 운전석에 오른 준석에 이어 자신도 조수석에 올랐다.
“근데 그 장바구니 뭐야.”
이제 막 윤재가 조수석 바닥에 내려놓은 장바구니를 시야에 포착한 준석이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핫핑크색 천 재질의 장바구니에는 원색의 꽃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전에 쓰던 게 너무 낡아서 버렸거든. 새로 살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주방 서랍 뒤져보니까 이게 있더라. 전에 어머니가 화장품 사시면서 서비스로 받아 놓으셨나봐.”
어릴 적부터 있는 물건은 굳이 새로 사지 말라는 모친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윤재는 지금까지도 그 가르침대로 알뜰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일을 돕겠다고 나선 준석에게 서랍을 뒤져 나온 앙증맞은 코끼리가 그려진 앞치마를 건넸던 것도 있는 물건을 잘 활용하는 평소의 행동이 그대로 나온 것이었다.
“어차피 물건 담는 가방인데 겉모양이 좀 그러면 어때. 그냥 용도대로 잘 담기만 하면 되지.”
섬세한 외모답지 않게 의외로 생활력과 관련해선 쿨한 면이 있는 윤재를 잠시 그대로 바라보던 준석이 다시 한 번 요란한 장바구니를 흘깃 쳐다본 뒤 차를 출발시켰다.
한동안 꽁꽁 얼었던 날씨가 풀린 덕분인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소 가볍게 변해 있었다. 시기적으로 아직 봄이 오려면 멀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 본 기상예보에 따르면 일단 가장 혹독한 추위는 물러갔다고 했으니 몇 개월에 걸쳐 잔뜩 움츠렸던 거리의 분위기도 이제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기 시작할 터였다.
시장 한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본격적으로 장을 볼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은 평일 오후라 한적한 시장 길을 천천히 걸으며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구매해 화려한 꽃무늬의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물론 오늘도 장바구니를 손에 든 건 준석이었다. 기본적으로 윤재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루는 것을 싫어했지만 이미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그는 이제 순순히 손을 내미는 준석에게 장바구니를 맡기고 있었다.
“어.”
문득 걷던 준석이 대형슈퍼마켓 앞의 진열대 앞에 멈춰 서자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윤재도 발을 멈췄다.
“와- 엄청 싸네. 우리 동네 마트보다 훨씬 싸게 판다.”
준석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는 건 거의 원가의 절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 캔 맥주였다. 평소 맥주를 즐겨 마시는 준석이 얼마 동안 진열대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재가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혀 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살래? 안으로 들어갈까?”
윤재의 질문을 받은 준석이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부터 사야 할 것도 많은데 괜한 짐 늘리기 싫다.”
“네 짐은 내가 들어줄게.”
“됐어.”
윤재에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하고 싶지 않아 창피함을 무릅쓰고 화려한 분홍 꽃무늬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는 준석이 빨리 가자며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윤재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줄곧 추웠던 날씨가 조금은 풀린 덕분일까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 전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며 급격히 손님이 줄어든 탓에 볼 때마다 늘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상인들도 모처럼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놓고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었다.
“저기, 총각!”
근처 은행에 간 윤재의 부탁으로 이제 막 구매한 생선을 상인으로부터 건네받아 장바구니에 넣던 준석이 문득 옆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교통비가 없어서 그런데 조금만 도와줘.”
다짜고짜 도와달라며 자신의 팔을 붙드는 할아버지를 쳐다본 준석이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패턴이라면 이미 출퇴근길에 몇 번이나 경험한 적이 있는 그였다. 말이 교통비지 실상은 구걸의 구실일 뿐이라는 것을. 정말로 도와줘야 할 상황이라면 군말 없이 도와주겠지만 이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구걸에 모르는 척 손을 내밀어줄 만큼 준석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형식적인 사과의 말을 하며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할아버지의 손을 떼어낸 준석이 몸을 돌리려다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구걸을 거절당한 할아버지가 조금 전까지 주름 진 얼굴 위에 드리우고 있던 가려한 표정을 일시에 지워내더니 갑자기 ‘애미 애비도 없는...’을 시작으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시장이 떠나가라 커다란 목소리로 내뱉기 시작한 것이었다. 뜻밖의 상황을 맞이한 준석은 조금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만 주변 상인들의 태연한 태도를 보건대 이와 같은 상황이 이곳에서는 자주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이쪽이야말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공공장소에서 이런 개념 없는 노인네를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 준석은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어차피 여길 떠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니 굳이 상종할 필요도 없다고. 다만 그는 가끔씩 장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윤재가 걱정이 될 뿐이었다.
계속해서 시끄럽게 욕설을 내뱉고 있는 할아버지를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던 준석이 잠시 후 근처의 은행에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윤재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게에서 쓸 잔돈을 바꿔 밖으로 나온 윤재는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거친 욕설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서서 뒤늦게 자신을 알아본 윤재를 향해 빨리 오라고 손짓한 준석은 잠시 후 욕쟁이 할아버지가 다음 타깃인 윤재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곧바로 다리를 움직였다. 줄곧 참고 있던 그의 입에서 억눌린 욕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총각, 나 교통비가 없어서 그런데 조금만 도와줘.”
조금 전 준석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사를 윤재에게 건네고 있는 할아버지는 어느 샌가 또다시 가련한 표정연기에 몰입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상인 중 누군가가 ‘아이구, 저 양반 또 시작이네.’라고 한소리를 했지만 이미 연기에 들어간 할아버지는 들려오는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윤재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교통비가 없으세요?”
“응, 집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
초라한 할아버지의 행색을 보고서 이것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감한 표정을 지은 윤재가 잠시 후 곁으로 다가온 준석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말에 앞서 윤재의 팔에 감겨 있는 할아버지의 손부터 떼어낸 준석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의 손목을 붙잡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또다시 걸쭉한 욕설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시장상인들 누구도 할아버지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욕쟁이 할아버지와의 거리를 제법 벌여놓은 뒤에야 걸음의 속도를 늦춘 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윤재를 쳐다보았다.
“너 저 할아버지 처음 봐?”
“응.”
운이 좋다고 할까 종종 이곳을 찾는 동안 윤재가 문제의 할아버지와 만난 적은 없었다. 만약 만나기만 했다면 영악한 할아버지에게 있어 선한 인상의 윤재는 당연히 최고의 먹잇감이 되었을 터였다.
“너 앞으로 만나더라도 절대 돈 주거나 하지 마. 저거 다 수법인 거 알지?”
단호하게 느껴지는 준석의 당부에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알아. 내가 애냐? 나이가 몇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걱정 돼. 가게에 오는 잡상인한테도 밥상 차려 주는 게 너잖아. 우리 열세 살 조카보다도 난 네가 더 걱정된다.”
졸지에 열세 살 꼬맹이보다 낮은 레벨로 책정이 된 윤재가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짓자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준석이 잠시 멈춰 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장은 잘 다녀왔어?”
“뭐... 음식 때문에 고생 좀 한 것 빼고는 괜찮았어. 일은 잘 해결됐으니까 내일 출근해서 보고서 올린 뒤에 승인 받으면 당분간은 좀 널널하게 일할 거야.”
“그래? 그러면 일 잘 끝난 데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이따가 버터구이 오징어 스페셜로 구워줄게.”
“스페셜 버터구이 오징어는 뭐가 어떻게 다른데?”
준석이 피식 웃으며 묻자 윤재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근 새로 개발하고 있는 메뉴인데 일반보다 버터 양을 조금 더 늘리는 거야. 대신 양파향이 나는 소스를 첨가해서 느끼한 맛을 좀 덜어주고.”
“그냥 아예 처음부터 신 메뉴 시식해달라고 말을 해.”
“응. 그럼 시식하고 감상 좀 말해줘.”
말이 떨어지자마자 냉큼 말을 바꾸는 윤재를 쳐다보고 웃은 준석이 문득 장보기 구매 목록에 들어 있는 파인애플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장 보고 돌아가자. 스페셜 오징어 구이 시식 좀 해보게.”
“응.”
짧게 대답한 윤재가 앞서 걷는 준석을 따라 싱싱한 과일들로 채워진 가판대 앞으로 향했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 냄새가 오가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유혹하고 있었다.
“어, 준석 형님?”
가게 안으로 들어선 성호가 주방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을 채우고 앉아 있는 준석을 발견하고 힘이 실린 목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꽤나 오래 전이었던 만큼 모처럼 만에 준석을 앞에 둔 그는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준석이 그리 편안한 타입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워낙 낯가림이 없는 성격의 성호는 웬만한 사람을 상대로는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일례로 모두가 어렵게 생각하는 수영을 상대로 한낮도 아닌 새벽에 문자를 날렸던 몇 시간 전의 일은 그의 대범한 성격을 구체적으로 증명해주는 대목이었다.
다짜고짜 들려온 형님이라는 호칭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준석이 접시에 놓인 오징어를 찢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네. 저야 뭐 늘 그렇죠. 준석 형님은요?”“나도 잘 지냈어. 그런데 준석 형님은 뭐야?”
질문을 받은 성호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늘 놓아두던 자리에 놓은 뒤 준석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아, 준석 형님이요? 그냥 그 호칭이 제일 맞을 것 같아서요. 그래도 혹시 다르게 불러지길 원하는 호칭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성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준석이 ‘일단은 그렇게 해. 그럼.’이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딱히 성호에게 어떤 호칭으로 불러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만큼 이제와 달리 대체할 호칭도 떠오르지 않는 그였다.
“성호 왔어?”
“네. 사장님.”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윤재에게 인사를 건넨 성호가 곧바로 테이블에 내려진 접시를 쳐다보았다. 접시를 채우고 있는 건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버터구이 오징어였다.
“오늘은 냄새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코가 좋네. 이건 얼마 전부터 내가 새로운 메뉴로 개발하고 있는 거야. 버터 양을 조금 더 늘리는 대신 양파소스를 곁들여서 많이 느끼하진 않아. 거기에 단 맛도 살짝 나고. 준석아, 어때?”
“응. 괜찮네. 적당히 감칠맛 나게 소스를 잘 만든 것 같다.”
조금 전까지 준석이 찢어 입에 넣고 있던 오징어의 정체를 알게 된 성호가 자신도 손을 뻗어 오징어 다리 하나를 가져갔다.
“성호는 어때?”
어느 정도 맛을 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던 윤재가 적당한 타이밍에서 조심스레 묻자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던 성호가 미소를 머금었다.
“되게 맛있어요. 이건 오늘 당장 내놔도 되겠는데요?”
“그래?”
“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사장님 요리 센스가 엄청 좋으시네요. 처음부터 아예 이 길로 나가셨으면 지금쯤 오성급 호텔 주방장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건 오버야.”
성호의 극찬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된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 대꾸했다.
요리를 하는 게 싫지는 않지만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요리보다는 제대로 미술을 전공하고 싶은 것이 윤재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대단한 화가나 교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명예나 돈의 여부를 떠나 그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건 그렇고 우대리님이 사장님 댁까지 잘 바래다주셨어요?”
“!”
갑작스런 성호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성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응.”
“사장님은 쪽방에 뉘어놓고 가도 된다고 하셨지만 제가 한 번 보니까 너무 좁고 덮을 이불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대리님한테 문자드렸던 거예요.”
진심어린 걱정이 담긴 성호의 말을 들은 윤재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문득 그 사이의 틈을 뚫고 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래다주다니... 너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무슨 일은... 그냥 좀 취해서.”
평소 술에 약한 윤재가 자체적으로 술을 입에 대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준석은 일단 첫 번째 의문을 가슴에 담아둔 채 두 번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대리님은 누구야?”
이번에 준석의 질문이 향한 곳은 윤재가 아닌 성호였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성호가 질문을 받은 즉시 입을 열었다.
“우대리님은 우리 가게에 가끔씩 오시는 손님이에요. 엄청 잘생기신 분인데 몇 번인가 우리 가게에 오셨다가 진상손님도 쫓아주셨어요. 하여튼 되게 괜찮은 손님이세요.”
진심어린 호의가 담겨 있는 대답을 들은 준석이 다시 한 번 질문을 이었다.
“그 손님이 어제 윤재를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네. 아니... 어제가 아니라 오늘 새벽이요. 전에 주소를 안다고 하셔서 주소만 물어볼 목적으로 문자를 드렸는데...”
“성호야.”
수영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오는 상황을 막기 위해 윤재가 중간에 나서자 그런 윤재를 슬쩍 쳐다본 준석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친하길래 새벽에 나와서 널 집까지 바래다 준 거야, 그 사람. 너 나 없는 사이에 친한 친구라도 새로 사귄 거야?”
오늘 아침 전까지 중국에 출장을 가있었던 만큼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요청이 들어왔어도 도움을 줄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보통의 친구 사이에서도 무리가 되는 부탁을 들어준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준석은 아무래도 그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유치하고 더 나아가 치졸한 감정일지 몰라도 그것이 솔직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윤재에게 자신이 모르는,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가까워질 가능성마저 있는 상대가 생기는 것을 당연히도 준석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묘하게 서운한 느낌이 묻어나는 준석의 표정에 윤재는 섣불리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보통이라면 수영을 그저 가게의 손님이라고 적당히 설명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로 이해시키기엔 정황이 너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보통의 손님은 일개 단골가게의 주인을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지 않는다. 어디 손님과 주인의 관계뿐인가, 평범한 친구라도 짜증내며 마다할 상황이었다. 어떻게 머리를 굴려 봐도 상식적으로 일반적인 관계에 대입해서는 결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영과 자신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 지금 윤재가 처해 있는 입장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예전에 잠시 알던 사람이야. 친구라고 하기엔 좀 미묘하지만...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성호가 그쪽에 연락을 한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고서 슬쩍 성호를 한 번 쳐다본 윤재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준석을 완전히 속일 자신은 없는 그였지만 지금은 서툴게라도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 들려온 말로는 상황이 완전히 납득이 되지 않지만 분위기 상 윤재가 이 화제를 이어나가길 원치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준석은 일단 이쯤에서 지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윤재는 늘 이 자리에 있을 테고 자신 역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않을 테니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앞으로도 언제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였다.
“이 소스엔 양파 말고 뭐가 들어가?”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얼굴을 조금은 푼 윤재가 곧바로 대답했다.
“휘핑크림이랑 후추랑...”
“후추도 들어가?”
“응. 일단 제일 좋은 맛을 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해 봤어.”
이어지는 윤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조금 전 들었던 ‘우대리’라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좀처럼 머릿속에서 깨끗이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준석은 그래도 중간 중간 윤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
새벽에 술에 취한 윤재와 그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간 남자.
그 장면을 스치듯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진 준석은 잠시 후 세 사람 분의 커피를 타오겠다며 일어서는 윤재를 향해 확인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윤재를 향해 준석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혹시 앞으로 무슨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날 불러. 다른 사람 말고.”
갑작스러운 동시에 무척이나 진지한 준석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러다 와서 나 잘 때까지 자장가 좀 불러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불러줄게.”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윤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줄곧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호였다.
연인 사이에서나 오갈 법한 달콤한 대사와 달리 결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준석의 표정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성호는 잠시 후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온 준석으로부터 ‘너도 윤재한테 일 생기면 나한테 전화해.’라는 말을 듣고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준석 형님의 핸드폰번호는 모르는데요...”
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벗어두었던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준석이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본 뒤 다시 성호에게 시선을 던지고 말했다.
“번호 불러.”
서늘한 목소리로 내려진 명령을 듣고서 손에 들고 있던 오징어를 접시에 내려놓은 성호가 짧은 헛기침을 한 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준석의 이름 뒤에는 형님이라는 호칭이 붙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