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42화 (42/66)

42.

곤혹스러워하는 윤재의 태도를 확인하고서 그가 지금 바깥에 와있는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수영이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신발 들고 어디 옷장 안에라도 들어가 있을까?”

단순한 농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나름 진지한 목소리의 질문을 받고서 잠시나마 그쪽의 방법도 선택지에 넣어본 윤재는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해결방법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인정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단순히 수영의 존재를 숨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조금 전 일부의 바람을 타고 흘러든 연기로 인해 거실에 남아 있는 담배 냄새만 해도 비흡연자인 윤재로선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설마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지금 윤재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자신을 찾아온 준석을 계속 바깥에 방치해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시 한 번 수영과 시선을 교환한 뒤 무거운 마음으로 손을 뻗어 문을 연 윤재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준석을 쳐다보았다. 보통 때 같으면 웃으며 인사를 건넸겠지만 지금 심리 상태로는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었다.

“샤워라도 했어? 문 여는데 왜 이렇게 뜸을 들...”

먹을거리가 잔뜩 든 비닐봉지를 든 채로 신발을 벗으려던 준석이 문득 현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낯선 구두를 시야에 들이고 중간에 말을 멈췄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구두는 일단 사이즈부터가 윤재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조금 전 현관 안에 들어선 것과 동시에 희미한 담배 냄새를 인식했던 준석으로 하여금 지금 이 집에 자신이 모르는 ‘낯선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일단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거실 안으로 들어선 준석이 예상대로 눈에 들어온 낯선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제법 큰 사이즈의 남성용 구두와 흐릿한 담배 냄새를 통해 상대가 ‘남자’일 것을 추정하고 있긴 했지만, 정작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눈에 띠는 남자였다.

회사 내에서 최장신 축에 드는 자신보다도 몇 센티는 더 커 보이는 키에 모델처럼 늘씬한 체형을 하고 있는 상대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묘하게 이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의 미남이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기본적인 인사치레도 없이 마주서 있는 수영과 준석 사이에는 누구라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명백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낯선 상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준석의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한창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수영의 입장에서 역시 늦은 시간에 약속도 없이 불쑥 윤재의 집에 들이닥친 불청객의 존재가 가시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야? 연락이라도 먼저 좀 해주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말에 잠시 동안 수영과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거둬낸 준석이 천천히 윤재를 돌아보았다. ‘이 남자, 누구야?’라고 윤재를 향하고 있는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준석의 시선을 받고 슬쩍 수영을 한 번 쳐다본 윤재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쪽은 제 친구인 이준석이에요. 준석아, 이쪽은...”

“예전 윤재가 다니던 회사에서 일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우수영입니다.”

수영과 자신의 관계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를 두고 마지막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던 윤재가 뜻밖에 중간에 가르고 들어온 수영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느끼는 와중에도 어쨌거나 윤재와 아는 사이인 상대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수영과 시선을 마주한 준석이 ‘이준석입니다.’라고 형식적인 한 마디를 건넸다. 당장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윤재와 같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있는 건 눈앞의 낯선 남자가 결코 이르지 않은 시간에, 그것도 윤재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보통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이 한낮이거나 혹은 상대가 좀 더 후덕한 인상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러나 지금 준석이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이상할 만큼 강한 기를 두르고 있는 남자로 어떻게 봐도 윤재와의 접점은 없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는 그의 존재는 자연스레 준석으로 하여금 현 상황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들고 있었다.

“윤재와 많이 친하신가 보네요. 이렇게 같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실 정도면.”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말투가 나온 직후 준석이 쓰게 웃었다.

이렇게 속 좁은 모습을 윤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윤재에게 다른 누군가를 소개 받으며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하는 일을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지금 스스로가 취하고 있는 태도에 조금은 당혹스런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웃음을 드리우고 있는 준석을 잠시 서늘한 눈으로 관찰하듯 지켜보던 수영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그 쪽 만큼은 아닐 겁니다. 만약 내가 밤에 약속도 없이 들이닥치면 윤재가 이렇게 선뜻 문을 열어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윤재를 쳐다본 수영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다 이내 고개를 돌리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곧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를 깨끗이 걷어냈다.

좋지 않은 감정과는 별개로 수영은 지금의 상황을 나름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째서 윤재가 자신과 친구의 만남을 두고 이렇듯 난감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 성격 상 커밍아웃은커녕 과거 자신과 있었던 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있었을 윤재로서는 지금 자신의 존재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느껴지고 있을 거라는 걸 수영은 충분히 인식하는 동시에 이해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한 반감을 드러내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수영 역시 매한가지였지만, 어쨌든 준석이 윤재의 친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머릿속에 떠올린 그는 오늘은 이쯤에서 자신이 먼저 물러나주는 것이 윤재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몸을 돌려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난 이만 갈게. 아까 전에 나누던 얘기는 나중에 다시 이어서 해.”

재킷을 몸에 걸치며 그렇게 말하는 수영을 쳐다본 윤재가 조금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로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대답했다.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불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는 윤재는 한시라도 지금의 이 어색한 상황을 종료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직접적인 눈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먼저 자리를 피해주려는 수영의 행동이 그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 친구 두 분이서 즐겁게 시간 보내세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비교적 정중한 존댓말을 사용한 수영이 짧은 인사를 남기고 준석의 곁을 스쳐 지나려는 순간이었다.

“혹시 얼마 전에 취한 윤재를 집에 데려다준 게 당신입니까?”

형식 상 혹시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이미 준석의 마음 안에는 확신이 서 있었다.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그대로 걸음을 멈춘 수영이 고개를 돌려 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준석의 질문을 받은 당사자보다 더 놀란 건 줄곧 두 사람의 곁에 서있던 윤재였다.

“준석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앞으로 나서는 윤재를 슬쩍 한 번 쳐다보고서 다시 수영에게 시선을 던진 준석이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일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처음 성호로부터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그 얼굴을 모르는 낯선 ‘우대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느꼈던 그는 이제야 분명한 실체를 확인한 지금 한층 더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성호는 우대리를 두고 굉장한 미남이라고 했고, 공교롭게도 굉장한 미남인 눈앞의 남자의 이름은 우수영이었다. ‘우’라는 성씨만큼이나 이 정도의 미남은 흔치 않다는 현실에 대입해 볼 때 굳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어째서 이 남자일까. 그간 사회생활을 해오며 여러 사람을 만나온 준석은 소문의 ‘우대리’를 마주한 지금 적어도 한 가지는 마음으로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소문의 ‘우대리’는 과연 자신의 예상대로 윤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타입의 남자라는 것을.

사실은 그랬다. 지금의 준석은 수영을 상대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을 느끼고 있는 동시에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냉정한 이성에 대입해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솔직담백하게 말해 준석은 언뜻 보기에 결함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 남자가 윤재의 곁에 있는 것이 싫었다. 그가 윤재와 함께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주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이 일시에 엄습해왔다. 만약 수영이 좀 더 평범한 인상이나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를 상대로 이 정도의 적대심을 느끼진 않았을 거라고 준석은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윤재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해서 윤재의 곁에 있는 모든 남성을 그런 쪽으로 의식해 본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준석이었다. 그러니 이건 분명 예외적인 일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싫었다. 어린애 같은 독점욕이니 질투심이니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준석은 결코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품고 있는 눈앞의 남자가 더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라도 윤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명백한 적개심이 담겨 있는 준석의 질문을 받은 뒤로 얼마간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수영이 현관으로 향해 있던 몸을 천천히 돌려 준석을 마주했다.

“그렇다면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한참 만에 열린 수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뚜렷한 대답이 아니었지만 이미 부정을 당하지 않은 시점에서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사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해도 이미 드러나 있는 정황상 그의 대답을 순순히 믿지는 않았을 준석이었다.

“윤재를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앞으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직접 수고하지 마시고 저한테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낸 준석이 명함을 찾기 위해 지갑을 펼치자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영이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는 윤재의 친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을 향한 준석의 무례한 태도를 적당히 넘기고 있었던 수영도 이제 조금씩 자제심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수영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무엇이 준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하다 언뜻 뭔가를 머릿속에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수영이 알기로 보통의 친구들-그것도 성인 남자들 간의-사이에서 이 정도로 한 쪽이 한 쪽을 대상으로 뚜렷한 소유욕을 주장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다시 말해 지금 수영이 준석에게서 느끼고 있는 태도는 조금만 과장해서 말하면 연인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할 법한 행동과 꼭 닮아 있었다. 물론 굳이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자면 단순히 자신의 소중한 지인을 어딘가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인간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 가능성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순식간에 자신을 일방적인 경계의 대상으로 낙인찍은 준석을 상대로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없게 된 수영은 그럼에도 자신 앞에 내밀어진 명함을 일단은 받아들었다. 윤재와 친한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

“일단 명함은 받아두겠습니다만 내가 수고를 할지 남한테 부탁을 할지는 내가 알아서 결정합니다. 윤재씨와의 일도 나와의 문제고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간섭할 수 있는 선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정중하되 바짝 날이 서있는 수영의 말에서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읽어낸 준석이 한층 더 표정을 굳혔다. 그는 지금 모처럼 머릿속에 두고 있던 상대와 마주한 이 기회에 분명하게 일을 처리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준석아, 그만해. 그 날 일방적으로 도움 받은 건 난데 여기서 이런 얘기가 나오면 내 입장이 더 난처해지잖아.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윤재가 중재를 위해서 나섰다는 걸 알면서도 수영은 지금 들려온 윤재의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지금 준석을 상대로 한 윤재의 태도가 마치 화가 난 남편을 달래기 위해 급하게 약속을 내놓는 아내의 모양새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윤재의 회유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준석은 쉽사리 단호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처음 성호로부터 낯선 남자의 존재에 대해 듣고 난 뒤로 줄곧 그것과 관련된 생각을 늘 머릿속 한켠에 넣어두고 있었던 그는 지금 스스로가 적지 않게 감정적이 되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여기 제 친구는 많이 순진한 녀석이라서요, 혹시라도 괜히 이상한 사람한테 걸려서 피해나 입지 않을지 친구로서 걱정이 되서 말입니다.”

아제 아예 대놓고 적개심을 내보이는 준석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진 수영이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대상이 된 건 불쾌하지만 지금 막 들려온 준석의 말에는 자신 역시 어느 정도 동감하고 있었다. 윤재가 순진하다는 것도, 그가 이상한 놈한테 걸려서 해를 입는 게 걱정이 된다는 것도. 그러나 결과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윤재를 두고서 마치 어린 여동생을 걱정하는 오라버니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다 큰 남자끼리 친구면 친구답게 선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이거 뭐, 친구 뺏기기 싫다고 막무가내로 투정부리는 애도 아니고. 아니면 뭐죠, 혹시 그 친한 친구를 상대로 혼자서 다른 마음을 품고 있기라도 한 건...”

그 순간 갑자기 얼굴 앞으로 날아온 주먹을 재빠른 반사 신경을 발휘해 손으로 막아낸 수영이 이제 반대로 금방이라도 반격에 나설 듯한 태세를 취하자 윤재가 급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그만하세요! 준석이는 제 가장 친한 친구예요!”

“김윤재, 비켜!”

“준석이 너도 이러지마!”

윤재의 커다란 목소리가 좁은 거실에 울려 퍼진 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듯한 태세를 취하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힌 끝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자세를 풀었다.

“준석이는 저한테 형제나 다름없는 가장 소중한 친구예요. 그러니까 말... 가려서 해주세요.”

다시 한 번 윤재의 단호한 말이 이어진 것과 동시에 준석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강하게 친구의 편을 드는 윤재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놀란 기분이 된 수영은 조금 전과 비교해 미묘하게 굳어져 있는 준석의 얼굴을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상 앞에서 계속 싫은 소리를 듣다가 뒤늦게 한 번 쏘아붙였을 뿐인데 졸지에 소중한 친구를 해하려하는 악당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굳이 여기서 윤재의 입장을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 그는 이쯤에서 자신이 먼저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한 차례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한 말은 실언이었어요. 잠시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말이었으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분 나쁠 만큼 정중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 수영을 가만히 쳐다보던 준석이 이내 고개를 돌려 거실 벽 어딘가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다. 사실 지금 그의 귀에 수영의 말은 제대로 전달되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조금 전 윤재로부터 들었던 말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준석을 잠시 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슬쩍 윤재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 순간 파악하기 힘든 애매한 표정을 지은 윤재가 이내 어색한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수영의 입장에선 이대로 두 사람을 두고 혼자서 떠나려니 불편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남아 같이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이제라도 화해하고 셋이서 사이좋게 포커라도 칠 게 아니라면. 윤재를 향한 준석의 태도가 어딘가 수상쩍긴 해도 윤재가 그를 향해 저렇듯 단단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한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일은 발생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그나마 바닥까지 가라앉기 직전에 있는 수영의 기분을 조금은 건져 올려주고 있었다.

“갈게. 나중에 봐.”

그 말을 끝으로 냉정히 몸을 돌려 현관문을 나서는 수영의 뒷모습을 뒤늦게 윤재가 눈으로 쫓았다.

사실은 윤재라고 모를 리 없었다. 조금 전 처음 두 사람이 마주한 이후 사실 상 먼저 시비를 건 쪽이 준석이라는 것도, 수영이 그 대단한 성격에 꽤나 인내심을 보였다는 것도 그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마치 일시적으로 성격이 뒤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전의 준석이 수영을 상대로 너무도 공격적이었던 반면 수영은 뜻밖에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도. 거기에 하필이면 몇 시간 전의 수영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골라 담았던 주방용품의 가격을 대신 지불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그 무거운 것을 이곳에 옮겨주는 수고까지도 해주었던 만큼 이제 막 현관문을 나선 수영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했던 윤재의 마음은 아무래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너...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수영이 떠나고 얼마의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먼저 목소리를 낸 윤재가 아직 그 자리를 지킨 채 서있는 준석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로 대놓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던 준석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윤재의 입장에선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었다. 만약 수영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일을 알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조금 전이 첫 만남으로 당연히 수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할 준석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윤재의 질문을 받은 뒤에야 그에게 시선을 던진 준석이 천천히 점퍼를 벗어 소파에 내려놓고 자신도 그 옆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혹시 술 마셨어?”

윤재의 질문을 들은 것과 동시에 한쪽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은 준석이 물었다.

“냄새 나?”

“아니, 냄새는 안 나는데...”

“아까 영훈이랑 미소 만나서 좀 마셨어.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이 들어간 상태라면 조금 전 준석이 취했던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윤재였다. 확실히 준석은 체질적으로 술에 강한 편이고 당장 보기에도 그에게서 취한 기색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고 해서 정말로 조금도 취하지 않은 상태인 건 아니라는 걸 윤재는 그간 가게 내에서 겪은 몇 번의 일들을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까 내가 좀... 무례하기는 했지?”

이제야 간신히 냉정한 이성을 되찾은 준석이 그렇게 묻자 그 사이 천천히 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은 윤재가 짧은 한숨을 앞세워 대답했다.

“그래, 사실 좀 놀라긴 했어. 내가 아는 이준석이 아닌 것 같아서.”

“그 정도였어?”

“응. 꼭 싸우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무섭게 달려들더라. 너 실제로 아까 주먹까지 날렸잖아. 앞으로는 그러지 마. 그 사람 싸움 엄청 잘 하거든.”

윤재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머금은 준석이 문득 몸을 일으키더니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비닐봉지 속에서 과자 한 봉지와 캔 맥주 두 개를 꺼내 들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마실래?”

“아니.”

예상하고 있던 대답을 들은 준석이 들고 있던 캔 맥주 중 하나는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신 분의 맥주만 뚜껑을 땄다. 그 사이 윤재가 준석이 소파 위에 놓아둔 스낵의 봉지를 뜯어서 꺼내 먹기 좋게 펼쳐주었다.

“술 마시려고 온 거야?”

“뭐 겸사겸사. 안부도 확인하고 얘기도 하고. 주말이니까 밤새 마시면서 떠들려고 왔지. 오랜만에 여기서 자고 가고 싶기도 했고.”

“.......”

“아까 그 남자가 전에 성호가 말한 우대리야?”

또다시 수영의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힌 윤재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을 만들고서 대답했다.

“응.”

“밖에 세워져 있던 외제차도 그 남자 꺼지?”

“...응.”

예상한대로의 대답에 칫-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대꾸를 한 준석이 손에 든 캔을 입으로 가져가 순식간에 몇 모금을 목 안으로 흘러 넘겼다.

구두부터 비싸 보이더니 외제차에, 그러고 보니 아까 입고 있던 옷도 무지 좋아 보이긴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드는 준석이었다. 물론 굳이 그런 부속품이 없더라도 충분히 여자들한테 먹혀들어갈 만한 미끈한 면상이긴 했지만.

“아까 그 남자가 너랑은 일과 관련해서 아는 사이라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야? 보통 샐러리맨 월급으로 저런 외제차는 끌고 다닐 수가 없는데 혹시 무슨 대한민국 올해의 보험왕이라도 돼?”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영의 이야기에 윤재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영과 있었던 일을 속 시원히 밝힐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그로서는 원치 않아도 준석에게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 수영은 윤재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고, 이제부터는 윤재가 그것에 맞춰 거짓말을 이어가야 했다.

“원래 부잣집 사람이야.”

“아... 그래? 어쩐지...”

윤재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수긍한 준석이 다시 맥주 네 모금을 목 안으로 넘겼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완전히 취한 채로 잠들어버리고 싶었지만 알코올에 강한 자신의 체질은 이런 때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준석이 너 아까 그 사람한테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야?”

벌써 가벼워진 캔을 한 손에 든 채로 잠시 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준석이 문득 들려온 질문에 따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몇 초간은 여전히 멍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그가 질문을 파악한 것과 동시에 쓰게 웃었다. 사실 윤재의 입장에선 충분히 이상하게 여겨질만 한 행동을 했다는 걸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흥분해서 쏘아 붙이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조금 전 수영이 한 말이 틀리지 않음을 준석은 씁쓸한 기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다 큰 이 나이에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싫다고 해서 짜증을 내다니, 이해를 바라는 게 무리였다. 사실 자신도 윤재가 모르는 사이 다른 친한 친구들과 잘만 어울리고 다녀온 사실을 생각하면 아까 전 수영이 입 밖에 냈던 말들을 마냥 비웃음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혹시 준석이 너, 그 사람이랑 나 모르는 사이에 만난 적 있었어?”

“아니.”

“.......”

“그냥... 너한테 나보다 더 친한 사람이 생긴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유치하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준석의 대답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있어서 제일 친한 친구는 너야. 아까도 말했잖아.”

들려온 윤재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낀 준석이 손에 들려 있는 캔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아까도 말했지...”

“.......”

“.......”

“내가 세상이 반쪽이 나도 믿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너야.”

이어 들려온 윤재의 말을 들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준석이 잠시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기쁜데. 너한테 이 정도로 신뢰받고 있다니. 그럼 아까 그 사람, 우대리도 일찍이 소개 좀 시켜주지 그랬어. 괜히 나 혼자서 네가 이상한 놈한테 걸린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잖아.”

절반의 농담과 절반의 책망을 담아 말한 준석이 이내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도 아닌 윤재를 상대로 이런 소인배 같은 태도를 취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지만 아까 전 ‘형제와도 같은 소중한 친구’라는 말을 듣고 난 뒤로 좀처럼 기분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현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너무도 힘겹게 느껴지고 있는 그였다.

“미안. 아무래도 술기운이 좀 돌기 시작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온다. 이해 좀 해줘.”

“괜찮아.”

윤재의 대답을 듣고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준석의 기분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가장 친한 친구’, ‘형제와도 같은 친구’,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서 온갖 좋은 말은 다 들었는데도 정작 준석의 마음은 아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그 말들이 미리부터 자신의 진심을 차단하는 단단한 방어막처럼 느껴져서, 부탁이니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애원처럼 들려와서 준석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윤재야.”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린 윤재가 고개를 돌려오자 준석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너무 날 믿지 마.”

“.......”

의미를 알 수 없는 준석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지금 준석이 스스로가 말한 대로 어느 정도 취해 있는 상태인 모양이라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린 윤재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준석을 돌아보았다.

“자고 갈 거지? 이불 깔아놓을게.”

“...응.”

대답을 듣자마자 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조금 전 윤재의 몫으로 꺼내놓았던 새 캔을 딴 뒤 입으로 가져갔다.

이 와중에도 준석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 보았던 수영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니면 뭐죠, 혹시 그 친한 친구를 상대로 혼자서 다른 마음을 품고 있기라도 한 건...’

문득 귓가에 떠오른 수영의 말이 다시 한 번 준석의 가슴과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그저 단순한 비꼼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아까 전 들었던 수영의 단호한 말투는 준석으로 하여금 마치 몸속 깊은 곳을 난도질당하는 듯한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었다.

‘빌어먹을 자식.’

조금이나마 더러운 기분을 지워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손에 쥔 맥주 캔을 일시에 깨끗이 비워버린 준석이 그 사이 이불을 깔아놓고 돌아온 윤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억지로 표정을 바꾸었다.

이 와중에도 잔뜩 걱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이 이 순간만큼은 야속하고도 미웠다. 늘 그렇듯 다정한 친구의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가.

남의 속도 모르는 채 ‘술 너무 마시지 마. 나중에 머리 아파.’라고 걱정스럽게 말하는 윤재를 향해 스치듯 쓴웃음을 지어보인 준석이 빈 캔을 흔들며 말했다.

“오랜 만에 네가 만들어주는 오므라이스 먹고 싶다.”

뜬금없는 준석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재빨리 머릿속으로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떠올려본 윤재가 말했다.

“그럼 햄이랑 맛살 좀 사와야겠는데...”

“그냥 있는 재료로 만들어줘. 부탁하는 주제에 군말 않고 맛있게 먹을게.”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준석을 보고서 다행히 이제 그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하다고 생각한 윤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준석이 너 피망 좋아하지? 여기 보니까 많이 남아 있다!”

“아, 그래? 그럼 아예 밥 반, 피망 반으로 만들어줘!”

주방에서 들려온 윤재의 외침에 맞춰 자신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대꾸를 해준 준석은 곧이어 들려오는 덜컹거리는 소음을 귀에 담은 채 천천히 등받이 깊이 몸을 기댔다.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우울한 생각들은 이제 곧 앞에 대령될 따끈한 오므라이스에 대한 기대로 잠시나마 묻어두기로 했다.

이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현명한 판단이라고 준석은 믿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