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지인호씨, 그리고 내가 이 부분 고치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보니까 하나도 안 고쳐져 있네?”
“아... 죄송합니다! 수정할 부분을 따로 체크해두었는데도 제가 중간에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지금 가져가서 수정한 뒤에 곧바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하여튼... 대체 지적을 몇 번을 해야 알아듣는 건지. 이래도 내가 말 많은 과장이라 밉다고 뒤에서 투덜대겠지.”
“아닙니다, 과장님. 제가 어떻게 그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뒤에서 욕하는 것까지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일이나 좀 똑바로 해줘. 알겠어?”
인호를 제자리로 돌려보낸 양과장이 몇 개월 사이 휑해진 정수리를 벅벅 긁고서 사무실이 떠나가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있는 자들이 목격하기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한 차례의 폭풍이었지만 사실 많은 부하직원을 단속하며 끊임없이 그들의 실수를 지적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양과장으로선 몇 번이고 반복되는 상황이 충분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나마 조금 전의 호통도 평소의 수준과 비교하면 매우 얌전하게 지나간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요한 사무실에 울려 퍼지고 있는 빠른 타자소리를 통해 제자리로 돌아간 인호가 열심히 수정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직원들은 각자의 일에 임하는 중간 이어서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양과장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 인호처럼 자신의 이름이 불리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 섞인 우려가 지금 양과장의 책상에 놓여 있는 결재서류를 작성한 몇몇의 직원들로 하여금 좀처럼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학창 시절 모르는 문제를 앞에 두고 교사로부터 자신의 번호만은 불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학생의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그렇게 불편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신중하게 서류를 검토하던 양과장의 눈썹이 문득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한 직원들은 이번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누구일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추측에 들어갔다. 물론 동시에 자신의 이름만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잠시 후 평소답지 않게 묘하게 시간을 끌며 고심을 하던 양과장의 입에서 마침내 다음 지적의 대상이 불리워진 순간, 사무실 안은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양과장의 입에서 호명된 건 다름 아닌 ‘우대리’였기 때문이었다.
보통이면 수영의 이름이 나온 시점에서 또다시 그가 칭찬의 대상으로 지정이 된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직원들은 그러나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양과장의 심각한 표정을 통해 아무래도 그런 긍정적인 방향의 상황은 아닌 게 분명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설마 하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서 이름을 불린 수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양과장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일시에 많은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그의 얼굴은 눈썰미 좋은 사람만 간신히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굳어 있는 상태였다.
“우 대리, 저기 말이야... 내가 몇 번 반복해서 검토해 보니까 이쪽 부분 통계에 실수가 있는 것 같은데... 직접 확인 좀 해주겠나?”
인호를 상대로 호통을 칠 때와 달리 좀처럼 스스로의 생각에 확신을 품지 못하고 있는 태도로 조심스레 말을 건넨 양과장이 이제 막 건네받은 서류를 잠시 동안 신중하게 살피던 끝에 고개를 든 수영을 긴장된 얼굴로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뭔가 착오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직원들은 뜻밖에 깨끗이 잘못을 시인하는 수영의 말을 듣고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극히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한 수영이 일과 관련된 실수를 지적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그...래. 수정 좀 해주게.”
실수를 지적한 당사자조차 당황하고 있는 분위기에서 조용히 서류를 들고 제자리로 돌아온 수영은 곧바로 작성하고 있던 파일을 뒤로 미뤄두고 실수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파일을 새로 불러냈다.
사실 그 자체로만 보면 그다지 큰 실수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통계의 숫자와 관련된 부분인 만큼 그 작은 균열로 인해 전체의 정확성을 의심케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터라 실수가 드러난 부분의 통계가 들어간 파트는 전부 최소 한 차례 이상씩 재검토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한동안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주변의 시선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서둘러 검토 작업에 착수한 수영은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끝에 다행히 조금 전 지적받은 부분 외에 다른 실수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한 차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과장으로부터 실수와 관련되어 호명을 당한 것은 분명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순순히 수긍이 되기도 하는 수영이었다.
실수가 나온 이유에 대해서라면 곧바로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며칠 전 윤재의 집에서 만났던 이준석이라는 남자의 존재로, 짧지만 분명한 임팩트가 남은 그와의 만남이 있었던 이후 수영은 머릿속에서 그의 존재를 깨끗이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최근에는 일에 집중하는 것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에는 일단 상대가 윤재의 친한 친구라는 점을 인정해 최대한 자신 쪽에서 참는 방향으로 상황을 넘겼었지만, 혼자가 된 이후 다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릴 때면 불쾌감과 더불어 적지 않은 분노가 차올랐다. 만약 상대가 윤재와 관련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윤재가 그 자리에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까지 일방적으로 성질을 죽이지는 않았을 수영이었다. 이제껏 안하무인에 가까울 정도로 일과 관련되지 않는 한 누구와 상대하든 철저히 자신의 기분을 우선시 해 행동해 왔던 그로선 그야말로 가진 인내심의 한계를 스스로 실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준석.
마치 윤재가 자신의 것인 것처럼, 그가 자신의 허락 없인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결국엔 남남일 뿐인데 그의 말투에서 윤재를 도와주고 말고 하는 것을 일일이 자신에게 허락받아야 한다는 뉘앙스가 느껴졌을 때는 당장 화가 난다기 보다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던 수영이었다. 마음 같아선 대놓고 비웃음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그 곁을 지키던 윤재를 의식해 그와 같은 최소한의 반응마저 조용히 삼켰던 수영은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 안에서 당시 느꼈던 불쾌한 기분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껏 준석이 윤재와 가까운 친분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영의 기분은 불편해졌지만 그보다 더 그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그 사이에도 그가 윤재와 함께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른다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상상이었다.
윤재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한 건 아니었다.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 정도로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는 않은 수영이었다. 그 증거로 실제 그는 윤재의 곁에 가장 많은 시간 동안 붙어 있는 걸로 봐온 성호를 상대로 그 어떤 불쾌감이나 적대심도 품고 있지 않았다. 적대심은커녕 오히려 자신이 없는 사이에도 꾸준히 곁에서 윤재를 도와주고 있는 성호에게 고마운 기분마저도 느끼고 있는 그였다. 윤재에게 친절한 사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하등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준석은 달랐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와의 만남에서 윤재를 향한 어딘가 개운치 않은 감정을 읽어냈던 수영은 자연스레 그 날 이후로 그의 존재와 관련해 불편한 생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감이 지나치게 예민했던 탓이길 바랐다. 윤재를 향한 생각이 지나치다보니 별 거 아닌 일에도 혼자서 크게 반응했던 것이길. 그러나 당시의 일을 좀 더 세밀하게 조각내어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수영은 자신의 예감이 점점 더 확실하게 굳혀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땠든 그렇다고 해도 사적 감정을 일에까지 끌어들이다니 수영은 이제껏 회사 안에서 잘 유지해오던 페이스를 놓쳐버린 스스로를 두고 더없이 한심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래서야 얼마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퇴근 뒤에 늘 술을 퍼마시다 일을 망친 부하직원을 일방적으로 욕할 수도 없게 되었다.
혹시나 또 다른 부분에서 실수가 발견될지 모른다는 생각 하에 나머지 부분들도 일일이 신경을 써서 검토 작업을 마친 수영은 마침내 양과장으로부터 수고했다는 말을 들은 뒤 제자리로 돌아와 가볍게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져 주변의 직원들도 일제히 점심식사를 하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우대리님.”
평소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일원 중 한 명인 영진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책상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별로 상관없어. 어디든.’이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식욕 자체가 없었지만 어쨌든 퇴근 전까지 일을 하려면 배를 채워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억지로나마 그를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 함께 식사를 하는 다른 멤버인 세민이 어느 샌가 재킷에 코트까지 걸치고서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우대리님.”
자신과 똑같은 질문을 내놓은 세민을 슥 한 번 쳐다본 영진이 수영을 대신해 대답했다.
“우대리님은 어디서 먹든 상관없으시데.”
“아, 그래? 그럼 오늘은 요 앞 ‘원조 할매 설렁탕집’에 가서 먹을까? 우대리님, 어떠세요?”
또다시 질문을 받은 수영이 재킷을 걸치며 대답하려던 순간 문득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를 듣고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후 액정에 떠있는 글자를 확인한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 위로 의아한 감정이 떠올랐다.
발신자는 뜻밖에도 모친이었다.
최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모친과의 통화를 짧게 안부를 주고받는 선에서 끊어온 수영으로서는 주말도 아닌, 평일 회사에 출근해 있는 대낮의 시간에 걸려온 모친의 전화가 당연히도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외출 채비를 마친 채로 대기하고 있는 영진과 세민에게 고개를 돌린 수영이 잠시 기다려달라는 눈짓을 보낸 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나다. 수영아.]
예상하고 있던 목소리를 들은 수영이 ‘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라고 침착하게 질문을 건넸다.
[응, 사실 내가 지금 네 회사 앞 식당에 와 있거든. 시간 상 너도 이제 슬슬 점심 식사를 할 때가 됐잖니? 잠깐 얼굴이나 볼까 해서. 이쪽으로 좀 와줄래?]
갑작스런 모친의 말을 듣고 조금 당혹스런 기분을 느낀 수영이 짧은 침묵 뒤 ‘잠시만요.’라는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아봤다. 통화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본 그는 미안하다는 말로 일단 두 사람을 먼저 보냈다.
가뜩이나 일로 바쁜 상황에서 잠시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에마저 모친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없이 불편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쨌든 아들 된 입장에 있는 수영은 일부러 회사 앞까지 찾아온 모친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게의 이름을 전달받고 곧 나가겠다는 대답을 했다.
“어, 대리님 혼자 식사하러 가시는 거예요?”
엘리베이터에 오른 수영이 안에 타고 있던 동료들 중 한 사람이 건네 온 질문에 ‘밖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서.’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 대답만으로 애인이니 어쩌니 하는 농담 섞인 추측성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지만, 이제 곧 모친과 마주할 생각에 오로지 그쪽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수영은 뒤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들려오는 말들을 깨끗이 무시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르자마자 주변의 동료들과 식사를 잘 하라는 형식적인 짧은 말을 주고받은 뒤 서둘러 로비를 가로질러 회사 건물을 빠져나온 수영은 조금 전 모친이 통화로 알려준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장소인 만큼 굳이 차를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의 이 상황은 분명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모친과 좋은 모자 관계를 유지해온 수영이 의식적으로 그녀와의 통화를 피하기 시작한 건 기껏해야 최근 들어서의 일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재에 대한 마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그와 동시에 주변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할 즈음에서였다.
지금까지는 누구와 관계를 가지든 결혼과는 별개라는 인식을 해온 수영은 그와 같은 생각에 기인해 모친이 주선하는 맞선 자리를 순순히 받아들였었고, 그 덕분에 모친과 수영 두 사람 사이에 특별히 불편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아들이 마지막에 결혼과 관련되어 제대로 된 선택만 한다면 그 때까지 그가 누구와 만나든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 것에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는 것이 모친의 일관된 입장이었던 만큼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순식간에 변해 수영이 이제 더 이상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이후로 이제껏 좋은 분위기를 유지해왔던 모자간에는 급격히 좋지 않은 기운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오늘 모친이 직접 이곳에 찾아온 이유라면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 수영은 그렇기 때문에 약속된 장소로 향하는 동안 잠시라도 굳은 얼굴을 풀 수가 없었다. 모친의 뜻을 굳이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밖에 없게 되었을 만큼 수영은 어느 샌가 윤재에게 진심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다른 한 면으로 누군가와 새로운 만남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런 일 따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윤재의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그럴 자신이 있고 말고의 여부를 떠나 아예 처음부터 깨끗이 그러고 싶은 마음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수영이었다.
한창 손님들로 넘쳐날 시간대임에도 워낙 메뉴의 가격대가 높아 드문드문 자리가 비어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중 문득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친의 건너편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여성이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서 미간을 좁혔다.
이쪽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건 뒷모습뿐이었지만 굳이 당장 얼굴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라면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영이었다. 정황 상 몇 가지가 맞아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던 수영은 점심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고 일단은 모친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영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 다가가자 그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온 모친이 곧바로 얼굴 위로 미소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모친과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수영이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서있는 여성을 돌아보았다. 수영의 시선이 그녀에 향하기 무섭게 모친이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인사하렴. 이쪽은 진아름씨라고 xx건설 전무님의 막내따님이란다. 아름씨, 이쪽이 전에 말한 내 둘째 아들인 수영이에요. 현재 이 앞에 있는 xx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죠.”
모친의 입에서 짐작하고 있던 말이 나온 순간 수영의 입가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었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건가 하는 생각부터 떠올린 그는 지금 자신과 마주하고서 애써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젊은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인 모양이었다. 얼마 전 휘영에게서 전해 들었던 ‘xx건설 전무의 막내딸로 괜찮은 성격에 미술을 전공해서 지금 유학하고 있는 중이며 귀국한 뒤엔 큰아버지가 대표이사로 있는 광고 회사에 바로 들어가기로 예약되어 있다는 아가씨’가.
휘영이 미리 전한 대로 특별히 눈에 띠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사실 외모가 아주 뛰어난 수준이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무리한 만남을 강행시킨 모친의 행동에 불쾌함을 넘어서 분노를 느끼고 있는 수영은 자신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네 온 아름에게 가장 기본적인 대꾸만을 해주었다. 모친의 입장을 생각하면 여기서 형식적이나마 웃는 얼굴이라도 지어 보여야 했지만, 뜻밖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상황에 놓여 있는 지금으로선 이런 무리한 일을 감행한 모친의 입장까지 친절히 생각해주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지 않은 수영이었다. 그저 순간의 상황을 좋게 좋게 넘어가기 위해 적당히 맞춰 행동을 하다가는 결국 모친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앉자, 수영아. 아름씨는 이쪽으로, 내 옆에 앉아요.”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아름이 마주 앉을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주려는 모친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영이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들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져오는 모친과 시선을 마주하고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지금부터 일이 있어서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다고 하셔서 잠시 얼굴만 뵈려고 온 겁니다.”
“뭐라고? 잠깐만, 수영아.”
“지금 회사에 한창 일이 많아요.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고 가세요.”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친과 아름을 스치듯 한 번씩 쳐다본 뒤 곧바로 등을 돌린 수영은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수영아!”
급하게 자신을 따라서 가게를 나온 모친의 부름에 못 이기는 척 움직이던 다리를 멈춰 세운 수영은 그제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고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가오는 모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신경 써서 단장한 모친은 여전히 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고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늘어진 살도 없이 뒤에서 보면 아가씨로 착각할 만큼 날씬한 몸매를 하고 있는 그녀는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차례씩 쳐다볼 만큼의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의 미모를 물려받은 건 세 아들 중 수영이 유일해서 나머지 아들인 휘영과 재영은 부친을 닮아 평범한 수준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단정한 인상으로 어디 가서 빠질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지만 모친의 특별한 미모를 감안하면 많이 아쉽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세 아들을 한 차례 이상씩 만나본 몇몇 사람들은 장남과 막내아들이 가져가지 못한 모친의 미모 유전자를 차남인 수영 혼자서 독식한 것 같다는 농담 섞인 말을 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모친이 유독 차남을 아끼는 이유가 자신을 쏙 빼닮았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오랜 만에 만나는 모친의 고운 얼굴 위로 명백하게 떠올라 있는 불만의 감정을 읽어낸 수영이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모친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해온 입장에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에 수영이라고 마음 편할 리는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태도야?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저렇게 인사도 없이 남겨두고 오다니, 너 그렇게 경우 없는 애가 아니잖니? 이게 대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한 겁니다. 제 노력이 잘 전달이 돼서 다행이네요.”
“뭐...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모친의 얼굴이 이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본 수영이 뒤늦게 가게를 나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제가 얼마 전에 분명히 어머니한테 이번 맞선자리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이번 뿐 아니라 앞으로도 저한테 맞선 얘기는 꺼내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정중하게 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래.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이번 건은 정말 놓치기 아까워서 그러니 꼭 한 번만 나가달라고 나도 부탁하지 않았니? 내가 오죽하면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겠어?”
“그래서 지금 만족하세요? 결국 고집대로 하셔서 속이 시원하세요?”
“수영아!”
순간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고서 뒤늦게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모친이 잠시 텀을 두고 다시 입을 열려하자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수영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생기면 전 똑같이 이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까 괜한 노력하지 마세요.”
단호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을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바로 앞에 서있는 모친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만 가보세요. 저기 아가씨가 서서 기다리고 있네요.”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모친을 확인한 수영이 ‘다음 주 재영이 생일에 집에 갈 거예요. 그 때 봬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다행히 아름의 존재를 인식한 모친은 더 이상 뒤에서 수영의 이름을 불러오지 않았다.
이로써 한동안은 잠잠해질 터였다.
꽤나 노골적인 거절법이긴 하지만 이편이 모친이나 아름에게도 더 분명한 대답이 되었을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거절의 구실로 만들기 위해 조금 과장하기는 했으나 회사 일이 많은 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조금 전의 말에 굳이 책임지겠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수영은 서둘러 점심을 먹고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중간에 방치하고 온 일을 다시 재개하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다. 특히나 오늘은 상사로부터 실수를 지적당하는 불쾌한 일을 겪기도 했던 만큼 평소보다도 더 일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였다.
사람들로 붐비는 음식점들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던 수영이 적당히 혼자서 배를 채울 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문득 발을 멈췄다.
“.......”
수영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얼마 전 뜻하지 않게 윤재와 함께 찾았던 곳과 같은 브랜드의.
잠시 강한 바람을 맞은 채로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수영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패스트푸드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의 회사원으로 보이는 수트 차림의 사람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띠고 있는 가게 안은 패스트푸드 특유의 기름진 냄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금도 특별히 햄버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달리 먹고 싶은 메뉴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수영은 어차피 혼자 식사를 하게 된 이상 빠르게 먹고 끝낼 수 있는 이점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미리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은 뒤 큼직하게 전면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대충 눈으로 훑은 수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미리 생각하고 있던 메뉴를 입 밖에 냈다.
“치즈버거 세트 주세요.”
카드를 내밀어 결제를 한 뒤 빠르게 주문되어 나온 치즈버거 세트를 들고 창가 쪽의 한 자리를 차지한 수영은 그와 마찬가지로 홀로 식사에 임하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 틈에 껴서 포장을 벗겨낸 치즈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피클과 함께 느껴진 깊은 치즈의 향을 진지하게 음미한 수영이 문득 얼마 전 이 치즈버거를 앞에 두고 윤재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런 게 좋아?’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이제 곧 서른인데도 아직까지 입맛은 크게 변하지 않았나 봐요.’
-‘넌 별로 햄버거 같은 건 안 먹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그러면 전 어떤 걸 먹을 것 같은 이미지인가요?’
-‘주로 채식. 상추나 케일 같은 거.’
-‘전 초식동물이 아닌데요. 특별히 풀 종류를 좋아하진 않아요.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당시 대화에 임했던 윤재의 표정과 말투가 신기할 정도로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간 따로 의식하지 않았었지만 자신이 은연중에 윤재를 초식동물의 이미지에 맞춰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수영은 그제야 깨달았었다. 그러고 보니 얌전한 생김새 하며 유순한 성격하며 윤재는 틀림없는 초식동물의 이미지였다. 물론 초식동물 가운데에는 코뿔소나 하마 같이 성질 포악한 녀석들도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굳이 윤재의 이미지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초식동물을 꼽자면 톰슨가젤이나 토끼일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조금 전 맞선의 예행 차 자신을 찾아온 여자와 모친을 동시에 바람맞혀놓고서 기껏 혼자 치즈버거를 먹으며 한다는 생각이 윤재에 대한 것이라니, 자신도 이제 갈 데까지 간 모양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은 어쨌든 오늘까지 야근을 이어가지 않기 위해 한 시라도 빨리 일을 재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남은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와- 이거 맛있네요. 전에 있던 것보다 더 입에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렇죠? 맛있죠? 이거 저희 사장님이 새로 개발하신 메뉴인데 오늘부터 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거예요.”
“아, 그래요? 근데 진짜 맛있네요. 버터향도 나면서 양파의 달짝지근한 맛도 나고요. 앞으로는 그냥 버터오징어 말고 이것만 주문하게 될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요즘 이거에 중독이 돼서 계속 입에 달고 살고 있어요. 지금도 일하는 중만 아니면 계속 먹고 있을 거예요. 하하.”
이어지는 손님들의 신 메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성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윤재는 한산해진 틈을 타 싱크대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빈 냄비며 그릇들을 씻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서둘러 윤재의 곁으로 다가간 성호가 일단 양팔에 고무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설거지는 제가 할 게요. 사장님은 이제 좀 쉬세요.”
“아냐, 내가 할게. 너야말로 계속 움직이느라 힘들었잖아.”
“사장님처럼 더운 불 앞에서 계속 요리하는 것보다는 서빙 쪽이 덜 힘들어요. 자, 빨리요.”
성호의 완력에 떠밀리다시피 싱크대 앞에서 밀려난 윤재가 잠시 망설이다 고무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득 들려온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주방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어느새 익숙한 자세를 잡고 설거지를 시작한 성호를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손님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어서 오...”
주방을 벗어난 것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먼저 인사부터 건네려던 윤재가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앉은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평소 자주 앉았던 자리를 당연하게 차지하고서 윤재에게 시선을 던져온 건 ‘불편한 만남’이 있었던 날로부터 근 일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수영이었다. 시간상으로 치면 그리 긴 공백은 아니었지만 최근까지 비교적 자주 만남을 가져왔던 탓일까, 정확히 6일 만에 모습을 보인 수영이 이상할 정도로 오랜 만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윤재였다.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네.”
한산한 가게 안을 슬쩍 한 번 둘러본 수영이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자 마저 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간 윤재가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서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대로 한창 손님이 붐비는 시간대를 지나 있는 지금은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손님의 수가 불과 한 시간 전과 비교해 눈에 띠게 줄어들어 있었다.
“잘 지냈어?”
코트에 이어 재킷까지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은 수영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엷은 하늘색의 셔츠 위로 늘어뜨려진 심플한 디자인의 네이비색 넥타이가 무척이나 단정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봤잖아요.”
“최근에 일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있는 게 몇 개월 만의 일처럼 느껴져.”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로 그렇게 말한 수영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윤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주문을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메뉴판에 시선을 던졌다.
“술은 됐고 간단한 식사 좀 할 수 있게 해줄래?”
“아직 저녁 안 드셨어요?”
곧 있으면 아홉시가 되는 시각인 만큼 지금 나온 윤재의 질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회사에 있었어. 중간에 하던 일 끊고 나오는 걸 안 좋아해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놓으려고. 이왕이면 한창 집중되어 있을 때 많이 해두는 게 좋거든.”
이제 완전히 성실한 회사원이 된 수영의 모습에 생경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것이 바람직한 변화일 거라는 생각이 든 윤재는 곧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말한 뒤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수영은 주변에서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 손님을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어 피로한 눈가를 눌렀다.
식사고 뭐고 당장 씻고서 푹 잠을 청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 가며 일부러 자택이 아닌 이곳으로 행선지를 택했던 수영은 조금 전 윤재의 얼굴을 본 순간 우습게도 피로의 상당수가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피로에 찌든 가장이 집에 가서 토끼 같은 자식을 보는 순간 피로가 싹 풀린다는 얘길 하는 심정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정말로 우습게도.
잠시 후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덮고 있던 손을 치워낸 수영이 이내 자신의 테이블 위에 차례로 놓이는 반찬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깻잎무침과 오이소박이, 계란말이, 멸치볶음, 살짝만 부친 두부와 양념장.
중앙 자리를 차지한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건 얼큰한 순두부찌개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반찬들을 전체적으로 눈에 한 번 담은 수영이 그 사이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려는 윤재를 불렀다.
혹시 뭔가 따로 필요한 게 있는 건가 싶은 표정을 짓고서 수영을 돌아본 윤재는 ‘어차피 다른 손님도 없으니까 말동무나 좀 해줘.’라는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며칠 전 요 앞에 새로운 선술집이 거창한 이벤트를 앞세워 오픈을 한 뒤 손님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터라 지금의 이 한산한 상태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가게 문을 닫는 시간까지도 계속 유지될 것 같았다.
수영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채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는 수영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윤재가 문득 자신에게 던져진 시선을 알아차리고 최근까지 줄곧 마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조심스레 말로 꺼냈다.
“저... ‘그 날’은 죄송했어요.”
갑작스럽게 윤재로부터 사과의 말을 들은 수영이 곧바로 ‘그 날’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했다.
“왜 네가 사과하는 건데?”
“제 친구니까요.”
“.......”
“원래는 굉장히 배려심 깊고 자상한 녀석이에요. 그 날은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나 봐요.”
준석을 대신해 사과하는 윤재를 잠시 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멈춰 있던 손을 움직여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그 친구랑은 많이 친한 모양이지?”
마음 같아선 ‘그 자식’이라는 호칭을 쓰고 싶었지만 어쨌든 이성적인 판단 하에 자체적으로 표현을 완화한 수영은 윤재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수저를 움직였다. 과연 예상대로 반찬들은 하나하나 정갈한 맛과 딱 좋은 간을 유지하고 있어서 식사를 하는 그의 기분을 만족시켜주고 있었다. 이 반찬들을 따로 판매한다면 왕창 사재기라도 해놓고 싶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이젠 친구보다 형제에 더 가까울 정도죠.”
“...그렇게 친하다니 좀 부럽네.”
문득 들려온 수영의 대꾸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친구 같은 건 하기 싫다고 말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그래, 맞아.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
“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자리를 지금 당장 여기서 내준다고 해도 난 사양할 거야. 난 네 친구나 형제 같은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아.”
조금은 단호하게 느껴지는 수영의 말을 듣고 곧바로 파악되지 않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윤재가 잠시 후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이 친구가 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네요.”
주변에서는 여전히 다른 손님들의 대화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느 새 식사를 끝내가고 있는 수영을 확인한 윤재가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커피라도 끓여오겠다는 말을 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문득 건너편에서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좋아한다고 한 치즈버거, 아까 점심에 한 번 사 먹어봤어.”
“!”
예상치 못한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 의자에서 떨어졌던 엉덩이를 다시 내려놓은 윤재가 컵을 들어 물을 마시는 수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회사동료들이랑 단체로 햄버거를 먹은 건가요? 점심식사로 먹기엔 속이 좀 부담스러울 텐데요.”
“아니, 단체는 아니고 그냥 나 혼자 가서 먹었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재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을 알아차린 수영이 쓰게 웃었다. 지금 윤재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희미한 동정의 빛이 어려 있는 윤재의 시선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는 그였다.
분명 조금 전의 대답을 들은 윤재는 ‘역시 성격이 안 좋은 남자라 회사 안에서 밥도 혼자 먹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졸지에 불쌍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상황만큼은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수영은 일단 간략하게나마 오해는 풀고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상황이 그렇게 된 것뿐이야. 이런 걸 굳이 변명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제껏 주변에 사람이 끊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수영으로선 설마 자신이 이런 변명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윤재와 다시 만나고,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어가면서 수영은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었던 수많은 일들과 생각들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었다. 마치 닫혀있던 세상을 벗어나 신세계로 나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아가는 소소한 감정들은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그 대신 마치 봄볕처럼 따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치즈버거, 입에 맞았나요?”
문득 들려온 윤재의 질문에 그제야 처음의 주제를 떠올린 수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어. 근데 앞으로 다시 사 먹지는 않을 것 같아.”
자신의 대답을 듣고 스치듯 미소를 머금은 윤재를 바라보고 있는 수영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조금 전까지 야근을 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있던 피로가 신기하게도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토끼 같은 자식 대신 토끼 같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수영은 다른 손님들로 어수선한 속에서도 모처럼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주방 일을 마친 성호가 평소대로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올 때까지.